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화. < 탐욕의 재앙(4) >
놈이 너털웃음을 터트린다.
[웃기는 놈이네. 그럼, 어디 한번 해보던지.]
그 말이 끝이었다.
놈이 푸스스하는 소리와 함께 연기처럼 완전히 사라진다.
곧바로 기운을 퍼트렸지만 그게 전부였다.
내 기운과 내 감각에 놈의 기척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도망치는 게 자신 있다고 하더니.’
확실히 그 말 그대로였다.
천천히 눈을 감고 다시 집중했다.
귀신의 기운이 나를 기준으로 점점 뻗어나가고 주변을 덮으며 내 의지에 따라 놈의 기척을 찾는다.
2초.
3초.
4초.
순식간에 수도 전체를 감쌌지만 내 기척에 잡히는 것은 주민들의 목소리가 전부였다.
이대로는 소득이 없을듯하다.
일단 기운을 거두었다.
자 생각해보자.
여화는 자신의 목숨을 대가로 탈레리안을 강림시켰다.
그리고 탈레리안은 미리 준비한 것처럼 구슬을 꺼내들었고 무언가를 했다.
그리고 소멸했다.
맥락만 보자면 여화의 목숨은 아스가르드에 있던 탈레리안을 지상으로 강림시키는 대가였을 것이고, 탈레리안이 카르피온을 소환한 건 탈레리안의 목숨이 대가였을 확률이 높다.
그게 현재 상황을 바라보는 내게 있어서 가장 합리적인 판단이다.
그런데, 카르피온은 나름 9성의 신격을 갖춘 존재다.
솔직히 느끼기에는 9성이라기 보다는 나보다 아래로 느껴지긴 했으나, 지입으로 9성이라는데 어쩌겠는가.
그냥 그러려니 해야지.
중요한건 그런 그를 ‘고작해야’ 5성 밖에 안 되는 탈레리안이 소환했다는 점이다.
내가 세상을 오래산건 아니지만 시스템을 비롯해 벌어지는 수많은 일들에 대해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법칙은 알고 있다.
바로 등가교환.
무언가를 얻으려면 그에 상응한 대가를 소모해야한다.
5성의 탈레리안의 목숨은 턱없이 부족하다.
그렇다면 이건 놈의 소환 시간에는 제한이 있다는 이야기고 실제로 시간제한이 존재한다면 그 주기는 매우 짧을 것이라는 가정이 성립된다.
잠깐만.
순간, 머릿속에 번개가 쳤다.
말도 안 되는 생각이지만, 그 대상이 여화이기에 성립할 수 있는 단 한 가지 가정.
그러니까. 여화가, 목숨을 한 개가 아닌 두 개를 바쳤다면?
곰곰이 생각해보면 탈레리안은 여화가 목숨을 바쳤다고만 했지 그게 한 개라고는 말하지 않았다.
그러다 문득 실소를 터트리고 말았다.
‘내가 지금 무슨 잡생각을 하고 있는 거지.’
어차피 잡아서 쳐 죽일 생각인데, 시간제한이 있건 없건 그게 무슨 소용일까.
이때를 대비한건 아니었지만 문득 형님이 만들었던 스킬과 형님과의 대화가 머릿속에 떠오른다.
-가끔 생각했거든. 내 몸이 한 개가 아니라 두 개였다면 어땠을까하고.
-졸렬잎 마을 닌자처럼요?
기억속의 형님이 웃는다.
-내가 너한테 알려준 잔보나 분보같은 보법은 사실 실험하다가 만들어진 거였거든.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 이상 생각하지 않았다.
집중했다.
기운이 내게 몰리고 마나의 결이 느껴진다.
이어서 의념을 담고 한곳으로 모았다.
둥근 구체 수십 개가 생겨났고 그것들은 마치 무언가를 복사하는 것처럼 내 몸 안으로 들어왔다가 다시 밖으로 빠져나갔다.
천천히 눈을 떴다.
귀기와 혈기가 뭉쳐진 검붉은 수십 개의 구체가 내 주변을 떠다닌다.
천천히 한손을 들어 올렸고, 의념을 보냈다.
‘변해라.’
이어서 투두둑 하는 소리와 함께 수십 개의 구체가 점차 사람의 형체로 변하기 시작했다.
뜬금없지만 에덴동산의 아담과 이브가 이러지 않았을까.
아래쪽에서 수많은 이들이 작게 탄성을 내지르며 나를 올려다보는 게 느껴졌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나는 지금, 스킬이 없는 상태에서 스킬을 사용했다.
