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화. < 지배자(1) >
호기롭게 달려들었지만 결과는 썩 좋지 못했다.
퍼어억-!
내 주먹이 놈의 몸통을 그대로 후려친다.
사방으로 터져나가는 충격파가 예사롭지 않았지만 그게 전부였다.
놈이 아무런 타격이 없는 것처럼 물끄러미 나를 응시한다.
그 시선이 참 묘했다.
일순간 내가 먹잇감이 된 것 같은 기분이라고 해야 할까.
그 순간, 놈의 몸이 아까처럼 변화하기 시작했다.
완전히 검은색으로 물들더니, 놈의 몸이 그 자리에서 회전한다.
다른 건 보이지 않았다.
그냥, 직감.
나는 반사적으로 팔목을 들어 올려 방어 자세를 취했다.
콰아아앙-!!
무언가가 내 팔목을 후려친다.
찰나의 순간 기운을 다리로 모으고, 허공을 박찼다.
뒤로 날아가려는 것 같던 내 몸이 뒤쪽이 아닌 정면으로 뻗어나간다.
짧은 순간이지만 보았다.
코앞에 흔들거리는 놈의 꼬리.
아무래도 방금 나를 후려친 건 놈의 꼬리였나보다.
타격이 있고 없고 그런 걸 떠나서 내 직감이 경고를 내린다.
절대로 방심하지 말고, 최대한 빠르게 끝내야한다고.
그런 내 귓가에 들려온다.
으아악-!!
밑에서, 그리고 저 멀리서 들려오는 주민들의 비명소리.
아까의 그 소리들과는 비교조차 되지 않았다.
범위가, 아무래도 더 넓어졌나보다.
빌어먹을 새끼.
***
여화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조용히 울린다.
“이상하네...”
“뭐가 말입니까?”
머리에 곧은 뿔 하나가 인상적인 도깨비, 새롭게 여화의 오른팔이 된 살롬은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지닌바 7성의 초월자로서 아스가르드 내에서도 상위권에 자리한 그는, 솔직히 여화가 어려웠다.
비위맞추는데 능했던 탈레리안과는 정반대의 성격이었기에 더더욱 어렵게 느껴진 것일지도 모른다.
“내가 생각한 방향이랑 너무 다르게 움직이고 있어.”
이해가 되지 않는 건지 도깨비가 고개를 갸웃한다.
“됐다. 너 이해시키려고 말 꺼낸 것도 아니니까 너는 그냥 내 옆에서 추임새나 넣으렴.”
“...예”
여화의 궁금증, 그녀의 의문은 간단했다.
“이도가 예지 능력자였다면 카르피온을 ‘해방’시켰을 리가 없어.”
“...그렇군요.”
말 그대로 추임새를 넣는 살롬의 말은 무시했다.
여화는 조용히 팔짱을 끼고는 생각을 이어갔다.
모두가 짐작했겠지만 카르피온의 성질은 간단했다.
평상시 인간과 흡사한 형체의 그 모습은 카르피온의 힘이 억눌린 모습이고, 그 상태에서 죽음을 맞이하거나 큰 타격을 입는다면 억눌린 그의 힘이 터져 나온다.
그것이 지금 이도가 싸우는 카르피온의 모습이었다.
인간체 카르피온의 권능은 고작해야 범위가 300키로 미터 정도에 달하지만 완전체로 변하는 순간 그 범위가 다섯 배, 아니, 열배 이상 증가하게 되는데.
만약 이도가 예지 능력자였다면 카르피온을 죽이는 건 더욱 더 손쉬웠을 것이다.
예를 들면 변형하기 전의 카르피온을 북부 같은 곳에 처박아놓고 거기서 자연스럽게 시간을 끌며 카르피온이 자연사하기를 기다리는 것.
그런데 왜 굳이 저렇게 비효율적으로 움직이는 걸까.
생각할수록 이상했다.
‘여태껏 이도의 행동들이 기존 상식의 범위를 벗어났다고 해도 그러려니 하고 넘어간 건 얘가 예지 능력자였기에 우리가 모르는 미래를 자기 나름의 입맛에 맞게 바꾸는 것이겠구나... 싶었는데.’
