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화. < 앞당겨진 무대 (1) >
고착화.
어떤 상황이나 현상이 굳어져 변하지 않는 상태가 되는 것을 뜻하는 단어다.
생각해보면 내 주변 상황과 지금의 상황.
그 외의 다른 부가적인 요소들까지.
이 모든 것들은 고착화라는 단어 하나로 설명이 가능했다.
위기감도 없었고 모든 이야기들이 긴장감 없이 진행되었고 해결되었다.
그렇다면 왜, 대체 왜 고착화가 되었는가.
이유는 간단했다.
내가 너무 강해졌기 때문에.
기존의 에피소드는 내게 너무 쉬워졌다.
내가 수많은 시련자들에게 들었던 에피소드에 대한 이야기들은 모두가 목숨을 위협하는 줄타기와 다름이 없었고 발 한번 삐끗하면 그대로 목숨이 날아가는 살얼음판이었다.
그런데도 지금처럼 모든 게 여유롭고 고착화가 진행 되어 버린 것은 내가 일반적인 범주에서 심각하게 벗어난 채로 에피소드를 진행했기 때문이다.
이건 더 이상 언급 할 필요도 없는 진실이었다.
나는 이 고착화가 끝까지 유지될 줄 알았다.
여화와 대화를 나누기 전까지는.
***
"지금 뭐하자는 건데?”
여화가 잔을 내밀며 눈웃음을 친다.
“그 답은 묻지 않아도 알고 있지 않니? 내 입으로 말하긴 부끄러운데.”
헛웃음이 터져 나온다.
여전히 잔을 건넨 채로 서있는 여화를 무시하고 걸음을 옮겼다.
문이 열려있는 방이 눈에 들어온다.
저기가, 여화가 있었던 방일까?
그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내 예상이 맞았다는 걸 한 번 더 확신했다.
이곳은 지구에 있던 호텔을 모티브로 따온 게 분명하다.
내가 두바이에 있는 그 호텔에 가본적은 없으나, 고급진 인테리어가 어떤 느낌인지는 알고 있다.
눈앞에 보이는 푹신하고 거대한 쇼파와, 밖의 전경이 그대로 보이는 서너 개의 커다란 유리창.
그리고 나올지 안 나올지는 모르겠지만 벽에 걸려있는 거대한 벽걸이 TV까지.
쿵-
내 뒤쪽의 문이 닫히고,
저벅저벅-
이 방에서부터 로비까지, 그리고 로비에서 이 방까지 계속 맨발로 걸은 여화, 그녀의 발자국 소리가 내 귓가를 어지럽힌다.
“내가 지구에는 가본 적이 없지만, 이런 인테리어들은 꽤 마음에 들어. 모든 게 끝나면 지구라는 곳에 한번 가보고 싶을 정도야.”
무시하고 소파에 대충 걸터 앉았다.
“이상하네. 우리 이도가 왜 이렇게 과묵할까?”
“됐고, 왜 그랬지?”
여하가 내 허벅지에 걸터앉는다.
나는 피하지 않았다.
“어떤걸 말하는 거니? 탈레리안을 소멸시킨 거? 아니면 카르피온을 내려 보낸 거? 그것도 아니면 내가, 내 목숨을 두 개나 소모한 거?”
고작해야 3cm의 거리를 사이에 두고 여화가 내 눈을 응시한다.
나는 조용히 그 눈을 마주했다.
이어서 그녀의 오밀조밀한 얼굴이 시야에 들어온다.
잡티 하나 없이 도자기 같은 피부.
이런 여인을 대체, 누가 지배자라 부르겠는가.
“짐작은 하고 있을 거 같은데, 탈레리안을 소멸시킨 건 말이야. 네가 에피소드 초반에 걔를 언급했잖아? 걔랑 너는 왠지 사이가 좋아 질 것 같지는 않더라고, 그래서 퇴장시킨 거지.”
정말로 짐작은 했었다.
설마 이거야? 혹은 혹시나 하는, 그런 짐작이었는데 사실이었을 줄이야.
“카르피온을 내려 보낸 건... 글쎄, 아마 이것도 너는 알고 있을 걸? 내가 목숨 두 개를 버린 거랑 같은 맥락이니까. 내가, 너를 가지고 싶다는 거, 그 의지와 네가 모르던 몇 가지 ‘사실’을 알려주려고 한 거. 야. 이런 걸 굳이 내 입으로 말해야겠니?”
여화가 싱그럽게 웃는다.
하지만 왜일까.
가슴에 그 어떤 파동도, 심지어 미약한 흔들림도 없었다.
여화의 태도는 분명 가식이 아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여화에게 관심이 가지 않는다는 건 대체 무슨 이유일까.
내가, 고자가 된 걸까.
문득 볼에서 부드러운 손길이 느껴진다.
여화가, 어느새 손에 들고 있던 잔을 옆에 내려놓고 내 볼을 쓰다듬고 있었다.
