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를 한다는 건-91화 (90/131)

91화.  < 그래서 어쩌라고?(2) >

통로를 뚫고 모습을 드러낸 정령왕의 모습은 거의 상상 속에서나 등장했을법한 환상 동물의 모습과 흡사했다.

머리에는 수십 개의 뿔같은 것이 달려있었는데, 마치 사슴의 녹용처럼 뽑아먹으면 꽤나 건강에 좋을 것 같은 느낌을 준다고 해야 할까.

덩치는 약 8미터에 달하며, 네발로 걷고 있었고 마치 호랑이처럼 날렵해 보이면서도 온몸을 둘러싸고 있는 붉은 가죽은 그 무엇으로도 뚫을 수 없을 정도로 질기고 단단해보였다.

그중에서 가장 압권인 것은 놈의 주둥이였다.

[건방진 놈들. 감히 정령계에 기운을 보내다니... 미친것이냐?]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렇게 화를 낼 정도의 일은 아니었다.

내가 바보 등신도 아니고 방금 만들고 깨우친 폭기를 전력으로 사용해서 터트렸겠는가.

정말로 가벼운 인사. 그 위력이 어느 정도냐면 단순한 신호탄 같은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이런 하등한 종족들이 힘을 얻기만 하면 누가 되었건 오만해지고 사리분별을 못하는 것이, 이게 진정 종족의 특성인지 아니면 인간에게만 한정된 사고의 한계인지 궁금해질 정도군.]

놈의 말을 들으며 생각했다.

두 번째로 던진 폭기는 어떠했는가.

분명 나는 느꼈다.

내가 두 번째로 터트린 폭기의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는 것을.

확신하건대 약간의 생채기를 입은 정령은 있겠지만 죽은 정령은 없다.

그건 정말로 확실하다.

그러니까. 내가 이런 말을 들을 정도의 개짓거리를 한 게 아니라는 말이다.

[시련을 겪는 놈들에게 우리 정령들은 기회를 주었고 유희삼아 너희들을 도와주는 것일..]

“야."

[...야?]

정령왕이 나를 향해 고개를 돌린다.

놈의 붉은 두 눈동자와 눈이 마주친다.

“주둥이가 왜 이렇게 길어? 그래서 본론은 언제 꺼낼 건데?”

[본론?]

“뭘 자꾸 의아하다는 듯이 되묻고 있냐. 내가 정령을 좀 써야겠거든. 그런데 그럴 수가 없네. 어떤 빌어먹을 새끼가 뒤에서 통제하고 있어가지고.”

[...혹시 그건 나를 말하는 것인가?]

"그럼 여기 너 말고 누가 있는데?”

이윽고, 놈의 그르렁하며 짐승소리를 낸다.

그 소리가 점차 낮아지는 게, 아무래도 웃는 것 같다.

[아무리 세월이 지나도 여전하군.]

말없이 놈을 바라보았다.

뭐가 여전하다는 걸까.

[인간이라는 놈들은 여전히 힘을...]

“아 거 새끼 진짜 짜증나게, 적당히 하자.”

놈의 말을 그대로 끊었다.

아무리 봐도 아까 했던 그 넋두리 같은 개소리의 연장선이 분명했으니까.

조금 웃긴 건 지금 놈의 반응이었다.

매우 당황해한다고 해야 할까.

마치, 음식을 조리하다가 싱크대에서 바퀴벌레를 본 사람이 지을법한 그런 표정이다.

“일단 확인 차 물어볼게 . 너, 정 령왕이냐?”

[...]

놈은 말이 없었다.

그런 놈을 나는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제 와서 말하는 거지만 놈의 힘이 생각 외로 강하다.

바하로사보다는 확실히 윗줄이며, 지옥도에서 보았던 5성의 괴물들이 뿜어내던 기운과 흡사하다.

정령왕이 아니냐는 내 질문은 확실히 꽤나 합당했다.

“대답해. 내가 정령계로 보낸 그 기운들은 단순한 ‘인사’에 불과했지만 네가 계속 그딴 식으로 나오면 이제는 인사로 끝나지는 않을 거다.”

말문이 막힌 듯 놈이 천천히 나를 훑어본다.

