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를 한다는 건-101화 (100/131)

101화.  < 영웅은 악마의 시체 위에 서 있는 게 어울리잖아요.(2) >

잠깐 말을 멈춘 아스트레이는 무언가를 생각하고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그대는 악녀가 되고, 악녀인 그대는 이도라는 남자에게 죽을 생각이야. 그래... 그거면 해결되겠지. 이도라는 남자는 국가의 상징이자 한 대륙의 신이 될 것이며, 상징 그 자체가 된 그의 유지는 그게 얼마가 되었건 매우 오랜 시간 지속될 것이고. 그 뜻을 거부하고 권력을 가지려는 욕심 많은 이들은 이도라는 남자를 신으로 믿는 이들에게 걸러지게 될 터이니. 분명 그대의 생각은 가장 합리적이야. 영원하지는 않더라도 매우 오랜 시간 혼란스러운 대륙을 안정기로 강제로 접어들게 할 획기적인 방법. 정말이지, 생각할수록 놀라워. 시련자의 특수이긴 하지만, 한 국가의 토대를 만든 이들이 오랜 시간 걸쳐서 차근차근 기초를 다져야할 그 과정을, 그대는 단기간으로 좁혔어. 아니, 좁히려고 해. 개인적으로 그대의 의지는 정말로 마음에 드는군.

시련자들의 특성과 현재의 상황에서 가장 합리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방법이지만, 결국 이 모든 일에는 ‘한수아’라는 인간의 ‘희생’이 전제되어야한다.

아스트레이는 시련자들의 특성을 한 번 더 떠올렸다.

-하지만 대중을 속인다는 건 생각 외로 쉽지가 않아. 아이템이라는 걸로 그대의 모습을 감춘다 해도, 혹은 대기실이라는 기이한 공간으로 이동해 모습을 감춘다고해도, 누군가는 ‘작은 의심의 씨앗’을 품을게 확실해. 그 전의 과정도 그대의 생각보다 매우 말끔하고 깔끔하게 진행되어야하네. 이야기를 만드는데 작은 의심조차 남기지 않는다는 건... 매우 힘든 일이야. 즉, 그대는 정말로 죽어야하네. 시체를 남기고 죽는 과정까지 그 모든 흔적이 남아야하는데... 그걸, 그대는 정말로 감당하려는가?

한수아는 조용히 고개를 돌렸다.

폭포 소리가 기운차게 귓가를 때리며 얼음 파편 같은 물줄기가 사방으로 터져나가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온다.

한수아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처음에는 몰랐는데, 이도님은요. 정말 불쌍한 남자더라고요.”

-...

“이도님의 입장에서는 지구라는 세상을 구할 이유가 정말 없거든요. 그런데 그걸 굳이 하려고 해요. 배척받고, 세상의 놀림감이 되어 복싱 선수로서의 미래를 강제로 막아버린 그 세상을, 저라면 그냥 관심을 아예 끊었을 텐데, 이도님은 굳이 그 세상의 멸망을 막으려고 해요. 그것도 스스로를 희생하면서. 저는요. 그런 이도님의 곁에 있고 싶어요.”

-...

“이것도 나름대로 희생이잖아요? 제가 희생하면 이도님은 저를 잊지 않으실 거고 지구로 돌아오시면 저를 또 챙겨주실 테니까. 그 이후의 일은 그때 가서 생각해보려고요.”

한수아는 진심이었고 아스트레이는 그것을 읽었다.

그의 고민은 짧았다.

아니, 고민 할 필요도 없었다.

두 개의 목숨중 하나를 버리려는 한수아라는 존재와 이미 죽어 영면에 드는 것만이 남은 자신이라는 존재.

상황은 묘하게 비슷했다.

-재미있겠어. 좋아. 그대를 돕겠네. 내가 아는 모든 것을 총동원해서라도 그대를 도울 것이야.

아스트레이는 흐릿해진 손을 내밀었고 한수아는 그것을 맞잡았다.

서로는 감촉을 느낄 수 없었지만 묘한 동질감을 느꼈다.

그렇게, 29일이 지났다.

**

[Episode #38]

[판게아 행성을 지배하던 크레타노스는 무한한 번식력과 무엇이든 가리지 않으며 먹는 식성이 전부인 짐승입니다. 그들로 인해 행성 판게아는 더 이상 먹을 식량도, 살아갈 땅도 없게 되었습니다.]

[크레타노스를 멸종시키십시오.]

[그들은 이곳 발바라 대륙의 생명체를 ‘식량’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제한 시간 : 4일]

[Episode #38은 금일 18시부터 시작됩니다.]

성미령은 눈앞에 보이는 메시지 창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우리 뭔가 청소부가 된 것 같지 않아요?”

“저랑 비슷하게 생각하셨네요.”

옆에 있던 나성진이 성미령의 말을 받았다.

이내 둘은 시선을 교환했다.

전과는 다르게 이 둘의 시선에는 ‘여유’가 가득했다.

그럴 만도 한 것이. 목숨이 두 개라는 심리적인 안정장치는 생각보다 매우 효과가 뛰어났다.

