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 가질 수 없다면 부숴버리겠다.(3) >
서늘한 기세를 뿜어내는 여화, 그녀의 눈빛이 매우 싸늘하다.
그런데 왜일까.
여화의 모습에서 느껴지는 감정의 뉘앙스는, 적어도 내가 느끼기에는 분노가 아니었다.
일종의 기대감 같은 것.
이게 정말 이상한데, 마땅히 설명할 길이 없다.
정말로 그렇게 느껴지고 있었으니까.
순간 찌릿하고 어깨에서 통증이 올라온다.
농담이 아니라 진짜 아프다.
3성의 초월체인 내 몸이 고통을 느낀다는 건 적어도 여화가 나 이상의 격을 뿜어내고 있다는 이야긴데.
그 이상 머리로 생각하지 않았다.
나는, 그냥 내 본능대로 평소 내가 하던 대로 행동했다.
“그렇다면 어쩔 건데?”
“...너 혹시 약하니?”
그때, 발락투스가 끼어들었다.
“그쯤하지. 지금은 이도랑 내가 대화를...”
“도마뱀은 입 다무시고.”
“...뭐?”
여화가 발락투스에게 일침을 쏘아내고, 순식간에 발락투스의 몸에서도 기묘한, 빛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마치 무지개를 보는 것 같다고 해야 할까.
붉은색, 푸른색, 검은색, 하얀색. 총 네 가지 색상의 기운이 발락투스의 몸에서 조금씩 피어오르고, 여화와 마찬가지로 그의 몸에서도 스파크가 튀기기 시작했다.
정말이지. 개판도 이런 개판이 없다.
말 한마디로 상황을 이렇게 만든 여화도 대단하고, 그걸 곧이곧대로 반응하는 발락투스도 대단하다.
그리고 여전히 여화는 내 어깨를 움켜쥐고 있었다.
문득 궁금증이 생겨난다.
분명 지금 시스템이 저들에게 제약을 가하고 있었다.
슬며시 찌푸려지고 있는 둘의 미간을 보고 있자니, 왠지 모르게 그 고통이 적지는 않은 것 같다.
그게, 어느 정도일까.
나는 천천히 손을 들어올렸다.
몸 안의 기운을 자극했고, 혈기를 끌어올렸다.
그 순간.
띠링!
[아스가르드에서는 격을 뿜어내실 수 없습니다.]
[당신에게 1단계 제재가 가해집니다.]
빠직-!!
몸 전체에 거대한 압박감이 몰려온다.
긴장의 끈을 조이고 있지 않았더라면 그 자리에서 그대로 무릎을 꿇었으리라.
온몸이 박살나는 것 같은 기분과 뼈가 압축되는 것 같은 섬뜩한 고통이 뇌리를 관통하는데, 젠장.
어깨를 틀어쥐고 있는 여화의 손보다 이게 더 아프다.
최대한 내색하지 않고 손을 들어 여화의 손을 쳐내자. 그녀의 눈동자가 슬며시 호선을 그린다.
내 생각이 맞았다.
이년은 화난 게 아니다.
그리고 실제로 나를 죽일 생각도 없었다.
그저 내게서 무언가를 기대한 것이 확실하다.
그리고 그건 현재 진행형.
다리에 힘을 주고 한걸음 내디뎠다.
여화와의 거리를 한 치 차이로 줄인 나는, 조용히 여화를 내려다보았다.
내 키는 약 185cm. 여화의 키는 170대 중반.
묘한 구도가 형성되던 그때, 여화가 입을 열었다.
“너 진짜... 마음에 든다.”
내가 미친놈이라 불리는 이유는 상식 밖의 행동을 주로 하기 때문이다.
그걸 미쳤다고 볼 수는 없다.
그저 특이할 뿐.
그런데 여화는 아무리 봐도 미친 게 확실하다.
“미치겠네. 너 진짜 대체 어디에 있다가 이제야 나타난 거야?”
그녀가 조용히 기운을 가라앉히자, 끼어들어야할지 말아야할지 고민하던 발락투스도 기운을 가라앉혔다.
순식간에 아스가르드의 선착장은 고요해졌다.
당연히 나도 기운을 가라앉혔지만, 이게... 뭐라고 해야 할까.
여파가 남아있다고 해야 하나?
온몸이 쓰라리다.
이 갑작스러운 힘 싸움에 괜히 끼어든걸까 하고 살짝 후회감이 든다.
“원하는 게 뭐야? 정보야? 그것도 아니면 힘이야? 다 줄게. 그냥 나랑 함께 가자. 너, 그냥 내꺼 하자.”
고통도 없는 걸까.
나보다 더한 격을 뿜어내며 시스템으로부터 제제를 당한 여화는 너무나도 평온해 보인다.
그런 그녀를 향해, 해줄 말이 있다.
정말로, 이 말은 해야 할 것 같다.
“날 가지겠다고?”
여화가 고개를 끄덕인다.
마치 내가 자기의 제안을 수락한 것처럼 보이나보다.
당연히 오판이다.
웃음이 터져 나온다.
그리고, 긴 말 할 필요도 없었다.
“난 누구도 못 가져. 가져도 내가 갖는다. 그러니 헛꿈 꾸지 마.”
깔끔한 내 한마디에 여화는 조용히 입술을 깨물었다.
그게 분하다는 듯한 그런 모습이 아니라.
마치 탐스러운 무언가를 갈망하는 표정이라고 해야 할까.
양쪽 입 꼬리를 살짝 말아 올린 그것이, 그렇게 말해주고 있었다.
아마 전생에서 여화와 내가 얽히지만 않았더라면 실제로 넘어갔을 정도로 꽤나 매혹적인 모습이다.
