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 탐욕의 재앙(1) >
쿵-!
가볍게 자리를 박찼다.
그런데 뭐라고 해야 할까.
아마 그런 표현이 어울리지 않을까싶다.
남들보다 몇 초 더 빠르게 이동하는 느낌.
탈레리안과의 거리가 순식간에 좁혀지자, 나는 망설임 없이 주먹을 내질렀다.
[아직 늦지 않았으니 다시 생... 흐읍!]
후웅-!
무언가 말하던 탈레리안이 몸을 크게 틀며 내 주먹을 피한다.
아직 상승된 신체에 적응하지 못한 걸까.
이걸 빗나가다니.
이래서야 누가 나를 전직 복싱 선수로 보겠어.
망설임 없이 다음 동작을 이어갔다.
다리에 힘을 주고 횡으로 휘두르자.
쩌엉-!!!
탈레리안의 옆구리에 그대로 틀어박힌다.
"끄윽-!”
내 귓가에 탈레리안의 짧은 비명이 울리는가 싶을 때.
콰아아아앙-!!!
그나마 인적 없는 곳에 그의 몸이 틀어박혔다.
그게 끝이었다.
쿠구궁-!!!
땅을 가르며 먼지구름이 피어오른다.
터억-
조용히 자리에 착지한 나는 고개를 들었다.
적막했다
탈레리안의 기파에 짓눌린 이들이 정신을 차리고 하나둘 고개를 들더니 나를 바라본다.
잠깐의 침묵, 그리고 그 이후 이어지는 과정은 간단했다.
와아아-!!
거대한 함성이 터진다.
거참.
상황이 그대로 종료된 줄 알고 있는 걸까.
만세 삼창까지 하려는 모습을 바라보다 그냥 손을 들어올렸다.
뚝-
솔직히... 이게 무슨 몰래 카메라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딱히 기운을 다시 끌어올린 것도 아니고 그냥 손 하나 들어 올린 것뿐인데 상황이 이렇게 정리된다고?
‘...할 말이 없네.’
솔직히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처음 유토피아를 건국할 때도 그랬지만 나는 정치인 체질이 아니다.
나름 연기를 잘한다고 생각은 하지만 그건 남들에게 이용당하지 않기 위해서 나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일종의 방어기제였을 뿐, 실제로 나는 누군가를 속이는 것을 그리 좋아하지는 않는다.
뭐라고 해야 할지 머릿속으로 단어를 정리하던 그때.
“모두 하던 일 멈추시고 대피하세요.”
맑고 청량한 목소리가 내 뒤에서 들려온다.
고개를 돌리자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라는 것처럼 여유로운 표정을 짓고 있는 한수아가 보인다.
거참, 얘가 언제부터 누군가한테 명령을 내리는 게 자연스러워진 걸까.
그리고는 실소를 터트리고 말았다.
정말 시답잖은 생각이었다.
답은 이미 내려져있었으니까.
내가 이 세상과 시련에 적응했던 것처럼 한수아도 적응한 것이다.
지금 내 시선을 잡아끄는 건 한수아가 아니라 주변 사람들의 반응이었다.
누군가는 뒤에서 궁시렁거리기도 했고 누군가는 환희에 젖은 표정으로 엎드리기까지 한다.
그러면서도 한수아의 명령을 따르는 그들은 나를 감히 올려다보지도 못했다.
마치 절대로 손대서는 안 될 상징 같은 것을 본 것 같은 그런 모습이라고 해야 하나.
정말이지,
‘가관이네.’
슬며시 고개를 돌려 상자를 품안에 들고 있는 한수아와 눈을 맞췄다.
머릿속에 어렴풋이 그림이 그려진다.
내가 사루에게 전한 말은 분명 한수아에게 제대로 전해졌다.
-네가 알아서 처리해라.
이 말은 생각보다 많은 뜻을 함축한 말이 아니었다.
그냥 내가 갈 때까지 문제 일으키지 말고 시간을 벌어놓으라는, 그런 의미였는데, 그 짧은 사이에 한수아가 택한 방법이 나라는 존재의 신격화다?
솔직히 예상조차 하지 못했다.
다시 생각해보니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터져 나올 정도였다.
나름 객관적인 시스템이 나한테 이 대륙을 복속시키겠냐고 물을 정도이니, 두 번 언급할 필요는 없으리라.
“주민들 대피시키라고 명령은 내려놨어요. 따로 시키실 거라도 있으신가요?”
잠깐 말문이 막혀왔다.
사람이 뭔가 확 변한 것 같다.
