소설리스트

회귀를 한다는 건-114화 (113/131)

114화.  < 앞당겨진 무대 (3) >

-불안해 보이는군.

아스트레이의 말에 한수아가 고개를 돌린다.

“그렇게 보이나요?”

-전에도 말했지만 거울이 있다면 집어서 보여주었을 텐데, 내가 거울을 집을 수가 없군.

아스트레이는 생각보다 유머감각이 있는 남자였다.

그리고, 그는 지금 진심이었다.

이도가 아스가르드로 넘어간 지 정확히 하루.

고작해야 24시간에 불과했지만 그 시간동안 벌어진 일들은 매우 많았다.

아스트레이와 한수아는 조용히 정면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약 2m 정도의 몸길이에 세 개의 거대한 앞발이 인상적인 생명체.

온몸에는 붉은 비늘이 돋아나있었고 쭉 찢어진 눈은 보기만 해도 등골이 오싹해질 정도였다.

한수아는 바닥에 내려놓았던 아스트레이의 상자를 집어 들고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백악기 시절 살았던 공룡인 벨라키랍토르. 줄여서 랩터라 불리는 그것과 흡사한 생명체인 크레타노스의 시체가, 사방에 즐비했다.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워프 게이트를 매스 텔레포트 존으로 바꾼 건 확실히 잘한 일이었군.

뿌듯해하는 아스트레이의 말에 한수아는 아무 말 하지 않았다.

그런 한수아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아스트레이가 말을 잇는다.

-에피소드는 곧 정리 될 거고 그대는 죽지 않아도 되며, 각 종족들은 서로 피를 흘리며 힘을 합쳐 싸웠으니 이 대륙이 내분으로 박살날 일은 없을 것이네.

-아까도 물었지만, 그대는 왜 그렇게 불안해하는 거지?

“글쎄요. 잘 모르겠어요.”

-잘 모르겠다? 무엇이?

“그냥... 이게 잘하고 있는 건가 그런 거요.”

-그대는 잘 하고 있어. 전에도 말했지만 그대는 누구도 해내지 못한 일을 해낸 것이라네. 그리고 이번에도 마찬가지야. 그대는 자부심을 가져도 좋아.

위로에도 한수아의 표정은 풀어지지 않았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아스트레이는, 결국 눈치챘다.

한수아의 불안한 표정, 저 원인은 발바라 대륙이 아닌 다른 일 때문이라는 것을.

-음... 여심... 복잡하지.

"..."

-이도, 그 남자의 선택이 어떻게 될지는 몰라도, 그대는 그대의 할 일만 하면 되는 것이야.

걸음을 멈춘 한수아가 고개를 돌려 아스트레이를 바라본다.

“제가 할 일이요? 그게 뭔데요?”

아스트레이가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아니.

-그렇게 말하면 내가 뭐라고 답해야하는가. 그건 그대 스스로가 잘 알고 있을 텐데.

“그걸 모르겠어요. 제가 여화라는 지배자보다 힘이 센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오래 살아서 세상 경험이 많은 것도 아닌데, 솔직히 대륙의 상황을 정리했다고는 해도 그 일은 대부분 아스트레이님과 엘리자베스가 한 일 아닌가요? 저는 그냥... 능력 하나로 도움만 준 게 전부잖아요.”

“모르겠어요. 내가 뭘 해야 할지. 지금 하고 있는 이 일들이 나한테 최선인가 싶기도 하고.”

한수아의 말을 조용히 듣던 아스트레이가 유령 같은 손을 내뻗어 한수아의 어깨에 올린다.

그대로 조금만 내리면 한수아의 어깨를 통과했을 테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

마치, 인생을 더 오래 산 선배가 후배에게 조언을 해주는 것처럼. 조용히 입을 열었다.

-나는 시련자가 아니었다네 . 하지만 딱 하나는 알고 있지.

“무엇을요?’’

-그대들은 목숨이 두 개이지 않은가. 상황이 예상치 못하게 급변한다 해도 에피소드가 진행되는 그 시간동안 그대들의 목숨이 두 개라는 사실은 절대로 변하지 않아. 내가 파악한 에피소드는 결국 시련자들을 성장시키기 위한 무대니까.

-이거 하나만 알아두게. 내가 이도라는 남자를 오래 보지는 못했지만 그가 어떤 남자인지는 알아. 그대가 말했듯 그 남자는 ‘희생’이라는 것에 매우 집착을 하지.