일종의 분신술.
머릿속으로 스킬을 획득했다느니, 만들었다느니 별에 별 업적이 깨졌다는 알림음이 들려왔지만 당연히 이것도 신경 쓰지 않았다.
내 목적은 하나였으니까.
내 모습을 한 정확히 80개의 개체에게, 나는 말했다.
“그 새끼 찾아.”
내 말을 들은 그들은 마치 충신처럼 고개를 끄덕이고는 사방으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그 상태로 나는 눈을 감았다.
내가 만든 분신체 하나하나에게서 느껴지는 ‘시선’과 ‘감각’
순식간에 80개의 시야가 느껴졌지만 확실히 성장했기 때문일까.
생각보다 그렇게 혼란스럽지는 않았다.
눈을 감고 집중했다.
카르피온은 대체 어디에 있는 걸까.
놈이 도망치는 범위가 대체 어디까지일까.
놈을 찾아 족치려면 놈의 패턴을 확실히 알 필요가 있었다.
역시 그러려면, 일단 한번은 찾아야한다.
그때였다.
80개의 시야중 하나가, 허공에 묘한 균열을 발견했다.
분신이 그곳으로 몸을 날린다.
[뭐야. 벌써?]
놈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이내 하얀색으로 물든 놈의 몸이 시야에 보인다.
이어서 놈의 몸이 검은색으로 물들더니 분신을 향해 손을 내밀었고.
콰앙-!
무언가 터지는 소리와 함께 내 분신이 사라진다.
별거 아니지만 감이 잡힌다.
검은색은 공격.
흰색은 이동. 혹은 도망.
방향은 북서쪽, 거리는 약 230km.
감겨있던 내 눈이 조용히 떠진다.
찾았다.
**
그렇게 생각한 나는 자리를 박찼다.
그 와중에 다른 걸 생각할 여유는 없었다.
그래서였을 것이다.
나는 머릿속에 울리는 알림음을, 이 순간 확인하지 못했다.
띠링!
[돌발 퀘스트!!]
[발바라 대륙에 닥친 재앙, 신성 카르피온을 죽이십시오.]
[제한 시간 : 179:59]
[성공시 50억 코인을 획득합니다.]
[실패시 발바라 대륙은 멸망합니다.]
***
아스가르드의 연회장은 조용했다.
약속된 침묵이 아닌, 자연스러운 침묵.
방금 전까지만 해도 언성을 높이던 이들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입을 다물고 한곳을 주시하고 있었다.
바로 영상.
거대한 스크린에 떠있는 현재 발바라 대륙의 상황을 모두가 지켜본다.
그리고 그들은 느꼈다.
이도라는 인간이 지금 어느 정도까지 올라온 것인지를.
대단하다는 말로는 부족했다.
하지만 지금 그들이 입을 다문 것은 이도의 힘 때문이 아니었다.
퀘스트.
돌발 퀘스트가 발동했다는 거.
그게 중요했다.
천군은 조용히 고개를 돌려 발락투스를 바라보았다.
우연의 일치였던 걸까.
마침 시선을 돌린 발락투스와 눈이 마주친다.
둘은 굳이 이야기하지 않았음에도 서로의 생각을 읽었다.
친해서가 아니라 그냥... 자연스러웠다.
둘은 생각했다.
시스템이 왜 저 상황을 퀘스트로 내려주었는가.
이건 시스템이 현재 벌어지는 여화의 미친 짓을 ‘정당하다’ 라고 선언한 것과 다름이 없었다.
그렇다면 왜 탈레리안이 소환되었을 때는 퀘스트가 생겨나지 않았는가.
이상하다.
너무나도 이상하다.
그렇기에 천군과 발락투스는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여화가, 성장한 것인가?’
이내 둘은 동시에 고개를 저었다.
그건 불가능했으니까.
아스가르드는 힘이 제한된 감옥이다.
모략 같은 것을 꾸미는 잔머리가 발달한다면 모를까. 이곳에 갇혀 있는 죄수와도 같은 초월자들은 신격의 성장을 이루어낼 수 없다. 아니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지금 상황은 어떻게 받아들여야할까.
답이 나오지가 않는다.
거기다 이 일을 만든 것은 여화이고 여화는 무언가를 묻는다고 쉽게 대답해줄 그런 여자는 아니었으니까.
그렇게 둘은 의심 가득한 표정으로 동시에 시선을 돌렸다.
겉보기에는 표정 변화 없이 물끄러미 영상을 바라보고 있는 여화가, 둘의 시야에 들어온다.