원래 얘가 이런 말투를 썼었던가?
마치 똑 부러지는 사무관을 보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이다.
그러다 충격을 회복하지 못한 건지 아까부터 계속 멍한 표정을 짓고 있는 아스트레이가 눈에 들어온다.
그가 말하기를 분명 자기는 마테리아 제국의 수석 서기관이라고 했었다.
그렇다면 혹시 저 유령이 한수아에게 따로 교육 같은 것을 시킨 걸까.
유능한 사무관이 되는 서른 가지의 방법 뭐 그런 거.
“이도님?”
재차 나를 부르는 한수아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내가 해야 할 말은 길지 않았다.
아니, 길면 안 된다.
내가 바라고 내가 원했던 구도.
그게 지금의 이런 모습이다.
나는 분명, 언젠가 지금과 비슷한 상황을 마주한적이었다.
지금의 한수아가 그때의 나였고, 지금의 내가 그때의 형님이었을 뿐.
나는 형님이 내게 했던 말을 그대로 내뱉었다.
“고생해라. 죽지 말고.”
한수아가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숙인다.
이어서 그녀의 뒤에 있던 에덴의 시련자들이 머뭇거리며 한수아를 따라 고개를 숙였다.
묘한 향수가 머리를 스치려던 그때.
-하하... 생각할수록 꼴이 우습구만.
이 분위기와 정말로 어울리지 않는 게 끼어들었다고 해야 할까.
이어서 탈레리안이 박혀있던 구덩이에서 거대한 기운이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마치 기를 모으는 것 같은 느낌이다.
나름의 주관으로 상황을 해석한 나는, 매우 깔끔하게 반응했다.
손을 뻗은 뒤 그 기운에 맞서 내 기운을 뿜어내자.
콰아아앙-!!!
탈레리안의 기운과 내 기운이 충돌하며 거대한 자기장을 만들어낸다.
치지직하며 타오르고 자기장이 점차 퍼져나가더니 이내 터져나가는 그 모습은 상황을 잊을 정도로 장관이었다.
손을 내리고, 한걸음 내디뎠다.
터억-
이제는 너무나도 쉽게 발동되는 축지.
메시지 창에 신화 스킬이 어쩌고 하는 알림음이 들려왔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내 앞에 보이는 탈레리안.
양 손을 마주하며 무언가 술식을 맞추려는 것 같은 그가 순간 멍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본다.
묘한 건 그 표정에 적의는 보이지 않는다는 거.
아니, 방금 전 기운을 퍼트린 건 나랑 싸우자는 의미 아니었나?
그런데 저 표정은 뭐지.
그 이상 생각하지 않았다.
내 손이 뻗어나가며 탈레리안의 왼쪽 옆얼굴을 그대로 후려친다.
쩌엉-!!
아까와는 달랐다.
탈레리안도 대비를 한 것인지 그의 몸 전체를 감싸고 있는 실드는 내 주먹을 막아냈다.
안타까운 건 당장이라도 부서질 것처럼 균열이 간 상태였다는 거.
이어서 자리를 가볍게 박차고는 주먹을 위에서 아래로 내려찍자.
[잠깐!! 나는 싸우러 온...]
콰아아앙-!!
퍼걱-!!
탈레리안이 그대로 멀리 날아간다.
잠깐. 멀리 날아간다는 표현은 조금 부정확한 듯하다.
탈레리안은 자기가 튀어나온 그 구덩이에 그대로 쳐 박혔으니까.
머지않아.
쿠궁-!
콰앙-!!
얼마나 깊게 파고든 건지 모르겠다.
천천히 고개를 돌리고, 걸음을 옮겼다.
한쪽에 파인 거대한 구덩이.
그 끝이 어느 정도일지 짐작도 되지 않는 그곳에서, 탈레리안의 숨소리가 들려온다.
약간 간헐적으로 들려오는 기침 소리로 미루어보아, 타격이 적지는 않은듯했다.
솔직히, 여기까지는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문제는 그 이후였다.
작게 쿨럭 거리던 탈레리안이 쿡쿡 거리며 다시 웃기 시작했으니까.
두 대 맞더니 미친 걸까.
쇳소리 같은 웃음소리가 거슬리다 못해 오히려 걱정이 될 정도다.
아니... 이제 시작인데 1라운드 KO가 말이야 방구야.
빠른 전개가 너무 도가 지나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려던 때.
-그래서였군. 그래서였어. 그래서 안전장치라고 하셨던 거였어.
이쯤 되니 상승된 신체 능력이 조금 귀찮을 정도였다.
