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화. < 앞당겨진 무대 (2) >
쿠웅-!
무언가에 짓눌리는 느낌이 든다.
이어서.
콰아앙-!!!
무언가가 내 머리를 그대로 후려쳤다.
정면에서 느껴지는 고통과, 그 고통이 뇌리로 전달된 순간부터 곧바로 느껴지는 거대한 중압감.
내 몸이 그렇게 뒤로 날아가다 땅에 쳐 박히던 그때. ‘나’가 움직였다.
재빨리 손을 뻗더니 땅을 짚고는 그 자리를 순식간에 박찬 것.
이어서.
콰아아아앙-!!!!
하늘에서 거대한 번개가 방금 전까지 내가 있던 자리를 내려찍는다.
순간 기분이 싸해졌다.
번개의 범위는 그렇게 크지 않았다.
정확하게 가로세로 2m 정도의 구덩이.
그게 문제였다.
마치 창으로 찌르기를 한 것처럼 나를 완벽하게 꿰뚫어서 죽여 버리겠다는 필살의 의지가, 이 미래를 지켜보는 나에게 너무나도 노골적으로 느껴졌고 아마 당사자인 나도 그렇게 느꼈을 것이다.
‘나’가 고개를 든다.
하늘에 떠있는 거대한 몸체의 남자.
약 4m정도의 백발 거인,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가 말한다.
“천군님께서 네놈을 그리 어여삐 여겼거늘.”
듣자마자 인상이 팍 구겨지는 소리였다.
이 예지 속에서 나를 죽이는 놈이, 바로 저놈인걸까?
신격은 어림잡아 6성.
아니, 7성 정도로 보이는데, 내가 저런 놈한테 죽는다?
그렇게 생각하던 찰나.
“고작 귀신의 기운을 그 정도까지밖에 사용....큭!”
콰아아앙-!!
놈이 말을 끝마치지도 못한 채 멀리 날아갔다.
방금 전까지 백발 거인이 서있던 자리에는 붉은색 피부의 도마뱀이 이족보행으로 서있었는데, 저거 설마 궁극체 드래곤인가? 이번에는 놈이 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발락투스님께서 네놈을 살리라고는 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거슬린다고 말씀하셨지.”
그 말과 함께 놈이 나를 향해 자리를 박찬다.
이후 이어지는 것은 격렬한 난투극.
기이하게 나는 평소보다 훨씬 느린 몸으로 움직였고 귀기도 끌어올리지 못했으며 혈기를 극한까지 끌어올렸음에도 그 힘이 예전과 같지 않았다.
카르피온에 비하면 분명 이놈들은 약하다.
그런데... 왜 이러는 거지?
모르겠다.
내 힘이 약해진 건지 아니면 이 예지를 보기 전에 내가 귀기를 계속 끌어올리다가 나도 모르는 ‘제한’이 생겨 버린 건지.
궁금하긴 했지만 지금 답을 내려야할 사안은 그게 아니었다.
궁극체 드래곤과의 1:1 싸움.
1성의 초월자였을 때 나는 3성의 바하로사와 나름 대등한 싸움을 펼쳤다.
6성의 신체를 가진 내가 아무리 지쳤다고 해도 동급의 드래곤에게 신체적으로 밀릴 일은 없었다.
그때였다.
미래의 ‘나’와 지금의 ‘나’의 생각이 일치 된 것처럼, ‘나’가 빠르게 주변을 훑는다.
우연일까.
우연이라고 치자.
그런데, 곧바로 의문이 피어오른다.
내 시야에 나무 한 그루가 보이는데, 분명 그 거리는 최소 수백 미터가 넘는 게 확실했다.
그런데 왜 그 크기가 수십 미터는 훌쩍 넘어 보이는 걸까.
원근감은 개나 줘 버린 건지.
끝이 아니었다.
주변에 보이는 건물 파편들은 확실히 말하건대 보통 인간이 사용했을법한 그런 구조물이 아니었다.
확실하다.
이곳은 발바라 대륙이 아니다.
타이탄.
거인들의 세상인 타이탄이 분명했다.
순간 여화의 말이 머릿속에 맴돈다.
에피소드가 변했다는 것과 에피소드가 공정을 전제로 한다는 그 말.
그리고 신들의 전쟁이 앞당겨졌고 타이탄은 전쟁터가 되었다는 그 말.
그러니까. 시스템은 에피소드의 난이도를 변경했고 그 변경의 이유에는 ‘나’라는 존재가 필수불가결적으로 들어갈 것이다.
나를 기준으로 에피소드의 난이도를 변경했다는 말이 되는데.
이건, 뭐라고 말이 나오지 않을 정도였다.
사안의 심각성이 순식간에 와 닿는다고 해야 할까.
...미치겠네.
이 이상 요약하거나 정리할 필요는 없었다.
그냥 내 눈앞에 보이는 이것들이 전부였으니까.