한동안 여화를 바라보던 둘은 소득 없이 고개를 돌렸고 다시 영상을 시청했다.
***
'...뭘까 이게.’
겉보기에는 무표정을 유지했지만 여화는 지금 매우 혼란스러웠다.
이런걸 의도하지는 않았다.
탈레리안과 카르피온을 밑으로 내려 보낸 이유는 이도의 선택을 보기 위해서였을 뿐, 그 외의 다른 목적은 없었다.
당연히 시스템이 눈치 챌 것을 예상했었다.
아니, 확신했다.
하지만 시스템은 몰라야한다.
아니, 알고도 모르는 척 했어야한다.
이건 애초에 정당한 방법도 아니었고, 꼼수로 인해 시스템을 우회한 것에 지나치지 않으니까.
쉽게 말하면 시스템은, 돌발 상황이 발생한다면 그 원인을 확실하게 찾은 뒤에 해결하는 게 기본이다.
모든 초월자들이 그렇게 생각했고 실제로도 시스템은 그렇게 행동해왔다.
지금의 상황은 시스템이 원인을 찾아야하는 상황이고, 그 원인은 여화의 목숨.
즉, 지금은 사라진 여화의 목숨이 그 원인이기에 시스템은 혼선을 빚어야하는 게 마땅하다.
그런데, 대처가 너무 빠르다.
빠르기만 했을까.
이걸 퀘스트로 내려준다고?
‘느낌이 싸해지네.’
과장이지만 이런 생각이 들 정도였다.
이제 아스가르드의 초월자들도 에피소드의 일부가 되어버리는 게 아닐까하는.
여화는 버릇처럼 팔걸이를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이상한 건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결정적으로 카르피온이 발바라 대륙에 머물 수 있는 시간은 여화의 계산대로라면 약 1시간.
그 60분이라는 시간은 절대로 짧은 시간이 아닌데, 오히려 지금 시스템이 3시간으로 늘려버렸다.
팔걸이를 치던 여화의 손가락이 그대로 정지한다.
이건 하나밖에 없다.
정확히는 이번 일을 계획하고 실행한 여화이기에, 오직 여화만 알 수 있는 사실.
지금 이쪽 세상에, ‘누군가’가 존재한다.
시스템이 개입할 수 있도록 정당한 명분을 주고, 거기다 성공 보상과 실패 보상까지 걸어버릴 수 있는 어떤 존재.
여화는 조용히 한손으로 턱을 짚었다.
누굴까.
시스템과 ‘대화’가 가능하며, 아스가르드의 상황을 알고 있기까지 한데다가, 이도에 대한 상황까지도 알 수 있는 누군가.
‘넌 도대체 누구니.’
여화의 한쪽 입 꼬리가 살짝 말려 올라가고 말았다.
생각할수록 웃기지 않은가.
1시간이라는 지속 시간을 오히려 3시간으로 늘려버리다니.
대체.
‘너는 누군데 내 일에 끼어드는 거니.’
여화는 생각했다.
그게 누구건 면상 한번 보고 싶다고.
***
카르피온의 위치를 인지하고, 그곳으로 가기까지 걸린 시간은 고작해야 초 단위였다.
허공에 갈라진 균열이 보이고 그곳에서 고개를 갸우뚱하고 있는 카르피온을 본 순간, 용솟음치는 내 기운이 내 의지를 따라 움직인다.
놈이 고개를 돌리고, 놈의 코앞에 10개의 폭기가 생겨나는 것은 거의 찰나의 순간 벌어진 일.
이어서.
콰아아아앙-!!!!
거대한 폭음이 터지고, 나는 그 폭음 안으로 뛰어들었다.
상승된 내 감각이 말한다.
놈은, 아직 그 자리에 있다고
쌔애액-!!
강기를 머금은 내 주먹이 직선으로 뻗어져나간다.
[어...어?]
콰아아앙-!!!!!
내 주먹이 놈의 얼굴을 후려치고, 내 주먹을 둘러싼 강기가 터져나가며 놈에게 2차 타격을 입혔다.
[큭... 이 새끼가.]
나만큼은 아니지만 생각보다 입이 걸걸하다.
놈의 몸이 흰색으로 변하려던 그 순간. 내 손이 번개 같은 속도로 놈의 어깨를 휘어잡는다.
마치 연기처럼 또 다시 흐릿해지려던 놈이, 마치 도망칠 수 없는 것처럼 그 자리에서 정지했다.
그걸로 확신했다.
놈은 무언가에게 잡혀있는 순간에는 아까처럼 몸을 순식간에 빼내지 못한다.
