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화. < 영웅은 악마의 시체 위에 서 있는 게 어울리잖아요.(3) >
내 눈은 어느 한곳에 못 박힌 듯 움직이지 않았다.
[Episode #38]
조금 당황스러웠다.
종속 시키겠냐는 메시지가 뜬것도 어이가 없었는데, 에피소드가 벌써 30후반 대를 넘어 40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은 더 어이가 없었다.
여전히 떠있는 메시지 창을 향해 다시 시선을 던졌다.
[크레타노스를 멸종시키십시오.]
처음 침식 에피소드가 시작되었을 때 언급한 적이 있었는데, 과거에도 정확히 Episode #38에 크레타노스가 등장했었다.
그런데 이번에도 크레타노스가 등장한다?
도저히 그냥 넘어가려고 해도 그럴 수가 없을 정도로 이상했다.
앞서서 말 한대로 침식이라는 에피소드는 내가 균형자들의 시련을 받는 것과 마찬가지로 ‘메인 스토리’다.
그러니까 이 모든 것을 소설이라고 친다면 침식은 본편의 메인 스토리다.
내가 균형자의 시련을 받는 것도 나름의 메인 스토리긴 하지만 시스템은 그것을 ‘외전’이라고 정의했다.
젠장.
다시 생각해보자.
그런데 전생에서 Episode 40쯤에 등장했던 침식이 고작해야 Episode 극 초반부에 등장하면서 흐름이 깨졌는데, 크레타노스라는 몬스터가 전생과 같은 에피소드에 등장한다는 게 말이 되나?
그냥 단순한 우연의 일치일까?
내가 너무 예민한 걸까.
워낙 엿 같은 일이 많이 일어나다보니 조금 이상하다 생각되는 부분을 그냥 흘려 넘길 수가 없었다.
한숨을 푹 내쉬던 그때.
띠링!
[악惡을 지배하는 자가 당신에게 대화를 요청합니다.]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그 메시지 창을 바라보고 있던 그때.
띠링!
[선善에서 군림하는 자가 당신에게 대화를 요청합니다.]
[시작을 알린 아룡이 당신에게 대화를 요청합니다.]
밀린 일을 한꺼번에 처리해야하는 어느 기업의 임원이 이런 기분이지 않을까.
무의식적으로 손가락을 올렸을 때 순간 흠칫했다.
생각해보면 나는 항상 선택의 순간을 눈앞에 마주했고 그 선택에서 나름의 가장 합리적인 선택을 해왔다.
이번에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세 명이 대화를 요청한 지금, 그 중간에 끼어있는 나는 대체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하나만 선택하면 다른 둘이 빈정 상해할 것 같은데.
그렇게 생각한 순간.
[일반적인 대화가 아닌 신격을 대가로 이루어지는 대화이기에 통합 대화가 불가능합니다.]
시스템의 메시지에 한숨을 터트리고 말았다.
내 손가락이 잠깐 허공을 떠돈다.
그러다 세 개의 메시지 창 중 하나를, 선택했다.
띠링!
[오랜만이네? 거의 한달 넘게 안보여서 죽은 줄 알았잖아.]
청명하지만 그 안에 장난기가 엿보이는 가날픈 목소리가 귓가에 울린다.
[시작을 알린 아룡이 섭섭해 합니다.]
[선善에서 군림하는 자가 당신을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봅니다.]
조용히 팔짱을 끼고 테라스에 있는 의자에 걸터앉았다.
-내가 한 달 동안 보이지 않았다고?
머릿속에 연결되어있는 작은 끈.
그곳으로 목소리를 보내자.
[...중독되려는 건가. 네가 반말하는 게 왜 이렇게 기분 좋은 걸까. 여하튼, 맞아. 너 한 달 동안 안보였어.]
[우린 네가 죽은 줄 알았다니까? 그 폭포에서 정령도로 간 것 같은데... 그 이후에 대체 어떻게 된 거니? 정령도면 사루는 만나봤니? 아 만났겠구나. 내가 걔를 딱 한번 만나봤는데 그때 걔가 뭐라고 했는지 아니? 나보고 꺼지래. 웃기는 년이지. 아니 이게 아닌데, 잠깐만 너, 정령도에서... 설마 통과 했니? 어머?]
말없이 머릿속에 울리는 여화의 말을 들었다.
지옥도로 갔을 때, 이쪽 세상의 초월자들이나 사람들에게는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내게는 매우 긴 시간이었다.
정령도 때도 그렇게 진행 될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솔직히 확신은 하지 못했었다.
그래서 한수아한테 일을 처리해놓으라고 말해둔거였는데, 생각해보면 그때 무언가 이상하긴 했다.
언젠가 언급했지만 이쪽의 세상과 균형자들의 세상, 즉 ‘이면 세계’는 시간의 일치를 이루지 않는다.
