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 정령도(3) >
보석을 집어 들자 알림음이 떠오른다.
[아이템 ‘???’의 정보 열람에는 자격이 필요합니다.]
[시스템이 개입합니다.]
[시스템이 당신의 자격 여부를 판단합니다.]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기다렸다.
시스템의 목소리가 마치 로딩 하듯 이어지고, 그렇게 침묵이 이어질 때, 아스트레이가 그 침묵을 깼다.
-그 물건은 내가 알기로 ‘자격’이 되지 않으면 확인조차 불가능하다고 알고있...
띠링!
[아이템 ‘???’의 정보가 ‘세월의 돌’로 변경됩니다.]
불가능이 뭐 어쨌다고?
슬며시 아스트레이를 바라보자 그가 고개를 갸웃한다.
그리고는 눈을 크게 치켜뜨는 게 눈치가 생각보다 빠른 남자인 듯싶다.
-...대체 자네 정체가 뭔가? 그 레이놀즈라던 남자는 그 물건의 정보조차 확인 못하고 그대로 묻어버렸었는데...
작게 나랑 같이... 라는 말을 덧붙이는 아스트레이의 모습을 잠깐 바라보다 다시 고개를 돌렸다.
눈앞에 떠있는 작은 정보창이 눈에 들어왔는데, 이게... 묘하게 거슬린다.
+
[세월의 돌][???]
발바라 대륙 ‘포효하는 격류의 절벽’에 이 돌을 놓으면 ‘???’로 향하는 통로가 생성된다.
+
무언가 일이 쉽게 진행될까 싶었는데 이번엔 또 수수께끼다.
조금 당황스럽다고 해야 할까.
-여하튼 이야기를 마저 하자면 마테리아 제국은 이 거대한 대륙을 지배하는 단 하나의 단일 국가였지. 그것만으로 많은 게 설명되지 않는가?
등등등.
조용히 팔짱을 끼고 생각에 잠긴 나는 아스트레이의 말을 한귀로 듣고 한귀로 흘렸다.
옆에 있던 한수아도 마찬가지였는데, 이 관심 없다는 너무나도 노골적인 우리의 태도에도 아스트레이는 전혀 굴하지 않았다.
마치 그냥 의무처럼.
그러니까 그냥 해야 하는 것처럼 그는 계속해서 말했다.
마테리아 제국은 어쩌고, 당시에 있었던 마도포의 위력이 어느 정도였는지, 심지어 시련자에 대한 이야기까지.
그러다 마테리아 제국의 멸망을 말하며 모두가 기억을 잃었다는 그 부분에서 나는 끼어들었다.
“기억을, 잃어?”
-앵무새처럼 떠들기만 했는데 이제야 관심을 가져 주는구먼. 그렇다네. 모두가 기억을 잃었지. 옆에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도 모른 채 그냥 먹고, 싸고 자고, 그게 끝이었지.
“그게 가능한가?”
-정말 안타깝지만 실제로 가능했다네. 말 그대로 주민들은 그냥 ‘사는 것’에만 목적을 두는 존재가 되었고 그 외의 부가 가치, 그러니까 문화, 예술, 경제, 사회. 이런 것들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을 두지 않았지. 그냥 숨만 쉬면서 살아가는 인형. 그래 인형, 대륙의 주민들을 표현하는 데에 그만한 비유가 필요 없을 정도야. 딱 인형이었어.
세월의 돌이라는 보석을 손에 쥔 채로 이리저리 굴리던 내게, 아스트레이가 떨어진 흥미를 되찾게 해주겠다는 듯이 내가 관심 가질만한 이야기를 꺼내들었다.
-그대 이전에 그 상자를 찾았던 레이놀즈라는 남자는 내 이야기에 충격을 받더니 결국 이 세상은 멸망하니 어쩌니, 결과가 정해져있는 가공품이니 뭐니, 그런 소리를 하다가 나를 그대로 이곳에 처박아버리더군.
대충 짐작이 가기 시작했다.
나는 슬며시 인벤토리에서 군자검을 꺼내들었다.
이놈이 보여준 그 과거 속에서 레이놀즈가 왜 그런 짓을 했는지 나름대로의 설명이 되고 있었다.
그런데, 군자검을 본 아스트레이의 눈동자가 살짝 변했다.
