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화. < 영웅은 악마의 시체 위에 서 있는 게 어울리잖아요.(1) >
정령도에서 나온 한수아는 마치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조용히 허공을 응시했다.
그 옆에 있는 아스트레이도 한수아와 마찬가지로 무언가를 깊게 생각하는 듯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는데, 그의 표정에 그대로 드러나 있는 심각함은 한수아의 그것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였다.
“무슨 생각하세요?”
한수아의 물음에 아스트레이가 조용히 한숨을 내쉰다.
-그 사루라는 초월...아니지. 균형자... 하아, 솔직히 뭐라고 불러야할지 모르겠군. 내게 있어서는 균형자든 신이든, 결국 초월자든 간에 모두가 인외의 존재니까.
한수아가 고개를 갸웃한다.
“그걸 물어본 게 아닌데요.”
아스트레이가 특유의 허탈한 웃음을 터트리며 대답했다.
-무슨 생각을 하냐고? 정확히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는지는 몰라, 최소 수십에서 길면 수백 년이 흘렀겠지. 이제 그 모든 일이 여기서 끝나는 건가 싶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네.
한 번 더 웃음을 터트린 아스트레이는 조용히 얼음 절벽에서 떨어져 내리는 폭포를 감상했다.
그런 그를 향해 한수아가 말을 건넸다.
“과거의 망령이니, 제각기 갖고 있는 역할이 있다느니 하는 그런 말들을 아스트레이님은 너무 깊게 생각하시는 것 같아요,”
-...내게 있어서는 깊게 생각 할 수 밖에 없는 말이지. 초월자들의 힘이 어느 정도인지는 여천이라는 남자를 옆에서 직접 겪어보면서 깨달았었네. 그런데 이제는 그런 괴물을 아래로 내려다보는 균형자라는 자가 내게 경고를 했어. 절대로 이건 쉽게 받아들일 문제가 아니야.
“그래서 그냥 조용히 죽으시려고요?”
-죽는다는 표현은 정확하지가않군. 난 이미 죽었으니까. 그냥... 영면에 든다는 표현이 어떻겠는가.
한수아는 잠시간 말없이 아스트레이를 바라보았다.
공감 능력이 바닥이 아닌 한수아는 아스트레이라는 남자가 얼마나 숭고한 의지를 지녔는지 눈치 챌 수 있었다.
솔직히, 모를 수가 없었다.
아스트레이라는 남자는 방향은 다르지만 결국 이도와 비슷한 면이 많은 남자였으니까.
스스로를 희생하며 한 가지 목적만을 가진 채 앞만 보고 걷는, 분명 둘은 닮았다.
그렇기에 한수아는 알 수 있었다.
이도가 아스트레이라는 남자를 꽤나 마음에 들어 한다는 것을.
“제가 제안하나 드리고 싶은 게 있는데요.”
-제안?
“들어보고 결정하실래요? 아니면 듣기 전에 결정하실래요?”
-...그대는 자세히 보면 꽤나 음침한 구석이 있어.
“옆에서 보고 배운 게 이거밖에 없어서 그래요. 어떻게 하실래요?”
아스트레이가 헛웃음을 터트린다.
-들어보고 결정하겠네.
한수아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우리 이도님이 무언가를 해야 하거든요. 그런데... 걸림돌이 너무 많아요.”
“그 걸림돌을 제가 완전히 치워버리려고 하거든요. 그 일에 아스트레이님이 도움을 주셨으면 해요.”
-나 같은 망자가 대체 무슨 도움을 줄 수 있겠는가.
아스트레이는 모른다고 했지만 글쎄, 한수아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이도님이 다스리는 곳들은 물론이고 새롭게 받아들이는 이들까지. 그 모든 이들이 너무... 고마움을 모르는 것 같아요."
아스트레이가 고개를 갸웃한다.
-이해가 가지 않는군, 그 이도라는 남자가 다스리는 곳이라니?
조금 자세한 설명이 필요할듯하다.
한수아는 이도가 해왔던 일들을 정리하고 요약해서 이야기해주었다.
잠깐의 시간이 흐르고 한수아의 이야기가 끝났다.
-...내가 잘못들은 것인가.
아스트레이가 눈을 껌뻑이며 되묻는다.
-황제? 그 남자가? 힘은 분명히 있어 보이는 게 확실했는데. 황제라고? 이종족을 받아들여? 대체 무슨 짓을...
혼란스러워하는 아스트레이를 향해 한수아는 곧장 본론으로 직행했다.
“아마 아스트레이님도 이 말에는 공감하실 거예요. ‘사람’ 사는 곳은 결국 정치라는 게 있을 수 밖에 없다는 걸.”
-...그 말에는 매우 공감하네.
“그런데 제가 정치를 잘 몰라요.”
아스트레이는 바보가 아니었다.
이렇게까지 이야기했는데 못 알아들었으면 그건 바보가 아닌 그냥 천치다.
작은 한숨을 푹 내쉬던 아스트레이가 마치 학생을 가르치는 선생처럼 입을 열었다.
