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 가질 수 없다면 부숴버리겠다.(4) >
내가 뭘 잘못 들었나.
“뭐?”
“자자고. 나랑.”
할 말을 잃었다.
방금 전까지 이곳에 있었던 발락투스는 내게 여화와 관계를 원만히 하라고 말했고 마치 짜 맞춘 듯 여화가 들어와 저런 말을 한다는 게.
나만 모르는 몰래 카메라가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뭘 그렇게 당황해? 설마 동정이야?”
대답할 가치조차 없었다.
나는 그대로 의자에 앉아 물끄러미 여화를 바라보았다.
지배자라는 어마어마한 위명에 걸맞지 않게 상당히 왜소한 체격의 그녀는, 분명히 내가 알기로 악마종이 분명한데 겉보기에는 인간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러니까. 주먹만 한 얼굴에 키 170대 중반, 거기다 나올 데 나오고 들어갈 데 다 들어간, 심지어 그 주먹만 한 얼굴 안에는 눈코입이 다 들어가 있었으며 단순 비율로만 따져도 8등신은 가볍게 넘길 정도의 압도적인 미인.
그런 미인이 나보고 자자고한다.
만약 여기가 지구였다면, 여화가 아닌 다른 여자였다면 그 자리에서 옷을 벗었을 것이다.
“나도 나 나름대로 곰곰이 생각해봤거든.”
나풀거리는 말투로 한손에는 아르페지오를 든 여화는, 꽤나 고혹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녀가 내 맞은편 자리에 앉으며 아르페지오를 내게 건네는 그 일련의 모습들이 마치 한 폭의 그림 같다고 해야 할까.
술병을 받아들자 그녀가 멈췄던 말을 이어간다.
“너는 아무리 봐도 나를 ‘적’으로 생각하는 것 같아. 맞지?”
대답하지 않았다.
아무런 제스처도 취하지 않았다.
그냥, 들었다.
여화가 뭐라고 말할지 궁금했으니까.
“왜 그럴까 생각해봤어. 처음에는 천군과 발락투스가 너한테 후원해주고 나는 후원해주지 않았기 때문이 아닐까 싶었는데, 어차피 그 아이템들이 없었더라도 너는 지금 여기까지 성장했을 거야. 내가 본 너는 그런 남자였거든. 거기다 그렇게 쪼잔한 것 같지도 않고. 그렇다면... 하나밖에 없어.”
하나밖에 없다고?
“예지, 네 권능은 분명히 미래를 보는 것과 관련이 있어. 그 미래에서 너는 나와 척을 졌던 거야. 그러니까... 우리는 ‘적’이었다는 거지. 어때 내 추측이?”
방향은 틀리지만 결론은 맞았다.
여화는 내 적이다.
나와 형님을 죽이고, 지구를 멸망시킨 적.
내가 아무리 현재를 살아가려고 해도, 유일하게 벗어날 수 없는 과거가 하나 있는데, 그게 바로 눈앞의 여화다.
과거와 현재에도 꾸준하게 내 앞을 막고 있는 존재.
그녀가 말한다.
“궁금하네. 네가 본 그 미래에서 너는 나랑 잤을까?”
“네가 말했잖아 너 스스로는 누구도 가질 수 없다고 가져도 네가 갖는다고.”
선착장에서 분명히 그런 말을 하긴 했었다.
그리고, 여화의 말이 이어진다.
“그러니까 네가 날 가지면 되잖아?”
묘하게, 조금씩 설득되는 기분이다.
그녀가 말을 덧붙인다.
“표정 보니까 맞나보네. 미래의 어느 순간에는 결국 내가 널 죽인다는 거.”
그녀의 고혹적인 미소가 점점 짙어진다.
“궁금하네. 내가 왜 널 죽였을까...”
진심으로 궁금하다는 표정을 짓는 여화의 모습에서, 방금 전까지 들었던 감정들이 눈 녹듯 사라졌다.
내가 미친 걸까.
발락투스의 말이 진실이라면 여화뿐만이 아니라 천군도 내게는 결국 걸림돌이다.
기왕 힘을 가진 거, 그 끝까지 한번 가보자는 내 생각과 내 최종 목표를 가로막는 걸림돌 중 하나인 여화.
그런데 그녀와 손을 잡는다는 건, 박쥐 수준이 아니라 그냥 모든 걸 포기하겠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심지어 미인계로 넘어간다?
이건 그만큼 내 각오가 하찮고 일시적이었다는 말과 다르지 않은가.
“혹시 ‘카르피온’이랑 싸워봤니?”
