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화. < 지배자(2) >
일단 인벤토리에서 물약 서너 개를 꺼내고는 연거푸 들이마셨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나는 이 코인이라는 것을 그저 내 능력치를 상승시키는 수단,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생각했었다.
언제였더라.
오슨을 죽이고 왕 행세를 하고 유토피아 제국을 건국한 것은 코인이 목적이 아닌 내 성장이 목적이었다.
코인은 그저 부가적인 가치였을 뿐.
그 이후 나는 코인에 대해서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
즉, 그때부터 내게 있어서 코인이라는 건 그냥... 계륵도 아니고 애물단지도 아닌, 그냥 신경 쓸 일이 없는 그런 수단이 된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슬며시 코인 보유량을 확인했다.
[보유 코인 : 19.253.476.750]
약 192억 코인.
대충 눈대중으로 계산해보니 완전히 폐허가 되어버린 발바라 대륙을 적어도 폐허가 되기 전의 상태로 바꿀 수 있는 양이다.
물론 최소의 비용으로 최대의 만족을 얻겠다는 생각이 바탕이 되어야만 했지만, 중요한건 내가 폐허가 되어버린 곳을 원상복귀 시킬 수 있는 ‘수단’을 가지고 있다는 것.
대가리부터 터져 주변에 살점이 널브러져있는 카르피온의 시체에 대충 걸터앉고는 턱을 괬다.
솔직히 조금 혼란스러웠다.
내 개인적인 생각이고 이게 과장일수도 있는데.
혹시 이거.
‘창조의 힘이라고 볼 수 있는 거... 아닌가?’
어차피 이 코인이라는 건 시련자가 아니고서야 얻지도 사용하지 못한다.
표본은 있었다.
바로 나.
내가 전생에서 직접 몸으로 겪어봤으니까.
형님과 수많은 시련자들이 코인이니 뭐니 하는 이야기를 하긴 했지만 어차피 나는 그 실체로 모르고 사용하지도 못했다.
그게 시련자와 일반인의 차이였고 이건 생각보다 매우 큰 차이다.
결국 이 코인이라는 건 수많은 생물체중 시련자라는 호칭을 가진 이들만이 사용할 수 있고 그들이 아니면 의미가 없다는 뜻인데. 일반인이 보기에 이건 어떤 식으로 다가오게 될까.
간단했다.
시련자들은 상점에서 코인을 대가로 무언가를 사는 과정을 일반인들은 소설 속에서나 나오는 것처럼 손 한번 까딱이자 무언가가 만들어지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그들이 보기에 그 행동의 의미는 등가교환 법칙을 완전히 무시하는 무에서의 창조.
이건 과장하나 보태지 않고 이것보다 더하면 더했지 못하지는 않으리라.
거참.
생각을 이어가려해도 주변에 피어오르는 먼지 구름이 거슬린다.
먼지를 소멸시키고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나는 공백의 왕이라는 존재를 모른다.
군자검의 시련에서 대충 모습을 보긴 했지만 그건 외형적인 모습에 불과했고 그건 내게 있어서 유치원에 장식품처럼 놓여있는 곰돌이 인형과 다를 바가 없다.
하지만 그가 세상을 만든 건 확실하다.
그렇다면 그는 세상을 만드는데 아무런 대가를 필요로 하지 않았던 걸까?
내가 공백의 왕을 직접 대면하고 그가 생전에 세상을 만드는 과정을 본적이 없기에 이 사안에는 답을 내릴 수가 없다.
하지만 지금 나는 코인이라는 수단이 일종의 창조와 비슷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다면 현실적으로 공백의 왕이, 세상을 창조할 때 그것을 그냥 뚝딱 만든 게 아니라 무언가를 바쳤다는 결론이 가장 합리적이다.
이 가정을 바탕으로 생각을 이어간다면 공백의 왕이 바친 무언가는 그의 힘이었을 수도, 혹은 그의 기운이었을 수도 있지만 시스템은 그것을 ‘코인’이라고 정의했다.
그러니까. 이 코인은 창조의 바탕이 되는 일부이자 모든 것.
