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를 한다는 건-92화 (91/131)

92화.  < 그래서 어쩌라고?(3) >

턱하고 책장이 덥힌다.

성미령은 떨리는 눈으로 책의 뒷면에 적혀있는 문구를 읽었다.

-마테리아 황실 수석 서기관 아스트레이.

저자의 이름이 보인다.

그리고 그 밑에.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친 검신 여천에게 이 책을 바친다.

성미령은 혼란스러웠다.

[천상의 학살자가 조용히 눈을 감습니다.]

떠오르는 메시지는 신경 쓰이지 않았다.

이미 이 책을 읽을 때부터 저 천상의 학살자는 계속해서 메시지를 보내고 있었으니까.

그보다 더 신경 쓰이는 것은 하나였다.

책의 내용.

성미령은 소감을 깔끔하게 한 단어로 정리할 수 있었다.

매우 충격적이다, 라고.

“시련이라는 게... 우리 세상뿐만이 아니라 다른 세상에도 계속해서 벌어지던 일이었어?”

끝이 아니었다.

“...영체 상태? 죽어도 원래 세계로 돌아가?”

혼란스러운 수준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이 시련을 겪으면 죽은 시련자들은 실제로 죽은 게 아니라는 말이다.

이도는 그 사실을 알고 있던 걸까.

성미령은 가끔 이도에게 질문을 던졌었다.

시련자들을 죽인 것을 후회하지 않냐, 혹은 왜 죽여야 했나.

그런 질문에 이도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따라 올 거면 따라오고 아니면 말라는 식의 단순한 논리와 행동.

성미령은 이제야 이도의 행동에 대해 이해할 수 있었다.

이도는 분명히 이 사실을 알고 있다.

책상에 책을 내려놓은 성미령이 조용히 한숨을 터트린다.

복잡한 머리를 환기시키고 싶지만 마땅한 수단이 없었다.

이어서 또 다른 의문이 떠올랐으니까.

이도의 말대로 황궁의 도서관에서 책을 읽는 것에 시간 대부분을 보냈던 성미령은 거대한 의구심을 품고 있었다.

이 거대한 발바라 대륙에는 치명적인 모순이 있었다.

그 모순은 철저하게 현재가 아닌 과거로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이 책의 내용에 나와 있듯, 바로 마테리아 제국, 그게 모든 의문의 시발점이었다.

결론만 말하자면 마테리아 제국은 멸망했다.

그리고 그게 전부였다.

왜 멸망했는지, 심지어는 마테리아 제국이 있었던 시절의 지명이라던지 이런 것들이 발바라 대륙에는 아예 존재하지가 않았다.

분명 제국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던 국가가 그저 이름만 전해지고 남겨진 기록물이 전무하다는 것이, 이게 말이나 되는가.

심지어 전해지는 이야기도 너무나도 간결했다.

마테리아라는 제국이 ‘고대’에 존재했고 그 제국은 ‘그냥’ 멸망했다는 이야기. 심지어는 그냥 ‘자멸’했다는 이야기.

그게 끝이었다.

세세한 내부 사정이 전혀 알려지지 않았는데.

솔직히, 이건 어떻게든 그러려니 하고 넘어갈 수 있었다.

국가가 만들어진다면 그 전의 역사를 지우는 것은 승자들의 권리가 분명했으니까.

다만 그 권리가 조금 도를 지나쳤구나 하는 나름의 합리화는 가능했으니까.

하지만 이후의 ‘공백기’, 그리고 그 다음 등장한 판테온 제국의 사정은 그 의문을 다시 생각하게 만들었다.

판테온 제국의 건국은 생각보다 일사천리로 이루어졌다.

과거 ‘대륙 전쟁’이 벌어졌으며 그 대륙을 통일한 레이놀즈라는 인간이 자신의 이름을 따 제국을 건국했다는 사실. 그게 전부였으며 그 이전에 존재했던 대륙의 상황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려지지가 않았다.

나름 황녀이자 과거의 성녀였던 엘리자베스를 비롯해 행정청의 고위 행정관들. 심지어는 일반인들마저 그 전의 역사를 모르고 있다는 게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으며 그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을 대륙의 당사자들은 전혀 의구심을 품고 있지 않았다는 그 사실에 성미령은 소름이 돋았었다.

정말 잠깐이지만 이렇게 생각했었다.

이쪽은 지구와 다르니까, 이들의 사고방식은 우리와 다르구나.