“그것도 아니면 ‘벨엘’이랑은? 나름 7성 정도의 신격을 갖추고 있는 아인데, 혹시 네가 이겼니?”
여화의 능력은 소환술이다.
내가 아는 건 운석을 소환해서 한 행성을 가루로 만들어버리는 것이 전부인데 지금 여화의 입에서 나오는 이름들로 미루어보니 생명체도 소환이 가능한가보다.
“대답이 없네. 그래서, 나랑 잘 거야 말거야? 난 자신 있거든.”
“자신?”
“응 자신. 최고의 밤을 만들어 줄 수 있다는 자신. 아마 천국이 따로 없을걸? 내가, 좀 잘하거든.”
웃음이 터져 나오고 말았다.
미치겠다 진짜.
그 동안 모두가 간과했던 사실이 있는데. 내가 계속 그녀라고 지칭해서 그런건지 몰라도 여화는...
“너 중성이잖아.”
"...응?"
물끄러미 여화를 응시하자, 그녀가 폭소를 터트린다.
“이야... 그건 또 어떻게 알았데? 미래에서 너, 나랑 잔 게 맞구나.”
이건 또 무슨 개소리야?
“내가 중성이라는 거 아는 애들이 거의 없어. 그래도 내가 가끔 말해주기도 하거든? 그런데 나는 ‘침대’위에서가 아니면 절대 그런 말을 안 해줘. 발락투스가 그런 것 까지 일일이 말해줬을리는 없으니, 뻔하지. 너, 나랑 자는 미래를 봤구나?”
"..."
잠깐만. 뭔가 이상한데 이거?
여화가 중성이라는 것을 내가 아는 이유는 간단하다. 형님이 말해주었기 때문에.
그런데, 형님은 그 사실을 어떻게 알고 있던 걸까.
설마...
‘이 양반이... 설마 여화랑 잔거야?’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여화의 말이 이어진다.
그런데 그 말이 가관이었다.
“이렇게 된 거 뭘 숨기겠어. 맞아 난 중성이야.”
“그런데, 네가 초월자라면, 적어도 거대한 성장을 노린다면 너도 성별을 중성으로 바꾸는 게 좋아.”
“뭐?”
여화가 내 손에 들린 아르페지오를 바라본다.
마치, 일단 한잔 마시라는 듯한 그런 느낌이다.
잔잔한 분위기를 원하는 걸까.
여화의 원대로 한잔 마시자마자 여화가 말한다.
“너도 알다시피 신격을 갖추기 위해서는 종의 한계를 뛰어넘어야해. 그리고 그때부터는 같은 출발선에서 시작되는 일종의 새로운 게임이 시작되지.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야.”
"..."
“그 출발선에서 나름 ‘결승선’에 왔다고 자부하는 그 순간, 또 다른 출발선이 생기거든.”
여화의 말에 집중했다.
분명 내게 도움이 될 만한 정보가 분명 할 테니까.
“그런데 웃긴 게, 그 출발선에서 새롭게 출발을 하려면 이번에는 성별을 뛰어넘어야하더라고. 결론만 말해주면, 나는 중성이고 천군도 중성이고, 발락투스도 중성이란다.”
“그 결승선이라는 게, 정확히 어느 부분이지?”
“이거 말해주면 내가 또 손해긴 한데... 말해 주지 뭐. 내가 말하는 그 결승선은 두 자리 수의 신격을 갖추는 순간을 뜻해.”
정리를, 해야 할 것 같다.
지금의 나는 3성의 초월자.
이거 9성을 넘어 10성이 된다면, 그때부터 새로운 게임이 벌어진다는 이야기다.
나름 정리를 하려고 하던 그 순간. 여화가 말을 잇는다.
“그런데, 사실 말이 중성이지, 본래의 바탕은 변하지가 않아. 무슨 여성의 몸에서 남성의 성기가 자라난다거나 그런 게 아니라, 혹시 생각했는지 모르겠는데, 중성이 되면 자손을 만들 수가 없어. 정말 안타깝긴 한데... 뭐 어쩌겠니.”
거참.
대충 결론 내려 보면 힘을 가지기 위해서, 그러니까 신이 되어 우주를 다스리려거든, 종의 한계를 뛰어넘는 1단계 초월자가 되어야하고, 거기서 성별의 한계를 뛰어넘는 2단계 초월자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아마 이게 공백의 왕이 만들어놓은 질서일 확률이 높다.
결국, 모든 것을 초월한자만이 신이 되어야 한다는 공백의 왕의 의지가, 느껴지는 기분이 들 정도다.
