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를 한다는 건-88화 (87/131)

88화.  < 개소리를 하도 들어서 그런가. 뭐가 일어났다고?(1) >

“왜 대답이 없는가?”

“...너무 큰 충격을 받아서요.”

천군이 희미한 미소를 짓는다.

“그것보다는 고민되겠지. 분명 고민 될 거야. 그대는 유토피아 제국을 건국하면서 이종족들을 통합했어. 그 과정에서 그대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지. 그저, 말 그대로 그들을 지키기 위해서라는 목적 때문에. 정말이지, 생각할수록 숭고하고 대단해.”

조용히 천군의 말을 들었다.

“결과적으로 보자면 유토피아를 건국하면서 아수라의 시련을 받게 될 자격을 얻었고 그대는 통과했어. 평화를 위해 스스로를 희생시킬 수 있는 그 심성과 그것을 받쳐주는 힘까지. 그대의 대의는 결국 내 대의와 궁극적인 뜻을 같이하게 될 것이야. 물론 현재로서는 미약하긴 하지만 그대는 무서울 정도로 성장하는 상황이지. 나는, 그대가 필요해.”

확실히 천군의 말을 틀리지 않다.

내가 유토피아를 건국한 것은 어떻게 바라보건 간에 결국 나 자신을 희생시킨 결과물이다.

그 결과물이 지나치게 뛰어날 뿐.

하지만 나는 세상을 멸망시킬 생각이 없다.

세상의 생명체들이 수많은 감정을 가지고 있기에 문제가 된다고?

“...세상에 유일하게 감정을 가지고 있는 존재는 ‘신’ 한명이면 충분하다 이 말씀이십니까?”

“그렇다네.”

잠깐 입을 다물었다.

생각할 시간이 필요한 게 아니라 어떤 질문을 던져야할지 고민하려는 의도였는데, 천군이 말끔하게 대답해준다.

“최후에 남게 될 이들 중 감정을 가진 존재는 많겠지. 그런 이들은 결국 ‘대의’를 위해 힘쓴 이들이어야만 해. 현재의 균형자들의 자리를 나는 나를 도운 이들로 교체할 생각이네. 내가 아는 균형자는 최소 2명. 원하는 자리만 선택하시게. 그러면 그대를 그 자리의 균형자로 만들어주겠네.”

"..."

무슨 헤드 헌터도 아니고.

천군의 말은 간단했다.

나는 새로운 생명을 창조하고 내가 꿈꾸는 세상을 만들테니 너는 아수라처럼 지옥도 같은데서 좀비같은 놈들이랑 평생을 살아라. 이게 천군이 내려주는 보상이다.

에라이 양아치 같은 새끼.

지금 여기서 내가 해야 할 말은 하나밖에 없었다.

“일단 생각해보겠습니다.”

"..음..."

천군이 짧게 신음을 삼킨다.

“에피소드는 아직 중반부에도 이르지 않았으니, 제게도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조금만 더 지켜보시죠.”

"...다른 두 명과 무슨 대화를 나누었는지 모르겠으나, 혹시 여화에게 가려는 것은 아니겠지?”

피식-

“지금 확답을 드려야합니까?”

“해주면 좋지.”

“천군님이 보시고 판단한 저라면, 어떤 선택을 할 것 같습니까?”

천군은 망설임 없이 답했다.

“현재까지의 행보라면 여화 쪽에는 당연히 가지 않을 테고, 다른 제 4의 진영은... 애초에 관심 둘 필요도 없으니, 그대는 나와 발락투스, 둘 중 하나를 선택하겠지.”

“그러면 조금만 더 지켜보시죠. 저도 제 ‘대의’에 대해서 생각해볼 필요가 있는 것 같으니까.”

천군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게 끝이었다.

아스가르드의 외부를 천천히 걷던 나와 천군은 조용히 찢어졌다.

천천히 걸어가는 천군의 뒷모습이, 꽤나 가벼워 보인다.

마치 내가 자기 쪽에 붙을 것이라고 확신하는 듯한 모습이다.

그런데 천군의 말 중에 조금 의아한 부분이 하나 있었다.

바로 제 4의 진영을 언급하던 그 부분.

뭔가 느낌이 싸하다.

내가 대의의 이면이라는 진영을 알게 된 이유는 하나였다.

그들이 내게 접근했기 때문에.

그리고 그 접근이라는 수단은 곰곰이 생각해보면 비밀스럽기가 그지없었다.

