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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를 한다는 건-98화 (97/131)

98화.  < 이거 완전히 싸이코 아니야?(3) >

오랜만에 보는 형님의 모습을 보았음에도 나는 반가움을 표하지 못했다.

그저 의아함을 가득 담은 표정을 지었을 뿐.

대체 왜 여기서 형님이 등장했을까 하는 그런 의아함이 아니라.

형님의 곁에 있는 이들, 그들이 내 감정의 흐름을 완전히 틀어막았다.

뭔데, 대체 왜...

“오랜만에 보는 것 같네?”

...박유정이 왜 여기있는거지?

내가 진행하는 에피소드에서의 박유정이 아닌 전생에서의 풍신 박유정.

그녀가 내게 반갑다는 듯 인사를 건네고.

“저놈은 여전히 싸가지가 없어. 봤으면 인사부터 해야 되는 거 아니냐?”

분명 내가 죽인 주청윤, 아니, 전생의 뇌신 주청윤이 여전히 삐딱한 표정으로 나를 아니꼽게 쳐다보고 있었으며.

"..."

아무 말 없이 나를 바라보는 랜버튼까지 있었다.

그 뒤에는 보라색 머리가 인상적인 크리스틴까지 자리해있었는데, 도통 이게 무슨 상황인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형님이 내 옆에 오더니 내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잠깐 걸을까?”

...뭔지는 모르겠지만 무언가 부자연스럽다.

그냥, 그렇게 느껴진다.

일단 형님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고 앞서 걷는 형님과 보폭을 맞췄다.

걸을수록, 잠깐 보이지 않았던 주변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당황이 더욱 커져간다.

분명, 여긴 지구였다.

의심 할 것도 없었다.

전쟁의 흔적 같은 것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 서울 도심 한복판.

대출 광고가 흘러나오는 거대한 TV가 눈에 들어오고 그 뒤편에 펼쳐진 새파란 하늘에는 비행기가 떠다니며 도심의 사람들은 스마트폰을 들며 제각기 할 일을 하며 걸어 다니고 있었는데, 침식이 시작되기 전, 나름 평화로웠던 지구가 분명했다.

시발.

언젠가 생각했던 트루먼 쇼.

그 엿 같은 영화의 주인공이 된 것 같은 기분에 휩싸였을 때.

따악-!

형님이 손가락을 튕긴다.

경쾌한 소리가 울리자마자 모든 게 멈췄다.

도심의 사람들은 물론 뒤에 있던 박유정과 랜버튼, 그리고 주청윤까지, 그 모두가 동영상을 중간에 정지시키기라도 한 것처럼 그 자리에서 정지했다.

순간 온몸에 소름이 확 하고 올라온다.

내 가슴속에서 피어난 의구심과 의아함. 그리고 불안감과 분노, 그 혼합된 감정들이 순식간에 나를 감싼다.

대체...

“...이게 뭡니까?”

“뭐긴, 내가 말했잖아 너는 아직 여기 오기 이르다고.”

“그러니까... 이것들이 대체 다 뭐냐고 묻고 있는 겁니다.”

의도하지 않았는데도 목소리가 떨려온다.

정말로 혼란스럽다.

그런데, 내 감정의 변화를 확실히 알아챘을 형님은 너무나도 평온했다.

마치 아는 사람을 집 안에 초대했을 때 지을법한 그런 여유로운 표정.

젠장.

소리를 지르고, 윽박이라도 지르고 싶다.

뭐야.

대체, 이게 뭔데?

“이도야 왜 그렇게 당황해? 별거 없어. 그냥 나 나름대로의 세상을 만든 건데. 당황할 정도는 아니잖아?”

만들었... 다고?

당황할 정도는 아니라고?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지금?”

형님은 여전히 여유로운 표정으로 대답했다.

“무슨 말이긴, 너도 짐작했을 거 아니야? 나 죽은 거.”

“보자... 그렇게 오래된 것도 아니지만 생각해보면 조금 오래된 것 같기도 하네, 여화한테 너랑 내가 같이 죽었을 때, 그때 시스템이 나한테 메시지를 보냈거든,”

“메시지요?”

형님이 잠깐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는 무언가를 곱씹듯 생각하더니 내게 말했다.

“별건 아니야. 결과만 봐. 나는 내 격과 내 존재를 바치는 것으로 단 한 번의 기회를 더 얻게 되었어, 그리고 그 기회를 내가 아닌 너한테 준거지.”