“그러니까 지금의 내 몸은 격을 초월하기 전 그때의 신체와 매우 유사해. 여성의 몸이라는 거야. 무슨 벗겨놓으니 남성의 성기가 나온다는 그런 건 무의미하다는... 어라? 이렇게 말하는 것도 이상하네. 내가 중성이라는 걸 알고 있다는 건 미래에서 너는 나랑 잤다는 이야기잖아? 그럼 굳이 이런 대화는 불필요한 거 아니야? 이거 상황이 되게 애매해지는데...”
착각물의 최후는 결국, 진실이 밝혀지는 것으로 끝나는 게 맞다.
하지만 나는 조금 다르게 보고자한다.
착각물의 최후를, 그냥 착각으로 끝내자.
“뭐가 애매하지?”
“아니 맞잖아. 네 권능의 발동 메커니즘을 나도 자세히는 모르겠는데, 내가 보았던 예지 능력자들은 대부분이 ‘선택’의 순간에서 예지를 보았거든? 결국 너는 나랑 함께하기로 선택했다는 건데, 그 끝이 결국 너의 죽음으로 나타났다는 거잖아? 나에 대한 적대감은 그게 밑바탕이 되었기 때문인 것 같은데... 그게 그래야만 모든게 설명이 되거든? 그런데, 내가 왜 그랬지?”
여화한테서 얻을만한 정보는 충분히 얻어냈다.
그만 상황을 정리하자.
“너는 왜 공백의 왕이 되려고 하는 거지?”
“미래를 봤다면 알고 있을 텐데... 또 말해주지 뭐. 뻔 하잖아? 죽이고, 부수려고.”
너무 간단해서 말문이 막혀올 정도다.
“대체 왜?”
그녀의 사상을 이해하고 싶지는 않지만 알아둘 필요는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착각이었나 보다.
이어지는 그녀의 대답이 말문을 막히게 만들었으니까.
“왜라니? 이유가 필요해? 죽이고 싶어서 죽이고, 위에 있고 싶어서 위로 올라가는 건데?”
목표가 부수는 게 목표고 그 안에 대의고 나발이고 아무것도 없다면, 그건 분명 순수한 악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여화는 분명 순수한 악이다.
힘을 가진 순수 그 자체의 악惡.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런 나를 여화가 물끄러미 바라본다.
무시했다.
그렇게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가려던 그때. 여화의 말이 나를 붙잡는다.
“난 말이야. 가질 수 없다면 부숴버리거든.”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아르페지오를 붙잡고 있던 그녀가, 손가락에 힘을 주자 퍼석하고 병이 부서진다.
“그래서?”
“그냥 그렇다고. 다음에 아스가르드로 올 때는 확실히 결정해줬으면 좋겠어.”
“네가 예지로 나랑 잤다고 해도, 실제로 나는 모르는 미래잖아? 내 방문은 항상 열려있으니까. 언제든 노크만 해."
대답하지 않았다.
정말로 내 정신이 피폐해지고 뭘 해도 답이 없을 거라고 느껴지지 않는 이상 여화에게 붙을 일은 없을 테니까.
그렇게 문을 열고 나가자, 휘황찬란하게 빛나는 날개가 나를 반긴다.
“이제, 이야기가 끝났군.”
천군이었다.
이건 무슨, 면접관이 된 기분이다.
그가 말한다.
“잠깐 걷겠는가?”
무거운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
천군과의 대화는 앞선 두 지배자와의 대화와 별 반 다를 바가 없었다.
중성이 되어야 한다는 말과 지옥도에 대한 것.
그 말로 확신했다.
여화와 발락투스와의 대화는 그 주점 안에서 밖으로 퍼져 나가지 않았다는 것을.
그렇게 한번 한 대화를 똑같이 반복한 뒤, 천군이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나는 세계 유일의 천사, 마지막 남은 천국의 생존자이자 그곳의 왕이었지.”
천군의 겉으로 보이는 모습은 어떻게 봐도 ‘천사’였다.
펄럭이는 날개들과 훤칠하게 큰 키.
무기를 사용하는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균형 잡힌 몸들로 미루어보면 뭘 쥐어주든 잘 사용할 정도로 그의 몸은 밸런스가 뛰어났다.
마치, 궁극체의 드래곤을 보는 것 같은 기분이라고 해야 할까.
“긴 이야기는 필요 없겠지. 천국은 내 손에 멸망했다.”
“...예?”
솔직히 당황했다.