-...그 남자가 가지고 있던 검이군.
계속해서 군자검에 머물던 그의 시선이 조용히 내 쪽으로 옮겨진다.
-...설마 그때 그 남자의 ‘명령’으로 온 것인가?
명령?
이 양반이 생각만 해도 엿 같은 소리를 하고 있네.
“내가 그럴 놈으로 보이나?”
아스트레이가 미심쩍은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한다.
-그거야 모를 일이 아닌가.
“됐고, ‘포효하는 격류의 절벽’, 알아 몰라?”
아스트레이가 조용히 내 말을 곱씹는다.
-포효하는 격류의 절벽이라...
잠깐 생각하던 아스트레 이가 빙긋 웃으며 말한다.
-이름만 들어서는 자세히 모르겠지만 짐작 가는 게 한두 군데 있긴 하네. 그런데 미심쩍은 게 많아서 꽤나 애매하구만.
“미심쩍다고?”
아직도 나를 레이놀즈의 하수인으로 보고 있는 걸까.
살짝 기분이 상해지려던 그때 아스트레이가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말한다.
-이런, 내 말을 오해한 모양이군. 그대가 그때의 그 남자와 다르다는 것을 알아. 그 남자는 그게 무엇인지 확인조차 하지 못했으니 그대가 그 남자보다 훨씬 강하거나, 무언가가 월등하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내가 세상을 오래 살지는 못했지만 무언가 뛰어난 사람이 자기보다 모자란 사람의 아래에 있는 경우는 본적이 없어. 내가 미심쩍다고 한 말은 내가 그 장소를 직접 가봐야 한다는 말을 하려는 것이었네.
“그게 미심쩍다는 단어를 쓸 만한 상황인가?”
의문스러운 내 질문에 아스트레이는 망설임 없이 답했다.
-일단 나는 마테리아라는 제국의 이름을 잊히지 않게 할 사명이 있어. 그대가 내게 하나만 약속해준다면 나는 내가 아는 모든 지식을 총 동원해서라도 그대를 도와주겠네, 어떤가?
“약속의 내용이 뭔지 들어보고 판단해야 할 것 같은데.”
-별거 없네. 그저 그대가 방금 말한 ‘포효하는 격류의 절벽’을 찾게 된다면, 나를 다시 원래 자리에 묻어주게.
무언가 말하려다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거참, 대신 관 뚜껑 닫아 달라는 게 부탁이라는 표현을 쓸 정도의 일인지 그 단어의 정의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되는 순간이었다.
-말하지 않았는가. 나는 사명이 있다고, 마테리아라는 제국의 존재를 잊히지 않게 하는 것이 나의 사명, 나는 이곳에서 그대처럼 후에 이곳을 찾게 될 다른 이에게 마테리아 제국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어야하네 .
“그게 의미가 있는 일인가? 그냥 사람들이 많은 도시 쪽에 자리 잡아서 이야기를 퍼트리면 될 일이잖아.”
아스트레이가 어색하게 웃는다.
-나는 자세히는 모르지만, 나를 찾아올 이들은 적어도 그대처럼 힘이 있는 이들이거나 무언가를 찾으려는 이들이라고 생각하네. 그게 고고학자건, 시련자건 그런 건 중요하지 않지. 그런 ‘극소수’에게 이야기를 남겨준다면 그게 어떤 식으로든 세상으로 퍼져 나갈 것이라고 나는 믿어.
“그러니까, 그 일을 네가 직접 하면 되잖아. 왜 남한테 일을 떠넘기는 건데?”
-나는 과거의 망령, 육체조차 잃고 남은 사념만이 존재하는 내가 세상에 등장한다면 그것은 세상의 균형을 깨는 일, 그 상황을 시스템과 아스가르드의 신들이 가만히 두고 볼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네. 적어도 지금의 내 행동은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마지노선. 나는 이곳에서 기다릴 것이네. 그게 십년이 지나건, 백년이 지나건, 후에 이곳으로 올 이에게 잊힌 국가의 존재를 알리는 것. 그거면 나는 충분하네.
나는 마테리아라는 국가에 대해 관심을 둔 적이 없었다.
솔직히, 지금 아스트레이의 말을 들어도 그다지 관심이 생기지 않는다.