젠장 너무 복잡하다
내가 두 개의 도를 클리어하면서 무언가가 변한 걸까?
솔직히 이러고 싶지 않은데, 느낌이 되게 이상하다.
[통과했구나? 몸 보니까... 5성인가? 아니지. 한 6성? 이야.. 놀랍네. 너 진짜 괴물이네?]
-두 자리 수가 넘는 네가 할 말은 아니지.
[어머. 나랑 너랑 같니? 내가 살아온 세월만 네 인생의 열배는 가볍게 넘는단다.]
-그래서 할머니 취급해달라고?
[그건 아니고, 나 말이야. 더 못 참을 거 같은데, 그냥 지금 아스가르드로 오면 안 되니?]
이건 뭐... 대화의 맥을 잡을 수가 없다.
대답하지 않고 조용히 창밖을 바라보자. 이번에는 개소리가 이어진다.
[설마 한수아라는 그 미친 애 때문은 아니지?]
누가 누굴 보고 미쳤다는 건지.
[걔 말이야. 재미는 있더라. 아스트레이라는 귀신도 웃기고, 나 진짜오래 살길 잘했나봐. 내가 여태껏 지켜본 시련이 되게 많은데 이번 시련만큼 흥미로운 게 없는 것 같아.]
대충 돌아가는 상황으로 미루어보면 한수아가 무언가를 한 게 확실하다.
그리고 그 무언가는 그녀의 능력을 기반으로 한 나라는 존재의 신격화일 확률이 높다.
[걔는 이상하게 너를 정말로 따르는 것 같더라고, 우리 탈레리안이랑 다른 쪽 진영 애들이 후원해주겠다고 무슨 말을 걸어도 죄다 무시하던데. 참... 특이한 아이야. 너 혹시.]
-혹시 뭐?
[걔 좋아하니?]
이게 무슨 로맨스 소설 인 줄 아나.
헛웃음을 터트리자.
[그게 아니면, 나 걔 죽여도 돼?]
웃는 얼굴 그대로 멈췄다.
[왠지 걔가 참 귀찮아 질 것 같아서 그래, 혹시 네 예지 속에서는 어땠어? 내가 걔를 죽였니?]
-...
[갑자기 궁금해지네. 너 말이야. 나랑 그 한수아라는 애, 둘 중에 하나 선택하라고 하면 누구 선택할거니?]
이걸 질문이라고 하나.
뭐라고 말하려던 그때.
[답해주지 않아도 상관은 없어. 말로 하는 대답이 뭐가 중요하겠니. 모든 건 행동이 중요한 법이잖아?]
슬금슬금, 불안감이 점차 고개를 치켜든다.
여화가 아무리 미쳤다고 해도 ‘개연성’이 없다면 저런 말이 나올 수가 없다.
그러니까.
내가 없는 사이에 한수아는 여화와 무언가 마찰을 빚었거나 여화를 자극한 게 확실하다.
[궁금하네. 너는 어떻게 행동할지. 나... 너무 힘들어.]
로맨스에서 갑자기 신파극으로 돌변했다.
진짜 미치겠다.
[확인해봐야겠어. 한번, ‘선택’ 해보렴.]
그게 끝이었다.
머릿속에 이어져있던 여화와의 끈이 그대로 끊긴다.
아니, 이렇게 지 할 말만 하고 끊어 버릴 거면 대화는 왜 건거야?
사루나 발락투스가 느꼈을 기분이 아마 이런 기분이지 않을까.
거참, 직접 당하고 나니 기분이 조금 그러네.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서 테라스를 벗어났다.
복도를 향해 걸으면서 끊임없이 생각했다.
자기랑 한수아,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잠깐만.
발걸음이 그 자리에서 정지했다.
“....설마.”
혹시나 하는 마음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나는 여화의 성격을 매우 직설적이라고 판단하고 있다.
가식은 가능하면 떨지 않으며 자기 자신에게 당당한 그런 초월자.
쉽게 말하면 그녀에게 있어서 ‘우선순위’라는 것의 기준은 무언가 추상적이거나 그런 게 아니라, 자기 마음에 드는지 들지 않는지에 대한 감정.
즉, 철저하게 주관적인 감정을 기반으로 행동하는 게 여화라는 존재다.
시발.
확실하다.
지금 무언가 틀어졌다.
“...허억!”
무언가 숨 들이마시는 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뒤로 자빠져있는 소천과 눈을 크게 뜨고 있는 양규가 보인다.
마치 귀신이라도 본 듯 한 표정이다.
됐고.
“가서 한수아 불러와.”
“..예?”
“가서 한수아 불러오라고. 다른 애들도 전부.”
나는 그대로 몸을 돌려 아까 그 테라스로 향했다.
거울이 없어서 내 표정이 어떤지는 모르겠으나, 한 가지 확실한건 지금 내 표정은 매우 굳어져 있을 거라는 거.
