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화. < 지배자(4) >
그렇게 아스가르드로 이동하려다 잠깐 멈췄다.
슬며시 시선을 돌려 구석에서 조용히 상황을 주시하고 있는 박유정을 바라보자, 그녀도 때맞춰 나를 향해 고개를 돌린다.
그녀를 바라보는 내 머릿속에, 아까의 상황이 신기루처럼 아른거린다.
한수아를 죽일 듯 권능을 남발하던 그녀의 악귀 같던 모습.
전생에서 내가 저런 모습을 본건, 몬스터를 학살할 때였는데, 그걸 한수아라는 대상을 바라보며 보여줄 줄은 몰랐다.
조용히 그녀를 응시했다.
카르피온의 탐욕이, 욕심이라는 감정을 극대화시키는 거라면 박유정은 한수아를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는 게 확실하다.
아무래도, 한번쯤 경고를 해둬야 할 것 같다.
-내가, 왜 너를 받아 준거라고 생각하지?
“…네?”
혜광심어였기에 내 말은 모두에게 들리지 않았지만 박유정이 되묻는 그 말은 모두에게 들려왔다.
모두의 시선이 박유정에게 집중되고 그녀가 침을 꿀꺽 삼킨다.
-너를 살려준 이유는 네가 쓸 만해서다.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몰라. 관심도 없어. 하지만 내가 하려는 일을 방해하려고 하지는 마라. 그러고 보니 갑자기 궁금해지는데. 박유정. 한수아를 죽이고 싶나?
"..."
-성미령에게 들어서 알고 있겠지만 시련자들은 기본적으로 두 개의 목숨을 가지고 있지. 한수아는 내가 가장 필요로 하는 인물이고. 네가 한수아를 정 죽이고 싶다면 한수아보다 내게 쓸 만한 사람이 돼야하는데... 너, 안 그럴 거잖아? 나한테 목맬 이유도 없고.
사실이었다.
박유정이 내 옆에 남아있는 이유는 그저 내 옆이 생존 확률이 더 높기 때문이며, 조금 더 나아가 생존 확률뿐만이 아니라 내 옆에 있으면 더 강해진 채로 지구로 무사히 돌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한수아와 나성진, 성미령처럼 정말로 나를 믿고 내 사람을 자처하는 이들과는 다르다.
-그러니까. 그 두 개의 목숨을 거덜 내고 싶지 않으면 적어도 나한테 계속 쓸 만한 존재로 남아있어.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나?
박유정이,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인다.
그게 끝이었다.
다른 이들에게 격려나 그런 걸 해줄 필요는 없었다.
나는 그대로 아스가르드로 이동했다.
***
아스가르드로 가는 동안 내 머릿속은 복잡했다.
언제부터였던 걸까.
천군과 여화, 그리고 발락투스.
이 세 명의 관계 사이에 박쥐가 된 것은 분명 내 선택이었는데, 왜 꼭... 박쥐 노릇을 해야 했던 걸까.
사실 답은 내가 내렸고 당연히 선택도 내가 내렸다.
그때의 나는 이게 최선이라고 생각했고 그게 가장 이득이 될 거라고 생각했었으니까.
그런데 지금에 와서 곰곰이 생각해보니까. 뭔가 이상하다.
자 보자.
분명 내가 여화든 천군이든 발락투스든, 그들 셋 사이에서 어디든 갈 수 있다는 여지를 밝힌 것은 분명 처음 아스가르드로 갔을 때부터 시작되었다.
그런 내게 발락투스는 말했다.
여화와 관계를 원만하게 해둘 필요가 있을 거라고.
이 부분부터 생각을 이어가보자.
여화는 분명 미쳤다.
아니, 자기 목숨을 최소 두 개나 써가면서 에피소드에 난입을 한다?
실질적으로 얻는 게 없는데도 그런 시도를 한다는 건, 보통 상식으로 이해 할 수가 없는 일이 분명했다.
발락투스는 분명 이렇게 말했다.
‘여화라면 자기 밑에 있는 이들의 절반 정도를 바치는 대가로 발바라 대륙을 멸망시킬 수 있다.’
이 이중인격자 새끼가, 나를 가지고 놀려던 걸까.
의문이 피어오른다.
혹시 나는, 이용당한 게 아닐까?
적어도 지금 결과가 말해주고 있었다.
여화는 목숨을 두 개나 잃었다.
발락투스는 무엇을 잃었는가.
천군은 무엇을 잃었는가.
다시 보자.
여화는 목숨을 두 개나 잃었고 탈레리안도 잃었다.
발락투스와 천군은 견제하던 세력 중 가장 강한 여화의 팔 하나 정도를 잘랐고 상대적으로 힘이 강해졌다.
이런 상황을 만든 건 나와 여화, 둘 사이의 줄다리기였고 그 둘은 뒤에서 이득을 취했다.
씨발.
왜 이걸 몰랐던 거지?
왜 나는 생각하지 못했던 거지?
발락투스가 정령도에 대한 정보를 주었기 때문에 그를 믿었던 걸까?
미친놈.
진짜 미친 건 여화가 아닌 나였다.
