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화. < 영웅은 악마의 시체 위에 서 있는 게 어울리잖아요.(4) >
아스가르드 연회장에 있던 여화는 길고 가는 손가락으로 팔걸이를 두드리고 있었다.
툭툭거리는 소리가 규칙적으로 울리던 그때, 여화의 머릿속에는 한수아의 말이 아른거리고 있었다.
-이도님은 제꺼에요.
그 정도까지는 이해할 수 있었다.
이도라는 남자는 어느 자리에 있는 이들이건 간에 소유욕을 자극하는 남자였으니까.
하지만.
-당신은 안 돼요.
실소가 터져 나오고 말았다.
-당신은 이도님을 가질 수 없어요.
생각할수록 흥미로웠다.
-이도님은 내꺼니까. 무슨 수를 써서든 내가 가질 거니까.
웃음이 짙어진다.
결정은 진작 끝났고 방법도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 돌린 지 오래다.
한수아는 자극해서는 안 될 것을 자극했다.
‘내가 가질 수 없는 게 있다고? 그런데 그걸, 네가 가질 수 있다고?’
여화는 궁금해졌다.
이도와 한수아.
이 둘의 관계가 어디까지 지속될까.
이도는 한수아를 포기할 수 있을까?
문득 여화의 시선이 옆에 있던 탈레리안을 향해 옮겨졌다.
***
“탈레리안아”
“예 여화님.”
탈레리안은 무심했다.
이미 여화의 밑에서 지낸 기간만 수백 년.
나름 여화에 대해서 잘 안다고 자부하는 탈레리안은 여화가 뭐라고 하건, 심지어 그게 어떤 요구건 당황할일이 없다고 생각했었다. 지금 이 순간까지는.
“너 ‘강림’ 한번 해야겠다.”
“...예?”
탈레리안은 되묻고 말았다.
당황이라는 감정이 고스란히 들어가 있는 물음에도 여화는 대수롭지 않게 어깨를 으쓱했다.
“뭘 되묻고 그래? 강림하라니까?”
농담인줄 알았다.
아니 농담이기를 바랬다.
강림을 하라고?
이 미친년이 진짜.
“이상하네? 탈레리안아 왜 그렇게 당황해?”
당황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스가르드의 초월자들이 제약을 받고 있다는 것은 굳이 두 번 말하지 않아도 되는 명백한 사실.
객관적인 그런 상황에서 에피소드가 진행되고 있는 지역으로 강림을 하라고?
'...'
탈레리안은 입을 꾹 다물었다.
정확히는, 그냥 할 말이 없었다.
수천 년이 넘는 세월동안 ‘강림’하는 것을 시도한 초월자가 없었을까?
그럴 리가.
왜 아스가르드에 연회장이 만들어졌고 그 연회장에 설치된 모니터로 시련자들을 볼 수 있겠는가.
직접 갈 수 없으니까.
설령 어떻게든 강림한다하더라도 아마 시스템에 의해 곧바로 소멸될 가능성이 높다.
아니 소멸될 것이다.
이건 명백한 자살 행위다.
“너무 걱정하는 거 아니니? 설마 내가 안정장치 없이 너를 보내주려고?”
분명 긴 말은 아니었다.
여화의 저 짧은 말로 탈레리안은 눈치 챌 수 있었다.
이 미친년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이건 나름 오랜 기간 여화를 곁에서 ‘보좌’했던 자신이기에 가능한 일.
탈레리안은 작은 목소리로, 여화에게만 들릴 정도의 목소리로 물었다.
“설마... ‘한 개의 목숨’을 쓰시려는 겁니까?”
여화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말없이 탈레리안을 바라볼 뿐.
“...그 정도로, 이도라는 인간을 가지고 싶으신 겁니까.”
“평소답지 않게 말이 되게 많다? 조금 섭섭해지려고 하는데?”
"..."
새삼스럽지만 여화는 재앙의 시조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왜 하필이면 재앙의 시조일까.
말 그대로 재앙의 첫 시작을 알린 괴물이기에 붙여진 별명이다.
그녀가 일으키고 소유하고, 만들어낸 재앙은 정확히 아홉 가지.
일종의 소환 술로 재앙을 소환할 수 있는 그녀는 명실상부한 지배자. 그 이상이다.
여기서 중요한건 여화는 그 재앙을 자신의 목숨으로 대신 사용 할 수 있다는 점이다.
즉, 여화의 목숨은 총 10개 .
탈레리안이 알기로 초창기 아스가르드에서 여화는 한 개의 목숨을 대가로 나머지 초월자들과 힘 싸움을 했었다.
그 이후 악신들의 왕이 되었으며, 얼마 전 한 개의 목숨을 대가로 에릭이라는 시련자에게 ‘약간의 힘’을 나눠주었다.
고블린들의 시조, [유바의 신성]이 여화에게 헛짓거리를 했다며 쏘아붙였던 그 부분은, 사실 탈레리안도 공감하고 있던 부분이었다.
