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화. < 지배자(3) >
언제였더라.
한 20년 전인가.
어릴 때의 나는 세상이 소설 같았으면 좋겠다고 생각 한 적이 있었다.
어렸을 때 했던 철없는 생각이었고. 나이를 먹고 나서 그건 잡생각에 불과했다는 걸 깨달았다.
그런데 지금, 그 생각이 다시 의문으로 점칠 된다.
정말로, 불가능한 걸까.
소설 속에서는 주인공이 건물을 만들라는 지시를 내리면 고작해야 며칠 지나기도 전에 그 건물이 뚝딱 만들어진다.
뿐이랴. 믿지 못할 정도로 두렵고 말도 안 되는 진실을 사람들이 눈치 챈다 해도 주인공이 아니라고 한마디만하면 모든 게 뚝딱 해결 되기도 한다.
공상과 현실.
그 두 개의 기준을 가르는 것은 역시 현실 속에 공상이 끼어들 여지가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일 뿐.
개연성이 맞는지 맞지 않는지는 결국 과정의 차이일 뿐이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은 ‘힘’으로 대체가 된다.
“주민들이 안정을 찾고 있습니다.”
‘황궁’의 대전에 앉은 채로 조용히 팔걸이에 턱을 괬다.
주민들의 안정.
사실 당연한 결과였다.
지구의 역사만 훑어봐도 나오지 않는가.
내부의 혼란을 정리하는 가장 빠른 방법은 외부의 적에게 모든 책임을 떠넘기는 것이라고.
너무나도 멀리 있는 아스가르드의 초월자.
그들까지 갈 것도 없었다.
탐욕이라는 거대한 재앙.
그것을 막기 위한 한수아의 마법은 효과를 보았고 대륙을 구했다.
그게 이 세상에 쓰이게 될 역사이고 내가 만든 진실이다.
이미 지금의 내게 있어서 공상과 현실의 경계는 무너졌다.
지금 내가 있는 곳은 앞서 언급했지만 황궁이었다.
분명 카르피온과 몇 번 부딪쳤을 때 무너졌고, 완전히 가루가 되어버린 황궁이 대체 어떻게 존재할 수 있을까.
주민들은 보았다.
내가 손 한번 까딱이자 무너진 황궁이, 마치 아무 일 없던 것처럼 그 자리에서 ‘재생’되는 모습을.
그들에게 있어서 이건 기적이었고, 그런 내가 하는 말은 진실일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무너진 주택들과 창고, 그리고 그 안에 들어 있어야할 무기와 식량. 그런 무생물체를 넘어 죽어버린 생물체인 가축들까지. 그런 것들을 손 한번 까딱이자 만들어내는 내 모습에 모두가 기겁했고 모두가 전율했다.
한정적이긴 하지만 나는, 분명 이 발바라 대륙에서는 ‘신’이었다.
앞에서 지나치게 정중한 모습으로 계속해서 무언가를 말하는 양규의 말을 손을 들어 막고는 고개를 돌렸다.
구석에 있는 검은색 피부의 고블린.
오랜만에 보는 것 같은 고블린들의 왕인 네스레자가 내 시선을 받자마자 황급히 그 자리에서 엎드린다.
너무나도 지나친 예의였지만 그러려니 했다.
“고블린들의 피해는?”
"...살아남은 이들이 많아봐야 이천이 안됩니다.”
이번에는 반대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붉은색 피부에 각진 얼굴, 그리고 돌출된 송곳니가 인상적인 덩치 3m정도의 오크가 네스레자가 그러했던 것처럼 그 자리에서 냉큼 엎드린다.
“소개를 받은 기억이 없는데, 누구라고?”
"오...오크들을 이끌고 있는 툴칸 바투르입니다. 폐하.”
자세히 보니 내게 죽은 툴칸과 이목구비가 매우 흡사했다.
그의 아들인가보다.
“오크들의 피해는?”
“약 1만 가량이 살아남은 것 같습니다.”
수만이 훌쩍 넘는 숫자 중 1만이면, 그냥... 대부분이 죽었다고 보는 게 합당하다.
슬며시 고개를 들고는 조용히 주변을 훑었다.
상황이 해결되긴 했어도 지금, 눈앞에 닥친 일이 적지가않다.