생각해보면 지배자라는 것들은 죄다 정상적인 사고를 가진 놈들이 아닌데, 너무 만만하게 봤다.
상황을 지배하는 건 나여야 한다.
이용당하는 게 나여서는 안 된다.
하아...
기분이 참... 더럽다.
그렇게 나는 아스가르드에 도착했다.
선창장에 자리한 나를 반기는 존재가 있었다.
“오랜만이군.”
실페리온.
지금은 그냥 신경 쓰고 싶지도 않은 제 4의 진영.
대의의 이면 소속의 초월자.
실페리온이 말했다.
“말하고 싶었네.”
“뭐를?”
“고맙네.”
뜬금없다고 해야 할까.
그러니까, 말하고 싶은 게 있었는데 그게 고맙다는 말이었다고?
“대화의 맥을 못 잡겠는데, 뭐가 고맙다는 건데?”
“그때, 그대가 말했듯 우리 진영에 첩자가 있었네.”
“첩자?”
“아직 조사 중이긴 하지만, 천군과 발락투스 휘하의 첩자를 잡아냈다네.”
긴 시간은 아니었는데 꽤나 바쁘게 움직였나보다.
하긴, 지금 생각해도 웃음이 터져 나올 정도의 일이었다.
아니, 종족을 잃고 원한과 복수심으로 무장하고 눈에 불을 킨 채로 어디든 달려들었어야 할 놈들이 원로원인지 뭔지 하는 자기들만의 직위를 만들고 완장놀이를 한다?
이게 우습지 않으면 대체 어떤 게 우스운 일이겠는가.
그런데…
"천군과 발락투스?”
실페리온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 둘이 첩자를 심어놨었다고?”
“원로는 총 네 명이라네, 그중 두 명이 발락투스와 뜻을 함께했고 다른 한명이 천군 쪽에 붙어있었지. 박쥐같은 새끼들...”
박쥐라는 말에 살짝 찔끔했다.
그런데 상황이 참 묘하게 흘러간다.
내가 이용당한거구나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천군과 발락투스가 생각보다 더 음흉했다는 사실이 밝혀진다고?
전개가 너무 매끄러운데?
나는 물었다.
여화는 ?
“앞서 말했지만 조사 중이네, 하지만 상황으로 보면 여화 진영 소속의 첩자는 없을 것이네. 하지만...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젠장. 우리 진영의 이들끼리 나눴던 모든 대화와 계획들이 무의미해졌어. 그냥 종이쪼가리가 되어버렸네. 혹시 그대는... 이걸 알고 있었던 건가?”
대답하지 않았다.
내가 알고 있었다고?
“그대의 예지 능력, 그대는 대체 어디까지 본 것이지? 우리는 성공할 수 있는가? 지금 내가 그대와 이 자리에서 대화를 나누는 것도 그대의 예지 속에서 그려지던 미래였나?”
처음 보았을 때 신중에 신중을 거듭하던 그때의 실페리온과 지금의 실페리온은 너무나도 달랐다.
매우 필사적이라고 해야 할까.
듣는 귀가 많다며 혜광심어를 보내기도 했던 실페리온이 이 정도의 변화를 보일 정도라는 건.
‘원로라는 놈들의 배신이 그 정도로 충격적이었다는 건가.’
그런 실페리온에게 내가 해줄 수 있는 말은 없었다.
나는 조용히 그를 스쳐지나갔다.
킹스 하운즈 호텔.
그곳에 있는 여화와 대화를 나눠야 했으니까.
그렇게 아홉 걸음 정도를 걸었을 때였다.
“크흑..."
내 걸음이 멈춘다.
순간 잘못들은 건가 싶었다.
이건 분명 흐느끼는 소리다.
그것도 여자가 아닌 남자가 흐느끼는 소리.
설마, 아니겠지.
내 뒤에는 실페리온 밖에 없는데, ‘그’ 실페리온이 흐느낀다고?
슬며시 고개를 돌렸다.
무뚝뚝하고 무언가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있던 실페리온, 그가 완전히 무너진 채로 자리에서 주저앉아있었다.
그냥 지나칠까 말까를 두어 번 고민하고는 결국 나는 실페리온에게 다가갔다.
그가, 고개를 든다.
붉은 돌기와 남성다운 얼굴은 그렇다 치고, 그 두 눈에서 흘러내리는 눈물이 나를 비춘다.
거참.
한마디 해야겠다.
“봤다면?”
“...뭐?”
“그 미래를, 내가 봤다면?”
“...정말인가? 정말로, 보았는가?”
보았을 리 없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이 모든 상황은 전생에서 벌어진 적이 없는 일이었으니까.
“하나만 말해줄게.”
“무엇을?”
“나한테 붙어.”
“...뭐?”
“헛짓하지 말고 나한테 붙으라고. 나도 시발 박쥐 노릇하는 거 띠꺼워서 못하겠거든.”
실페리온이 멍하니 나를 바라본다.
그 시선을 잠시간 응시하다 다시 걸음을 옮겼다.
바로 대답 해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아니, 만약 바로 대답했다면 오히려 의심했으리라.