그러다, 조금 놀란 표정을 짓더니 고개를 몇 번 갸웃한다.

마치 이럴 리가 없는데 라는 말이 놈의 얼굴에 쓰여 있는 듯하다.

그가, 말했다.

[...정말이지. 어이가 없군. 그래 질문에 대답해주마. 나는 정령왕이 아니다. 그분의 이름을 그대는 듣지 말아야하며, 알아서도 안 된다. 나는 현재 정령계를 다스리는 두 개의 기둥중 하나인 슈사이어. 이번엔 내가 묻지, 그대는 누구지? 귀족鬼族은 이미 멸종했을 터인데. 몸 안에 인간의 기운과 귀신의 기운이 혼합되어있는 존재라니.]

무언가 말하려던 그때 .

[잠깐, 이거 재미있구나. 귀기가 그대의 몸과 어우러지는 그 자연스러운 현상, 그리고 영혼 안에 잠들어있는 기이한 존재까지. 정말이지... 흥미로운 종족이군. 앞선 말은 취소해야겠어. 그대는 인간이 아니었군.]

잠깐 고개가 옆으로 기울어진다.

이게 뭔 개소리야?

“내가 인간이 아니라고?”

[능청떠는 것도 제법이구나. 앞서 말했듯 나는 정령계를 다스리는 두 개의 기둥, 내 눈을 속이려고 하지는 말거라. 내가 살아온 세월만 이미 수천 년, 특히 ‘시련자’라면 내 눈을 피할 수는 없다.]

뭔가 상황이 되게 이상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놈의 말을 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걸까.

내가 인간이 아니고, 내 영혼에 무언가 들어있다고?

자기 눈을, 속이지 말라고?

아니, 나도 모르는걸 어떻게 속이는데?

무엇보다 놈의 태도가 분노로 불타오르던 아까와는 거의 딴판이었다.

한 180도 정도 돌변했다고 해야 하나.

이놈도 조울증에 걸린 건지 진심으로 의심이 들 정도였다.

[대답하지 않는군.]

무슨 대답을 해야 될지 진지하게 고민했다.

정확히 한 3초 정도 고민을 했고 내가 내린 답은 깔끔했다.

“왜 정령을 통제하는 거지?”

[생명체를 빨아들이는 영혼의 기운이 다른 이들에 비해서 지나치게 월등한 한 존재에게 휘둘리지 않기 위해서.]

힐끗 고개를 돌려 한수아를 바라보았다.

아무리 봐도 놈의 말은 한수아를 겨냥한 말이었으니까.

“정령은 인간이나 다른 종족과 본질 자체가 다르다는 건 나도 알아.”

내 말에 슈샤이어가 귀를 기울인다.

“하지만 자의식을 가진 존재라는 건 부정하기 어렵지. 그들이 한수아와 계약하고 한수아와 함께하고 싶어 하는걸 네가 막는 건 욕심 아닌가?”

[그 끝에 파멸밖에 없을 터인데, 그 결과를 알고도 방치하는 건 내 본연의 임무에서 벗어난다. 그대는 결국 저 인간 여인을 통해 정령들을 이용하려는 모양인데, 절대 불가하다.]

강조하는 걸까.

하필이면 절대라는 단어를 쓰는 게, 슈사이어의 확고한 의지를 보여주는 듯하다.

그러니까 놈의 말은 하나였다.

앞으로 한수아는 정령을 소환하지 못한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솔직히 말하면 적어도 나에게 있어서 슈샤이어의 말은 납득이 가질 않고 있었다.

“어떤 일을 진행할 때는 순기능과 부작용이 공존하는 법이지.”

한수아를 비롯한 슈샤이어가 동시에 나를 바라본다.

“순기능은 그렇다쳐도, 부작용이 있다면 그 부작용을 최소화할 수 있는 방향을 찾아야 하는 거 아닌가? 그런데 아예 막아버리겠다고?”

[그게 가장 완벽한 결과를 추구하는 과정이니까.]

순간 군자검의 개소리가 떠오를 정도였다.

“협상하자.”

[..협상?]

“대충 보니까, 내가 뭘 하려는지 너는 모르는 거 같은데. 안 궁금하냐?”

[...]

궁금할 것이다.

솔직히, 이게 안 궁금 할 수가 없다.

