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화. < 요즘 홈쇼핑도 장사를 이따위로는 안 해 (1) >
“미쳤냐니. 말 참 험하게 한다.”
험하다고?
그럴 리가. 이건 굉장히 순화시킨 표현이다.
적어도 지금 내 눈에 보이는 형님의 모습은 미친 수준을 넘어 그냥 극심한 정신분열을 앓고 있는 이들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가 않았으니까.
젠장.
‘정지혁’이 아니었다면 당장 정신을 차리라고 주먹을 날렸을 것이다.
“왜 그러는 건데? 뭐가 문제야?”
“우리 되게 숭고했잖아. 대통령, 그리고 헌터 연합까지, 그들 모두가 제안한 돈, 명예, 권력 뭐 이런 거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말 그대로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모두 희생했어. 그런 이들을 어떻게 잊어? 이렇게라도 보고 싶은데, 이게 미쳤다고? 이도야 왜 그렇게 받아들이는 거냐. 너는 알잖아. 다른 이들은 몰라도 너는 알잖아. 우리들은 피가 이어지지는 않았어도 그 이상의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아니야? 내 말이 틀...”
“아니까!”
젠장.
“아니까... 지금 이러고 있는 거잖습니까.”
"..."
“유정이도 주청윤도, 크리스틴도 랜버튼도, 그 모두가 죽었습니다. 우리 기억 속에서만 존재하는 이들이잖아요. 그들을 기억하는 것으로 충분한 거 아닙니까? 내가... 젠장. 형님. 내가 모든 걸 막으면 되잖아요. 우리가 아는 그 미래를 만들지 않으면 유정이나 다른 이 들까지 전부 웃으면서 살아갈 새로운 미래가 펼쳐진다고요. 왜 과거에 얽매여 있는 겁니까. 그들은 없습니다. 죽었어요. 대체 언제까지 그들에게 잡혀 있을 겁니까. 형님, 왜 이렇게...”
“구질구질하냐고?”
“...예.”
형님과 나는 말로 하지 않아도 서로의 생각을 읽을 수 있었다.
형님은 내게서 안타까운 감정을 느꼈을 테고 나는 마찬가지로 형님의 광기와 분노, 그리고 아쉬움과 미련을 읽을 수 있었다.
"..."
형님은 잠시간 침묵에 잠겼다.
이어서 주변에 있는 풍경들을 천천히 둘러본다.
감상을 하는 것 같은 그런 모습은 아니었다.
마치, 남겨두었던 미련을 털어내기 전 곱씹는 과정 같다고 해야 할까.
이내, 형님이 손을 들어올린다.
아까처럼 손가락을 튕기는 그런 모션을 취하려는 것 같은데, 이상하게 형님의 손은 튕겨지지 않았다.
“...왜 망설이십니까.”
분명 형님은 아까 전 손가락을 튕기는 것으로 이 주변에 있는 모든 것을 멈췄다.
발동 원리나 세세한 내부 사정까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비슷한 행동으로 이 모든 것들을 없앨 수 있지 않을까.
나는 속으로 간절히 기도했다.
형님이 과거에 얽매이지 않기를.
하지만, 결국 형님의 손가락은 튕겨지지 않았다.
“안되겠다. 나는 너랑은 달라서... 안되겠다.”
“형님!”
“...이런 걸 원한 게 아닌데, 너도 나처럼 쟤들을 보면 웃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내 착각이었네. 처음부터 모든 걸... 그냥 내가 다 잘못 생각한 거였어.”
말의 뉘앙스가 너무 의미심장하다.
그렇게 느끼고 싶지 않고 그렇게 생각하고 싶지도 않지만 젠장.
이 직감이라는 빌어먹을 놈이 자꾸 그런 것을 캐치해낸다.
제발 그러지마.
이건 아니잖아.
“대화는 여기까지 하자.”
그게 끝이었다.
형님이 손으로 나를 살짝 밀치는 것과 동시에 내 뒤쪽에서 작은 게이트가 열렸다.
그 안으로 빨려 들어가며 내가 본 것은 나를 향해 무언가 인사를 보내거나 힘내라는 격려를 하는 그런 형님의 모습이 아니었다. 형님은 나를 향해 등을 돌린 상태였다.
왜.
대체 왜 돌아보지 않는 겁니까.