한 가지 목숨을 포기해야 하는 ‘의지의 수련’의 본질을 깨우쳤을 때도 이 정도로 불안하지 않았다.
젠장.
***
-표정이 좋지 않아 보이는군.
아스트레이의 상자를 품안에 들고 있던 한수아가 고개를 갸웃한다.
“정말요?”
-거울이 있다면 직접 보는 게 나을 텐데. 아쉽게도 내가 거울을 집을 수가 없군.
한수아가 작게 웃는다.
“사실 조금 복잡해요.”
-복잡하다? 그대는 생각보다 대단한 일을 해낸 것이야. 스스로에게 조금 당당해져도 되네.
위로하려는 말인 것 같지만 한수아는 그 말이 전혀 위로가 되지 않았다.
“이도님이 어떻게 생각하실 지가 저는 중요해요.”
아스트레이가 그대로 입을 다문다.
그렇게 침묵 속에서 둘은 양규를 따라 이도가 있는 황궁의 테라스로 향했다.
그곳에 도착하자 이미 자리해있는 박유정과 나성진, 그리고 성미령이 있었다.
하지만 한수아의 시선은 그들을 넘어 혼자서 자리에 앉아있는 이도만이 보였다.
그가 한수아를 바라보며 묻는다.
“대충 들었어. 나 없을 때 네가 무슨 일을 한 건지.”
“일단 잘했어. 잘했는데...”
잘했어라는 말에 환하게 웃던 한수아가 잘했는데라는 말에 표정을 굳힌다.
“혹시 내가 들은 이야기들 중에, 내가 모르는 무언가, ‘다른 일’을 한 적이 있냐?”
“다른 일이라 하시면...”
“악惡을 지배하는 자.”
이도의 짧은 말에 한수아가 고개를 갸웃하더니 무언가 깨달았다는 듯 입을 살짝 벌린다.
이도가 무엇을 묻는지 확실하게 알아챈 것.
그리고 짐작 가는 것도 하나 있었다.
한수아의 그 반응에 이도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
한수아의 이야기는 길지 않았다.
여태껏 많은 후원을 받기도 했지만 그 후원에 조건을 걸었던 이들도 많았다.
당연히 한수아는 그 모든 제안을 거절했고, 그냥 초월자들의 메시지를 모조리 무시했다.
근데, 딱 한명.
악을 지배하는 자.
여화의 제안이 너무나도 끈질겼기에 한마디 했단다.
“여화한테 할 짓 없냐고... 물어본 거냐?”
그거 뿐이었다면 다행이련만.
“한심해 보인다.... 가서 밥이나 먹어라... 혹시 술 마셨냐.. 그리고 그 외에 몇 가지 욕설도 했다고?”
“…네."
한손으로 머리를 짚고 말았다.
이게 끝일 리가 없다.
나한테 말하지 못할, 하지만 여화에게는 말한 무언가... 여화가 확실한 자극을 받았을 그런 말을 한 게 분명하다.
젠장.
과정은 무시하자.
결과만 보자.
그때였다.
내 감각에, 무언가... 이상한 기척이 느껴진다.
슬며시 자리에서 일어섰다.
터억-
무언가가 하늘에서 떨어지는 소리.
정확히는 착지하는 소리다.
그리고..
치지직-
스파크같은 것이 타오르는 소리까지.
이어서 그 ‘무언가’가 점차 존재감을 키우기 시작했다.
내 표정이 굳어지고 내 주변에 있던 시련자들이 그 자리에서 주저앉는다.
수도에서 건물을 만들던 이들은 그대로 기절했고, 세워져있던 건물의 절반 이상이 그대로 무너져 내린다.
조용히 고개를 돌렸다.
수도 한복판에 한 남자가, 검은색 로브를 입은 채로 내 쪽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거리는 족히 수키로 미터가 넘었지만 무의미했다.
그 남자가, 작은 목소리로 말한다.
[여화님이 말씀하셨다.]
신격은 높게 잡아도 5성.
그런데... 그 모습이 참 묘하다.
-검은 로브를 입었고 그 밖으로 튀어나와있는 면상이 마치 ‘쥐새끼’같이 생겼다고 해야 할까. 삐죽 튀어나온 턱주가리랑 주둥이까지. 그 모든 게 그냥 쥐를 연상시키는 남자가 있었거든.
그 남자가 말했다.
[한수아를 선택하겠느냐. 아니면 여화님을 선택하겠느냐.]
쥐새끼 같은 그 남자의 면상을 바라보던 내 머릿속에는 과거, 형님에게 들었던 말이 떠오르고 있었다.
-그놈이 탈레리안이야. 만개의 언어를 깨우친 자.
내 직감이 맞았다.
여화가 지금, 미친 짓을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