사실이었다.

굳이 두 번 언급할 필요도 없는 사안이었고 이도의 행동 방향과 그가 걸어온 길을 대충 보기만 해도 확신 할 수 있는 사안.

이도는 희생을 중요시한다.

-그래서 그대는 전에 스스로의 목숨을 소모하려고 하지 않았는가. 상황이 변했다고? 아니, 내가 봤을 땐 큰 줄기는 똑같아. 이런 말 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그대에게는 기회가 있어.

“기회가 있다... 결국 한번 죽으라는 이야기네요?”

-개인적으로 그대가 죽지 않았으면 했지만, 그대의 목적이 이도라는 남자에게 한정되어있는 이상 가장 확실한 방법은 그것밖에 없다네. 그리고. 그냥 죽어서는 안돼. 잘 죽어야한다네 그것도 매우 잘.

“...그런데 이 말 아스가르드에 있는 초월자들이 지켜보고 있을 텐데요?”

-그게 무슨 상관인가. 알고도 막을 수 없는 게 사람의 의지이며 실천하는 의지인 것을.

나름 위로가 된 걸까.

한수아는 한숨을 푹 내쉬고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여자의 감이 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그냥 직감이라고 해야 할지, 한수아는 복잡했다.

위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대충 짐작했다고 해야 할까.

“지구에 이런 말이 있거든요.”

-무슨 말?

“낙동강 오리알이 되었다는 말이요.”

“그냥 그런 생각이 들어요. 낙동강 오리알. 꽤 적절하지 않아요?”

-나는 낙동강이 뭔지도 모르고 오리알이 뭔지도 모르는...

“그런데.”

아스트레이의 말이 끊긴다.

“포기 안 할 거. 달라진 건... 거의 없으니까. 분명, 기회는 생길 거니까."

***

시간이 얼마나 흐른 건지 모르겠다.

체감상 분명 최소 서너 시간은 훌쩍 흐른 것 같은데 하늘에 떠있는 인공 태양의 위치가 변하지 않은 걸 보면, 저건 그냥 말 그대로 인공이었나 보다.

시답잖은 생각을 하던 그때.

“너... 진짜 잘하는구나?”

여화의 꾀꼬리 같은 목소리가 내 생각을 끊는다.

“어떻게 까면 깔수록 새로울까? 우리 이도는 양파 같은 남자였어.”

“그래서?”

“까칠한 것도 여전하네. 그래도 우리 몸 섞은 사이인데 조금 부드럽게 대해주면 안되겠니?”

그냥 하는 소리라는 것을 나도 알고 여화도 안다.

몸을 섞었다?

그게 뭐?

내가 여화와 자는 그 과정은 사랑이라느니 그런 달달한 감정 같은 것은 전혀 들어있지 않은, 말 그대로 계약을 하기 전 도장을 찍는 사무적인 행위와 다르지 않았다.

감정이 없는데 부드럽게 대해줄 이유도 없고, 서로 상부상조한 건데 먼저 굽히고 들어갈 이유도 없다.

힘의 차이는 있겠으나, 솔직히 이제 그것도 무의미해졌다.

“타이탄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자세하게 해줬으면 하는데.”

“자세하게? 여기서 어떻게 더 자세하게 말해주니? 그것보다 난 아직도 그게 참 의아해. 너 정말 발락투스의 말을 믿은 거였니?”

말이 잠깐 샌다.

바로잡지는 않고 그냥 그러려니 했다.

여화는 말을 할 때 대충, 이렇게 무언가 빙 돌려서 말하는 버릇이 있는듯했으니까.

그런데, 발락투스의 말을 믿었냐고?

솔직히 믿었다고 하기에는 조금 어렵다.

흘러가는 상황들을 종합해보면 발락투스는 나한테 거짓이 아닌 진실을 말할 확률이 높다고 생각했고 결과적으로 보면 정령도로 가는 방법은 진실이었다.

그 외의 이야기가 거짓이든 진실이든 나는 관심 없었다.

그런데 여화는, 내가 그 모든 이야기들을 진실로 믿은 줄 아나보다.

“얘봐라? 의외로 순진한 구석이 있네. 이도야 생각을 해보렴. 발락투스는 한 집단을 지배하는 지배자야. 그 지배자가 단순히 왕의 옆을 보필하는 것을 원한다? 그 밑에 있는 애들은 다 눈 뜬 장님이니?”