조용히 눈웃음을 치고 있는 여화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말한다.
“이렇게 내 손길을 피하지 않는다는 건, 네가 내 쪽으로 오겠다고 결정한 거라고 받아들여도 될까?”
글쎄.
무언가 말하려던 그때, 여화의 얼굴이 천천히 가까워진다.
입을 맞추려는 행동이 확실하다.
잠깐 그 모습을 바라보다 손으로 그녀의 입술을 막았다.
촉촉한 감촉이 느껴졌지만 이것도 일단 무시했다.
그녀의 얼굴을 뒤로 살짝 밀어내며 말했다.
“나는…”
“아 진짜!!”
짜증내는 여화에 의해 내 말이 끊긴다.
“너 진짜 고자새끼니?”
응?
“야. 이쯤 됐으면 한번은 넘어와라. 뭐가 이렇게 비싼 건데?”
여화의 곧은 눈매가 삐죽 솟아오른 모습이 그녀의 심정을 대변하는듯했다.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여화가 그대로 내 허벅지에서 일어서더니 내려놓은 술을 그대로 원샷한다.
그리고는 여화가 나를 물끄러미 응시한다.
할 말이 있는 모양새라, 나는 기다렸다.
머지않아 여화가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에피소드가, 너무 쉽다고 생각하지 않니?”
"?"
갑자기 이 무슨 뜬금없는 소리란 말인가.
표정을 숨기지 않은 채 당황, 그 자체의 얼굴을 보여주자 그녀가 천천히 말을 잇는다.
“너 같은 경우를 나는 본적이 없어. 나뿐일까, 시스템도 마찬가지고 다른 초월자들은 말할 것도 없지. 전에도 비슷하게 말한 적이 있는 것 같은데, 시스템은 적어도 ‘공정’을 기본 모토로 내세우고 있다는 거 혹시 알고 있니?”
여화의 말이 매우 의미심장하다.
아니 그것보다 대화의 방향이 이렇게 갑작스럽게 변해도 되는 건가.
여화가 잔을 내려놓고는 그 옆에 놓여 있던 와인병을 그대로 들더니 쭉 들이킨다.
“후우. 정리해줄까 아니면 그냥 결론만 말해줄까? 어느 쪽을 원하니?”
“...그 전에.”
“그전에?”
“왜 나한테, 계속 정보를 주는 거지?”
찌푸려진 표정의 여화가 어이가 없다는 듯 웃는다.
“왜겠니? 너를 가지고 싶어서잖아.”
“계속 나를 봐왔으니까 알 텐데, 내가 어떤 놈인지.”
“알아. 가져도 네가 가진다고? 그거 그냥 진짜로 이마에 써 붙이고 다녀. 안 써 붙이고 다니니까 자꾸 헷갈리잖니.”
'..."
이게 농담하자는 건지. 아니면 말장난하자는 건지.
“에휴. 됐고. 이야기가 너무 샜네. 결론만 말해줄게. 에피소드가 변했어.”
“변했다?”
“이렇게 말해주면 복잡하려나? 다른 형태로 말해줄게. 아니다. 그냥 결론만 말해줄게. ‘신들의 전쟁’이 앞당겨졌단다."
“...뭐?”
이번에도 당황했다.
농담이 아니라 정말로 당황했다.
“카르피온이랑 싸우고 나서 못 느꼈니? 메시지 창이 생각보다 조용했을 텐데? 거기다 오면서 봤을 거 아니야? 여기 아스가르드가 꽤 휑 해졌다는 거.”
"..."
나는 내색하지 않고 빠르게 메시지 창을 훑었다.
메시지 창에 떠있는 무수한 초월자들의 메시지들.
농담이 아니고 정말로 많았다.
그렇게 빠르게 훑어내려다가 생각지도 못했고 느끼지도 못했던 작은 모순 하나를 발견했다.
++
12:26[무의 극의를 깨우친 자가 당신의 힘에 전율합니다.]
12:26[시작을 알린 아룡이 당신의 힘에 감탄합니다.]
...중략.
12:30[혼란을 초래하는 거인이 고개를 갸웃합니다.]
15:56[악惡을 지배하는 자가 아스가르드의 외곽, 킹스 하운즈 호텔에서 당신을 기다리겠다고 말합니다.]
++
대충 훑어봤을 때는 그러려니 했었는데 지금 여화의 말을 듣고 보니까 확실히 이상하다.
카르피온이 죽었을 때는 메시지가 미친 듯이 빗발쳤었지만 그 이후, 내가 황궁을 재생시키고 거기서 명령을 내리는 등의 행동을 하기 까지 그 어떤 호응도 없었다.
의아하게 생각하지도 않았었다.
애초에 나는 이런 메시지들을 그냥 무시했으니까.
항상, 정말로 항상 무시했다.
내가 기억하고 내가 주의해야 했던 건 딱 천군과 여화, 발락투스.