유바의 신성과 쎄쎄, 그리고 실페리온은 혜광심어로 내게 그 정보를 알렸었는데, 그토록 비밀스러운 조직인 제 4의 진영을, 천군은 알고 있는 게, 이거 이상하게 느낌이 좋지가 않았다.

‘설마 지들끼리만 비밀스럽다고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여하튼, 천군의 뒷모습이 이제는 눈에 보이지 않게 되자 나는 조용히 한숨을 터트렸다.

솔직히 미쳤다는 생각 말고는 들지가 않는다.

모든 생명체를 죽이고 새로운 생명체를 창조하되, 그 생명체의 감정을 제한한다?

너무 극단적인 사상이다.

분명 어찌 보면 저건 정답이 될 수도 있다.

그의 뜻대로 만들어지는 세상은 진정한 ‘유토피아’라고 부르기에 한 점의 부족함이 없다.

분란 없이 웃으면서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이라.

성경 속에나 등장하는 천국이 딱 그런 모습이 아닐까.

그런데 그 궁극적인 목표를 이루기위해 모든 세상을 멸망시킨다는 건 결국 욕심이고 오만이다.

말 그대로 실험 정신.

공산주의라는 사상을 실험하던 소련이라는 나라가 떠오른다.

그 끝은 결국 더 큰 혼란이었다.

천군과 소련이라는 거대한 실험장을 운영하던 이들이 대체 뭐가 다르단 말인가.

조용히 고개를 돌렸다.

검은 도화지에 흰색 점을 찍은 것 같은 수많은 행성들과 작은 소행성들이 시야에 들어온다.

‘저런 것들을 창조했다고?’

군자검이 보여주었던, 그러니까 그 잊혀졌다던 역사가 문득 떠올랐다.

시스템의 도움을 받은 군자검이 내게 구라를 쳤을 확률은 거의 제로에 수렴하니, 사실로 믿어 될 것이다.

그곳에서 공백의 왕은 공격을 받고 있었다.

즉, 연합군들은 세상 유일한 신을 향해 반기를 들었다는 뜻.

생각보다 충격적이지는 않다.

지구의 역사책만 뒤져보아도 ‘신’을 향해 반기를 든 역사는 수도 없이 많으니까.

바벨탑이 대표적인 예다.

‘내가 너무 안일하게 생각했던 건가.’

정확히는 무게감이 느껴진다고 해야 할까.

생명체를 창조하는 자리.

만 세상에서 군림하는 단 한명의 신.

나는 조용히 팔짱을 끼고는 주변에 있던 작은 의자에 대충 주저앉았다.

깊게 생각하는 척 했지만 사실, 결론을 내리자면 매우 깔끔했다.

여화나 천군을 나는 막아야한다.

둘 중 하나가 신이 된다면 그게 어떤 방향이건 간에 내가 알던 모든 것들은 무너질 테니까.

그걸 나는 막아야한다.

아니 막을 것이다.

‘이거, 생각보다 보통 일이 아니었잖아?’

형님이 내게 말해주지 않았던 ‘진실’, 그러니까 형님은 이 모든 것들을 알고 있었다.

미친 사상을 가진 천군과 그냥 부수고 죽이는 게 좋은 여화.

그 둘을 어떻게든 꾀겠다는 생각은 애초에 하지도 않았다.

고작해야 30년 남짓한 세월을 살았던 내가 최소 수백 년 이상을 살아온 존재들을 말로 설득해 그들의 사상을 바꾸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아니 아예 불가능하다.

형님이 나를 회귀시켜 준 이유는 이것일까.

저 둘을 막고 세상의 멸망도 막으라는?

미친놈은 미친놈으로 막는 일종의 이독제독?

‘이 양반이 진짜 혼자 재미봐놓고 나한테 똥 치우라고 등 떠민 거야?’

화가 나지는 않았다.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길 수 있었다.

형님이 관계된 일이니까.

다른 이들에게 들이미는 잣대와는 당연히 다를 수밖에 없다.

형님은 내 인생의 은인이니까.

솔직히 말하면 형님이 관계된 일이라면 나는 내 신념마저 굽힐 수 있다.

문득 형님이 장난스럽게 웃고 있는 모습이 떠오른다.

그렇게 내 입가에도 자연스러운 미소가 피어날 때쯤.

“시간, 괜찮나?”

뒤쪽에서 언젠가 들었던 목소리가 내 상념을 뚫고 들어온다.

듣자마자 느꼈다.

언젠가 들어본 목소리라고.

