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를 한다는 건-93화 (92/131)

93화.  < 정령도 (1) >

뒤쪽에서 울려 퍼지는 굉음이 꽤나 살벌하다.

옆구리에 한수아를 낀 채로 무려 20km는 넘게 이동했지만 굉음이 계속 이어지는 게, 확실히 기술 하나는 제대로 만든것같은 기분이다.

그렇게 약 10km정도를 더 이동한 나는 한수아를 내려놓았다.

그녀가 붉어진 얼굴로 나를 바라본다.

마치, 감동받은 것 같은 표정이다.

그녀가 무언가 말하려했지만 고개를 저었다.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까.

대충 한수아를 향해 눈짓하자 그녀가 뒤로 물러선다.

정확히 다섯 걸음 정도 물러서는 게 만족스럽지가 않다.

모자라다는 눈짓을 한 번 더 보내자 그녀가 더 멀찍이 떨어진다.

그때였다.

파아앙-!

터져 나오는 파공음에 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온몸에서 새하얀 기운을 뿜어내고 있는 슈샤이어가 보인다.

솔직히 조금 놀랐다.

귀기의 기운을 나름대로 극한까지 끌어올려서 일시에 터트렸는데 그 실드라는게 생각보다 단단한것같다.

무엇보다 약간 지쳐 보이는 것 같은 슈샤이어의 모습에 그 기술이 꽤나 큰 힘을 소모하는 것이라는 합당한 추측이 가능했다.

[...네놈은 대체 무엇이냐.]

거리가 꽤나 먼 것이 분명했지만 의미는 없었다.

놈이나 나나, 이미 보통이라는 상식을 뛰어넘은 지 오래니까.

서로에게 있어서 이 정도의 거리는 의미가 없었다.

나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알아서 뭐하게?”

으음..

아무래도 조금 더 새로운 기술이 필요할 것 같다.

[크아아!!]

놈이 포효를 내지른다.

처음에 봤을 때는 꽤나 신기한 생명체구나 싶었는데 하얀 기운을 뿜어내며 번들거리는 붉은 두 눈동자로 나를 노려보는 게. 이상하게 몬스터를 보는 것 같은 기분이다.

이어서 콰앙 하는 소리와 함께 놈이 나를 향해 달려든다.

나와 놈의 거리가 대충 5초 정도가 흐르자 제로가 되었다.

잔보를 펼치며 회피하고, 천천히 놈의 주변을 돌았다.

이어지는 슈샤이어의 앞발과 뒷발, 꼬리까지.

삼연타로 이어지는 공격들을 깔끔하게 회피한 나는 생각을 멈추지 않았다.

일단 내 눈에 보이는 단단한 놈의 가죽, 그 겉에는 생채기가 없었다.

내가 쏘아 보낸 7개의 폭기는 무려 산 하나를 무너트렸고 그 주변을 완전히 초토화시켰다.

이걸 범위로 표현한다면 아마 못해도 반경 20km정도는 되지 않을까.

지금 귀신 상태의 내 신격을 어림잡아 6성 정도.

그런데 5성의 초월자가 펼친 ‘실드’를 뚫지 못했다는 건 동급의 대상에게도 통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빠르게 결론이 내려진다.

이 폭기는 일종의 양민학살용 기술로 사용해야 할 것 같고. 그렇다면..

'단일 대상을 저격하는 기술을 만들어보자.’

광역기술은 이제 필요 없다.

하나면 충분했으니까.

고개를 뒤로 젖히고, 몸을 옆으로 틀자 놈의 앞발이 코앞을 스쳐지나간다.

놈의 공격 패턴은 이미 외운지 오래다.

기회를 틈타 귀기를 끌어올렸다.

후웅-!

작은 바람이 휘몰아치며 허공에 기운이 뭉친다.

이변이라고 생각한 걸까.

슈샤이어가 꽤나 난폭해진다.

콰앙-!! 콰아앙-!!

더 빨라진 놈의 공격이 계속해서 이어질 때마다 땅이 터져나간다.

말이 쉽지, 이게 실제로 터져나가는 범위가 어마어마했다.

한번 휘두를 때마다 거의 반경 수백 미터가 초토화 되고 있었으니까.

바하로사 따위는 명함도 못 내밀 정도다.

허공에 뭉쳐지던 기운에 의념을 보냈다.

‘길어져라.’

놈과 나의 머리 위, 정확히 30여 미터 정도의 높이에서 검은색의 긴 막대기가 장막을 걷어내듯 천천히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길이는 약 2m, 긁기는... 굳이 말로 표현하지 못할 정도로 작다.

실선 정도라고 해야 할까.

기운을 더, 보냈다.

쿠구궁-!

2m의 길이가 10여 미터로 늘어나고 긁기가 무려 50cm 정도의 크기로 변했다.