눈 뜬 장님이라...

솔직히 엑스트라급도 안 되는 놈들이라 신경쓰지 않고 있었는데 다시 보니 꽤나 큰 모순처럼 다가온다.

“생각해보면 그럴 만도해. 발락투스가 정령도로 가는 위치를 알려줬다고 했었나?”

고개를 끄덕이자,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던 여화가 무언가 깨달았다는 듯 말했다.

“내가 바보였네. 사실 결과적으로보면 발락투스도 그렇고 너도 그렇고 서로를 믿었다기보다는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어간 거였네?”

새삼스럽지만 아스가르드의 이들이 나 같은 초월자들을 지켜보려면 한 가지 조건이 선행되어야한다.

바로 에피소드의 지역 내에 있어야 한다는 거.

내가 내 영혼이니 뭐니 하는 이상한 공간에 형님과 단 둘이 있었을 때의 모습을 아스가르드의 이들은 몰랐다.

또한 내가 아스가르드로 넘어와서 발락투스와 독대를 했을 때도 마찬가지다.

무슨 대화를 했는지 짐작을 했을 뿐 자세한 내용을 그들은 모른다.

그렇기에 여화도 내가 발락투스와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는 방금 내가 말하기 전까지도 모르고 있었다.

“말이 자꾸 새는데, 발락투스는 말이야... 아주 교활한 놈이야.”

“교활하다?”

“적어도 나는 너한테 거짓말을 할 생각이 없으니까. 내가 아는 진실만 말해줄게. 발락투스가 말한 것 중에 몇 가지 진실이 있기는 해. 걔가 드래곤들의 시조였고, 무수한 기간 동안 영면에 들었다는 거. 그건 진실이야.”

침대에 누운 채로 내 어깨에 달라붙어있는 여화와 눈을 맞췄다.

“그런데 걔가 왜 영면에 들었을까? 궁금하지 않니?”

말없이 눈으로 여화를 바라보자, 그녀가 싱긋 웃는다.

“난 말이야. 배신하는 것들을 정말로 혐오하거든. 그런걸 보면 공백의 왕이었다는 그놈은 꽤 우유부단했던 것 같아.”

배신?

“발락투스는 말이야. 공백의 왕에게 도전했던 놈이거든. 지금은 뭐 잊힌 역사라고하나? 그 어디에도 기록이 남아있지가 않은데, 알 만 한 애들은 다 알아. 발락투스가 어떤 놈인지.”

잠깐 할 말이 없었다.

배신에 도전?

“그냥 그런 놈이야. 오른팔을 원한다고? 속지 마. 그 감언이설에 넘어가지마. 걔는 그냥 과거의 미련에 묶여있는 초월자이자. 공백의 왕이 되고 싶은 괴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니까.”

뒤통수가 살짝 아려온다.

초월자들이 어떤 놈들인지 나는 자세하게 파고들지 않았었다.

내가 들은 이야기들은 그들의 ‘힘’에 대한 이야기가 전부였고 그들의 유래에 대한 이야기는 정말 극소수중의 극소수.

내가 아는 건 여천과 탈레리안, 그리고 크로노스 외에 최대 열 명 정도로 한정된다.

자 생각해보자.

초월자와 지배자.

단어는 거창했지만 이곳에서의 초월자란 개념은 말 그대로 종의 한계를 초월한 자들일 뿐이며 지배자는 그들을 지배하는 초월자에 불과하다.

즉, 신이라 불리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이들이다.

하지만 그들은 신이 될 수 있다.

이 에피소드라는 것은 신을 만들기 위한 과정이라는 것을 모든 초월자들은 알고 있다.

하지만 모두가 신이 될 수는 없고, 단 한 명만이 신이 되는 그 상황에서 초월자들은 자신들 보다 더 강한 이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래서 진영이 나눠진 거고 그 진영에 속하게 된 건데, 하필이면 들어가게 된 진영의 지배자가 신의 자리에 관심이 없고 그 옆의 부스러기 같은 자리에만 관심이 있다?

그런 뜻에 동조하는 것도 웃기고 그런 뜻이 있다는 것도 우습다.