고개를 돌리자 검은 로브를 입은 채, 그 로브에 달린 검은 후드로 얼굴 전체를 감싼 괴인이 보인다.

그 후드 사이로 살짝 내비치는 창백한 입술과 푸르죽죽한 피부가 묘하게 반갑기까지 하다.

실페리온. 내가 처음 아스가르드로 왔을 때 나를 안내했던 문지기였다.

“오랜만이네, 여전히 음침하고.”

길가다 친구를 만났을 때 건넸을법한 내 친근한 말투에 후드로 살짝 삐져나온 그의 입 꼬리가 살짝 올라간다.

이어서.

“그대를 보고 싶어 하는 분들이 계시는데, 괜찮겠는가.”

무심결에 대답하려다 흠칫했다.

분들? 보고 싶어 해?

내 표정은 굳이 내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똥 밟았을 때 보통 사람이 지었을법한 그런 표정이 분명했으니까.

실페리온이 말을 덧붙인다.

[우리 이면 진영에는 원로분들이 계시지. 그분들이 그대를 보고 싶어 해.]

찌푸려진 표정이 더 찌푸려진다.

“내가 뭘 잘못들은 건가. 원로? 단어 선택이 그게 맞아?”

“...왜 그러는가.”

왜 그러는가라니.

“원로라는 단어의 뜻을 설명 해줘야 하나? 덕망 높은 공신을 뜻하는 원로가, 지금 니들 상황에서 어울리는 단어냐?”

“대의의 이면을 정치 집단으로 생각하고 싶지는 않은데, 이상하네. 왜 느낌상 정치 집단처럼 느껴지는 걸까.”

실페리온이 아무 말 없이 나를 바라본다.

“내가 파악한 대의의 이면이라는 집단은 분명 침식으로 인해 고향을 잃고, 종족을 잃은 초월자들의 집합소일 텐데. 아니냐?" “...듣는 귀가 많아. 혜광심어를 사용하는 방법을 모르지는 않을텐...”

“정말 모르는 거냐 아니면 알고도 모르는 척 하는 거냐?”

실페리온의 대답을 끊자, 그가 조금 당황해하며 한마디 내뱉는다.

“...뭐?”

의아함이 가득한 목소리다.

혹시나 하는 생각이었는데, 이것도 맞았나보다.

이놈들은 세 명의 지배자들을 너무 물로 보고 있다.

나름 비밀 조직처럼 행동하는 것 같은데, 천군은 분명히 내게 말했다.

‘현재까지의 행보라면 여화 쪽에는 당연히 가지 않을 테고, 다른 제 4의 진영은... 애초에 관심 둘 필요도 없으니, 그대는 나와 발락투스, 둘 중 하나를 선택하겠지.’

토씨하나 안 틀리고 정확히 저렇게 말했다.

그러니까, 이미 이들의 존재를 천군은 알고 있다는 뜻이고, 이 코딱지만 한 도시에서 천군이 안다는 건 여화도 알고 발락투스도 안다는 이야기다.

생각해보자.

현재 아스가르드에는 세 개의 균형이 유지되고 있는 상황이다.

나는 그 균형이 언제부터 시작 되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그 3개의 진영 중에서 제 4의 진영은 선과 악이 자리한 뒤 후에 나타났다던 중립 진영보다 더 후에 나타났을 확률이 높다.

그렇다면, 후에 생겨날 제 4의 진영을 세 명의 지배자들이 견제하지 않는다는 건, 결국 한 가지를 뜻한다.

혹시나 하는 생각을 버릴 수가 없다.

바로 질문을 던졌다.

“너는 대의의 이면이라는 그 집단에서 어느 정도의 위치에 속하지?”

“...내가 그걸 왜...”

“대답해. 점점 니들한테 정떨어지려고 하니까.”

실페리온이 입을 벌렸다가 바로 닫는다.

마치, 말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그런 갈등을 겪는듯하다.

나와 실페리온 사이에 잠시간의 침묵이 이어진다.

그 침묵을 깬 것은 내가 아닌 실페리온이었다.

“...상당히 높은 위치다.”

여기도 오등작 체제처럼 각 등급을 나눴을지는 미지수다.

그리고 굳이 그딴 체계까지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그냥 높은 위치라는 단어 그 자체를 순수하게 받아들였다.

그리고 물었다.

“대답해봐. 아스가르드의 지배자들이 너희의 존재를 모를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냐?”