분명 오판이고, 말 같지도 않은 결론이었다.

그리고 지금, 성미령은 소름이 돋은 상태였다.

마치 알아서는 안 되는 진실을 알게 되었다고 해야 할까.

그녀가 조용히 눈을 감는다.

책은 철저하게 보고서 형식으로 적혀있었으며 그 보고서는 마테리아제국의 시련자들이 겪었다는 ‘시련’의 이야기와 제국의 세세한 사정들이 끝이었다.

정확히 마지막 10페이지를 제외하고 말이다.

아스트레이는 마지막에 와서 보고서의 형식을 버리고 회고문의 형식으로 글을 남겼다.

그 내용 중 몇 가지 구절이 성미령의 머릿속을 어지럽힌다.

‘제국민들이 이상해진다. 옆에 있는 이가 누구인지 모르고, 우리가 소속된 국가의 이름을 잊어가고 심지어는 시련자라는 우리를 구원 할 영웅들을 잊어가는 그 사실이 나는 무섭다.’

‘이것이 멸망의 전조 인 것인가. 그렇다면 왜 우리는 멸망해야 하는가. 합당한 이유라면 받아들일 수 있다. 하지만 기억을 잃어가며 자연스럽게 멸망한다는 것은 너무하지 않은가.’

‘신이란 죽은 걸까.’

‘신이라는 존재는 대체 왜 우리에게 이런 시련을 내리는 걸까.’

‘가장 강한 시련자였던 여천이 말하기를 지금의 이 모든 일은 결국 후에 벌어질 새로운 에피소드를 대비한 사전 작업이라고 했다.’

‘그는 말했다. 마테리아라는 제국의 존재를 잊히게 하지 않을 것이라고.’

‘나는 그 방법을 물었고 여천은 대답했다. 아스가르드를 멸망시킬 거라고.’

자세한 내부 사정은 잘 모르고 있었지만 성미령은 이 순간 아스트레이의 감정을 너무나도 세세하게 느낄 수 있었다.

'...여천이 죽었다.’

‘홀로 수십 마리의 드래곤을 죽이긴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그의 시체조차 찾을 수가 없었다.’

‘나를 제외한 모두가 기억을 잃었다. 나는, 내가 해야 할 일을 알 수 있었다.’

‘남기자. 마테리아 제국의 흔적을,’

성미령이 천천히 눈을 떴다.

결론은 간단했다.

이 책에 등장하는 아스가르드의 ‘신’들. 그들이 이 대륙의 사람들에게 ‘기억의 소거’와 ‘인지의 부조하’를 일으켰다.

그리고 그건 판테온 제국이 건국되던 당시에도 벌어진 일이다.

문득 의문이 든다.

‘역사를 지우고 사람들의 기억을 조작해서 국가를 만들었어? 대체 왜?’

깊게 생각 할 필요가 없었다.

그 이유도 아스트레이는 적어주었으니까.

“우리가 알고 있는 이 발바라 대륙은 전부...”

성미령은 그 이상 말을 하고 싶지가 않았다.

믿고 싶지 않은 진실이었고, 혹시라도 엿듣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에게 이 사실은 너무나도 거대한 충격으로 다가올 것이 확실했기에.

하지만, 결국 성미령은 입 밖으로 내뱉고 말았다.

“여기는 그저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무대였어...”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불행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황궁 도서관에는 성미령 혼자만 존재했으며 그 말을 들은 이도 없었다.

성미령은 순간 어마어마한 공포감을 느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상황이, 그렇게 돌아가고 있었으니까.

아스가르드의 신들은 필요에 의해 대륙 주민들의 기억을 지웠다.

기억을 잃은 존재를 어찌 살아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까.

마테리아 제국의 상황으로 미루어보면 현재 대륙민들은 마테리아 제국민들의 후손이다.

하지만 그들은 마테리아 제국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며, 그냥 멸망한 나라구나 싶은 그런 마음밖에 없다.

그 당시의 제국민들이 어떤 최후를 맞이했는지도 모른다.

성미령이 지금 읽고 있는 이 책에도 마테리아의 최후에 대한 이야기는 적혀있지 않았다.

그렇다면, 마테리아가 아닌 지금 유토피아 제국의 상황은?

당연히 모든 일은 현재 진행형이다.

그들의 길을, 현재의 대륙민들은 따라갈 것이다.