문득 잡생각 하나가 떠오른다.
아까 나에게 번개를 뿌렸던 그 백발 거인은 천군의 아래에 있는 초월자가 확실하며, 지금 미래의 ‘나’가싸우고 있는 눈앞의 이 궁극체 드래곤은 100퍼센트 확률로 발락투스 쪽에 있는 초월자다.
이거 생각해보면 되게 웃긴 상황이다.
지들끼리 싸워도 모자를 판에 나를 먼저 죽이려고 달려든다고?
어처구니가없네.
그런 생각과 함께 내 시야에 수많은 초월자들이 싸우는 모습이 보인다.
그런데, 이건 무차별적인 싸움이나 전쟁, 그런 게 아니었다.
마치... 어느 두 집단이 한 집단을 다구리 하는 것 같다고 해야 할까.
나를 죽이려는 초월자들은 대부분이 드래곤과 거인이었고, 내가 아는 여화 진영 쪽의 악마술사들이나 서큐버스들은 내게 눈독조차 들이지 않고 있었다.
분명, 초월자들은 두 집단으로 나눠진 채로 한 집단을 몰아붙이고 있었다.
하.. 이게 뭐야.
그냥 개판이잖아.
이게 내가 여화의 제안을 거절한 뒤 겪을 미래인걸까.
그때였다.
내 시야에, 바닥에 목이 잘려진 채로 죽어있는 한수아가 보인다.
다른 시련자들은 없었다.
그냥 한수아만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알몸이었다.
순간 화가, 치밀어 오른다.
눈을 부릅뜬 채로 죽어있는 그녀의 앞에는 하의를 벗고 있는 레이놀즈가 보인다.
당연히, 레이놀즈도 죽어있었다.
놈의 몸에 남아있는 귀기의 파편.
저건 아무리 봐도 내가, 놈을 죽였다는 건데.
짜증이 치밀어 오른다.
그리고, 묘하게도 허탈감이 느껴졌다.
나는 대체, 뭐하는 병신인걸까.
그런 생각과 함께, 미래의 ‘나’가, 더 이상 생각할 시간을 줄 수 없다는 듯 눈앞에 있던 드래곤의 목을 물어뜯었다.
죽인 걸까 라는 생각이 들기도 전에, 멀리서 어마어마한 기운의 파동이 느껴진다.
‘나’가 고개를 들었다.
하늘에 떠있던 열다섯 마리의 완전체 드래곤이, 나를 향해 브레스를 내뿜는다.
피하는 것?
불가능했다.
하나하나가 6성에서 7성에 버금가는 놈들이 분명했으니까.
그때, ‘나’가 말한다.
“여화랑 거래해.”
대상없는 대사일까.
아니.
나는 안다.
저 메시지가, 어디로 향하는지.
쿠구구구궁-!
드래곤들의 브레스가 한곳으로 모아진다.
마치 태양처럼 찬란하고 섬뜩하게 빛나는 그 브레스를 바라보며, 미래의 나가 말했다.
"그리고 전부 죽여, 여화를 죽이네 마네 박쥐니 뭐니, 이딴 거 다 떠나서, 이 개새끼들, 반드시, 모조리 죽이라고.”
미래의 내가, 과거의 나에게 보내는 메시지.
과거의 나는 미래의 내가 느끼고 있는 거대한 감정. 그 끝을 모를 분노를 느꼈다.
이어서 하늘에 있던 브레스가 나를 향해 내리꽃힌다.
파공음, 단말마. 그런 건 없었다.
그냥, 나는 죽었다.
***
현실로 돌아온 나는 빠르게 눈을 감았다.
“갑자기 왜 그래? 감정이 확 요동치는데? 부끄러워하는 거야 뭐야?”
여화는 눈치가 빠르다.
지금의 내 감정은 끝 모를 분노에 점칠 되어 있다.
지금, 이 감정을 보여주어서는 안 된다.
눈을 감은 나는, 심호흡하며 끓어오르는 감정을 가라앉혔다.
오랜만에 보이는 예지였지만, 그 끝은 매우 어두웠다.
이걸, 나름대로 정리를 해보자면 솔직히 끝도 없다.
딱 하나.
단 한 가지만 보면 된다.
시스템은, 에피소드의 방향이 바뀐 것을 현재 시련자인 나와 다른 이들에게 따로 공지 해주지 않았다.
여화의 말로 미루어보면, 내가 카르피온을 죽이고 난 뒤, 그때부터 변화가 시작 된 건데, 그 변화를 나도 모르고 다른 시련자도 몰랐다?
이건 시스템이 아스가르드의 제약을 우선시해서 풀어줬다는 이야기고, 그 말은 즉, 그들이 타이탄에서 무언가를 ‘준비’할 시간을 주었다는 뜻이다.