이도가 사라진 뒤 벌어진 수십 개의 에피소드를 클리어 하는데 그 안정장치는 매우 큰 도움을 주었으며 고작해야 다섯 명도 안 되는 시련자들이 에피소드를 클리어 하니 그 보상도 적지가 않았다.

그렇게 시련자들은 성장에 성장을 거듭했고 이도의 생각보다 더 빠른 성장을 이뤄냈다.

비록 신격을 갖추지는 못했으나 가장 능력치가 낮은 성미령이 모든 스텟 70레벨을 넘은 상태였으니 그것으로 많은 것이 설명되리라.

“수아는 지금 뭐해요?”

나성진이 어깨를 으쓱했다.

“글쎄요. 아스트레이님이랑 같이 아이들한테 ‘이야기’를 해주고 있지 않을까요?”

“마테리아 제국이라... 그러고 보니 제가 쓴 책 읽어보셨어요?”

“대충은요. 소설이던데... 꽤 재미있던데요?”

성미령이 어색하게 웃었다.

“저야 아스트레이님이 남긴 기록을 보고 그분에게 이야기를 많이 듣긴 했으니까요. 꽤 잘 팔리고 있다니까 나중에 지구 돌아가서 소설가나 해야겠네요.”

둘은 작은 웃음을 터트리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걸음을 옮기던 성미령은 생각했다.

이도가 사라진지 대략 한 달.

그 기간 동안 생각보다 많은 것이 변했다.

일단 병사를 일으켰던 성주라는 이들은 모조리 참수 당했고 발바라 대륙에는 레드 원 신전이 사라졌다.

‘유토피아’라는 국가의 이름은 그 자체로 상징이 되어버렸고 그 국가를 만든 이도라는 존재는 살아있는 신 그 자체가 되었다.

국가의 체계도 달라졌다.

전국각지의 귀족들의 작위는 모조리 해제되었으며 성주라는 직위도 사라졌고, 기존의 공작은 1급 행정관, 후작은 2급, 백작은 3급, 그 밑으로 9급까지의 새로운 체계로 정립되었다.

당연히 반발은 있었지만 당연히 오래가지 못했다.

이도는 신기라도 있었던 걸까.

이도는 분명히 상황을 매우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이도의 말대로 병사를 일으킨 성주들에게 암중의 도움을 주고 있었던 귀족들은 존재했으며 심지어 한둘이 아니었다.

그리고 한수아의 행동에 반발을 했던 것도 당연히 그들이었다.

그들이 주축이 되어 일으킨 반발은 하루가 지나기도 전에 한수아에 의해 정리되었고 그들은 모두 죽었다.

철저한 공포정치였지만 그걸 완화시킨게 바로 아스트레이였다.

그는 엘리자베스와 양규를 데리고 전국 각지에 소문을 퍼트렸는데.

그 내용은 매우 길었지만 깔끔하게 정리할 수 있었다.

-그들은 대륙의 멸망을 앞당기려고 ‘악마’와 손을 잡았고 모두를 지키려는 이도라는 존재를 방해하려는 확고한 목적을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죽은 것이다.

이건 일종의 신호탄 역할을 했다.

그 이후 반란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귀족들뿐만이 아니라 자경단이나, 전국각지에 숨어서 ‘권력’을 가지려는 이들은 이도와 한수아를 따르는 ‘광신도’들에게 색출 당했으며 일주일이 되기도 전에 그 모든 세력이 와해되었다.

당연히 주동자들은 모조리 목이 잘려 성벽에 효수되었다.

말은 간단했지만 그 일주일동안 발바라 대륙 전국각지에는 거대한 피바람이 불었고 당연히 반발 작용으로 한수아는 성녀임과 동시에 악녀로 불리게 되었다.

이도를 맹목적으로 따르기는 하나 그 방법이 한쪽으로 치우쳐져있었기에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

당연히 얻은 것도 있었다.

정확히는 아스트레이라는 귀신의 정치 수완으로 인한 이득이라는 표현이 정확하리라.

그 모든 과정은 이도라는 존재를 방해하며 대륙의 멸망을 앞당기려는 악마의 하수인들을 색출하고 결국 대륙의 평화를 이루기 위한 과정으로 포장되었고, 그중에서 이종족들은 그 반란 종자들을 색출해내며 일종의 작은 통합을 이뤄냈었다.

가장 중요한 게 바로 이종족들이었다.

조용히 숨죽이면서 살아가는 고블린들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들과 전쟁을 하며 죽었던 인간 병사들은 결국 마스터라는 욕심 많은 이들과 대신관에게 이용당한 것으로 화살을 돌려버렸기에 그들은 오히려 인간들에게 동정을 받는 그런 종족이 되어있었지만 오크가 문제였다.

돌릴 화살도 없었고, 솔직히 어떻게 포장을 하건 결국 오크는 발바라 대륙에 고블린들과의 전쟁보다 월등한 피해를 냈으며 심지어 그 이후에도 인간들에게 피해를 끼치는 행동을 했다.