즉, 지금 여화에게 남은 목숨은 총 8개.
머지않아 거대한 전쟁이 벌어질 텐데 그 8개의 목숨 중에서 여화는 또 한 개의 목숨을 사용하려한다.
탈레리안은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곧 전쟁이 벌어질 것입니다. 왜 지금입니까. 차라리 무시하고 죽이시는 게....”
“탈레리안아.”
“...예.”
말을 끊은 여화가 의자에 몸을 깊숙이 파묻으며 왼쪽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여유로운 표정의 발락투스와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천군.
그 둘의 면상을 바라보던 여화가 작게 말한다.
“나는 가지고 싶은 게 있으면 가져.”
"..."
“못가진다는 단어. 나는 몰라. 난 항상 가져야했거든. 그러기 위해서 이 자리에 온 거고 힘을 얻은 거란다. 그런데 그런 내가 가지지 못할게 있다고? 심지어 그걸 자기가 갖겠다고? 빼앗겠다고?”
탈레리안은 확신했다.
여화는 분노하고 있다는 것을.
“내가 이렇게 매달리는데도 계속 줄타기하는 우리 이도가, 과연 어떤 선택을 내릴지 궁금하지 않니?”
“거대한 전쟁? 넌 알잖아? 내가 저 용대가리랑 유사 천사한테 죽을 일이 없다는 걸, 솔직히 쟤 둘이 힘을 합쳐도 나한테는 안 돼. 너도 그걸 아니까 옛날에 내 제안을 수락하고 내 밑으로 온 게 아니니?”
탈레리안은 부정하지 못했다.
사실이었으니까.
아스가르드의 지배자?
세 개의 진영? 다 무의미하다.
발락투스와 천군은 강하지만 여화처럼 여분의 목숨을 가지고 있지 않다.
비록 가진 힘은 발락투스가 여화보다 살짝 우세한 게 정설이긴 하지만 여러 개의 목숨을 가진 여화에게는 절대로 비빌 수가 없다. 그건 여화와 동수를 이루는 천군도 마찬가지.
그래서 탈레리안은 여화를 선택했고 여화의 시다바리노릇을 하고 있었다.
“생각나네. 대마법사 탈레리안. 대현자라 불리기도 했으며 여천과 마테리아 제국을 양분하고 있던 시련자.”
“그리고 여천이 죽고, 모두가 기억을 잃었을 때 제정신은 유지하고 있던 극소수의 인간들 중 한명. 그때... 8천만 명이었나 9천만 명 이었나? 그들을 제물로 바치면서 신격을 초월해 아스가르드로 온 남자. 그게 너잖아? 왜? 자신 없니?”
전부 사실이었고 부정할생각도 없었다.
하지만 자신 없냐는 말은 어떻게 반응해야할지 어려웠다.
이도의 신격은 신체만 최소 5성, 귀기라는 기운을 끌어올린다면 확실하지는 않지만 최소 7~8성은 될 것이다.
탈레리안의 불안감을 읽은 여화가 말했다.
“설마 내가 아무런 보험 없이 널 보내겠니? ‘카르피온’ 보내줄게.”
탈레리안이 입을 떡 하고 벌렸다.
“여화님... 그건....”
탈레리안이 말을 잇지 못하는 모습이 인상적인 걸까.
여화가 작은 웃음을 머금은 채로 그의 모습을 감상했다.
평소라면 마주 웃으면서 비위를 맞췄을 탈레리안이지만 지금 이 순간 그럴 수가 없었다.
카르피온.
여화가 가진 여러 개의 재앙 중에 하나인 ‘탐욕의 재앙’, 9성의 카르피온.
재앙을 자신의 목숨 대용으로 쓸 수 있는 여화이기에, 그녀의 말을 종합하자면 지금, 여화는 총 두 개의 목숨을 사용하려는 것이다. 너무나도 큰 대가지만 그것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은 거의 없다.
정말로, 없다.
그저 자기만족 내지 작은 궁금증의 해답을 얻는 것.
그게 전부다.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고 어떻게 포장해도 이건 그냥... 미친 짓이다.
“그런데 우리 탈레리안이 왜 이렇게 오늘따라 말이 길까?”
“...저 내려가면 소멸 될 겁니다.”
"에이, 소멸이라니. 너도 알잖아. 초월자들은 죽으면 지옥도로 가는 거, 설마 정말 모르고 있던 건 아니지?”
탈레리안의 표정이 처참하게 구겨졌다.
여화는 정확히 두 개의 목숨을 쓰려고 한다.
하나는 아스가르드의 ‘제약’에서 ‘잠시간’ 자유롭게 자신을 강림 시켜주는 것. 그리고 다른 하나는 재앙 하나를 자신에게 건네주어 혹시 모를 이도의 ‘방해’를 막는 것.
생각해보면 여화는 나름 탈레리안의 ‘안전’을 신경써주고 있었다.
“그건 아닌데...”