현재 시간은 정확히 16시.
정확히 2시간 뒤 Episode #38이 시작된다.
전생에서 발바라 대륙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던 여러 종류의 몬스터 중 그 질이 가장 악랄하고 짜증을 유발시키는 몬스터.
크레타노스.
놈들이 발바라 대륙을 침공하는데... 내가 지금 해야 할 일이 너무 많다.
내 예상이 맞는다면 나를 비롯한 모든 시련자들이 타이탄으로 넘어가는 시기는 Episode #39를 끝내는 시점일 확률이 높다.
내가 아무리 책임감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해도, 적어도 나는 내가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구분할 정도의 머리는 있다. 지금 발바라 대륙은 혼란으로 가득한 상황이다.
안정이 되고 있는 상황이라고?
그럴 리가.
인간을 먹이로 보는 크레타노스가 침공을 하는데 안정이 된다?
그들은 그냥 2시간 뒤 어떤 일이 닥쳐올지 모르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은 알고 있을까.
확인해 보자.
“2시간 뒤,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고 있나?”
“...예 알고 있습니다.”
양규가 대답하고 이어서 시련자들과 네스레자, 그리고 바투루까지 모두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런데 묘하게 ‘위기감’이 없다.
농담이 아니고, 정말로 위기감이 없었다.
그들은 마치 무언가를 믿고 있는 듯한 모습이었는데, 결국 나는 실소를 터트리고 말았다.
그들의 믿음.
간단하다.
이번일도 내가 해결 해줄 것이라는 그런 믿음이다.
솔직히 말하면 내가 나서는 것만으로 크레타노스는 손쉽게 정리될 것이다.
손 한번 까딱이는 것처럼 내게는 너무나도 손쉬운 일. 그리고 그것을 내 주변 사람들이 모를 리 없다.
위기감?
없을 수밖에 없었다.
나는 이미 인외의 존재를 넘어 재앙을 부순 그냥 괴물이니까.
그런데 이건 아니다.
짧은 순간 나는 판단했다.
이번 일에는, 나라는 존재가 끼어들어서는 안 된다고.
촉박하긴 하지만.
“연합군을 구축한다.”
“...예?”
“발바라 대륙에 존재하는 오크와 고블린, 그리고 인간. 이 세 종족으로 이루어진 새로운 병단을 창설하고, 최고 명령권자의 자리에 한수아를 임명한다.”
조용했다.
마치 찬물을 끼얹은 것 마냥 대전에 침묵이 자리한다.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한 걸까.
“대답은?”
“잘.. 할게요.”
한수아가 대답하고, 이어서.
"...이도님의 의향을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엘리자베스가 묻는다.
내 의향이라...
“말했던 거 같은데, 시련자들은 항상 발바라 대륙에 머무는 게 아니라고.”
"..."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적어도 바보는 아니었기에 내 말이 무엇을 뜻하지는 알고 있을 것이다.
아니, 알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나는 한 번 더 쐐기를 박았다.
내 시선이 율리우스와 똑 닮은 눈의 엘리자베스에게 꽂힌다.
“내가 나서서 모든 걸 한 번에 정리하면? 그 이후에는? 시련자들은 다른 세상으로 넘어가겠지. 그리고 발바라 대륙은 향후 벌어지는 에피소드와 아스가르드에 있을 초월자들의 시선에서 자유로워질 수밖에 없다. 즉, ‘안정기’에 접어들 기회를 얻게 되는 거지. 그런데, 정말로 안정기에 접어들 거라고 생각하나? 아무런 탈 없이?”
- 으음...
아스트레이가 조용히 턱을 괴며 나를, 흥미로운 눈으로 바라본다.
무시했다.
“네안데르탈인과 호모 사피엔스, 상대적으로 덜 진화한 네안데르탈인은 호모 사피엔스라는 종에게 멸종당했지. 인간과 오크, 고블린이 같은 인종은 아니지만 묘하게, 상황은 비슷해. 상대적으로 힘이 강한 오크와 신체가 약한 고블린, 셋의 지능은 비슷하되 각각 특성과 성질이 다르지. 양규 엘리자베스. 대답해봐. 내가 생각한 ‘안정기’와 너희가 생각한 ‘안정기’는 같나? 너희의 안정기는 세 종족의 안정기냐 아니면 인간만의 안정기냐?”