어마어마하다.

슈샤이어가 하던 공격도 멈추고 고개를 치켜들 정도로 그 위압감이 장난이 아니었다.

검은 창.

위에서 아래를 바라보는 창날은 날카롭고 무엇이든 뚫고 찢어 버릴 정도로 예리했다.

내 입으로 말하긴 그렇지만 디자인이 꽤나 볼만하다.

슈사이어의 한눈이 팔린 사이, 나는 뒤로 몸을 빼냈다.

이어서.

‘내려 꽃혀라.’

짧은 의념을 보내자 검은 창이 밑으로 수직 낙하한다.

그 목표는 정확히 슈샤이어.

피하려는 걸까.

이번에도 슈샤이어가 몸을 틀려는 모습이 보인다.

그런데 피할 수 있을 리가 없다.

놈은 그냥 내 연습상대에 불과했으니까.

슈샤이어가 뒤늦게나마 실드를 치던 그 순간 검은 창이 내리꽃혔다.

콰아아아아앙-!!!

***

정령계를 거닐고 있던 한 여인이 조용히 고개를 들었다.

“...알겠습니다.”

누군가 대화하는 걸까.

분명 혼자 있을게 분명하지만 그녀는 누군가와 대화를 주고받는 모습이었다.

“그렇게, 처리하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그녀는 천천히 손을 휘저었다.

눈앞에 공간이 일그러지며 기이한 통로를 만들어냈고 그녀는 그 통로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

굉음이 울려퍼진다.

상황은 간단했다.

나는 귀기로 뭉친 검은 창을 만들었고 그것으로 슈샤이어를 내려찍었다.

띠링!

[신화 스킬 ???를 획득하셨습니다.]

[당신은 이레귤러입니다.]

[신화 스킬 ???가 삭제됩니다.]

이제는 익숙한 알림음이다.

아무래도 이 기술을 만든 건 내가 최초인가보다.

무시하고 상황을 살폈다.

코앞에 지름 300미터 정도의 거대한 구멍이 뚫려있었는데 분명히 저곳은 슈샤이어가 자리해있던 곳이고 내가 창을 내려찍은 자리다.

살짝 자리를 박찬 뒤 허공에 뜬 상태로 그 구덩이를 살폈다.

깊이는 약... 30km?

잘 모르겠다.

그나마 확실한건 세월의 흔적이라고 해야 하나.

단층마저 보이는 게 생각보다 이거, 어마어마한 위력이다.

그 끝에는 복부가 훤히 뚫린 채로 몸을 떨고 있는 슈샤이어가 보인다.

그 이상의 움직임이 없는 걸로 보아 빈사 상태가 확실하다.

승부가, 끝났다.

이제야 제대로 된 대화가 가능하겠네.

그나저나 생각하면 할수록 이 검은 창이 마음에 든다.

자주 쓸 거 같은데 폭기처럼 이름을 붙여 주는 게 좋을 것 같다.

뭐라고 붙여볼까.

검은 창은 임팩트가 없다.

한곳에 기운을 응축시키고, 단순히 ‘관통’을 목적으로 한곳에 내려찍히는 창...

마치, 고대의 신화 속에서 신들이 벌을 내리던 창이 떠오른다.

거기다 기분 탓인지 몰라도 귀기 자체가 ‘파괴’의 속성을 띄고 있는 것 같다고 해야 하나.

오로지 부수는 것에 특화되어있는 기술..

그래, 신의 창.

신의 창이 괜찮겠다.

피식 웃고는 슈샤이어를 향해 몸을 옮기려던 그때.

찌이잉-!

기이한 이명음이 들려오고, 코앞에서 또 다른 ‘정령계의 통로’가 생겨난다.

의문을 품을 새도 없이 일단 자리를 박차 거리를 벌렸다.

그 안에서 천천히 누군가 모습을 드러내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나는 눈매를 좁혔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은발머리가 찰랑인다.

거기다 하늘을 향해 길게 솟아 있는 양쪽 귀.

외모는 여화나 한수아와 비견될 정도로 아름다웠으며 완벽한 S라인의 몸은 그 이상의 설명이 불필요할 정도였다.

확실하다.

저 여자, 엘프다.

그 엘프가 순백색의 드레스 같은 것을 입은 채로 나를 바라본다.

맑고 투명한 눈동자가 나를 꿰뚫는 것 같다고 해야 할까.

그녀가, 높낮이 없는 어조로 말했다.

“시련자 이도, 아수라에게 인정받은 초월자. 맞습니까?”

분명 저 통로는 정령 소환술로 만들어진 통로와 흡사했다.

아니 똑같았다.

내 짐작이긴 하지만 슈샤이어가 말한 나머지 한 개의 기둥이 아마 저 엘프가 아닐까 싶다.