허어...
‘과장이 아니었네.’
결론이 내려진다.
이 코인이라는 수단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이건 창조의 힘이 분명했으니까.
그리고 상황이 계속해서 말해준다.
이 시스템이라는 것과 공백의 왕은 한참 전부터 세상이 멸망하는 것을 전제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흥미롭네.’
순간 천군의 말이 머릿속에 아른거린다.
‘새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기존의 것을 모두 파괴해야한다네.’
여화는 뭐라고 했더라.
‘그냥 죽이고 싶어서 죽이고 가지고 싶어서 가지는 거야. 올라가고 싶어서 올라가는 거고, 거기에 꼭 거창한 이유가 필요해?’
그 둘과는 다르게 발락투스는 내게 뭐라고 했던가.
‘나는 그 둘보다는 그대에게서 가능성을 봤지. 적어도 그대는 다를 테니까. 그리고 나는 왕의 자리에 관심이 없어. 그저 왕이 될 이를 옆에서 도우고 싶은 것뿐이야.’
천천히 눈이 떠지고 반사적으로 실소가 터져 나온다.
모든 걸 다 떠나서 결국에는 코인을 최대한 모아놔야 한다는 건데.
그러다 문득 떠오른다.
‘여화님의 지식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뛰어나지. 그분의 힘과 그분이 가진 코인, 그것들이 그 모든 것을 증명해.’
탈레리안. 그놈은 분명 저렇게 말했었다.
대충 상황으로 보자면 현재 가장 많은 코인을 가지고 있는 건 여화. 그리고 아스가르드에서 가장 강한 것도 여화.
에휴.
한숨이 터져 나온다.
슬며시 자리에서 일어서고는 바닥으로 내려왔다.
언젠가부터 엉덩이가 허전하다 싶었는데, 보니까 내가 깔고 앉아있던 카르피온의 시체가 점점 가루가 되어 흩어지고 있었다. 호랑이는 뒤져서 가죽을 남기는데 이 새끼는 죽어서 먼지를 남기네.
미련 없이 고개를 돌렸다.
그런 내 뒤쪽으로 방금 전까지 카르피온의 시체였던 것이 먼지가 되어 주변을 장식한다.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사실 코인의 사용 방향이 밝혀졌다고 해도 이건 지금의 내게 있어서는 그렇게 큰 의미를 지니진 않는다.
그냥 몰랐던 사실을 깨닫게 된 것에 불과했으며 아직 에피소드는 고작해야 중반밖에 오지 않았다.
결국 남은 에피소드를 진행하면서 굳이 의도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모일 것이며 그 양은 지금 가지고 있는 코인의 최소 두 배 정도에 육박할 것이다.
발바라 대륙의 상점으로 미루어보면, 솔직히 그 정도만 되도 멸망한 지구를 원상태로 구축 시킬 수 있을 정도의 양이 분명하다. 그런데 이런 생각이 순간 쓸데없어 보인다고 해야 할까.
어차피 최후의 승자가 되어야만 코인의 의미가 빛을 발할 텐데.
그러다 문득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손가락이 시큰거린다.
포션도 마시고 세포도 자극해 회복 효과를 극대화시켰는데도 아직까지도 완치가 되지 않은 걸 보면 참 묘하다.
신체가 상승된 만큼 회복 시간이 길어진다는 건데.
귀기를 자극하는 건 조금 신중해야 하는 걸까.
시큰거리는 손가락을 주무르며 멈췄던 걸음을 다시 옮겼다.
결국 중요한건 내가 아스가르드의 모든 지배자들을 제치고 공백의 왕이 될 수 있는가 없는가. 이것이다.
여기에 모든 초점이 맞춰져야하고 내 모든 행동 방향은 그 범위 안에서만 움직여야한다.
코인에 휘둘려서는 안 된다.
후우.
다리에 힘을 주고 자리를 박찼다.
바람을 맞으며 생각을 정리했다.
코인은 그냥 많으면 많을수록 좋으니 에피소드를 진행하면서 모으면 되고, 발바라 대륙은 자의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내게 복속되었으니 걱정 할 필요는 없다.