"..."
둘은 대답하지 못했다.
적어도 나는 모든 사람들이 각각의 개성이 있다고 믿는다.
그들이 걸어야할 길과 그 방향은 그들이 여태껏 살아온 환경과 경험으로 만들어지는 거니까.
하다못해 도플갱어도 개성이 있다고 믿는 내게 있어서, 저 둘의 속내를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팔은 안으로 굽는다는 말이 있듯이, 저 둘은 결국 오크와 고블린들보다 인간이라는 종을 위에 놓을 세상을 만들게 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무의식은 자연스럽게 인간을 우월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을 터.
열 손가락 깨물어서 안 아픈 손가락이 어디 있겠냐만은 적어도 나는 열 손가락 중 어디를 깨물던 비슷한 고통을 느낀다.
“무기를 들고, 땀을 흘리고, 피를 흘려라. 세 종족 간에 우위를 다투는 건 내가 관심 쓸 일이 아니지만 적어도, 나는 내가 한 말을 지키고 싶거든.”
잠깐 말을 멈추고는 한수아와 다른 시련자들에게 시선을 옮겼다.
“내 사람은 절대로 죽게 만들지 않는다.”
한수아의 눈시울이 살짝 붉어지고 다른 이들이 감동 같은 것을 받은 것처럼 자연스럽게 자기들 심장 쪽에 손을 올린다.
그 모습을 바라보다 고개를 돌렸다.
“세상이 변하면서 결국 누군가는 적응하고 누군가는 도태된다고, 그리고 주민들에게 무언가를 요구할 생각도 없다고 말했었지. 개국 선언할 때 나는 분명 그렇게 말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그렇게 되면 그 끝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을 것 같아. 그러니 지금, 나는 딱 한 가지를 요구하려한다.”
"..."
“싸워라. 모두가 연합해서 같이 힘을 모으고, 함께 대륙을 구해, 소속감을 가지고 이곳을 너희들 모두의 고향으로 만들어라.”
나는 기운을 끌어올리지 않았다.
내 목소리는 평소와 다를 바 없었지만 듣는 이들에게는 아니었나보다.
“예 폐하!”
이구동성으로 대답하는 그들에게 무슨 말이 더 필요한가.
죽는 이들도 있을 거고 건물은 무너질 것이며 또 다시 폐허가 될 것이다.
그런 걸 고난과 역경이라 하며 그것을 이겨낸다면 적어도 발바라 대륙은 내가 들었던 암울한 미래가 아닌 나름의 빛나는 미래를 만들어 갈 수 있을 것이다.
잠깐 대전에 있는 모두를 훑었다.
마스터라 불리던 검주나 창주 같은 이들보다 강해진 시련자들과 전투에 특화된 오크라는 종족.
에피소드가 실패할 일은 없다.
분명히 클리어 한다.
그러니, 발바라 대륙에서의 일은 이 정도로 끝내자.
여기서 더 신경써봤자 좋아질건 없고 의미도 없었으니까.
거기다 내가 가야 할 길의 종착역은 적어도 이곳이 아니다.
그대로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때였다.
“폐하.”
나를 부르는 목소리에 다시 눈을 떴다.
양규.
그가 묻는다.
“혹시 이번에도 자리를 비우십니까?”
당연한 추측이었다.
할 일이 많은 내가, 뒤에서 손가락만 빨고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지금 내가 해결하고 내가 확실한 답을 얻어야하는 일은 하나였다.
바로 여화.
아무리 봐도 여화가 설계한 일은 카르피온의 선에서 전부 끝났다.
대륙은 혼란에 빠졌었고 한수아는 스스로를 자책했고 스스로 무너질 뻔했다.
이 이후에 여화가 끼어들 여지가 있냐고 묻는다면 글쎄.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
[악惡을 지배하는 자가 아스가르드의 외곽, 킹스 하운즈 호텔에서 당신을 기다리겠다고 말합니다.]
호텔?
웃기는 년이네.
피식 웃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 맞다.
자리를 비우냐고?
양규를 바라보며 말했다.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다.”
정말로 오래걸리지는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