이 세 명의 메시지가 전부였으니까.
그런데도 계속해서 메시지를 보냈던 다른 초월자들이, 12시 30분 이후로 그 어떤 메시지도 보내지 않았다.
내가 이곳 아스가르드로 넘어온 시간은 16시.
12시 30분에 보냈던 크로노스의 메시지가 일반 초월자들의 메시지의 끝이었고 15시 56분에 보낸 여화의 메시지가 모든 메시지의 끝이었다.
이 3시간가량의 공백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에피소드가 바뀌었다고?
한손에 와인 병을 든 채로 창가 쪽으로 걸어가는 여화의 뒷모습을 바라보자, 뒤에 눈이라도 달린 것인지 그녀가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지금 타이탄은 꽤 엉망이란다. 네가 ‘타이탄’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을지는 모르겠는데... 사실, 이런 말은 이제 의미가 없겠지?” 의미심장하다.
여화는 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
그녀가 몸을 돌린다.
“너 우리가 말하는 ‘예지’를 가진 능력자가 아니잖아.”
"..."
“미래에 대한 정보를 얻고 그 정보로 이득을 취하는 거, 그게 예지 능력자들이 스스로를 성장시키는 방법인데, 아무리 생각해도 너는 그런 예지를 가지고 있지 않아. 그런데... 그렇다고 권능이 없기엔 미심쩍은 게 너무 많거든. 권능이 없는 이레귤러? 말이 안돼. 너는 분명 가지고 있어. 시스템이 ‘규격 외’라고 판단할만한 그런 ‘권능’을.”
"..."
그 권능 이름이 예지력이라는 걸 알게 되었을 때 여화가 지을 표정이 어떤지가 궁금했다.
아마 놀라 까무러치지 않을까.
그것도 아니면 매우 당황하거나.
“네가 여태껏 행동하고 선택해온 길들을 곰곰이 생각해보면 미래를 안 다기 보다는 마치, 미래를 누군가한테 들은 것 같은 그런 느낌이야.”
농담이 아니라 속으로 찔끔했다.
저게, 사실이었으니까.
“아스가르드에있는 초월자들의 눈을 피하면서 시스템에 간섭할 수 있는 그런 능력을 가진 누군가가 너를 도우려고 하는 것 같기는 해. 혹시 그래서니?”
“뭐가 그래서라는 거지?”
“네가 내 유혹을 계속 뿌리치는 거.”
여화가 말하는 그 누군가는, 아무리 봐도 형님이 확실하다.
그런데 형님이 시스템에 간섭까지 할 수 있다고?
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그런 거라면 내가 이해할게. 이미 누군가에게 저당이 잡혀있는 상황이라면 내가, 그거 풀어줄게. 그놈이 어디 숨어있는지만 말하면 내가 가서 걔 죽여줄게. 목숨도 아직 여유롭거든. 어때?”
항상 생각했던 건데.
여화는, 정말로 종잡을 수가 없는 여자였다.
여화가 햇살을 등진채로 환하게 웃는다.
“그런데, 이게 또 재미있는 게 나는 너라는 존재를 예측이 불가능한 규격외의 존재라고 생각하거든? 그런 네가 누군가한테 저당이 잡혀있다는 게 정말로 가능하기나 한 걸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해.”
그녀가, 슬며시 가운의 끈을 풀어내기 시작했다.
“한 가지 확실한건 지금 타이탄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을 너는 모를 거라는 거. 그리고 그건 그 ‘누군가’도 마찬가지일 테고.”
여화가 입고 있던 가운이 자연스럽게 풀어헤쳐지더니 그녀의 두 가슴에 걸쳐진다.
아마 저 상반신만 사진으로 찍어 화보집에 올린다면 분명 전 세계에서 화제가 됐으리라.
이어서 그녀가 천천히 내게 다가오더니 내 허벅지에 앉고는 내 얼굴을 쓰다듬는다.
“이게, 마지막일 것 같아. 내 쪽으로 오지 않을래?”
아까처럼, 서로의 얼굴이 코 닿을 듯 가까워졌다.
“너만 보면 궁금한 게 자꾸 생기네, 이도야. 지금은 내가 뭘 궁금해 할까?”
그녀의 입에서 딸기 냄새가 난다.
아까 먹은 게 와인인줄 알았는데 설마 딸기 우유였나?
“말 안 할 거니?”
우연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무언가 일이 완전히 틀어진 것은 확실하다.
나는 이곳으로 오기 전 속으로 결심했다.
박쥐 짓은 그만두겠다고.
누군가의 밑에 들어가는 거? 못해먹겠다.
성격상 도저히 그게 힘들다.
나는 대답하려했다.
속으로 정해놓은 답을.
“나는…”
하지만 끊어야했다.
찌이잉-!
오랜만에 들려오는 이명음이 내 귓가를 어지럽히고, 순식간에 눈앞이 새까매졌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