“왜? 짐작은 했잖아? 아... 이게 아닌가? 우리 이도가 다른 게 궁금한가본데... 대충 알 것 같다, 육체를 잃은 나는 밖으로 나갈 수가 없어. 네 시련이 끝나기까지 나는 이곳에 갇혀 있는 처지지. 말 나왔으니까 말해줄게. 더 웃긴 게 뭔지 아냐. 이 시스템이라는 놈이 나를 여기에 가둬두면서 했던 말이, 앞으로 벌어지는 모든 일들을 네 ‘영혼’ 속에서 같이 지켜보래. 하하.. 웃기지 않냐? 나름 시간을 보내는 방법을 생각했고 그게 지금 네가 보고 있는 이 모든 것들이야. 별거 없지?”

지금 눈앞에 보이는 형님의 외형은 분명 내가 알던 형님의 모습과 똑같았다.

그런데 , 조금 다른 점이 하나 보인다.

작은 ‘광기’ 같은, 그런 이상한 감정.

형님과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그 감정을, 나는 형님에게서 느낀 것 같다.

아니, 느꼈다.

젠장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너도 몇 번 겪었으니까 알거 아니야? 시공간의 균열, 세상의 바깥쪽에 존재하는 정령도나 지옥도는 무無의 세상에서 창조된 것들이거든, 공백의 왕이라는 놈이 그 무의 세상에 의지와 목적을 달아주어서 그게 지옥도와 정령도가 된 건데, 지금 여기는 그런 게 없어. 그냥... 여기는 내가 주인이거든.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그러니까 내 상상 속에서 벌어지던 모든 일들을 창조할 수 있는 세상. 그게 지금 네가 보고 있는 것들이야. 뭘 그리 어렵게 생각해?”

무의 세상이니 뭐니 이딴 말은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그 원리나 그 본질 따위도 관심 없었다.

다시 고개를 돌렸다.

내 눈에 보이는 박유정이나 랜버튼, 그리고 저쪽 구석에 있는 크리스틴과 주청윤.

나와 함께, 그리고 형님과 함께 지구를 지키고 사람들을 살리며 몬스터를 죽이고 침식을 막아내던 그 불세출의 영웅들은 이제 없다. 분명히 죽었고, 나는 형님과 그들의 시체를 화장해주었으며 묘비까지 만들어주었다.

그 모든 과정들이 아직까지도 내 기억 속에 남아있다.

그러니까... 저들은 지금 세상에 없는 이들이다.

지금쯤 발바라 대륙에서 내 명령을 따르고 있는 박유정과 대기자 상태가 된 랜버튼과 주청윤, 그리고 에릭에게 죽었던 크리스틴 까지, 그들은 모두가 살아있되 결국에는 형님이 기억하고 내가 기억하는 이들은 아니다.

그렇기에 완벽하게 남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빌어먹을.

죽어서 세상에 없는 이들을 만들었다고?

그 말은 결국 지금 내 눈에 보이는 이 모든 것들은 형님의 ‘상상’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가상의 세계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그냥 허상.

실제로 살아있지 않은 그냥 신기루 같은 허상.

...시발.

목 끝을 맴돌던 말이 결국 밖으로 튀어나오고 말았다.

“형님... 미치신 겁니까?”

***

“이도님은 지금 어떻게 되셨나요?”

한수아의 물음에 투명한 구체의 모습을 한 사루는 깔끔하게 대답해주었다.

[진정한 신이 되기 위한 과정을 진행 중이랍니다.]

“진정한 신이요?”

[신이 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를 포기해야하는 과정이 필요하죠. 그것을 넘을지 못 넘을지는 결국 이도라는 인간의 한계에 따라 달라질 거랍니다.]

지금의 한수아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는 거죠?"

[의미라... 말씀드렸잖아요. 현재의 아스가르드와 에피소드에 대해서. 설마 이해하지 못하신 건 아니죠?]

한수아는 입을 꾹 다물었다.

시간의 경계가 달라진다는 것도 그렇고 계속해서 메시지를 보냈던 그 존재들은 신이 아니라 그저 신격을 초월한 과거의 시련자들이자, 제각기 모시고 있는 존재를 신으로 만들기 위한 부하 내지 병사라는 그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냥... 이해가 가지 않았다.

“왜 저에게 이런 정보를 주시는 거죠?”

물어보지 않을 수가 없는 질문이었다.