그리고 이건 여담인데 놈의 면상을 코앞에서 본 순간 작은 의문 하나가 풀렸다.
놈은 분명 겉보기에는 눈이 없음에도 나를 보고 있었고 주둥이가 없었음에도 무언가를 말하고 있었다.
괜히 달걀귀신이라고 한 게 아니었는데. 이렇게 가까이서 보니까 보인다.
인간처럼 두 눈이 있어야할 자리에 매우 작은. 태양의 흑점보다도 훨씬 작은 두 개의 검은 점.
아마 높은 확률로 저게 눈일 것이다.
그 눈에 검에 물든 내 모습이 작게나마 비춰 보인다.
나는 웃지 않았다.
매우 싸늘한 표정.
나조차도 저런 표정을 지은 게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여기까지 오면서 보았다.
수도와 그리 멀리 떨어진 곳은 아니었지만 이곳에서도 수도에서 있었던 ‘참사’가 벌어지고 있었다.
애착이 있거나 그런 건 아니었지만, 적어도 내가 살려보겠다고 마음먹었던 이들이다.
그들이 이놈 하나 때문에 죽이고 죽이는 싸움을 하고 있었다.
시발새끼.
팔꿈치에 힘을 주고 그대로 내려찍었다.
콰직-!!!
[큭..!]
놈의 면상에 금이 간다.
농담이 아니라, 정말로 금이 갔다.
좀만 더 패면 부서질 것 같다.
콰직-!!
콰직-!!!
연달아 두 번을 내려찍자 놈의 면상을 감싸고 있던 새하얀 파편이 사방으로 흩어진다.
[자.. 잠깐만!! 멈춰봐!!]
무시했다.
콰직-!!!
[멈추라고!!!]
놈이 절규하는 모습에, 나도 모르게 살짝 멈칫하고 말았다.
뭘까.
계속해서 후드려 패는 나조차도 무언가가 꺼림칙하다.
9성의 신격을 갖춘 놈이 이렇게 맥없이 당한다고?
이상하다.
그리고 그 의문은 잠시였다.
기회가 왔는데 놓치는 건 머저리들이나 하는 짓이 아닌가.
일단 패고보자.
내 전력을 오른 주먹에 몰아넣었다.
그리고, 완전히 금이 간 채로 부서지기 일보직전인 놈의 얼굴을 후려쳤다.
쩌어어어엉-!!!!
무언가 깨지는 굉음이 울려 퍼지고, 놈의 머리가 그대로 터져나간다.
끝인 걸까.
무언가 허무하다는 생각이 들려던 그때.
띠링!
[돌발 퀘스트가 메인 스토리(외전)#14로 변형됩니다.]
[지배자가 되기 위한 길.]
[재앙 ‘탐욕’을 죽이십시오.]
[성공시 100억 코인+(?) 를 획득합니다.]
[실패시 발바라 대륙은 멸망합니다.]
[제한 시간이 단축됩니다.]
[남은 시간 : 56:32]
이게 뭔 개소린가 싶다.
방금 죽은 거 아니었어?
내 생각이 무색하게도 곧바로 반응이 왔다.
쿠궁-!
땅이 진동하고 사방이 짓눌린다.
바닥에 떨어져있던 카르피온의 새하얀 파편들이 하늘위로 떠오르고, 목을 잃은 놈의 몸이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5m... 7m.... 순식간에 10여 미터가 넘는 크기로 변한 놈은, 아까의 모습과 매우 달랐다.
아까는 인간의 형태와 비슷했지만 지금 내 눈에 보이는 놈의 모습은 몸을 불린 궁극체의 드래곤과 흡사했으니까.
느낌이 싸해진다.
왜 하필이면 드래곤의 모습일까.
생각은 이어지지 못했다.
놈의 주둥이가 갑자기 열리더니.
파아아앙-!!!
거대한 포효를 터트리며 사방으로 충격파를 터트린다.
귀가 아플 정도였다.
포효를 멈춘 놈이, 나를 바라본다.
온몸을 검은색으로 물들인 놈이, 이번에는 큰 눈으로 나를 노려본다.
그 안에 담긴 광기와 살기.
온몸이 저릿하다.
슬며시 목을 풀었다.
왜 자꾸 보상으로 코인을 주는 건지, 그리고 이 코인으로 대체 뭘 하라는 건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생각하지 않으려한다.
일단, 놈을 죽이고 보자.
이번에는 매우 깔끔하게.
콰아앙-!
나는 놈을 향해 자리를 박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