내가 지금 아스가르드로 오지 않았더라면 나는 그냥 꼼짝없이 죽었을 확률이 높다.
객관적으로 보자면 나는, 성장이 매우 빠르다.
각 지배자들을 모시는 초월자들이 그런 나를 가만히 둘까?
내가 어디에 붙겠다고 확실하게 말 한 적이 없는 그런 상황에서 발락투스와 천군은 여화의 힘이 약화된 것을 확인했다.
나는 여화의 목숨이 정확히 얼마나 남았는지는 모른다.
솔직히 목숨이 여러개 있다는 것을 안게 고작 얼마 전인데 당연히 알 턱이 없다.
하지만 확실한건 여화를 제외한 다른 두 지배자는, 두 개의 목숨을 잃은 여화를 상대로 한번 해볼 만하다고 판단했다는 거.
그래서 두 놈이 힘을 합친 거겠지.
발락투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모른다.
그냥, 이중인격자의 변덕이라고 생각하는 게 속 편하다.
지금의 상황만 보자.
현재 상황에서 나는, 더 이상 유망주가 아니라 걸림돌이다.
그런 상황에서 나를 원하는 건 오직 여화 하나밖에 없었고, 내가 본 미래에서도 여화의 진영에 있는 초월자들은 나를 신경 쓰지 않았다.
정확히는 공격도 하지 않았고 방어도 하지 않았다.
고개를 들자 여화의 맑은 눈동자가 보인다.
‘너는, 거기서 내가 살아 날 거라고 생각한거냐?’
묻고 싶었지만 묻지 않았다.
새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기존의 것을 전부 파괴한다는 미친놈의 밑은 당연히 관심 없고, 이중인격을 가진 정신병자 도마뱀의 아래에도 들어갈 생각이 없다.
그렇다고 여화의 밑에 들어가서 시다바리가 될 것이냐고 묻는다면 당연히, 그것도 아니라고 답할 수 있다.
나는 말했다.
내 궁극적인 목표를.
“내가, 공백의 왕이 되어야겠다.”
2cm의 거리에 있던 여화의 진한 호기심을 담은 그 눈동자가 살짝 빛난다.
“결정해. 나를 도울 건지. 아니면 나를 죽일 건지.”
여화가 작게 웃으며 말했다.
“내가 궁금해 하던 건 그런 게 아닌데...”
“그게 아니면 너랑은 다신 만날 일 없을 거다.”
쐐기를 박자, 그녀가 양손으로 내 얼굴을 붙잡고는 폭소를 터트린다.
정말 재미있나보다 이 상황이.
한참을 웃던 여화가, 말했다.
“그러니까 너는, 나랑 ‘동맹’을 맺자는 거네? 아.. 너 정말 미치겠다. 왜 이렇게 재미있는 거야? 누구 밑에 들어가지 않고.. 얻어낼 건 다 얻어내겠다?”
여화는, 정말로 눈치가 빨랐다.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자, 그녀가 내 볼을 툭툭 두드린다.
“재미있네. 다 좋아. 다 수용해줄게. 결국 모든 건 ‘끝’에 가서야 결정이 난다는 이야기네?”
“그럴 수도.”
“재미있네. 정말로 재미있어. 네가 내 밑으로 들어오던지 아니면 내가 네 밑으로 들어가던지. 그 모든게 ‘끝’에 가서 결정 난다는 게... 하하. 이런 기분 얼마 만에 맛보는 건지 모르겠네.”
모든 에피소드가 끝날 때까지는 서로 우호적인 상황을 유지하고, 그때 가서 힘 싸움으로 서열을 정리하자.
여화는 그렇게 받아들인 것 같고 나도 사실은 그런 의도를 품고 말을 꺼냈다.
생각보다 여화의 반응이 괜찮다.
“그런데, 아직 대답 안한 거 같은데.”
“무슨 대답?”
“내가 지금 무엇을 가장 궁금해 하는지.”
잠깐 말을 멈춘 그녀가, 한 번 더 웃고는 말을 이었다.
“네가 정말 고자인지 아닌지. 나는 그게 궁금해. 계약을 하기 전에 도장부터 찍는 게 당연한 수순 아니겠니?”
그 질문에 나는 말로 대답하지 않았다.
손으로 그녀의 뒷머리를 잡고는 그녀의 붉은 입술을 훔쳤다.
이 선택이 옳은 선택인지 아닌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확실한건, 적어도 악수는 아닐 거라는 거.
비즈니스적인 관계.
적과의 동침.
그 어떤 단어를 갖다 붙여도 이 상황과 어울릴 것이다.
여화를 안으면서 나는 생각했다.
엉망이 된 타이탄이라.
고착화된 이 세상의 이야기가, 이제는 조금 긴박해지려는 걸까.
그런 생각을 하자 나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왜 인지는 모르겠는데 그냥... 웃음이 나온다.
그렇게 나는, 눈앞의 일에 집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