적어도 한수아는 바보가 아니었고 세상에서 공짜는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도도 마찬가지고 다른 사람들까지. 제각기 원하는 게 있다면 그 원하는 것을 갖기 위해 무언가를 시도한다.

한수아의 눈에 비친 사루의 모습은 무언가를 얻기 위해 여러 가지를 시도해보는 그런 이들의 모습과 다르지가 않았다.

[글쎄요. 왜냐고 묻는다면... 그냥이요.]

[정말 궁금하신 표정이네요. 굳이 이유를 붙여보자면, 저는 물론이고 지옥도의 주인인 아수라가 과연 이도라는 남자가 신이 되는 그 시간까지 살아있을까요? 아니지, 정확하게는 버틸 수 있을까요?]

“버틴다는 말씀은..”

사루는 느긋하게 대답했다.

[말 그대로에요. 저는 너무 오래 살았거든요. 그대의 생각보다 더, 저는 너무나도 오래 살았답니다. 이제는 힘들고 지쳤어요. 영면에 들고 싶다는 그 기분을, 그대는 아나요?]

알 턱이 없었다.

고작해야 100년 남짓 살아가는 인간이 수천 년을 넘게 살아왔을 사루를 이해한다는 것은 가능한 일이 아니었으니까.

[그런데 생각해보면 이상하지 않아요? 그렇게 지친 제가 지금까지 왜 살아있는 걸까요?]

[저를 만드시고 이 자리에 앉히셨던 그분은 이도라는 남자와는 달라요. 저 남자가 지금 신이 될 확률이 매우 높기는 하나 솔직히 말씀 드리면 ‘그분’과 비교하기에... 너무... 모자라죠.]

한수아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모자라다고?

그 이도가?

[이해하지 못하는 표정이시네요. 말이 잠깐 샌 것 같은데 저나 아수라는 지금 그냥 살아있는 거예요. 그저 그분이 남기신 마지막 명령이자 그분의 뜻을 전부 이행하지 못했으니까. 저는요. 그 이도라는 남자가 신이 된다면 그대로 영면永眠에 들 생각이거든요. 아마 아수라도 저와 생각이 다르지는 않겠죠.]

영면永眠.

분명 그 단어는 영원한 잠인 죽음을 뜻한다.

하지만 한수아는 조금 다르게 생각했다.

인간의 상식 밖에 존재하는 초월자들이기에 그들에게만 적용할 수 있는 새로운 가정.

즉, 저들이 사용하는 영면이라는 단어는 죽음을 뜻하는 게 아니라 말 그대로 오랫동안 잠이 든다는 것을 뜻하는 게 아닐까...

다만 그게 어떤 의미건 간에 사루는 이도가 신이 된 후에 벌어지게 될 일들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적어도 한수아는 그렇게 생각했다.

“...이도님이 이후에 만들 세상을, 지켜보거나 그럴 생각은 전혀 없으신 건가요?”

한수아의 물음에 사루는 망설임 없이 답했다.

[네.]

[제가 단어 선택을 조금 다르게 했군요. 정정할게요. 이도라는 남자가 모자라다는 건 저 같은 균형자들의 기준에서지 현재의 시련자들과 비교해서 보자면 절대로 모자라지 않아요. 저는 여러분들과 계속해서 살아가던 세계가 다른 존재랍니다. 그건 절대 변하지 않을 사실이에요.]

[그분께서 남기신 유지는 간단합니다. 이후에 만들어질 세상을 위해 제각기 부여받은 역할을 이행하는 것, 그리고 그 이후에 벌어질 결과가 어떤 것이건 간에 자기 역할을 마친 이들은 그 자리에서 빠져줘야 한다는 것. 저는 그분의 그 유지를 받들기 위해 여태껏 버티고 있던 거 랍니다. 이건 책임감과는 별개의 문제에요.]

한수아는 사루의 말에서 무언가 다른 뉘앙스를 느꼈다.

저건 단순히 문맥상으로만 받아들일 말들이 아니었다.

이내 한수아는 깨달았다.

“그러니까, 사루님은... 저에게 무언가 ‘역할’을 맡기고 싶으신 거군요.”

사루는 이도와 대화했을 때처럼 침묵했다.

그리고, 억눌린 것을 토해내듯 말했다.

[...재미있네요. 이도라는 남자도 그렇고 당신도 그렇고, 이상하게 인간이라는 종족은 눈치가 참 빨라요. 이상하게 소름이 돋으려고 하네요.]