여화는 의심이 들었다.
계속해서 이도에 대해 관찰하고 그를 이해하려고 나름의 노력을 했기에 이런 생각이 가능했는지도 모른다.
‘자세히 보니 딱히 무언가를 깊게 생각하고 움직이는 것 같지는 않네. 그냥 기분파는 아닌 것 같고.’
여화의 입 꼬리가 호선을 그린다.
안대로 눈을 가리고 있다가 안대를 치웠을 때 빛을 처음 본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내가 여태껏 눈 뜬 장님이었네.”
“예?”
여화는 힐끔 고개를 돌렸다.
발락투스와 천군의 시선이 느껴지자, 실소를 터트리고 말았다.
“전부, 장님이었어.”
"..."
여화가 영상속의 화면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카르피온과 이도는 생각보다 치열하게 싸우고 있었다.
9성 초월자의 싸움은, 한 행성을 초토화 시켜 버릴 수 있을 정도의 힘이 오가는 말 그대로 괴물들의 싸움이다.
이미 저 둘의 싸움으로 수백만에 이르는 이들이 죽었고 현재 진행형으로 죽어나가고 있으며, 이도의 주먹질과 카르피온의 꼬리가 맞닿는 순간 산 하나가 사라진다.
그런 둘을 번갈아 쳐다보던 여화의 시선이 굳어져있는 이도의 얼굴에 꽃혔다.
여화는 생각했다.
‘너... 미래를 알고 있는 게 맞긴 하니?’
물론 아직까지는 시기상조인 생각일수도 있었다.
어디까지나 가정이었고 뇌피셜에 불과했으니까.
확실한건 이도는 분명 ‘미래’에 대해서 어렴풋이는 알고 있다.
하지만 그게 너무 지나치게 제한되어 있다는 거.
지금에 와서야 생각해보니 그게 너무나도 부자연스럽다.
‘그러고보니 권능을 발동시키는 모습을 본적이 없네.’
한 가지 확실한건 영상속의 저 사태가 끝난다면 이도는 분명 아스가르드로 올 거라는 거.
여화는 이도에게 반드시 물어야하고 답을 얻어야할 질문을 떠올렸다.
그건 내편 니편이니 애새끼 같은 편 가르기 질문이 아니었다.
여화는 머릿속으로 그 질문을 떠올렸다.
‘너, Episode #100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고는 있는 거니?’
***
답이 없다.
카르피온과 싸우며 내린 답은 이게 전부였다.
솔직히 말하면 카르피온은 그렇게 강하지는 않았다.
기교도 없었으며, 단순히 꼬리를 휘두르고 손바닥을 휘두르는, 그러니까 언젠가 나한테 죽었던 바하로사의 그것처럼 단순하디 단순한 공격.
그게 전부였다.
문제는 놈의 몸이 너무 단단하다는 점이다.
정말이지, 말하고 있는 와중에도 어이가 없어서 한숨이 터져 나올 정도였다.
간단하게 정리하면 그 어떤 공격을 하건, 타격이 없다.
주먹으로 머리통을 후려치고, 발뒤꿈치로 미친 듯이 내려찍어도 몸만 휘청일 뿐 그 외의 다른 반응이 없다는 게 그것을 반증했다.
폭기를 터트리기도 했고, 당연히 협조는 안 해줬지만 인벤토리에서 군자검을 꺼내 휘두르기도 했다.
지금껏 시도해보지 못한 기술은 딱 하나였다.
신의 창.
의지의 시련을 통과하게 만든 기술.
문제는 그 기운을 끌어 모으려면 시간이 필요한데 지금, 내 상황에서는 신의 창을 제대로 쓸 수가 없었다.
‘딜레마...라고 하던가.’
너무나도 적절한 말이 아닌가.
지금도 밑에서는 사람들이 죽어나가고, 도시는 점점 폐허가 되어가고 있었다.
아니 이걸 도시라고 부를 수 있을까.
이미 내 주변에 살아있는 이들은 보이지 않았고 기척도 없었다.