이미 짐작했던 일이니까.
발바라 대륙은 판테온 제국이 지배하고 있었다.
그리고 판테온 제국이 건국된 과정들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지만 그에 대해 남은 기록이 전무했다.
심지어 판테온 제국 이전에 존재했던 국가의 이름이나 지명이나, 이런 것들이 아예 존재하지 않았고 알고 있는 이들도 없었다.
이것은 아스가르드의 초월자들이 개입했다는 명백한 증거이자 여화 쪽에 속해있는 레이놀즈가 자신의 ‘위명’을 높이기 위해 여화와 거래를 한 결과물이다.
그게 지금의 발바라 대륙이다.
그 이전에는 없었을까.
뻔하다.
시련이라는 것은 툴칸이 그랬듯 고대라는 단어를 써도 부족함이 없었다.
이 모든 것은 결국 힘을 가진 신을 만들어내기 위한 과정일 뿐이며, 시련자들은 결국 기회를 얻은 이들에 불과하다.
그들이 그 기회를 잡아채게 될 무대가 필요했었고 그 무대는 결국 만들어질 수밖에 없다.
마테리아 제국이 그랬고, 판테온 제국이 그러했으며, 내가 알지 못하는 먼 세상에서의 시련자들, 그러니까 여화나 천군이 겪었을 초기의 시련들도 아마 이런 식으로 진행되었을 확률이 높다.
솔직히 여기에 깊은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었다.
이건 그냥 아스가르드의 ‘힘’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으니까.
내가 지금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항은 따로 있었다.
바로 눈앞의 아스트레이.
상자에서 피어나온 빛을 매개체로 허공에 둥둥 떠 있는 유령 같은 이 남자가, 생각보다 마음에 든다.
사명이라.
이미 죽었지만 시간의 흐름을 느끼는 그가 또 다시 자기를 바닥에 묻어달란다.
이유는 앞서 말했듯 멸망한 자신의 국가의 존재를 알리기 위해.
힘이 있는 한 존재나, 자신을 찾게 될 이에게 그저 존재를 알리는 것,
아스가르드의 신들이 개입하기도 애매하고, 시스템이 뭐라고 하기도 애매한 그 최적의 마지노선.
그 선에 걸쳐진 상태로 아스트레이는 자신의 사명을 묵묵히 따라가고 있었다.
소박한 사명이지만 정말이지...
“재미있네.”
-그 말은 내 제안이 마음에 든다는 이야기로 해석해도 된다는 이야긴가?
“그래, 그렇게 해석해. 바로 시작하자. 짐작 가는 곳이 어디라고?”
슬며시 기운을 퍼트리며 아스트레이의 상자를 감싸자 그 상자와 아스트레이가 동시에 하늘로 떠오른다.
-꽤나 시원시원한 남자군. 일단 이곳에서 직진하시게.
인간 내비게이션이 떠오르는 것은 내 착각일까.
한수아와 나란히 선채로 걸음을 옮겼다.
옆에서 아스트레이가 내비게이션 역할을 해주는 그 일련의 상황이 계속 이어질 때, 나는 생각했다.
지금의 이 시련은 어차피 마지막 시련이다.
이 시련이 끝나는 순간 신의 자리를 놓고 초월자들 간의 거대한 전쟁이 벌어진다.
그 결과가 내 패배로 끝난다면 발바라 대륙은 물론 우주 전체가 멸망한다.
천군이든 여화든 미친 건 똑같았고 솔직히 발락투스도 그다지 믿음이 가질 않는다.
이 믿을 놈 하나 없는 세상에서, 멸망한 자신의 국가를 알리기 위해 스스로를 희생하는 아스트레이 같은 남자는 이 세월의 돌보다도 더 빛나는 보석처럼 보이고 있었는데...
‘복잡하네...’
내가 아는 이 사실들을 아스트레이에게 알려줄까 고민하다 그냥 고개를 저었다.
일단은 정령도부터 가자.
인재 영입이든 뭐든 이딴 것들은 지금 생각할 일이 아니었으니까.
내 발걸음에 조금씩 힘이 실리기 시작했다.
**
아스트레이의 안내는 생각보다 꽤 정확했다.