왜?
의문을 풀 수도, 풀지도 못했다.
나는, 그렇게 또 다시 어딘가로 이동했다.
**
홀로 남은 공간에서 정지혁은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거참... 힘드네.”
이내 손가락을 들어 올리더니.
따악-
살짝 튕기자 주변에 있던 모든 것들이 신기루처럼 흩어졌다.
“연기하는 게 이렇게 힘들 줄이야.”
정지혁은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은채로 고개를 돌렸다.
그의 시선은 방금 전까지 이도가 있었던 그 자리에서 멈췄으며 그렇게 한동안, 그 자리에서 벗어나지를 못했다.
머지 않아 정지혁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중얼거린다.
“자식... 화 많이 났겠는데?”
알 수 없는 표정의 정지혁은, 그렇게 아무것도 없는 새하얀 공간에 홀로 남았다.
***
[???가 당신에게 대화를 요청합니다.]
무시했다.
내 주변에 아무것도 없는 지금 이 공간도 나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이게 우주인지 아니면 시공간 뭐시기인지.
모르겠다.
왜 이렇게 된 걸까.
시련을 시작하고, 한태식을 죽이고, 오슨을 죽이고, 율리우스를 죽이고, 형식적이지만 국가를 건국하고, 아수라를 만나 귀기를 얻고, 이제는 정령도에서 의지의 시련인지 뭔지를 통과했다.
지금의 나는 유체이탈처럼 몸에서 영혼만 빠져나온 상태인걸까 아니면 그때 부서졌던 육체가 복구된 걸까.
그것도 모르겠다.
확실한건 지금 내 몸에 나조차도 느끼지 못할 거대한 힘이 꿈틀거리고 있다는 것.
그거 하나다.
그런데... 앞서 말했듯 정말로 이딴 건 지금 관심 밖의 일이었다.
방금 전, 내가 보았던 그 모든 상황들이 계속 눈앞에서 아른거린다.
과거에 죽었던 이들.
망령이라고 표현하기에는 부적절하다 .
그냥 신기루.
죽은 이들의 탈을 쓴 인형.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런 인형들을 가리키면서 반갑지 않냐고 묻는 형님의 모습이, 나는 지금도 소름이 돋는다.
솔직히 지금 이 순간까지 살아오면서 이 정도로 두려웠던 적이 없었다.
그래, 지금 나는 미치도록 두렵다.
형님이, 내가 알던 형님이 아닐까봐.
씨발.
“형님은 정말로 미친 건가...”
[???가 그건 아니라고 대답합니다.]
순간 흠칫했다.
뭐야 이건?
[???가 당신에게 대화를 요청합니다.]
아까처럼 무시할까 싶었지만 이거, 무시 할 수가 없을 것 같다.
슬며시 시선을 내렸다.
[???의 대화 요청을 받아들이시겠습니까? Y/N]
눈에 보이는 메시지창에서 Y버튼을 누르자.
[기대를 했는데, 영 아닌 것 같아 조금 실망이군.]
듣자마자 인상이 팍 구겨지는 개 같은 말이 들려온다.
[지옥도와 정령도를 통과한 시련자치고는 정신이 너무 약해. 영혼 안에 있는 그 존재는 결국 그대의 일에 참견을 할 수도, 무언가를 할 수도 없는 존재일 텐데 왜 굳이 신경 쓰는 거지?]
이 새끼가...
[그가 미쳤건 미치지 않았건, 그대의 목적은 신이 되는 것 아니었나? 모든 초월자들의 머리위에 서려는 자가 이토록이나 마음이 여리 다니,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조화란 말인가.]
“그러니까, 네 말은 형님이 미치지 않았다는 거냐? 그럼 아까 그 모습은 뭔데?”
[...]
“대답해.”
굳이 길게 말할 필요가 없었다.
지금 대화를 원하는 것은 내가 아닌 물음표라는 놈이다.
즉 칼자루는 내 손에 있다는 뜻.
[내가 해줄 수 있는 말은 하나다. 그의 모습이 그대의 기억과 다를지라도 굳이 신경 쓸 필요가 없다는 거, 나는 그 정지혁이라는 인간이 시련을 진행하던 모습을 보았지.]
“...보았다고?”