그런데 싸우려는 게 아닌 걸까.

분명히 그녀의 밑에서는 복부가 꿰뚫린 슈샤이어가 애처롭게 몸을 떨고 있었는데, 거참. 이것들은 동료의식도 없나.

“그분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분?”

“당신이 하려는 일을 막지 말라고, 당신이 하려는 일들을 오히려 도와주라고.

'..."

아무래도 저 그분이라는 게 정령도의 주인인 균형자를 뜻하는 것 같은데.

저 말이 뜻하는 건 간단했다.

나를 직접 보고 싶어 한다는 거.

“그리고…”

그녀가 잠시 아래를 내려다본다.

슈샤이어를 바라보는 걸까.

“저 아이는 여러모로 매우 부족한 아이입니다. 그러니 방금 전까지 있던 일들은 그냥 잊어 주시는 게 어떨까 싶은데, 괜찮으시겠습니까?”

생각보다 예의가 바르다.

슈샤이어는 자기 입으로 수천 년을 살아왔다고 했는데 부족한 아이라는 건...

‘얘는 그럼 몇 살이라는 건데?’

나이가 한 열 살 스무 살 정도 많아서 나보다 확실히 연장자구나 싶을 정도라면. 솔직히 소천과 같은 경우가 아닌 경우에는 나도 초면에 말을 낮추지는 않는다.

그런데 최근에 와서는 무슨 나이의 기본 단위가 수백에서 수천이니 이제는 도저히 어떻게 반응해야할지 모르겠다.

말을 놓아야하나 말아야하나.

대충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가 묻는다.

“이야기는 짧게 들었습니다. 정령도로 가는 길을 찾으시려고 하신다고.”

“맞아’’

잠깐 나를 바라보던 그녀가 물었다.

“정령들만 필요하신 겁니까?”

무심결에 고개를 끄덕이려다 흠칫했다.

구체적인 말이 아니라 이렇게 애매한 말은, 내가 뒤통수를 하도 맞아봐서 그런 건지는 몰라도 묘하게 경계심이 생긴다.

혹시 말 그대로 정령만 보내서 구경시키거나 하는 그런 경우가 생기지 않을까.

이거 내가 너무 예민한 건가.

정령들만 필요한 게 아니라.

“그 정령들도 필요하고, 걔들이 여기 한수아의 명령을 들어야지. 그러니까... 절대복종.”

그녀가 잠시 한수아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그리고는 나조차도 감탄할만한 싱그러운 미소를 피우더니 고개를 끄덕인다.

이어서 그녀가 손을 가로로 휘젓더니 정령계의 통로에서 마치, 막힌 둑이 터지듯 어마어마한 수의 정령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정말로 어마어마했다.

수백, 수천씩 나오던 이들이 수십만 이상의 숫자를 채우는 것은 거의 찰나의 순간 벌어진 일.

“그럼, 정령도에서 뵙겠습니다.”

무심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잠깐.

정령도에서 보자고?

무언가 말하려던 그때, 그녀와 슈샤이어의 몸이 그대로 사라진다.

나는 잠깐 멍하니 서있었다.

‘이것저것 묻고 싶은 게 많았는데 그냥 가버리네..’

조금 당황스럽다.

고개를 돌렸다.

언제 다가온 걸까.

한수아가 내 옆에 서있었는데 정말이지, 엘프에 밀리지 않을 정도의 외모라니.

보면 볼수록 신기할 정도다.

“일단 판 마련해줬으니 시작하자.”

“어떤 물건을 찾으시는 건데요?”

곰곰이 생각했다.

군자검이 내게 보여주었던 그 ‘과거’에서 레이놀즈는 작은 상자를 북부에 파묻었는데, 그 상자 안에 있는 내용물이 열쇠일 확률이 높다.

그러면 그 상자를 찾아야하고 그 주변을 찾아야하는데...

한손으로 턱을 짚고 잠깐 사방에 떠있는 수십만 개체의 정령들을 눈에 담았다.

아름다운 건 둘째 치고, 이 정도의 숫자라면 많은 키워드는 필요하지 않을 터.

“무너진 석벽의 흔적, 그리고 붉은색 모양의 작은 상자, 그리고 거대한 참격의 흔적. 이 세 가지를 찾으라고 해봐.”

한수아가 고개를 끄덕이고 정령들에게 내 말을 그대로 전한다.

이내, 수십만 개체의 정령들이 사방으로 뻗어져나가기 시작했는데 이상하게 여기 와서 눈 호강을 하는 기분이다.

그렇게 한수아와 잠깐 동안 말없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약 3분의 시간이 흐르자.

“찾았대요.”

벌써?

확실히 물량이 좋긴 좋나보다.

이제, 진도를 조금 빠르게 빼보자.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