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화. < 이거 완전히 싸이코 아니야?(2) >
말투는 험했지만 속내는 매우 복잡했다.
앞서 말했듯 이건 그저 가정일 뿐...이라고 생각하고 싶다.
젠장.
복잡하다.
솔직히 내 머리로는 이 이상의 방법과 그나마 합리적인 가정이 전혀 떠오르지가 않는다.
그렇다면 결국 결론은 두 가지밖에 없었다.
이 방법을 시도해야하는가.
혹은 여기서 포기해야하는가.
그 전에.
“사루. 거기 있습니까?”
평원 전체에 내 목소리가 조용히 울려 퍼지고 약 5초 정도가 지났을 때 반응이 왔다.
[무슨 일이시죠? 설마 포기하시려는 건가요?]
저 말은 그냥 씹어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래, 그냥 씹자.
“궁금한 게 있는데, 물어봐도 됩니까?”
[의지의 시련에 대한 세부적인 설명이라면 당연히 저는 해드릴 수가 없습니다. 모든 것은 시련자 이도님께서 스스로 깨우치셔야하니까요.]
글쎄, 내 생각에는 이미 깨우친 거 같은데.
“만약에. 정말로 만약에 내가 이곳에서 죽는다면 어떻게 됩니까?”
사루는 조용했다.
눈앞에 있는 영체의 구슬같이 생긴 그 사루가 만약 사람이었다면 어떤 표정을 지었을지는 대충 짐작이 간다.
아마 약간 놀란 표정. 혹은 흥미를 담은 표정이지 않을까.
[보아하니 의지의 시련의 본질에 대해서 알게 되신 것 같은데, 정확히 무엇이 궁금한 겁니까?]
이게 참 묘한 게, 이 사루라는 균형자는 자기 입으로 세부적인 건 답해 줄 수 없다고 말하면서도, 결국 내가 이게 맞냐고 물어보는 질문에는 암묵적인 오케이 신호를 보내주며 대답해주고 있었다.
이건 내게 우호적인 거라고 봐야하나 아니면 그냥 저 사루라는 균형자의 성격이 일반적이지 않은 걸까.
갑자기 피어오른 작은 의문이었다.
여하튼.
“말 그대롭니다. 내가 이곳에서 죽는다면 어떻게 되는 거냐고 묻고 있는 겁니다.”
[그건 답해드릴 수가 없네요. 궁금하면 직접 죽어 보실 수밖에요.]
참나.
변덕이 심한거야 뭐야?
정보를 주는 것 같으면서도 일종의 선을 지키고, 이상하게 그 선이 한 여기쯤이겠구나.. 하며 확신했을 때는 또 그 기준점이 모호해진다.
그러니까 자기 마음대로 행동한다는 뜻인데, 이게 마치 장난꾸러기를 보는 기분이다.
이 상태로는 정보를 얻을 수가 없다.
분위기를 조금, 바꿔보자.
나는 사루에게 말했다.
“저랑 거래 하나 하시겠습니까?”
[거래요?]
“제가 지금 한번 죽을 생각이거든요.”
[...]
“그런데 일이 어떻게 될지는 솔직히 짐작도 되지 않고 물어봐도 대답해주지도 않으니 나 나름대로 대비를 해야겠습니다. 제가 발바라 대륙 쪽에 해결해야할 일이 몇 개 있거든요.”
사루는 조용했다.
하지만 알 수 있었다.
사루가 내 목소리를 귀담아 듣고 있다는 것을.
"한수아. 지금 정령도에 있습니까?”
[...찔러본 건가요 아니면 확신하시는 건가요?]
사루의 물음에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말없이 사루의 이어지는 대답을 기다렸다.
내 확신어린 태도에 사루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중얼거린다.
[...제법, 이네요.]
솔직히 별로 어려운 추측은 아니었다.
나는 천재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바보도 아니다.
정령계와 정령도의 정의를 자세하게는 모르겠지만 확실한건 그 두 개의 단어는 별개의 것을 뜻하며 정령도는 정령계의 상위에 위치한 곳이다.
즉, 정령도가 정령계를 지배하는 일종의 피라미드 형태.
그리고 사루는 정령계를 비롯해 정령도를 다스리는 균형자, 즉, 왕이다.
그런데 그 정령도를 한 번에 흔들어버릴 수 있는 한수아라는 존재를 그냥 지나친다?
말이 되지 않는다.
“그녀한테 전해주시겠습니까.”
[일단은 들어보죠.]
“내가 조금 늦게 간다면 발바라 대륙에 밀린 일들은 네가 알아서 처리하라고. 이 말을 그대로 전해주시면 됩니다.”