나는, 다른 이야기가 나올 줄 알았다.
천군은 분명히 선善이라는 이름을 걸고 나오는 초월자이자 여화의 반대편에 서있는 존재. 그의 입에서 저런 말이 나온다고?
차라리 천국의 멸망을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라거나 그런 말이었다면 이해가 갔겠지만, 자기 손으로 멸망시켰다?
이건 어떻게 받아들여야하나.
“혼란스러운 이 우주에서 침식이라는 위험에 노출된다는 것은 그 자체로 고통일 수밖에 없다네. 그래서 나는 내 손으로 직접 내 백성들을 해방시켜주었지.”
점점 머릿속이 복잡해진다.
그러니까 지금 어떤 기분이냐면. 외눈박이들만 있는 세상에 두 눈이 똑바로 박혀있는 사람이 병신취급을 받을 때 느꼈을 그런 기분이다.
긴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저 이야기들로 확신했다.
이놈의 이야기는 더 들을 필요도 없었고 바로 결론으로 넘어가도 되겠다고.
“공백의 왕이 되려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핵심적인 질문이다.
발락투스는 저 질문에 공백의 왕이 되지 않겠다고 했으며 여화는 모든 걸 부수고 죽이기 위해서라고 했다.
나름 각각 다른 대답들이었고, 역시 천군의 대답도 달랐다.
“새롭게 시작하기 위해서.”
매우 함축적이다.
“새롭게 시작하기 위해 멸망하는 세상을 고른다는 건 모순이지 않습니까?”
“그게 왜 모순인가?”
되묻는 천군의 말에 오히려 내 말문이 틀어 막혔다.
내가 모르는 진실이 또 있는 걸까.
그런데, 이어지는 천군의 말로 미루어보니 그건 또 아니었나보다.
“모든 일을 새롭게 시작하기 위해서는 모든 걸 부수는 과정이 필요하다네. 폐허 속에서 싹틔우는 아름다운 꽃은, 그 자체로 숭고한 의지를 반영하기에.”
"..."
“보아하니 내 궁극적인 목적을 듣고 싶어 하는 것 같은데, 바로 대답해주겠네. 나는 우주의 모든 생명체를 지워버릴 생각이네.” 천군의 표정은 온화했다.
그 주둥이에서 튀어나오는 말과 매치가 되지 않을 정도로 온화한 저 표정에 나도 모르게 오한이 돋는다.
분명 저 모습은, 자기 생각에 확신을 가지고 있는 이들의 모습과 흡사하다.
아니, 똑같았다.
내가 아무 말 하지 않자 그가 말을 잇는다.
“모든 게 멸망하고, 잿더미가 되어버린 그 세상에서 나는 화합과 행복과, 웃음만 가득한 세상들을 창조하려 한다네.”
“지금도 웃는 이들은 많고, 행복해하는 이들도 많지 않습니까? 엄밀히 말하면 지금 세상에 벌어지는 일들은 아스가르드의 초월자들끼리의 싸움이고, 모든 일을 새우 등 터지듯 벌어지는 일들인데, 굳이 모든 세상을 지워야합니까?”
합당한 내 의문에 천군은 고개를 젓는다.
그리고 아까의 그 온화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직 그대는 깨우치지 못했나보군.”
“무엇을요?’’
“진정한 대의를.”
귀가, 썩는 기분이다.
내가 오래 산 것은 아니지만, 대의를 외치는 새끼들 중에는 정신이 제대로 박힌 놈이 없다는 그 만고불변의 진실을 여태껏 잊고 있었다.
세상은 혼란으로 가득해. 모든 생명체들에게 수많은 감정들이 혼재되어있기 때문이지. 신이 되어 웃으면서 행복함만 느낄 수 있는 생명체들을 창조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평화이자, 모두가 불만 없이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그런 세상이 아니겠는가.
발락투스의 말이, 확실하게 이해가 된다.
여화와 천군, 그 둘은 정 반대의 성향을 가지고 있지만 엄밀히 말하면 그곳으로 가는 과정은 같았다.
발락투스는 내가 저 둘과 다르다고 믿고 있었다.
확실히 내가 봐도 다르다.
이 미친년 놈들은 일단 세상 전체를 멸망시키는 것을 전제에 두고 모든 일들을 진행하고 있었으니까.
"나는 그 과정을 이루기 위해 그대라는 강자가 필요하네. 내 옆에서, 나와 함께 '대의'를 위해 걷지 않겠는가."
지금 내 소감은 간단했다.
‘진짜 미친것들 투성이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