곧바로 튀어나오는 대답에 진심이 담겼을 리 없으니까.
킹스 하운즈 호텔.
고개를 들자.
거대한 현대식 건물이 보인다.
외형은 두바이의 7성급 호텔과 비슷했는데, 그 옆에 대문짝만하게 영어로 킹스 하운즈라 적혀있는걸 보니. 아무래도 저기인가보다.
그곳으로 방향을 정하고 살짝 기운을 끌어올렸다.
뒤에서 나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을 실페리온.
그의 머릿속에 내 의념이 전달된다.
-내가 저 호텔에서 나오기 전까지 결정해.
-...알겠네.
여화와 어떤 주제의 대화를 나눌지는 확신할 수가 없었다.
워낙 종잡을 수 없는 년이었으니까.
하지만 확실한건, 절대로 긴 시간은 아닐 거라는 거.
그렇게 걸음을 옮기다 헛웃음을 터트릴 뻔했다.
“이제야 오는가.”
“오랜만이군.”
천군과 발락투스.
그 둘이 나란히 선채로 나를 반기고 있었다.
내 착각일까.
이놈들 너무 노골적이다.
“몰랐는데, 두 분이 꽤 사이가 좋았나봅니다?”
천군이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글쎄, 좋다기보다는 일시적인 거라네. 오해는 하지 말아 줬으면 해.”
무시하고 발락투스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뜻과 뜻이 맞아 잠깐 힘을 합친 것뿐인데, 말이 꽤 노골적이군."
노골적이라고?
내가?
“여화와 사이를 돈독히 하라고했던 건 결국 저를 이용하려고 했던 겁니까?”
“그런 의도는 아니었었네.”
의도가 아니었다?
결과가 그렇게 드러났는데?
“신의 자리가 아니라 신을 보필하는 자리에 앉겠다고 하셨던 거 같은데, 뭡니까 그때의 그 말은?”
“말 그대로네. 나는 신의 자리에 앉을 생각이 없네. 내 오래된 염원은 신의 자리가 아닌 그 옆자리. 그것은 절대로 변하지 않을 진실이야.”
“자꾸 진실진실 그러시는데, 받아들이기 참 애매하네요. 두 분 사이가 지나치게 좋은 것도 거슬리고, 마치... 내가 꼭두각시 인형이 될 뻔했던 것 같은, 그런 느낌이 들려고 하거든요. 이게 참, 제 착각입니까?”
천군과 발락투스가 잠깐 서로를 바라본다.
말을 맞추려는 걸까.
대답은 천군의 입에서 나왔다.
“그대의 대의가 아직 내 대의와 뜻을 합치시키지 못한 것 같군. 하지만 이것만은 알아두게, 나와 발락투스는 잠깐 힘을 합쳤을 뿐이고 이것은 그대의 행동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는 것을.”
이상하게 구역질이 날려고 한다.
무시하고 그 둘을 지나쳤다.
킹스 하운즈 호텔.
로비 쪽으로 걸어가자, 내 뒤에서 발락투스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작은 오해가 큰 오해가 되는 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지.”
다시 고개를 돌렸다.
잠깐 말을 멈춘 발락투스가 평온한 표정으로 천천히 말을 잇는다.
“하지만 그보다 더 안타까운 것은 잘못된 선택을 내리는 그 찰나의 순간이라네.”
글쎄. 그건 아닌 거 같은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저 둘이 저렇게 대기하고 있는 이유는 내가 여화 쪽에 붙지 않을까 하는 그 작은 염려 때문이 아닐까 하는.
마치 공작새가 날개를 펼쳐들 듯 덩치를 키워 보이려는 모습 같다고 해야 할까.
이거, 지배자라는 이름이 어울리지 않게 매우... 치졸해 보인다.
거참.
그 둘을 무시하고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무의식적으로 행동해서 그런가.
지금 보니 이 건물은, 외형만 지구의 두바이 호텔을 모티브로 딴 게 아니라 그 내부 구조까지 세세하게 구현한 게 맞나보다.
거기다 무인 시스템 효과까지.
띵 하는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가 열리고, 그 안에 걸음을 내딛는 순간. 아무런 동작도 하지 않았음에도 문이 닫히고 엘리베이터가 움직인다.
그러려니 하고 조용히 문 앞에 선채로 대기했다.
잠깐의 시간이 흐르고.
띵!
[56층입니다.]
문이 열리고 한걸음 내디뎠다.
아니, 내딛으려고했다.
문 앞에 서있는 여화가 아니었다면.
“기다리기 힘들어서 직접 마중 나왔는데 표정이 왜 그러니?”
내 표정은 지금 어떨까.
살짝 고개를 돌려 엘리베이터 내부의 거울을 바라보았다.
그곳에, 살짝 눈매를 찌푸린 표정의 내가 보인다.
그리고 그 옆으로 흰색 가운에 방금 씻은 건지 물기로 찰랑이는 머리를 쓸어내리고 있는 여화.
그리고 그녀의 다른 쪽 한손에 들린 와인 잔이 붉게 빛나고 있었다.
맞았다.
여화는, 나를 유혹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