사루가 침묵한다.
아마 누군가 이 장면을 지켜보고 있었다면 그 누군가도 침묵했을 것이다.
한수아의 행동 방향을 나는 안다.
그녀는 나에게 의존하는 것과 동시에 나에게 의미 있는 사람이 되기를 노력하는 그런 인물이다.
그런 그녀이기에 내게 해가되는 행동은 절대로 하지 않을 것이 확실하다.
[꽤 재미있는 남자였군요. 그렇다면 저는 무엇을 얻게 되는 거죠?]
저 질문에는 이미 준비한 대답이 있었다.
“내가 공백의 왕이 된다면, 정령도는 그대로 두겠습니다.”
[...뭐요?]
“내가 지금 좀 매우 예민해진 상태거든요. 내가 시발 내 목숨 하나까지 바쳐가면서 이 지랄을 하고 있는데, 보면 주변에서는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는 분위기더라고요. 내가 알기로 공백의 왕이 된다면 균형자건 뭐건 그냥 죄다 물갈이 시킬 권한이 생기는 게 확실한데, 이게 생각해보면 웃기지 않습니까? 왜 나만 박쥐노릇을 해야 하는 건가 싶기도 하고. 아.. 별 의미는 없으니까 귀담아 듣지는 마시고요. 그냥 혼잣말입니다. 그쪽이 나보다 더 잘 알지 않습니까? 이 시련이라는 게 진행하면 진행할수록 사람을 아주 미치게 만드는 거.”
점점 격해지는 내 말에 사루는 이번에도 침묵했다.
나는 짧게 심호흡 하고는 마저 말을 이었다.
“그래서 안전장치를 조금 해두려고 합니다. 내가 이래봬도 약속 하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지키는 놈이라, 거기다 플러스로 내 뒤통수 치는 놈이 있으면 나는 그게 어디건 그놈을 찾아서 반드시 복수하는 미친 싸이코 같은 놈이거든요. 어떻게, 저와 ‘거래’ 하시겠습니까?”
[정말... 신기하고 재미있고, 무모하기까지 한 남자군요. 적을 만드는데 아주 최적화되어있는 성격이신 거 같은데, 당신은, 정말로 그분의 자리를 대체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넘어온 것 같다.
“그거야 그때 가봐야 알게 될 일 아니겠습니까. 내가 중간에 지쳐서 말라비틀어질 잡초 같아 보이면 그냥 내 제안을 무시하시면 되고 적어도 끝까지는 갈 것 같아 보이면 내 제안을 수락하시면 됩니다.”
사루는 잠시간 말이 없었다.
마치 내 말을 곰곰이 생각하는 그런 느낌이다.
[가만 보니 이도님은 거래와 제안을 약간 헷갈려 하시는 것 같은데. 제 착각인가요?]
“아마 아닐 겁니다. 제가 누군가한테 부탁하는 일이 거의 없었거든요. 워낙 그렇게 살아온 인생이라.”
[하하... 좋아요. 별로 어려운 제안도 아니니 그 한수아라는 인간에게 그대의 말, 토씨하나 틀리지 않게 전해드리겠습니다.]
문맥상 분명 좋아해야할 타이밍이었지만 내 표정은 처참하게 굳어진 상태였다.
내가 왜 사루를 자극했겠는가.
젠장.
한수아에게 말을 전해 달라는 건 내가 부재중이었을 경우를 대비한 말이었다.
하지만 그 전제 조건 자체가 내가 만약 의지의 시련을 클리어 하게 된다면 이 자리에서 곧바로 벗어날 수 있는가 없는가에 대한 답을, 무조건 곧바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전제로 한 질문이자 그런 맥락이었고, 사루는 암묵적으로 내 말들에 이번에도 오케이 신호를 보냈다.
즉, 의지의 시련을 깨는 조건은 시련자로서 목숨 한 가지를 버리는 선택을 해야 하는 것이며, 그 선택을 할 경우 ‘부활’ 하기까지는 ‘일정시간’이 필요하다.
이게 내 결론이고 분명 확실한 정답이다.
빌어먹을.
속내를 숨긴 채 몸을 돌렸다.
이미 결심은 섰고, 전부터 말했듯 내게 뒤는 없다.
시간, 그게 어느 정도 걸릴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타이탄으로 이동하기 전이었으면 한다.
가장 중요한 여분의 목숨, 이게 내 심리적인 안정장치로서 내 성장에 방해가 된다?
그럼 당연히 버려야한다.
어차피 완전히 죽는 게 아니니까.
싸이코끼리는 통한다고 해야 할까.