말도 안 되지만 분명 이건 현실이었다.

이 대륙은 만들어졌다.

또한 이 대륙의 모든 주민들은 단순히 운영자 같은 위치의 시스템이 필요에 의해 없애거나, 감정을 조절하거나, 기억을 주입시키는 그런 인공지능 인형에 가깝다.

...공포 수준이 아니었다.

미지.

미지와 조우 한다면 이런 느낌이 들지 않을까.

성미령은 그렇게 한동안 의자에 앉은 채로 멍하니 책을 응시했다.

**

[왜 아무 말이 없는가.]

상념에서 깨어났다.

먼저 거래를 제시한 것은 나지만, 이런 대가를 원할 줄은 몰랐다.

한수아를 달라고?

그리고 한수아는 저 슈샤이어란 놈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면서 그저 자기가 없어지거나 죽었을 경우를 가정하고 내게 부탁하는 이 상황.

웃음이 터져 나오는 것과 동시에 눈앞에 있는 슈샤이어가 바하로사와 겹쳐 보이기 시작했다.

대화가 가능할거라고 생각한건 내 착각이었던 걸까.

생각을 이어가려던 그때 한수아가 조용히 고개를 돌리더니 놈을 향해 걸음을 옮긴다.

그녀가 한걸음 내딛고, 또 한걸음 내디뎠을 때 나는 반응했다.

손을 뻗어 그녀의 어깨를 잡아채자 그녀가 고개를 돌린다.

우리의 눈이 마주치고, 이내 그녀의 눈동자가 놀람으로 살짝 크게 떠진다.

“기억하냐고? 그럼 너는?”

“네?”

“내가 했던 말, 나랑 함께하겠다는 이들을 나는 무조건 살려서 지구로 데려갈 거라는 그 말 기억하냐고.”

고작해야 몇 시간 전에 했던 말이다.

그녀가 기억하지 못할 리 없었다.

한수아가 떨리는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일단 무시하고는 슬며시 고개를 돌렸다.

슈샤이어가 붉은 눈으로 나와 한수아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 안에 담긴 감정이 도저히 읽혀지지가 않는다.

그런데, 생각을 하면 할수록 상황이 참 묘하다.

나는 적어도 보통 사람이 생각할만한 상식선에서의 요구를 했다.

그냥, 어떤 물건 좀 찾으려하는데 거기에 도움을 좀 달라.

싸울 일은 없고, 원하면 감시도 해도 된다.

아니, 이 간편한 부탁의 대가가 ‘내 사람’의 생사여탈권이라고?

그건 대체 어느 나라의 계산법인가.

이건 나를 좁밥 내지 그냥 병신으로 보고 있는 수준이 아닌가.

나는 분명히 말도 안 되는 속도로 성장을 하고 있는데, 왜 이렇게 자꾸 말도 안 되는 선택지를 놓고 고민을 해야 하는 걸까.

에휴.

이 이상 대화는 불필요할 것 같다.

짜증나서 안 되겠다.

새끼가.

“일단 좀 맞자.”

[...뭐?]

한수아의 어깨를 틀어쥔 채 그녀를 뒤쪽으로 던져버린 나는 망설임 없이 자리를 박찼다.

슈샤이어가 뒤늦게 반응했지만 늦었다.

이미 내 손이 놈의 뿔 하나를 움켜쥐고 있었으니까.

처음 봤을 때부터 이러고 싶었다.

이거 한번 달여 먹어봐야겠다고.

손에 힘을 주자.

뚜둑-!

[크아아악!!!]

생각보다 쉽게 부러진다.

그대로 녹용을 역수로 꼬나 쥔 채 놈의 머리통을 내려찍자.

콰득-!

녹용이 그대로 부러진다.

신경 쓰지 않았다.

여분은 대충 수십 개는 넘어 보이니까.

양손을 뻗어 그대로 두 개의 녹용을 잡아채고는 놈의 머리통을 발로 박찼다.

콰직하는 소리와 함께 두 개의 녹용이 부러진다.

파아아앙-!!!

놈의 몸에서 피어나온 기파가 사방으로 뻗어나간다.

바닥에 쌓여있던 눈이 사방으로 터져나가는 그 모습은 꽤나 장관이었지만 그게 전부였다.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두 개의 녹용을 대충 뒤쪽으로 던져버리고는 오른손을 앞으로 뻗었다.

이어서 허공에 기운들이 뭉치더니 놈을 향해 날아간다.