심지어 아름다웠던 수도마저 폐허로 만들어버린 원흉.

그런 이들이 자연스럽게 녹아들기에는 시간이 필요했지만 한수아는 그 시간마저 앞당겼다.

그것도 생각보다 깔끔한 방법으로.

“생각할수록 기발하지 않아요?”

“뭐가요?”

“수아가 오크들을 정리한 거요.”

나성진은 자기도 모르게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사실 생각해보면 이건 한수아만이 가능한 방법이었다.

오크들이 호전성이 강하기는하나, 그들의 주축이고 그들의 정신의 밑바탕이 되어주었던 것은 결국 툴칸이라는 존재다.

인간보다 월등한 신체 조건을 가진 툴칸은 신격을 갖췄으며 신격을 초월하기 일보직전인 상태였다.

당연히 오크들에게 있어서 그런 툴칸은 신격화 될 수 밖에 없었는데.

한수아는 이 신격화라는 것을 이용했다.

정확하게는 툴칸이 남긴 유언.

세상으로 도망가라는 그 유언을 한수아는 왜곡했다.

아스가르드라는 초월자들에 의해 이용당한 툴칸은 이도에게 스스로 목숨을 바친 것이며 그 도망가라는 뜻은 아스가르드의 존재들로부터 도망쳐 이 세상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이도를 믿고 이도를 따르라는 말로 변했던 것.

어찌 보면 저 말은 현실성이 거의 없었다.

그럼에도 그게 통한 이유는 역시 한수아의 권능 때문이었다.

선동을 하는 것은 소수이지만, 그 대상은 광범위하다.

이게 통설이고 진실이다.

살아남은 오크들 중에는 지휘관급의 오크도 있었고 툴칸의 아들이었던 세 명의 오크도 존재했다.

한수아는 그들에게 권능을 사용했고 자신의 말을 진실로 믿게 만들었다.

분명 그 방법은 통했다.

한수아만이 가능했고 한수아만이 할 수 있는 방법.

그렇게 발바라 대륙은 완전한 안정기에 접어들었다.

하지만 이건 일시적인 현상에 불과했다.

“대체 어떻게 하려는 건지 감도 안 잡히네...”

“그러게요. 확실히 분란도 안 일어나고 다 좋아지긴 했는데, 수아의 능력이 평생 유지되는 게 아니니까... 걱정이네요.”

한수아의 말이 거짓이건 진실이건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한수아는, 매우 오랜 시간이 걸리는 일을 생명체의 감정을 건드리는 방법으로 순식간에 앞당겼다.

선동을 권능으로 했으니, 그 권능이 풀리는 순간 자신이 이용당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그들이, 한수아를 가만히 둘리가 없다.

아무리 이도가 신격화되었어도 그건 별개의 문제.

수련장에 도착한 성미령은 나성진과 함께 안쪽에 위치한 휴게실로 향했고 그곳에 있는 의자에 자연스럽게 앉았다.

“미치겠네... 혹시나 해서 제가 아이템 창에서 ‘시체 인형’이라는 걸 한번 확인해봤거든요? 근데 무슨 가격이 10억 코인이더라고요." 그 옆에 나란히 앉은 나성진이 성미령의 말을 받는다.

“...저도 보긴 했는데, 계산 해봐도 10억을 모을 수는 없더라고요. 거기다 코인이 교환되는 것도 아니고.”

“그래도 무언가 해결책이 있으니까 이렇게 일을 진행한 거겠죠? 이도님의 허락을 받았다거나..”

그때, 휴게실로 한 여성이 들어왔다.

날카로운 인상에 포니테일 형태로 머리를 묶은 그 여인은 온 몸이 땀으로 홈뻑 젖어있는 상태였다.

그녀, 박유정이 말했다.

“해결책이 있으면 뭐해요? 물어봐도 답해주지도 않던데.”

그 말에 성미령과 나성진은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솔직히, 사실이었으니까.

왜 마테리아 제국이라는 국가의 존재를 세상에 알리는 건지, 왜 스스로 악역이 되려는 건지.

그 이후의 일은 어떻게 처리 할 것인지.

아무것도 대답해주지 않으니, 결론이 내려질 리 없었다.

그때, 누군가 다급한 표정으로 휴게실로 뛰어 들어왔다.

“무슨 만남의 광장 같은 느낌이네요. 하나둘씩 여기로 모이는걸 보니.”

양손으로 무릎을 짚은 채 숨을 몰아쉬던 그 남자가, 땀에 젖은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이도님이... 이도님이 오셨습니다.”

모두가 잠시 멍한 표정을 지으며 되묻는다.

“...네?”

숨을 헐떡이던 소천이 크게 심호흡하더니 한 번 더 말했다.

“이도님이 오셨습니다.”

성미령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고, 그 뒤를 이어 나성진이 일어선다.

그리고 입구 쪽에 서있던 박유정까지. 그 셋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휴게실을 뛰쳐나갔다.

그런 그들의 뒤에서 소천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화가 많이 나신 것 같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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