그리고 탐욕은 죽었다.
대체 한수아와 자기중 하나를 선택하라는 여화의 말이 아직까지도 머릿속 한구석에 미심쩍게 자리했지만 솔직히 이건 모르겠다.
일단 확인해보자.
한수아가, 살아있는지 .
쿵-!
빛살 같은 속도로 내 몸이 직선으로 뻗어나간다.
***
수도로 도착한 나는, 슬며시 인상을 찌푸리고 말았다.
이걸 수도라고 부를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거의 폐허가 되다시피 해서 멀쩡한 건물들이 많아봐야 서너 개 정도 보이는 이런 곳을 어떻게 수도라고 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이런 것 때문에 인상이 찌푸려진 것은 아니었다.
이미 이곳에 오기 전, 카르피온과 싸우면서 도시 몇 개를 무너트린 내가 이런 걸로 기분이 상할 리 없다.
문제는 옹기종기 모여 있는 인파.
그들이 거슬렸다.
숫자는 어림잡아 수천, 거기다 부상자들을 수습하고 있는 신관들과 갑옷을 입고 있는 소수의 병사들까지.
그들 모두가 한쪽에 있는 ‘누군가’를 원망어린 표정으로 쏘아보며 계속해서 뭐라 뭐라 쏘아붙인다.
대충 들어보니 이게 다 네년 때문이 아니냐...라든지, 네년이 모두를 세뇌하더니 결국 미치게 만들었구나. 등등.
심지어 고블린들과 오크까지 보인다.
간단했다.
그 누군가는 한수아였고, 살아남은 생존자들 모두가 이 모든 사태의 원인을 한수아로 지목하고 있었던 것.
참고로 현재 진행형이었고 하늘 위에 떠있는 나를 눈치 챈 자는 단 한명도 없었다.
조용히 아래를 훑었다.
우선 성미령과 나성진이 보인다.
그 둘은 한수아에게 무기를 겨누는 이들을 막아서고 있었고 그 둘의 옆에 양규와 엘리자베스도 최대한 인파를 막아내고 있었다. 하지만 자연스럽게 섞여들지 못한 것처럼 보이는 한 여성.
구석에서 조용히 팔짱을 낀 채로 사태를 관망하고 있는 박유정이 보인다.
솔직히 그들 사이가 좋건 나쁘건, 그런 걸 떠나서 조금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내 사람’은, 모두가 살아있었으니까.
기운을 풀고, 조용히 자리에 착지했다.
터억 _
그런 나를 발견한 모두가 방금 전까지 높이던 언성은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그대로 멈추고는 황급히 그 자리에서 엎드린다. 그들에게는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나는, 천천히 걸었다.
온몸이 상처투성이인 한수아가 천천히 고개를 든다.
그 옆에는 반쯤 부서져 거의 흐릿해진 아스트레이가 마찬가지로 나를 바라본다.
당연히 무시했다.
나는 딱 한사람. 한수아만 바라보았다.
그녀가 말한다.
“...항상 그랬어요.”
억눌린 그녀의 목소리가, 새삼 새롭게 들려온다.
감각이 상승해서일까.
한수아의 목소리는 내색하지 않으려하는 것 같지만 분명히 울먹이고 있었다.
아까의 그 사무관 같은 모습과는 다르지만 이것도 내게는 꽤 신선한 변화였다.
“무언가를 하려고하면 항상 누군가가 방해를 해요. 지구에서도 그랬고 여기에서도 계속. 모르겠어요. 왜 계속 일이 이렇게 엉망이 되는 건지. 최대한 무언가를 해보려고 하는데도, 그게 무엇이건 간에 나는 제대로 끝마치지도 못하고, 결국 모두에게 폐가돼요. 항상 그랬어요. 항상.”
넋두리.
문득 든 생각이었다.
살짝 고개를 돌려 주변을 둘러보았다.
한수아의 목소리는 진심이 담겨져 있었고 의도한건 아니었겠지만 그 진심에는 그녀의 ‘힘’이 들어가 있었다.