모두가 서로가 서로를 죽이는 싸움을 벌였으며, 거기다가 나와 카르피온의 전투 범위 안에 들어와 있었기에 일반인들이 살아남는다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운 좋게 살아남았더라도 무너지는 도시와 함께 운명을 같이했을 확률이 높다.
그들의 죽음에는 내 영향도 있을 테지만 죄책감은 없었다.
하나를 살리려다 내가 피해를 보면 백을 죽이는 경우가 벌어질 테니까.
냉정하다거나 이기적이라거나. 이런 건 무의미하다.
놈은 재앙.
그런 재앙을 맞서는 나도 일종의 재앙이 되어야한다.
일단, 이놈을 최대한 빠르게 죽이자.
그런데, 틈.
틈이 보이질 않는다.
놈의 공격에는 기술이 없다고는 하나 나를 적으로 인식하고 머리 빈 파충류마냥 끊임없이 달려드는 건 확실히 거슬렸다.
젠장.
후웅-!
머리를 숙인 뒤 놈의 거대한 주먹을 피하고, 한발로 놈의 팔목을 발판삼아 자리를 박찼다.
애매하긴 하지만 일단, 해보자.
그대로 한발 더 내딛고는 놈의 거대한 머리통을 박찬 뒤 나는 하늘로 떠올랐다.
이어서 귀기를 퍼트렸고, 하늘로 보낸 뒤 뭉쳤다.
쿠구궁-!!!
하늘에서 검은 창이 만들어지기 무섭게 땅 전체가 떨려오기 시작했다.
이어서 카르피온이 빠르게 고개를 돌린다.
이변을 눈치 챈 게 확실하다.
망설임 없이 창에 의념을 보냈다.
‘내려 찍혀라.’
신의 창이 놈의 머리통을 향해 직선으로 내리꽃히고 이어서 놈이 자리를 피한 것은 거의 동시에 일어난 일.
퍼억-!
신의 창이 맥없이 땅에 박힌다.
생각보다 초라한 소리가 울렸다고 생각되던 그때.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앙-!!!!!!
귀가 먹먹하다.
거대한 먼지구름이 터져 나오는 그 순간, 나는 보법을 밟으며 허공에서 몸을 틀었다.
스아악-!
솔직히 조금 멍한 감이 없지 않아 있었다.
그래서 조금 늦은 걸까.
놈의 거대한 주먹이 내 어깨 어림을 살짝 스친다.
물리적인 타격은 없었지만 약간 정신적으로 타격을 받았다.
신의 창.
힘을 극한으로 끌어 모은 건 아니었는데도 피해 범위가, 장난이 아니었다.
피어오른 먼지구름에 가려지긴 했지만 한 가지 확실한건 지금 내 신의 창은 족히 수백 키로 미터에 버금가는 땅을 초토화 시켰다는 거.
확실하다.
신의 창은 놈에게 통한다.
머리통에 제대로만 박으면 확실하게 죽일 수 있다.
이어지는 놈의 공격을 피하면서, 머릿속으로는 계속해서 시뮬레이션을 돌렸다.
대략 내게 필요한 시간은 2초.
놈이 방심하는 그 확실한 상황을 만들기 위해서는 일단 놈의 시선을 확실히 돌려야한다.
적어도 나를 만만하게 생각하는 지금의 카르피온은 아까처럼 몸을 흰색으로 변한 뒤 도망칠 생각은 없어보였으니까.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여러 가지 상황을 머릿속으로 그리고, 나는 그중 한 가지 상황을 선택했다.
사실, 이거 말고는 없다.
집중하고 고개를 들자 코앞에 놈의 손바닥이 내뻗어지고 있었다.
의도는 확실했다.
나를 잡아채려 하는거.
그거면 충분하다. 그리고 내가 바라던 바였다.
나는 뒤늦게 반응한 것처럼 몸을 움직였고 자연스럽게 놈의 손에 몸이 잡혔다.
콰드득-!
놈의 손아귀에 힘이 들어가고, 나는 최대한 내 기운을 하늘로 끌어올렸다.
시간 싸움.
살을 내주고 뼈를 취하는 수법.
아무리 생각해도 이게 답이다.
하늘에, 아까보다 더 큰 신의 창이 생성되고, 놈이 그 창과 나를 번갈아 쳐다본다.