여화가 장난기 어린 웃음을 짓는다.
“이것 봐라? 너 나 못 믿나 보네? 내가 신이 되면 너를 알아서 살려주지 않겠니? 그런데 이렇게 자꾸 망설이면 내가 널 어떻게 하겠어? 응?”
탈레리안은 눈치가 빠른 남자였다.
그것도 아주 기가 막히게.
“...오해가 있으셨던 것 같습니다. 사실 저는 언제 내려갈지를 여쭤보려던 것이었습니다.”
여화가 씩 웃는다.
“언제겠니? 지금 당장 내려가렴.”
“....예.”
***
완성되어가던 첨탑을 무너트리며, 자신의 존재감을 한껏 뽐내는 탈레리안을 바라보던 내 소감은 깔끔했다.
‘미치겠네.’
결과만 보려고 하는데, 상황이 참 묘하게 돌아간다.
강림을 한다는 건 분명 어마어마한 대가를 치러야한다.
머리가 복잡하다.
지금 여화는 분명 무언가 어마어마한 것을 대가로 바쳤다.
그건 확실하다.
탈레리안이 천천히 내 쪽을 향해 걸음을 옮기던 그때.
탈레리안?
[아스트레이. 오랜만이군.]
-...네가... 네가 왜...
아스트레이와 탈레리 안은 아무래도 구면인가보다.
[마테리아 제국을 기억하는 자가, 그대밖에 없다고 생각했...]
“야."
왠지 쓸데없이 긴 이야기가 될 것 같아 중간에 끊은 나를, 탈레리안이 죽일 듯 노려보고 있었다.
무시하고 뒤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조금 불안한 표정의 한수아와 그녀가 들고 있는 상자의 아스트레이가 무언가를 말하려고 한다.
거참.
“입, 다물어.”
-...
“한수아 너는 애들 데리고 뒤로 빠져있고.”
많은 것을 함축한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한수아에게는 충분한 것일까.
그녀가 불안한 표정을 싹 지우고는 환하게 웃는다.
힐끗 고개를 돌리자 탈레리안의 기운에 짓눌린 이들이 보이는데, 보기 조금 안쓰럽다.
살짝 기운을 퍼트리자 주변에 엎어져있던 이들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고통은 사라진듯하지만 굳어져있는 표정은 여전한 걸보니 확실한 힘의 차이를 느꼈나보다.
그리고, 그런 이들에게 굳이 해줄 말은 없었다.
알아서 자리를 비켜주면 되는 거니까.
[대답을 하지 않는가?]
몰랐는데, 듣다보니 저 탈레리안의 목소리가 생각보다 거슬린다.
마치 쇳소리 같다고 해야 할까.
[여화님과 한수아. 이건 고민할 필요가 없는 사안인데, 무슨 생각을 그리 하는 것이지?]
하아...
[나는 한수아라는 인간이 여화님에게 뭐라고 했는지 자세히는 모른다. 하지만 그게 그대라는 존재의 ‘소유 여부’에 대한 이야기인 것은 불 보듯 뻔해. 그리고 저 인간은 여화님의 심기를 제대로 자극했지.]
무언가 말하려고 입을 열려던 그때.
[그분께서는 스스로의 목숨마저 희생하셨다. 그러니 그대는 반드시 심사숙고해서 결정해야할 것이다.]
목숨을 희생해?
[악惡을 지배하는 자가 턱을 짚고 조용히 상황을 바라봅니다.]
...이렇게 멀쩡히 살아있는데?
순간 소름 돋는 가정이 머릿속을 스쳤다.
‘...여화의 목숨은 한 개가 아니다?’
생각해보면, 여화의 도움을 받았던 에릭은 여화의 능력과 밀접한 능력을 얻었을 확률이 높다.
내가 아는 한 에릭은 여러 번 죽었지만 여러 번 살아났다.
젠장.
확실하다.
여화는, 마치 해리포터의 볼드뭐시기처럼 목숨이 한 개가 아니다.
아니... 어이가 없네.
[나에게 할당된 시간이 그리 많지가 않아. 그러니 대답하거라. 여화님인가 아니면 한수아인가.]
머릿속의 생각이 강제로 끊겼다.
선택이고 나발이고.
혹시.
“기억하냐?”
[...?]
“기차에서 내가 그랬던 거 같은데, 개소리는 ‘머지않아’ 네가 뒤질 때나 하라고.”
[...]
“몇 번을 말해야 되는 건지 모르겠네. 소유 여부? 선택? 지랄들하고 있다.”
힐끗 고개를 돌려 한수아를 바라보고,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부디 내 마지막 시선이 여화에게까지 닿았으면 한다.
“가지려거든 내가 갖는다고 이마에라도 써 붙이고 다녀야 되나. 안 그래도 할 일이 많은데 왜 이렇게 신경을 건드리는 거냐?”
긴 말은 필요 없었다.
“일단, 너는 좀 맞자. 짜증나서 안 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