한수아는 조용히 뒤로 한걸음 물러섰다.

그때, 그녀의 뒤에 홀로그램처럼 빛나는 남자가 묻는다.

-...아무리 봐도 이 자리는 내가 낄 자리가 아닌 것 같은데 왜 내가 여기에 있는 거지.

혼잣말이지만 혼잣말 같지 않은 아스트레이의 말에 사루가 대답했다.

[그대도 들어야 할 말이니까요. 그대의 존재를 아스가르드의 이들은 물론, 저까지도 알고 있었습니다. 이미 멸망한 세상과 시련의 바탕이 될 무대를 꾸미는 작업에서 오류로 생겨난 존재. 경우가 다르긴 하지만 그대도 엄밀히 보면 그분께서 남기신 유지에 방해되는 존재랍니다.]

-...

"..."

한수아와 아스트레이는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그대로 합죽이가 되어버렸다.

[저는 한수아님께 무언가 큰 역할을 맡기려는 게 아니에요. 당신은 마지막 순간에 분명 ‘어떤 것’을 선택해야 해요.]

길고 긴 능선을 넘어 드디어 본론다운 본론으로 넘어왔다.

하지만 말이 너무 알쏭달쏭하다.

[그 선택이란 그대가 이도라는 남자에게 의존하는 것을 넘어 그의 중심을 잡아 줄 수 있느냐 없느냐를 결정지을 매우 중대한 결정이 될 거랍니다. 그러니... 마음을 단단히 잡아 두시는 게 좋을거에요.]

한수아는 이 순간 마치 수수께끼를 하는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아스트레이, 제가 당신에게 개입할 권한은 없지만 이 말은 꼭 해두고 싶군요.]

-...그게 무엇입니까?

[과거의 망령은 과거에만 존재해야 하는 법이랍니다.]

-...

많은 것을 함축한 말이었다.

아스트레이가 입을 꾹 다물고 한수아가 고개를 갸웃하던 그때, 드넓은 잔디로 이루어진 정령도의 정원에 작은 빛무리가 일렁이기 시작했다.

그것은 이내 작은 균열을 만들었으며 이어 중간계인 발바라 대륙으로 통하는 게이트를 생성해냈다.

[아 참, 이도님이 한수아님에게 전한 말이 있었는데...]

게이트로 걸음을 옮기려던 한수아가 그대로 멈칫했다.

[조금 늦을 테니 발바라 대륙에서의 일은 네가 알아서 처리해라... 라고 하더군요.]

“아…"

한수아가 작게 탄성을 내뱉는다.

저 말은 결국, 이도의 믿음이 바탕이 되지 않는다면 절대로 나오지 않을 말.

한수아는 이 순간 살짝 감동받았다.

그런데..

“거짓말... 아니시죠?”

[당연히 아니랍니다. 보시면 감이 잡히시잖아요? 저는 중간계의 인물인 당신들에게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그 어떤 해도 끼칠 수 없다는 것을. 그 안에는 당연히 ‘거짓말’도 포함되죠. 그게 가능했다면 저기 빛나고 계시는 아스트레이님을 지금 당장 죽여 버렸겠죠.]

-...

복잡하게 생각 할 것도 없었다.

균형자라는 이들은 공백의 왕에게 임무를 부여받은 일종의 NPC들이며, 그들은 시련자를 불문하고 누군가에게 ‘해’를 끼칠 수 없다. 사실 벌어지는 모든 상황들이 그것을 증명해주고 있었으니, 한수아는 그 이상 의심하지 않았다.

그저.

‘...이도님이 나를 믿고 계셨어.’

과거의 이야기를 해준 것도 그렇고, 한수아는 확신했다.

이도는 나를 믿는다.

그녀는 지금 이 순간 사루가 해준 말들을 한귀로 흘려버렸다.

그저, 그녀는 생각했을 뿐이다.

‘어떻게 일을 처리해야할까.’

아스트레이의 상자를 품안에 든 한수아는 천천히 게이트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이도는 무슨 일이 있어도 결국에는 돌아올 것이다.

그 남자는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드는 그런 남자였으니까.

한수아는, 한 번 더 생각했다.

‘...어떤 식으로 처리해야 이도님에게 도움이 될까.’

깊은 고민이 필요한 질문이지만 한수아의 표정은 너무나도 평화로웠다.

마치 나름 생각 한 게 있기라도 한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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