혼자 중얼거리는 저 목소리가 귓가에 들릴 정도라니.
묘한 건 탈레리안의 목소리가 마치 무언가를 해탈한 스님의 목소리와 비슷한 느낌이었다는 거.
탈레리안이 계속해서 무언가를 중얼거릴 때, 나는 구덩이 앞에 도착했다.
“개소리 말고 그만 올라와라.”
피식 하는 웃음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구덩이 아래에서 실낱같은 기운이 피어오른다.
이어서.
터억-
구덩이에서 탈레리안이 모습을 드러냈다.
옆구리가 움푹 파여 있고 피를 토해낸 건지 입가에서는 피를 흘리고 있는 그의 모습은 아무리 봐도 정상적인 모습이 아니었다.
승부가 정해졌다고 해야 하나.
굳이 두 번 언급하지 않아도 상황이 그렇게 말해주고 있었다.
[나는 그대를 이길 수 없다. 그러니 이런 무의미한 싸움은 그만하지.]
요즘 들어 이런 생각을 자주한다.
내가 지나치게 모자른 놈이라 다른 이들의 사고를 따라가지 못하는 건지, 아니면 내가 워낙에 제대로 미친놈들만 만나서 그들의 사고를 이해하지 못 하는 걸까 하는.
저 말은 어떻게 받아들여야할까.
항복 선언이라고 받아들여야하나?
이 갑작스러운 개소리에 의아스럽다기보다는 조금 당황스러운 감정이 피어오르려던 그때.
[나를 향한 그 근원 모를 적의는 거두고, 대화를 좀 했으면 하는데, 그게 어려운가?]
근원 모를 적의.
단어가 참 묘하다.
분명 나만 기억하는 전생에서 놈은 형님을 비롯한 수많은 시련자들을 혼란스럽게 했으며, 그들이 세상을 어지럽히도록 그들의 심성을 악惡으로 바꿔놓았다.
물론, 탈레리안 말고 다른 이들도 있었지만 그들이 한 짓은 탈레리안에 비하면 새 발의 피.
나는 놈을 증오한다.
놈만 아니었다면 수천만 명이 죽을 일을 수십만 혹은 수만으로 줄였을 수도 있었으니까.
[그대가 나에 대해서 무엇을 아는지 나는 모른다. 왜 그렇게 내게 적대감을 갖고 있는 건지에 대해 작은 탐구심이 생기긴 하지만 이해 할 수 없는 일을 이해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 지금은 그저 그 일을 접어두고 현재의 상황에만 집중했으면 하는데, 그게 어려운가?]
여러 번 언급 할 필요는 없었다.
나만 기억하는 전생이다.
과거의 일은 지금의 상황과 전혀 관련이 없다.
그렇게, 생각하고 그렇게 판단 내렸다.
그러다 실소가 터져 나오고 말았다.
이 새끼가. 누굴 병신으로 아나.
분명 탈레리안은 나에 대해서 모른다.
하지만 그가 박유정과 랜버튼, 그리고 주청윤에게 코인을 후원했고 나를 배신하라는 일종의 퀘스트를 내려 준 것만 해도 이놈은 나한테 맞아 뒤질 놈이 확실하다.
그런데 근원 모를 적의라고?
이 시발놈이.
다시 놈을 쥐어 패려던 그때,
[수많은 아스가르드의 초월자들이 지금 이 상황을 지켜보겠지. 그들은 구경꾼, 그대와 나는 광대.]
꽉 쥐고 있던 주먹이 살짝 풀리고 말았다.
구경꾼과, 광대.
듣기만 해도 짜증이 나는 단어.
[그러면서도 나는 내가 맡은 배역을 도맡아서 끝내야 한다는 게 참... 안타깝군.]
거참.
대체...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냐?”
입가의 피를 슥 닦아낸 탈레리안이 실소를 터트리더니 대답했다.
[여화님은 그대를 원한다.]
여태껏 벌어진 일련의 상황들과 여화의 단도직입적인 말까지.
이건 세 번 강조한 것을 거의 연달아 강조한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러니까, 그냥 쓸데없는 이야기에 불과하다.
그렇게 생각했다.
탈레리안의 말이 이어지기까지.
[아마 이게 마지막 기회가 되겠지. 여화님이 지금처럼 흥미를 가진 존재를, 나는 수백 년간 본적이 없었고 아마 그 이전에도 없었을 것이다. 이 상황을 바라보고 있을 정신병 걸린 천사랑 미친 드래곤, 그리고 그 밑의 머저리들도 마찬가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