그 증거로 방금 전까지 한수아에게 적대감을 품고 있던 이들의 눈이 조금 풀렸으니까.
그래도 적대감과 그 안에 담긴 의구심은 완벽하게 사라지지 않았다.
말 그대로 조금 풀린 것.
거참.
이게 영혼의 힘인 걸까.
“이도님이 항상 바라보는 그 ‘누군가’처럼, 이도님한테 의미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어요. 그런데... 내가 다 망쳐버렸어요. 그냥... 전처럼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벙어리처럼 살았으면 모든 게 편했을 텐데, 그러면 이런 일도 벌어지지 않았을 텐데...”
자책까지 한다.
그러다 결국 숨기려던 눈물까지 내보이더니 한손으로 눈가를 계속해서 훔쳐내는데, 그 모습이 꽤나 안타깝다.
아무래도 한수아는 지금 벌어진 이 사태가 결국 자신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믿고 있는 게 확실했다.
그런데 이걸 그녀의 탓이라고 보는 게 과연 맞는 걸까.
굳이 탓하자면 내가 원인이 아니던가.
결국 내가 여화를 선택하지 않았고 박쥐새끼처럼 줄다리기를 했기 때문에 벌어진 결과.
그리고 그 근본을 더 따지자면 여화라는 존재의 변덕.
즉, 이건 인과를 따지기 애매한 일이다.
그냥 벌어진 일이고 지금은 해결된 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거기다 한수아가 무언가를 의도했는지는 바보가 아닌 이상 짐작이 간다.
무슨 생각으로 그랬는지는 지금 한수아가 자기 입으로 말했다.
나에게, 의미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그거면 충분하지 않은가.
나는 의념을 담아 한수아에게 보냈다.
[이번만이다.]
혜광심어養光心語.
난생 처음 보는 수법에 그녀가 살짝 당황한 표정으로 묻는다.
“...네?”
무시했다.
[이번 한번만이라고, 다음부터는 확실하게 처리해.]
촉촉한 눈가로 나를 멍하니 바라보는 한수아.
그녀의 시선을 외면하고는 슬며시 고개를 돌렸다.
“양규, 엘리자베스.”
“예!"
그 둘에게 나는 말했다.
“말했던 거 같은데 한수아를 도우라고.”
둘은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는 대답하지 못했다.
나는 한수아를 도우라고 말한 적이 없으니까.
“아까처럼 ‘재앙’이라 불리는 놈들이 대륙에 쳐들어올 거라고, 그걸 막으려면 이 땅에 종족간의 불화는 없어야하니 대륙의 주민들을 세뇌해서라도 막으라고 지시했는데, 내가 수도의 상황밖에 보지 못했어, 다른 지역은 어떻게 됐지?”
내가 저 둘에 대해서 자세히 알지는 못하나, 딱 한 가지는 확실하게 알고 있다.
눈치가, 기가 막히게 빠르다는 거.
“이도님이 지시한대로 한수아님과 함께 종족간의 불화를 막았습니다. 수도뿐만이 아니라 인근 지역을 비롯해 발바라 대륙에 있는 도시란 도시, 그 모두를 돌아다니며 작업했습니다. 지금 그 피해상황을 보고받을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생각보다 피해가 클 것 같습니다. 이 ‘재앙’이라는 게 너무나도 빨리 닥쳐오는 바람에... 죄송합니다.”
역시 양규는 눈치가 빨랐다.
조용히 주변 반응을 살폈다.
주민들이 약간이지만 혼란스러워한다 .
이 정도면 충분했다.
쐐기를 박을 시간이다.
“아니, 내 잘못이다. 너희는 일을 제대로 처리했어. 문제는 재앙이 내 생각보다 너무 빠르게 창궐했다는 거. 우리가 발바라 대륙의 멸망을 막긴 했지만 피해가 너무나도 크다. 그래도... 고생했다.”
"..."
조용히 손을 뻗어 한수아의 어깨를 두드렸다.
“네 덕에 멸망을 막았네. 고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