이곳이 아무리 눈보라가 항상 휘몰아치는 북부이긴 하나 세월의 흔적은 절대로 무시하지 못한다.
그런데도 아스트레이는 망설임 없이 방향을 지시했고 결국 그 방향 끝에는 ‘포효하는 격류의 절벽’이 존재했다.
눈은 그친지 오래였고 북부와 중부, 그 사이에 위치하는 그 정중앙에 거대한 호수가 있었으며 그곳으로 폭포가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마치 나이아가라 폭포의 업그레이드 버전 같다고 해야 할까.
“와아..."
콰과과과과과-!!
계속해서 휘몰아치는 포효 같은 폭포 소리에 한수아가 나지막한 감탄사를 내뱉는다.
-이곳이 바로 자하 폭포라네, 북부 지명인 자하도 원래는 이곳에서 따온 것이지.
아스트레이의 자세한 설명이 이어진다.
-원래는 세 개의 대형 폭포와 하나의 소형 폭포가 있었는데, 이제는 두 개의 대형 폭포만 남았군.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흘렀어... 잠깐 회상에 젖던 아스트레이가, 퍼득 정신을 차리더니 내게 묻는다.
-이곳 말고 반대편 쪽에는 엘레인 폭포라고 있는데, 아무래도 지형이 약간 바뀐 걸로 보아 그쪽은 사라졌을 확률이 높아. 아무리 봐도 이곳이 ‘포효하는 격류의 절벽’인 것 같군. 어떤가?
생각보다 아스트레 이가 꽤나 유능하다.
아마 이 남자가 없었더라면 나는 조금 시간을 낭비했어야할지도 모른다.
조용히 품에서 [세월의 돌]을 꺼내들고는 폭포 쪽으로 다가갔다.
-...나도 가야하는가? 저 폭포에 맞으면 상자가 부숴 질 것 같은데...
귀기를 살짝 끌어올려 아스트레이의 상자를 감싸주자 그제야 그가 안도의 한숨을 내뱉는다.
나는 한수아와 함께 상자를 들고 폭포의 정 중앙으로 향했다.
보면 볼수록 아름답다.
아니 경이로웠다.
하지만 지금은 감상에 젖을 때가 아니다.
나는, 세월의 돌을 조용히 폭포 쪽으로 이동시켰다.
돌과 폭포가 맞닿는 그 순간.
파아아아앙-!!!!
기묘한 파공음이 울려 퍼지더니, 주변에 있던 모든 게 멈췄다.
옆에 있던 한수아도 멈췄고, 아스트레이도 멈췄으며, 떨어져 내리며 포효 소리로 폭포의 존재를 마음껏 뽐내던 물도, 모든 게 멈췄다.
이어서, 빛무리가 나를 감싸기 시작했고 나는, 그대로 ‘어딘가’로 이동되었다.
**
눈을 뜨자마자 눈앞에 슈샤이어를 데려갔던 그 ‘엘프’가 보였다.
“생각보다 빠르게 오셨군요.”
주변을 둘러볼 새도 없었다.
“따라오시죠. 그분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계속 그분그분 하니까 듣기 좀 애매해지는데, 그 균형자는 이름이 없나?”
내 말에 엘프가 작게 웃는다.
“직접 들으세요. 그리고... 아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왜 이렇게 내 주변에는 자꾸 말을 하려다 마는 이들이 계속 나타나는 걸까.
“왜 말을 하다 말지? 내가 들으면 안 되는 말인가?”
“...그런 건 아닙니다만.”
“그럼 뭐 그냥 말을 하는 게 낫지 않을까 싶은데.”
존칭을 쓰는 것도 그렇다고 낮추는 것도 아닌 내 말에 그 엘프는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그저 조금 고민스러운 얼굴로 5초 정도를 고민하더니 내게 말했다.
“아수라의 시련이 어떤 식인지 저는 모릅니다. 하지만 이번 시련은 아무리 봐도... 통과하기 어려우실 것 같네요."
“...뭐?”
엘프는 그 말을 끝으로 그대로 몸을 돌렸다.
그런 그녀의 뒷모습이 내 시야에 한가득 들어온다.
거참.
대체 뭔데?
뭐길래 이렇게 궁금증을 유발시키는 건데?
대체 어떤 떡밥을 뿌리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