그때.
우두둑-!!
놈의 손아귀에 짓눌리던 내 오른팔이 기형적으로 꺾인다.
솔직히, 아프다.
아픈데.
일단 참았다.
이를 악물고 놈의 눈깔을 직시하자, 놈도 결단을 내린듯하다.
하늘에 있는 창이 떨어지는 게 먼저냐, 아니면 내가 놈의 손아귀에 짓눌려 죽는 게 먼저냐.
해보자.
‘내려, 꽃혀라.’
하늘에서 창이 내리꽃히고, 놈이 오른손으로 내 머리를 잡아채는 것은 거의 동시에 일어난 일이었다.
아니 잠깐.
이 새끼 아무래도 내 머리를 몸통에서 그대로 뽑아 버리려나보다.
취미가, 생각보다 고약하네.
그나마 멀쩡한 왼팔로 다가오는 놈의 오른손을 쳐냈다.
아니 쳐내려했다.
터엉-!
맥없이 튕겨져 나오는 내 주먹이 뭔가 애매하다.
튕겨져 나간 손으로 이번에는 머리 쪽을 보호했고 놈의 손에 힘이 들어간다.
우두둑-!!
손가락이 부서지고, 뼈가 으스러진다는 느낌이 들던 그때.
퍼억-!!!
모든 게 정지했다.
내 몸을 붙잡고 있던 놈의 왼손도, 내 머리를 잡아채고 있던 놈의 오른손도, 그 모든 게 멈췄다.
그대로 빠르게 고개를 돌린 나는 볼 수 있었다.
내 신의 창이 놈의 머리를 그대로 뚫어버린 것을.
나는 반사적으로 남은 왼팔로 얼굴 쪽을 보호했다.
이어서.
콰아아아아아아앙-!!!
거대한 폭음과 함께 멀리 날아가 먼지가 되어버린 공터에 쳐 박힌 나는, 그 와중에도 웃었다.
아니 웃을 수밖에 없었다는 표현이 적절할까.
띠링!
[탐욕을 막아내셨습니다.]
[100억 코인을 획득하셨습니다.]
정신없는 와중에도 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승자가 누워있는 경우는 없으니까.
기형적으로 꺾인 오른팔을 제대로 맞추던 그때.
띠링!
다시 알림음 소리가 들려온다.
저게 끝이 아니었나?
그렇게 생각하던 찰나.
[당신은 발바라 대륙의 지배자임을 증명하셨습니다.]
[발바라 대륙은 지금 이 순간부터 당신의 소유입니다.]
[상점창에 ‘발바라 대륙’이라는 항목이 추가됩니다.]
...나는 스스로 소유하겠다고 오케이 의사를 보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자동으로 수락이 된다고?
뭐가 이래?
이게 끝이 아니었다.
[상점창 ‘발바라 대륙’은 대기실이 아닌 곳에서도 이용이 가능합니다.]
거참.
솔직히 조금 흥미가 생겼다.
이 넘쳐나는 코인을 어디다가 쓰는 건지 답도 안 나오는 상황이었는데, 혹시 이게 무슨 힌트가 될까?
슬며시 고개를 돌렸다.
홀로그램 구석 쪽에 상점창이 갱신 돼 있는 모습이 보인다.
그쪽으로 손을 올렸다.
++
[발바라 대륙]
마테리아 제국 황궁 -50억 코인
마테리아 제국 암살자 양성 시설 - 20억 코인
마테리아 제국 일반 주택 - 10만 코인
주민 1명(성별 불문) -1만
...중략-
판테온 제국 황궁 - 5억 코인
판테온 제국 백마탑 - 1억
판테온 제국 흑마탑 -1억
++
잠깐 멍했다.
상점창에 나와 있는 항목은 의외로 간단했다.
건물과, 사람.
구석에는 무슨 정통 검법을 배운 기사니 뭐니 하는 게 적혀있었는데...
이 모든 게 코인으로 살수가 있었다.
순간 나는 소름 돋는 가정을 떠올리고 말았다.
이 코인이라는 건 무너진 세상을 재건할 때 쓰는 그런 용도가 아닐까하는.
...설마. 진짜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