슈샤이어의 눈동자가 크게 떠진다.

놈이 바보가 아닌 이상 지금 내가 쏘아 보낸 저 기운이 ‘폭기’라는 것을 모를 리 없을 터.

그리고 그 기운은 확신하건대 정령계로 보냈던 신호탄 수준이 아니다.

그것을 읽은 슈샤이어가 몸을 틀려고 한다.

회피가 목적인 것 같은데, 아쉽게도 표면적이 너무 넓다.

그래도 확실히 하는 게 좋겠지 .

나는 놈의 몸이 움직이는 방향을 따라 손의 방향을 틀었다.

내 손의 움직임에 따라 이동한 폭기가 슈샤이어의 몸통과 가까워진다.

이내.

-콰아아아앙!!!

거대한 폭음이 몰아치며 또 다시 눈보라가 휘몰아친다.

자리에 착지한 나는 망설임 없이 뒤로 몸을 박찼다.

눈보라를 뚫고 슈사이어의 거대한 몸뚱이가 방금 전까지 내가 있던 자리를 휩쓴다.

생각보다 타격이 없는듯하다.

[빌어먹을 놈이!!!!]

그러게 누가 성질 건드리래?

그 상태로 귀기를, 조금 더 끌어올렸다.

내가 뿜어낼 수 있고 컨트롤할 수 있는 최대치.

즉, 극한.

슈샤이어의 눈동자에 비친 내 모습이 꽤나 볼만하다.

손, 발, 그리고 머리부터 심지어는 눈동자까지 검은색으로 물들어있는 내 모습은, 진정한 의미의 흑인이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다리에 힘을 주고 손을 들어 올리자.

콰아아앙-!!!

재차 자리를 박찬 슈샤이어의 거대한 앞발이 내 팔에 막힌다.

하지만.

쿠웅-!

바닥이 깊게 파이고 여파로 돌 파편들이 터져나가는 것은 막을 수 없었다.

놈의 신격은 5성.

분명 5성이 분명하다.

그대로 팔에 힘을 빼고 스텝을 밟았다.

바람이 내 볼을 스친다는 생각이 들던 그때, 나는 놈의 뒤로 이동해있었다.

그런데, 이건 예상 밖이라고 해야 할까.

설마 했었는데 이놈 꼬리까지 달려있다.

계속 앞모습만 봐서 제대로 파악을 하지 못했던 게 약간의 실수라고 해야 할까.

그 꼬리가 정확히 내가있는 방향으로 휘둘러지는 모습을 바라보다 문득 한 가지 사실이 떠오른다.

어차피 내가 이곳 북부에 머무를 시간을 일주일로 잡은 건 내 힘에 익숙해지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5성의 괴물을 만났다는 건 그 기간을 순식간에 압축할 수 있다는 이야기.

이 기회를 최대한 이용해보자.

나는 파고들기보다는 오히려 뒤로 빠졌다.

후웅하며 놈의 꼬리가 허공을 베던 그 순간, 나는 양손을 펼쳐들었다.

귀기가 뭉치며 허공에 구체를 만든다.

하나, 둘. 셋...

다섯 개가 넘어갔을 때 살짝 멈칫했다.

조금 과부하가 걸린다고 해야 할까.

끊임없이 뿜어져 나오던 수듯물을 강제로 틀어막은 기분이다.

조금만 더, 아주 약간만 더 늘려보자.

이를 악물고 집중했다.

구체가 여섯 개로 넘어가고, 일곱 개로 넘어갔을 때, 슈샤이어가 고개를 돌렸다.

놈의 나를 향해 자리를 박차려는 동작을 취한다.

폭기를 더 만들고 싶은데, 애매하다.

일단 일곱 개.

빠르게 양손을 앞으로 내뻗자 일곱 개의 구체가 놈을 향해 날아간다.

이어서 놈이 포효를 내지르고, 근원을 알 수 없는 기묘한 힘이 놈의 몸을 감싸는 일련의 과정이 이어진다.

마치, 방어막을 치는 것 같다고 해야 할까.

그게 끝이었다.

힐끗 고개를 돌려 꽤나 먼 거리에서 이곳을 바라보고 있는 한수아와 눈이 마주친다.

그녀를 향해 자리를 박차고는 그녀를 옆구리에 낀 채로 의념을 보냈다.

‘터져라.’

[이 빌어먹...]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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