-이도라는 남자는 정말이지... 터무니없는 짓을 했어. 각 종족이라는 것은 말이네, 제각기 다른 행성에서 자기들만의 문화와 문명을 가지고 살아가던 존재들이야. 그런 존재들을 한곳으로 묶는다? 이건 정치의 문제가 아니라네. 그 남자가 힘이 있다는 건 인정해. 내가 보았던 여천보다도 월등했어. 하지만 그건 결국 일시적인 현상일 뿐이네. 결국 이도라는 남자가 한 일은 누가 더 우월한지를 가릴 수밖에 없는 종의 전쟁. 그것의 신호탄을 막아내는 임시방편, 그 이상도 이하도 될 수 없어.
아스트레이의 말은 분명 일리가 있었다.
하지만 한수아는 그 말에 동의하지 못했다.
아니 하지 않았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가장 합리적이고 깔끔한 방법을 하나 알고 있었으니까.
“만약, 그 종족들의 감정을 컨트롤할 수 있다면요?”
-...응?
“말씀드렸잖아요. 정치가 필요하다고, 제가 말하는 정치는 제가 정한 이들로 종족의 융합을 꾸려내는 일들이에요. 반란이니 권리를 요구한다느니 이런 이상한 짓을 하는 사람들은요. 전부 죽일 거거든요.”
“굳이 빙 돌아갈 필요 없잖아요? 이도님이 스스로를 희생하는데 사람들은 그걸 몰라요. 오히려 무언가를 요구하려는 사람들이 생겨나죠. 그래서... 제가 싹을 애초에 뿌리째 뽑아 보려고요.”
묘한 시선으로 한수아를 바라보던 아스트레이는, 무언가 깨달았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이제야 알겠군. 극소수의 시련자들 중 특별한 이들만 가지고 있다는 ‘권능’을 가진 존재. 그대의 능력은 사람들의 감정을 컨트롤하는 능력이로군.
한수아는 부정하지 않았다.
솔직히 할 생각도 없었다.
머릿속으로 꾸미고 구상한 나름의 ‘계획’에는 아스트레이같은 존재가 필요했으니까.
“시간상으로 모든 이들의 감정을 건드리는 건 어려워요. 제 말, 무슨 말인지 아시죠?”
-...
이 대화에서 약간의 살을 덧붙이자면 현재 이도에게 나름의 ‘신뢰’를 얻고 있는 엘리자베스나 양규, 그들을 넘어서 신뢰는 아니지만 그래도 일을 맡길 수 있는 소천이나 아퀴나스 같은 이들로는 안 된다.
충분하지도 않고 애초에 한수아의 ‘기준’에는 그런 이들이 설 자리가 없었다.
그들은 결국 멸망한 판테온 제국의 사람들임과 동시에 현재를 살아가는 발바라 대륙의 주민들이다.
그들은 그렇지 않다고 얘기하겠지만 무의식과 의식이 일치를 이루는 경우는 거의 없으며, 그들은 결국 그들 주변 사람들을 챙기게 될 것이다.
그게 현재건 미래건 언젠가는 벌어질 자연스러운 과정.
그렇기 때문에 한수아는 그런 이들과는 다른 이가 필요하다.
철저한 외부인이자, 이미 죽은 존재임과 동시에 과거의 존재.
거기다 이도도 마음에 들어 하는 그런 남자.
거기다 가지고 있는 지식도 풍부하면 금상첨화.
아스트레이. 이 남자말고는 없었다.
“저는 마테리아 제국을 잘 몰라요.”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나 이도님 같은 시련자들에게 그 제국의 존재를 알리는 건 의미가 없어요. 우린... 정말로 그런 일에 관심이 없으니까.”
안타깝지만 사실이었다.
멸망한 고대의 제국?
이도는 분명히 자기 입으로 말했다.
관심 없다고.
당연히 이도뿐만이 아니라 현재 살아있는 시련자들도 마찬가지였다.
과거의 일, 심지어 지구에서 벌어진 일도 아니고 다른 행성에서 벌어진 일이다.
그런 일에 관심을 가진다는 거 자체가 난센스다.
한수아는 그 말을 끝으로 입을 꾹 다물었다.
-황제라는 자리에 앉아있는 그 남자는 적어도 향후에 벌어질 일에 대한 책임감을... 잠깐.
아스트레이는 말을 하다 말고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조용한 침묵이 이어지던 그때, 아스트레이는 의식의 흐름이 아닌 한수아의 이야기와 이도의 행동, 그리고 벌어지고 있는 일련의 상황들을 머릿속으로 정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결론 내렸다.
-...이도라는 그 남자의 행동들은, 결국 책임과 무책임이라는 그런 범주의 문제가 아니군.
아스트레이의 말대로 이도의 행동은 책임과 무책임의 문제로 접근하기에는 부적절하다.
이도는 그 두 개의 경계에서 저울질을 하려는 게 목적이 아니라 그 두 개의 경계가 공존할 수 있는 환경 자체를 유지시키는 게 목적이다.