[정확히는 시스템에 저장되어있는 과거의 영상을 보았다. 그런 내게 있어서 그의 모습은 지금이나 그때나 별반 다르지가 않아. 그가 미친 거냐고? 아니, 그는 그대로다. 변한 게 없어. 무언가 다르다고 느꼈다면 그건 그 정지혁이라는 인간의 변화가 아닌 시련자 이도, 그대의 변화지.]
알쏭달쏭한 말이다.
‘하아... 젠장.’
양 손으로 얼굴을 덮고 천천히 마음을 정리했다.
형님이 보여주었던 그 가상.
그래, 어떻게든 이해를 해보려고 하자.
형님은... 외로웠을 것이다.
그 공간이 정확히 어떤 원리인지는 앞서 말했듯 나는 모른다.
하지만 그 공간에서 쓸쓸하게 시간을 보낼 형님의 모습을 생각하면 그런 변화가.. 생길수도 있지 않을까?
아니, 있어야한다.
그게 아니면 나는 형님을 미친놈이라고 취급해야 하니까.
“...후우...”
한숨이 멈추질 않는다.
형님이 말하기를 자기는 죽었다고 했다.
하지만 내가 시련을 진행하는 모습을 끝까지 지켜봐야 한다고 했으니, 결국 내가 하려는 모든 일들은 나 혼자가 아닌 형님과 함께 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시작을 형님과 함께 했으니까.
그러니까.
나는 멈추면 안 된다.
호랑이 등에 탄 지금의 상황에서 내가 생각해야 할 일은 형님이 미쳤는지 미치지 않았는지가 아닌, 형님과 내가 했던 오래전의 약속.
나를 의미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주었던 형님과의 지키지 못한 그 약속을 이뤄내는 것.
그래서 나와 형님이 아닌 지옥같은 미래를 막는 것.
그거면 된다.
들끓어 오르던 가슴이 완전히 고요해진다.
그제야 몸의 변화가 느껴졌다.
귀기의 본질을 파악하는 것은 솔직히 여전히 어려웠다.
어둡고, 음침한 그런 기운.
그런데 그 기운을 느끼는 내 몸의 감각이 상승한듯하다.
9성의 힘.
그 영체의 구슬을 깨던 그때의 힘이 현재의 내 몸의 한계가 된 것 같다고 해야 할까.
슬며시 자리에서 일어섰다.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며, 상승한 몸의 감각에 적응하려던 그때.
[아직까지도 그렇게 혼란스러운가?]
...정말 미안한데, 비록 잠깐이지만 잊고 있었다.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자.
“나한테 대화를 요청한 이유가 뭐지?”
[대충 마음이 정리된 것 같군. 대답해주겠다. 나는 ‘폭군의 갑주’다.]
대화의 템포를 따라갈 수 없다고 해야 하나.
이게 갑자기 뭔 개소리지?
“네가 뭐라고?”
[폭군의 갑주. 군자검을 지니고 있을 터인데, 아직도 감이 잡히지 않는가?]
감이 왔다.
농담이 아니라 그냥 군자검을 언급하는 그 순간부터 바로 확신했다.
이놈, 공백의 왕이 남긴 잔류 사념, 그러니까 내가 언젠가 생각했던 군자검과 비슷한 종류의 ‘아이템’이다.
“그래서? 네가 지금 여기서 왜 나타나는 건데?”
[큰 이유는 아니다...라고 하고 싶지만 잘 생각해보면 크다고도 할 수 있는 이유겠지. 시스템이 설정한 ‘자격’을 충족했다는 건, 절대로 작은 이유라는 범주의 것이 아니니까.]
자격이라...
[생각해보면 두 개의 도道를 클리어 하는 시련자는 그대가 처음이다. 대화를 나누기 전 몇 가지 알려주어야 하는 사항을 내가 깜빡했군. 지금부터라도 말해주지. 나 ‘폭군의 갑주’, ‘천룡검’, ‘귀신의 부츠’, ‘세계수의 씨앗’, ‘천생의 반지’, ‘투지의 귀걸이’. 이렇게 주인이 정해지지 않은 유산들은 두 개의 도를 클리어 하는 시련자에게 한 가지씩 선물이 되기로 결정이 되어있었고 그대의 성향과 지금껏 걸어 온 길들을 보고 판단한 시스템이 그에 맞는 아이템을 보상으로 내려주지. 여기까지는 이해했나?]