“원로라는 놈들이 뭐하는 놈들인지는 모르겠는데, 니들의 존재가 들통 났다는 걸 정말로 너희들이 모르고 있는 상황이라면 그만큼 니들은 한심한 새끼들이라는 뜻일 테고, 알고도 모른척했다면 니들 사이에서도 파벌이 나눠져 있다는 뜻이잖아. 내 말이 이해가 안가냐?”

실페리온의 몸이 부르르 떨린다.

분노라거나 그런 감정이 바탕이 된 게 아닌 여태껏 당연하게 생각해왔던 일들에 대한 의문을 품은 자들, 그들이 보여주는 반응과 흡사했다.

내 생각이 맞았나보다.

나는 분명 똑똑한 놈이 아닌데, 가끔 상황이 이렇게 만들어지는 게 참 소름이 돋을 정도다.

미치겠다 진짜로.

내 가정은 이렇다.

대의의 이면, 그 안에는 ‘간자’가 숨어있다.

비밀조직을 흉내 내는 이들의 의도가 뭐건 그딴 건 한편으로 제쳐두고, 애초부터 그들이 적대하는 존재들 중 하나가 그들의 존재를 알고 있다.

비밀 조직이 더 이상 비밀 조직이 아니게 된 상황인데도 지배자들은 그들에 대해 관심이 없었다.

그건 한 가지 상황을 뜻한다.

대의의 이면이 무엇을 하건, 결국 위협이 되지 않는다는 확신.

즉, 이미 충분한 ‘대비책’을 세워놨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정작 당사자인 놈들이 들통 났다는 그 사실조차 모른다고?

이건 애초에 써먹을 수 있는 자원이 아니라 그냥 자살 폭탄수준이 아닌가.

“생각할수록 어이가 없네.”

“정말... 인가? 우리의 존재가 들통 났다는 그 사실이?”

“혜광심어를 사용하지 않는 걸 보니 너도 스스로는 알고 있잖아? 나보다 그쪽 안의 상황을 더 자세하게 알고 있는 너는, 내 말에서 무언가 짐작 가는 게 있는 듯한 표정이었는데? 내 말이 틀려?”

"..."

실페리온이 침묵을 유지한다.

그런 실페리온을 바라보다 말했다.

“나는 말이야. 너희들에 대해서 잘 몰라. 그래도 하나는 알거든.”

“무엇을?”

“고향을 잃은 자들이 겪는 감정, 그리고 그 슬픔, 그것들을 넘어 주체하지 못할 정도의 분노.”

쎄쎄에게 들은 실페리온의 과거는 간단했다.

악마들과 전쟁을 했고 졌다.

종족을 위해 스스로의 몸을 폭탄으로 만들었던 실페리온은 실패했고 복수를 위해 아스가르드로 넘어왔다.

그와 나는, 어찌 보면 닮은 점이 꽤나 많다.

“내부 상황부터 제대로 정리해라. 대화는 그 이후에 하도록 하지.”

가만히 서있는 실페리온을 그 자리에 두고 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잠시간 그를 바라보다 이내 몸을 돌려 별들의 운하로 향했다.

**

운하로 향한 나는 우주를 향해 의념을 보냈고 이어서 운송 수단이 나타났다.

운전석에 앉은 채로 잠깐 눈을 붙였다

너무 많은 대화를 나눴고 생각지도 못한 정보들을 얻었으니,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으니까.

그렇게 시간이 흘렀고, 나는 눈을 떴다.

동시에 차 문이 자연스럽게 열린다.

익숙한 곳이었다.

눈앞에 보이는 거대한 황성, 그리고 주변에 흩뿌려져있는 피와 바하로사의 시체까지.

이곳은 발바라 대륙이다.

에피소드를 진행해야겠다는 생각보다는 일단 북부로 가야겠다고 생각하던 그 순간.

“폐하!!! 폐하아아아아!!!!”

이번에도 익숙한 목소리다.

고개를 돌리자, 다급한 표정의 ‘소천’이, 내게 달려오고 있었다.

전에도 그러더니 이번에도 대기했나보다.

그런데, 조금 당황스럽다.

“너 살아있었냐?”

“예..예? 아..예.”

죽은 줄 알았는데, 조금 의외네.

어깨를 으쓱하려던 그때 소천이 다급하게 말한다.

“그게 아니오라. 지금 반란이... 반란이 일어났습니다 폐하!”

아스가르드에서 워낙 개소리를 많이 들어서 그런 걸까.

귀를 의심할 정도다.

“뭐가 일어나?”

“바.. 반란이...”

잘못 들은 게 아니었나보다.

...에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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