그 뒤에서 벌어지는 일들까지 모두 일일이 신경 쓴다는 건 결국 두 마리의 토끼를 잡겠다는 건데, 두 마리의 토끼를 잡으려다 한 마리의 토끼조차 못 잡는 상황이 벌어진다면 그 책임은 누가 질것인가.
이도는 비효율적이고 멍청하고 한심한 선택이 아닌 나름, 최선의 선택을 한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그 뒤에 일어날 세세한 일들은 후발주자가 처리 할 수 밖에 없는데 지금 그 힘들고 고달픈 일을 처리하겠다는 이가 있다.
그것도 바로 눈앞에.
-그대는 그 이도라는 남자보다 더 흥미로운 존재였군.
한수아는 조용히 웃었다.
선발주자와 후발주자.
항상 이도만을 바라보고 이도를 따라다녔던 한수아였기에 그런 이도의 사상과 그 경계를 확실히 이해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경계를 아스트레이는 눈치 챘다.
-국가 이름이 유토피아라고? 이도라는 남자는 그 국가의 뼈대를 갖췄고 살은 그대가 붙이려는 것인가?
“맞아요.”
-그 과정에서 내가 얻을 것은 결국 하나밖에 없겠군.
한수아가 침착한 어조로 그 말을 받았다.
“아스트레이님은 마테리아 제국이라는 존재를 알리는 것. 그 소망 하나만 보고 여태껏 살아 계신 거잖아요?”
-살아있다는 표현은 아까도 말했지만 조금 부적절...
“그럼 죽은 거에요?”
“이렇게 저랑 대화도 하시고 저 폭포도 시야에 담을 수 있는 당신을, 대체 어떻게 죽었다고 볼 수 있는 건데요?”
-그건 단어의 정의에...
“아스트레이님은 하셔야 할 일이 있잖아요.”
“제가 도와드릴게요. 발바라 대륙에, 지워진 마테리아 제국의 흔적을 남기세요. 책으로 쓰셔도 좋고 이야기로 만들어도 좋아요. 그게 어떤 것이든 제가 도와드릴게요. 우리 상부상조해요.”
아스트레이는 조용히 턱을 짚고 생각에 잠겼다.
솔직히 구미가 당기긴 했다.
두려움? 있긴 하지만 그게 전부였다.
한수아는 계속해서 살아있다는 표현을 쓰긴 했지만 아스트레이는 스스로를 죽은 망자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게 사실이었고 그게 진실이니까.
그런데, 곰곰이 생각할수록 한수아의 말은 무언가가 부자연스러웠다.
맞물리는 톱니바퀴가 중간에 녹이 슬어서 부서질 듯 흔들리는 것 같다고 해야 할까.
감정을 컨트롤하는 능력자라면 굳이...
-내가 필요한가?
"..."
-유토피아라는 말 그대로 낙원이 될 국가에 살을 갖추려는 그 과정에서, 왜 나라는 존재가 필요한 것이지? 그대가 시련자라면 원래 살던 곳으로 돌아가기 마련인데, 결국 그대의 능력이 얼마나 뛰어나건 간에, 결국 그건 임시방편이 아닌가. 모든 게 일시적인... 어?... 잠깐...설마...?
말을 하다 무언가 깨달은 듯 아스트레이는, 입을 벌리며 당황을 금치 못했다.
정말 일말의 가능성조차 생각하지 못했고 가정조차 떠올리지도 못했었다.
그런데, 감정을 컨트롤하는 그런 권능으로 무언가를 하려한다는 건 결과가 좋을지는 몰라도 그 결과는 영원하지 않다.
결국 어떻게 되건 간에 그 끝에는 더 큰 혼란이 닥쳐올게 뻔하다.
그런데, 그 큰 혼란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이 딱 한 가지 있다.
아스트레이는 지금 그걸 깨달았고 눈앞의 이 여자가, 그걸 실행으로 옮기려 한다는 것도 깨달았다.
아니, 이게 가능하다고?
그걸 하려는 사람이 있다고?
아스트레이의 눈에 의미심장하게 웃는 한수아가 들어온다.
그녀가 말한다.
“영웅은 악마의 시체 위에 서 있는 게 어울리잖아요.”
아스트레이는 전율했다.
이 끝도 없는 믿음은 대체 어디서부터 나오는 것이란 말인가.
아니, 애초에 이런 생각 자체를 한다는 사실에 아스트레이는 경악했다.
-악녀가 되려는 것인가.
한수아는 침묵했다.
-세뇌와 비슷한 그대의 능력은 영원한 게 아니야. 시간이 지나면 언젠가는 풀리겠지. 그럼 결국 그대는 대륙의 공공의 적이 될테고. 모든 이가 그대를 죽이려고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겠지.
잠깐 말을 멈춘 아스트레이는 한수아와 눈을 맞췄다.
그녀의 의중을 확인하고 싶은 그런 눈빛으로 한수아를 바라보던 아스트레이가, 억눌린 목소리로 내뱉는다.
-그대는 두개의 목숨중 하나를 쓰려는 것이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