놈은 나에게 흥미를 가진 상황이지만 내가 뭘 하려는지는 모른다.

정령도로 갈 방법을 찾는 나는 정령이라는 ‘인력’의 도움이 필요하다.

놈은 나라는 존재에 대해 궁금할 터이니.

서로 상부상조하려면 역시 이것밖에 없다.

“오크들과의 전쟁에서 상급 정령들이 꽤 많이 소멸했다고 들었는데, 네가 지금 이러는 이유가 그것 때문이냐?”

[틀린 말은 아니다. 애초에 정령들에게 있어서 계약이란 드래곤들의 유희와 동일하다. 그런데 그 유희로 존재가 소멸한다면 그건 더 이상 유희가 아니지. 나는 그것을 막아야할 의무가 있다.]

솔직히 일단 몇 대 패고 시작할까 싶었는데, 생각 외로 대화가 조금 통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내가 찾으려는 물건이 하나 있는데, 정령들의 도움이 필요하거든. 싸우거나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말고 깔끔하게 10만 정도의 정령만 보내 주는 게 어때?”

[...기각한다.]

“이유는?”

[그대를 믿을 수 없기에.]

슬며시 웃고 말았다.

“그건 이유로 합당하지가 않은데, 너랑 나 사이에 신뢰라는 관계가 형성되어있었나? 아니잖아? 내가 널 믿는 것도 아니고 네가 날 믿는 것도 아니라는 건 당연한 사실이고 여기서는 네가 무엇을 얻을지, 혹은 내가 무엇을 얻을지를 생각해야하는 거 아니냐? 그 사이에서 저울질을 하는 게 정령계의 기둥이라는 네가 해야 할 일이지. 나를 못 믿겠으면 네가 직접 여기서 감시하면 되는거잖아? 이익의 저울화. 어렵냐 이게?”

[...그럼, 내가 그 일을 도와준다면 그대는 나와 정령계에 무엇을 줄 수 있지?]

“딱히 생각해보지는 않았는데, 원하는 게 있으면 말해. 어려운 것만 아니면 웬만해서는 들어주지.”

어이가 없다는 듯 슈샤이어가 실소를 터트리더니 내게 묻는다.

[그대는 대체 무엇을 찾으려는 것이냐.]

어찌 보면 가장 처음부터 했어야할 질문이었다.

나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정령도로 가는 열쇠.”

긴 말은 아니었지만 슈사이어의 표정이 점차 변하기 시작했다.

뭐라고 해야 할까.

연이은 충격에 할 말을 잃은 것 같은 사람이 지을법한, 그러니까 나라를 잃은 사람이 지었을 법한 표정이었다.

이게, 분명 놈의 모습은 짐승인데 그게 구분이 가는걸 보니 나도 이제는 인간과 꽤나 멀어졌나보다.

그가 떨리는 목소리로 묻는다.

[정령...계를 잘못 말한 것 아닌가?]

워낙 연기를 잘하는 놈들을 많이 봐와서 그런 걸까.

부정하는 슈사이어의 모습이 꽤나 볼만하다.

“내가 정령도로 가서 그쪽의 균형자를 만나야하거든. 정령계가 아니라 정령도. 혹시 정령왕이 균형자냐?”

놈이 입을 떡하고 벌린다.

[그.... 그걸 그대가 어찌...]

슈사이어 반응은 내가 원하는 질문의 답이 되어주고 있었다.

나는 정령계와 정령도를 같은 곳으로 봐야 할지에 대해 짧게나마 의구심을 품었었다.

솔직히 나는 정령도로 가게 될 확률이 매우 높기 때문에, 굳이 저 의구심에 대해 깊게 생각하지 않았었다.

하지만 지금 슈샤이어와의 대화와 반응으로 그 의구심이 밝혀졌다.

‘이거 참.. 일이 너무 쉽게 풀리는데?’

묘하지만 지금 나는 아수라와 그 밑의 장군들을 떠올리고 있었다.

슈사이어가 말하기를 자기는 두 개의 기둥 중 하나라고 했었다.

정말이지, 유사하다 못해 매우 똑같았다.

다른 점이라고는 지옥도는 시공간의 균열, 즉 세상의 이면에 위치해있는 세상이지만 정령계는 그 중간쯤에 걸쳐져있는 세상.