생각해보면 공백의 왕은 자기 나름대로 합리적인 시련을 설계한 것이다.
그래, 공평해야지
천군도, 여화도, 발락투스도 한 개의 목숨, 이제 나도 한 개의 목숨.
상황은 같아졌고 이제 나는 강해질 일만 남았다.
짧게 심호흡하며 양손을 깍지 끼고 가볍게 스트레칭 했다.
눈을 감고 잠깐 생각했다.
죽음이라.
여화한테 죽던 그 더러운 순간이 이 모든 것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는데, 이제는 나 스스로가 죽으려고 한다.
정말 아이러니하지 않은가.
조용히 눈을 떴고, 심장 어림에 잠자고 있는 귀기를 끌어올렸다.
다시 키가 커지고, 머리에 뿔이 생겨나며 온 몸이 검은색으로 물든 그때, 내 본능이 귀기의 흐름을 차단했다.
내가 내 몸의 극한이라고 표현하는 그 마지노선에 도달한 것.
그 리미트를, 이제 풀어야한다.
멈췄던 귀기를 억지로 끌어올렸다.
팔이 떨리고, 턱이 떨려오며, 시야가 조금씩 흐릿해진다.
모자라다.
더 끌어올렸다.
띠링!
[신체의 벽에 마주하셨습니다.]
[신격을 올리지 않으면 신체가 붕괴됩니다.]
[10초 후 신체의 붕괴가 시작됩니다.]
무시했다.
이번에는 혈기까지 끌어올렸다.
내 몸 전체가 검붉은 색으로 물들더니, 눈앞이 완전히 붉은색으로 물든다.
이건 기운으로 인한 부작용이나 그런 게 아니다.
그냥 눈의 실핏줄이 죄다 터진 것일 뿐.
띠링!
[신체의 붕괴가 시작됩니다.]
내 몸이 떨려 오는 것과 동시에 주변 공간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내 몸에서 넘쳐흐르는 기운이 이 공간 전체를 집어삼키고 있던 것.
속으로 직감했다.
이게 9성의 힘이구나.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고 손가락 하나로 산 하나를 지워버릴 수 있을 것 같은 느낌.
조용히 한손을 들어올렸다.
기운을 끌어올리자.
쿠구구궁-!!!!
이 근원 모를 공간이 당장이라도 부서질 것처럼 진동하기 시작했다.
반경 수십? 수백? 아니, 수키로... 모르겠다.
적어도 내가 느끼기에는 이 드넓은 평원의 크기는 수백키로를 월등히 넘는다.
그리고 나는 약 500키로 미터 정도의 공간을 완전히 지배하고 있었다.
대지의 기운이라고 해야 할까.
마나의 성질이 조금, 새롭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이어서 나는 내 모든 기운을 한곳으로 응축시켰다.
혈기도, 그리고 마나도, 그 모든 기운들이 허공으로 뭉치며 또 다시 새로운 신의 창을 만들어낸다.
하지만 전과는 달랐다.
크기만 100여 미터에 달하며 그 굵기가 10미터가 넘는, 거의 미사일처럼 생긴 그 신의 창은 내가 여태껏 사용하고 만들었던 그 어떤 기술들보다 압도적인 존재감을 과시했으며 그 안에 담긴 힘조차 월등했다.
프스스-!
하늘로 들어 올린 내 손가락이 끝부분부터 천천히 가루가 되어 흩어지기 시작했고 내 몸 전체에 조금씩 금이 가기 시작했다.
고통은 없었다.
그렇기에 무시할 수 있었다.
나는, 강하게 의념을 보냈다.
내려, 꽃혀라.
쌔애애액-!!!!
창이 구슬을 향해 내리꽃히며, 그 끝부분과 구슬이 맞닿는 그 순간.
파아아아아아앙-!!!!
강한 기파가 사방으로 터져나간다.
띠링!
[축하합니다! 당신은 의지의 시련을 통과하셨습니다.]
그 메시지가 끝이었다.
눈앞이 깜깜해지며 언젠가 느꼈던 감각이 뇌리를 타고 전해진다.
죽음.
이건 분명 죽음의 감각이다.
그렇게 나는, 오늘 한번 죽었다.
**
당연한 사실이지만 나는 전생에서 시련자가 아니었다.
그렇기에 대기자가 된다는 게 어떤 기분인지, 솔직히 겪어본 적이 없기에 모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적어도 내 눈앞에 보이는 것들은 대기자가 되는 것과는 하등의 상관도 없다는 것은 확실하다.
“지금은 때가 아니라고 했는데, 생각보다 빠르게 왔네.”
여전히 장난기 어린 웃음을 짓고있는 형님이, 나를 반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