“그래서 걔네가 중립이라 불리는 거야. 선이 될 수 있고 악이 될 수도 있으니까. 발락투스가 강한 건 맞아. 솔직히... 힘만으로 따지면 이 아스가르드에서 발락투스만큼 강한 놈은 없어. 그런데, 중요한건 놈의 목숨은 한 개라는 거. 이건 내 자랑 같긴 한데, 그런 발락투스도 나한테는 안 돼.”

새삼스럽지만 여화는 여분의 목숨을 가지고 있다.

발락투스가 아무리 강하다 해도 여분의 목숨을 가진 여화를 이길 수는 없다.

그러니까.

‘결국 그놈은 나를 이용하려했다 이거구만.’

발락투스를 넘어서 드래곤이라는 종족은 정말이지 정이 가지 않는다.

생각해보면 내가 만난 드래곤들은 하나같이 정상인 놈이 없었다.

그동안 생각지도 못했는데, 막상 이렇게 되니까 대충 알 것 같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은 법인데 시조라는 새끼가 저렇게 약아빠진 놈이다?

그 아랫놈들이 정상일 확률은 거의 제로에 수렴하지 않겠는가.

거참.

묘하게 여화가 정상으로 보이는 이 상황은 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잡설이 너무 길었네. 아까도 말했지만 나나 발락투스, 그리고 천군은 타이탄으로 가지 못해. 시스템이 제한을 걸어놨더라고.”

생략된 이야기긴 하지만 짧게 정리하면 시스템은 초월자들에게 ‘자유’를 주었다.

타이탄이라는 지역에만 한정된 자유.

초월자들은 자유 의지에 따라 타이탄으로 '강림' 할 수 있지만 지배자라 불리는 세 명의 초월자는 타이탄으로 가지 못한다.

그게 지금 벌어진 상황이다.

“솔직히 에피소드가 이렇게 변할 줄은 누구도 몰랐고 정확히 시스템이 뭘 원하는 건지도 몰라. 아마 그 열쇠는 시련자들. 정확히는 너. 네가 가지고 있겠지.”

가진 적도 없는 열쇠가 뭔가 싶은 생각이 들던 그때, 여화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눈부신 그녀의 나신이 햇빛을 받아 반짝인다.

“지금 참 애매한 게, 거기는 도화선이 당겨지기 직전의 상황이거든? 내가 아까 전쟁터라고 했었나? 그 말 조금 바꾸자. 소규모 분쟁 정도로. 걔들 지금 거기서 뭐하는지 아니? 그냥 눈치 싸움하고 있어. 왜 시스템이 타이탄에 한정된 자유를 준건지 그 누구도 모르고 있으니까. 우리가 에피소드의 일부가 되었다면 무언가 이야기가 나와야 하는데 이건 뭐 그냥 타이탄에 풀어놓고 아무런 말이 없어. 그런데... 내가 장담하는데 거기에 네가 가면... 그 도화선이 무의미해져. 폭탄이 경고 없이 그대로 터져 버릴 거야. 그건 확실해.”

“네가 나랑 손잡았다는 게 확실해진 지금 이 상황에서. 선 진영이랑 중립 진영 초월자들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지. 걔들은 우리 쪽 애들이 아니라 너, 너만 죽이면 돼. 넌 그 정도로 위협적이니까.”

탁자에 있던 가운을 대충 걸친 그녀가 몸을 돌린다.

“밑에 있는 애들한테 말은 해둘 건데, 아마 적극적으로 너를 돕지는 않을 거야. 그러니까 한번 살아남아 봐. 더 강해져서 네 가능성을 내게 보여 봐. 나는 더 보고 싶거든.”

“보고 싶다?”

여화가 싱긋 웃는다.

“네가 어디까지 성장할지. 그리고 우리 계약 아직 안 끝났잖아? 계약자가 중간에 비명횡사하면 그 계약서 중간에 찢어지는 거 알지?”

무시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솔직히, 이제 와서 말하는 거지만 매우 궁금했다.

미래의 나는, 대체 왜 초월자들을 모조리 죽이라고 그렇게 악에 받쳐 외친 걸까.

그 미래가, 그대로 흘러갈까?

슬며시 고개를 돌렸다.

욕실 앞에 서있는 여화가 나를 향해 손짓한다.

같이 씻자는 건가.

아니, 씻을 거면 가운은 왜 걸친 건데?

피식 웃고는 욕실로 걸음을 옮겼다.

일단 항상 그래왔듯이 눈앞의 일에 집중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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