그 차이였다.

“이야기가 더 편해지겠어. 그래서 어떻게 할래?”

[...애초부터 생각할 필요도 없는 ‘거래’였지만 이제는 이야기가 달라졌다.]

놈의 태도가 다시 변했다.

조금 침착해보이던 아까의 모습과는 조금 다르게 마치, 작은 열망 같은 것을 품은 어린 아이의 감정 같다고 해야 할까.

미치겠네.

이쪽 세상 놈들은 감정변화가 뭐 이리 급작스러운 건데?

나는, 그 이상 잡생각을 이어가지 못했다.

[원하는 게 있냐고? 있다. 저 인간 여인, 저 인간 여인을 우리 정령계로 보내라. 그렇다면 그대가 원하는 건 모두 들어주도록 하지.]

"..."

조금 반응이 느렸다.

뭐라고 답할지 헷갈렸다고 해야 할까.

이놈이 지금, 뭐라고 하는 거야?

“정령계로 보내라고? 뭘 하려고?”

[그것까지는 그대가 알 필요 없다. 죽이든 살리든 그건 내 자유다. 거래에 응하겠나?]

잠깐 고개를 돌려 한수아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표정은 아까까지만 해도 당황을 품고 있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마치, 체념했다고 해야 할까.

나와 눈이 마주친 그녀가 말한다.

“그때 혹시 기억나세요?”

“어떤 거?”

“제가 죽으면 지구에 있는 제 동생 좀 보살펴 달라고 했던 거요.”

기억난다.

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발바라 대륙에서의 Episode가 시작될 때, 나는 발리스타 왕국에서 그녀를 죽이려고 했었다.

단순히 기억나는 수준이 아니라 마치 조각처럼 내 머릿속에 각인되어있었다고 해야 할까.

분명 그때의 상황들은 내게 있어서 일종의 전환점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 그녀가 또 그때의 말을 한다.

마치 죽음을 직감한 것처럼.

그 짧은 시간을 용납하고 싶지 않은 걸까.

슈사이어가 묻는다.

[어찌 할 것인가. 인간도, 그렇다고 귀신도 아닌 존재여. 선택하라.]

**

그 시각-

수도의 황궁에서 책들을 정리하고 있던 성미령이 구석에 있던 책장의 모서리에 툭 튀어나와있는 부분을 실수로 툭 하고 건드리고 말았다.

그러자. 퉁 하는 소리와 함께 튀어나온 부분이 쑥 들어가고. 이어서.

투욱-!

무언가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온다.

나름 능력치를 꽤나 올렸던 성미령은 곧바로 그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고 그곳에서 꽤나 낡은 책 하나를 발견했다.

성미령은 의아한 표정으로 책을 집어 들고는 고개를 들었다.

분명 이 책은 위쪽 천장에서 떨어진 게 분명했으니까.

아니나 다를까.

고개를 든 성미령을 볼 수 있었다.

황궁 도서관 천장 쪽에 작은 ‘공간’이 하나 있었고, 그곳이 열려있다는 것을.

정말로 작아서 일반인이었다면 식별하지 못했을 정도로 작은 공간이었다.

즉 비밀 공간.

성미령은 버릇처럼 다시 고개를 내려 책의 제목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고개를 갸웃한다.

“죽은 자들이 죽지 않은 형태로 돌아오는... 아니지, 죽지 않은 자들이 죽은...”

성미령은 포기했다.

제목 자체가 해석도 되지 않을 정도로 흐릿했으니까.

정확히 말하자면, 책이 너무 낡았다.

그래도 성미령은 넘치는 호기심을 주체할 수 없었다.

다시 책의 제목을 살폈다.

그리고 책상 쪽으로 걸어가더니 그곳에서 붓을 꺼내들고는 책의 제목에 붙어져있는 먼지나 딱지 같은 것들을 조심스럽게 걷어냈다.

잠시간의 시간이 흐르고, 성미령의 입에서 복원된 책의 제목 이름이 새어나온다.

“두개의 목숨을 가진 시련자들에 대한 보고서.”

성미령은 순간 자신의 눈을 비비고 말았다.

내가 지금, 뭘 보고 있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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