여기까지 뿐이 아니라 그냥, 그 끝까지도 이해했다.
“그러니까, 너는 퀘스트 클리어 보상이다?”
[그렇다.]
“그럼 모습을 드러내야지 왜 말만 걸고 있냐?”
[드러낼 수가 없다.]
이건 뭔 우문현답이야?
보상을 줬으면 실물을 보여줘야지.
요즘 홈쇼핑도 장사를 이따위로는 안 해.
“정확히 무슨 소리냐? 보상이라며? 그럼 내가 쓸 수 있게 지금 내 손에 들어와 있어야 되는 거 아니냐?”
[그러니까 시련자 이도여, 내 이야기를 끊지 말고 끝까지 들어라. 모두 듣고 그때가서 판단하면 될 일이 아닌가. 무엇을 그렇게 서두르는 거지?]
진정된 줄 알았는데 아무래도 아니었나 보다.
짧게 심호흡하며 자칭 폭군의 갑주라는 놈의 말을 기다렸다.
[나는 현재 행성 타이탄의 용암 지대에 자리해 있다. 그 누구도 찾을 수도 없고 그 누구도 찾을 생각조차 하지 못하는 그 공간에 나는 잠들어있지.]
"..."
순간 욕이 터져 나올 뻔했다.
보물찾기는 정령도 찾는 선에서 끝난 거 아니었어?
또 보물찾기야?
[군자검은 그대를 선택하지 않았지만 나는 그대를 선택할 생각이다. 그러니, 나를 찾아라.]
할 말을 잃었다.
발바라 대륙도 아니고 타이탄이라고?
진짜 사람 귀찮게 하네.
[나는 시련이고 나발이고 그딴 건 관심도 없다. 그저 피를 못 본지가 너무 오래되었어. 이제는 도저히 버티기가 힘들 정도야. 나는, 그대에게 그대가 생각하는 그 이상의 힘을 주겠다. 타이탄으로 와서 나를 찾아.]
생각보다 매우 간절해 보인다.
이거 참,
목소리로 미루어보면 남자 목소린데, 남자한테 이렇게 구애받은 적은 없어서 당황스럽기까지 하다.
일단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여기서 어떻게 나가는 거지?”
[의념을 보내거라. 아스가르드에서의 별들의 운하. 그곳은 ‘이곳’을 모티브로 만들어진 곳이니까]
몸의 감각을 점검하면서 느낀 건데, 지금 내 상태는 영혼 상태가 아니라 그냥, 평소의 내 몸과 같았다.
다만 약간의 이질감이 느껴지긴 했는데, 아마 이 이질감은 지구에 있을 내 원래의 신체와 지금의 내 몸과의 괴리감일 확률이 높다.
그리고, 지구에 있는 내 원래의 몸은 죽었다.
나는 이제, 목숨이 한 개다.
갑주의 메시지는 무시한 채 나는 이 공간 전체에 의념을 보냈다.
나가고 싶다. 라고.
그러자 코앞에 작은 빛무리가 떠오르며 이내 그것은 게이트로 모습이 변했다.
망설임 없이 그 안으로 한걸음 내딛자마자 주변 풍경이 화악 하고 변한다.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나는, 유토피아 제국의 황성 꼭대기 쪽에 서있었다.
이내 내 표정이 당황으로 물든다.
분명 폐허가 되었던 수도가, 지금은 복구 작업에 한창인 게 내 시야에 들어오는데, 문제는 그 복구 작업을 하는 ‘존재’들이다.
손재주가 좋은 고블린들은 만들어지는 건물에 여러 가지 그림을 그리거나 세부적인 일을 처리하고 있었으며 목재를 옮기고 있는 오크들과 그들의 곁에서 함께 땀을 흘리는 인간들까지.
솔직히 당황스럽다.
그런데, 더 당황스러운 건 이게 끝이 아니라는 거.
띠링!
[당신은 발바라 대륙의 지배자가 되었습니다.]
[발바라 대륙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의 절반 이상이 당신을 신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당신은 발바라 대륙을 휘하에 복속시킬 수 있습니다.]
[발바라 대륙을 복속시키겠습니까? Y/N]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정확하게는 모르겠다.
하지만 짐작은 간다.
한수아.
얘가...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