그런 여화를 잠시간 바라보다 그대로 몸을 돌렸다.
뼈가 삐걱 이는 그 느낌은 당연히 엿 같았지만 그래도 아스가르드에서 1성의 신격을 뿜어낸다면 어느 정도의 고통이 가해지는지 그 느낌을 확실하게 깨우친 것으로 만족한다.
머리 나쁘면 몸이 고생한다더니.
실제로 나는 머리가 나쁜가보다.
고개를 들어 발락투스를 바라보았다.
그는, 가라앉은 눈으로 여화를 노려보고 있었는데, 내 시선을 느낀 건지 이내 그 상태로 몸을 돌리고는 앞서서 걸어가기 시작했다.
나는, 그런 발락투스의 뒤를 따랐다.
**
발락투스를 따라 도착한곳은 아스가르드 한편에 위치한 비어있는 주점이었다.
중세 시대 때 기사들이 모여서 술을 마셨던 술집이 아마 딱 이런 모습이지 않았을까.
발락투스는 어느 한쪽 자리에 앉더니 허공으로 손을 뻗었다.
분명 ‘인벤토리’를 사용하는 게 확실하다.
그 안에서 발락투스가 꺼내든 것은 술병이었다.
아무런 무늬 없이 약 1L 정도 되는 투명한 술병, 그 안에 담긴 주홍색의 영롱한 액체가 발락투스의 손길에 따라 좌우로 흔들린다.
그가 잔을 탁자에 탁 내려놓는 순간 불현듯 이 상황과 비슷한 어느 한 때가 떠올랐다.
바로 율리우스.
그가 죽기 전 정확히 이런 상황이었던 것 같다.
내 생각을 읽은 걸까.
“그 인간 아이가 떠오르나?”
발락투스의 말투는, 메시지로 보았던 것과 전에 보았을 때와는 달랐다.
무겁다고 해야 할까.
잠깐 말을 멈춘 그는 내게 술병을 통째로 건네며 말을 이었다.
“아르페지오라는 술이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술이지.”
발락투스의 맞은편에 앉은 나는 그 술을 받아들이고는 깔끔하게 한 모금 입안에 머금었다.
곧장 코를 타고 알싸한....
어우.
“...독하네요.”
깔끔한 내 감상평에 발락투스가 희미하게 웃는다.
그리고 물었다.
“나와 대화를 하자고?”
“예."
짧은 내 대답에 발락투스는 실소를 터트렸다.
“그대가 원하는 건 대화가 아닌 대답인 것 같은데.”
역시, 메시지 창으로 보여지던 모습은 발락투스의 본모습이 아니었다.
이거 참.
생각보다 예리 하잖아?
“빙 돌아갈 필요 없어서 좋네요. 그럼 바로 묻겠습니다. 공백의 왕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계십니까?”
“그대 생각보다는 매우 많이.”
“구체적으로 어떤?”
내 물음에 발락투스가 아르페지오를 한 모금 들이마셨다.
이거 참, 간접키스 한 건가.
실없는 내 생각은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았다.
이어서 발락투스가 툭 내던지듯 내뱉는 한마디가, 일종의 상황을 바꾸는 신호탄 역할을 했으니까.
그가 말한다.
“그걸 내가 왜 말해 줘야하지?”
날카롭고, 당연히 했어야하는 말이다.
나는 그들에 비해서 약자다.
가능성을 보여주고는 있지만 엄밀히 말하면 그건 좋게 포장한 거고, 결국 나는 현재로서 그들의 밑에 깔려있는 존재.
그런 내 질문에 그가 일일이 답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준비했다.
“서로 알고 있고 궁금해 하는 것을 세 가지씩만 대답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일종의 진실게임을 하자는 건가?”
“규칙은 하나입니다. 대답은 무조건 거짓이 아닌 진실로 답하는 것.”
발락투스가 묘한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거절의 의미일까.
“싫으십니까? 저한테 궁금해 하실 게 분명 몇 가지 있으실 텐데.”
그가 터억 하고 술병을 내려놓는다.
“진실과 거짓을 구분하는 건 각자의 몫이고?”
고개를 끄덕이자.
“먼저 묻지. 지옥도는 어떻게 통과했지?”
“잘."
“...웃으라고 한 소린가?”
장난치는 것 같아 보이지만 절대 아니었다.
“그럼 질문을 그렇게 포괄적으로 물어보시면 안되죠. 어떻게 통과했느냐가 아니라 통과 조건이 뭐였냐는, 그런걸 물어보셨어야지. 저는 대답했으니, 이제는 제가 묻겠습니다.”
“...이런 식으로 하는 게임이었나?”
무시했다.
발락투스의 질문에 나는 분명 대답했다.
기회를 날린 건 본인 탓이다.
“공백의 왕과 대화를 나눠 본 적이 있으십니까?”
꽤나 구체적인 질문이었다.
발락투스의 대답 여하에 따라 그가 알고 있는 정보의 상한선이 정해진다.
솔직히 나는 발락투스의 대답을 ok 혹은 no, 이 두가지중 하나일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제 3의 대답이 나왔다.
“그대는 운이 좋아. 하필이면 천군도 여화도 아닌 내게 왔으니까. 답해주지. 오래전이었다. 나를 만들고, 나를 창조했던 그분은 내가 커가는 것을 지켜보며 즐거워하셨지.”
이건 또 뭔 소리야?
그분은 나를 드래곤의 시조로 정하셨고, 내 속성을 본따 여럿의 드래곤을 창조하셨지. 대화를 나눠봤냐고? 나눠봤다. 정말로 많은 대화를 나눴지.
그는 신이되, 감정이 있는 존재. 그리고 생명체와 세상을 창조하는 유일무이한 존재였어. 중간에 영면에 들었던 나는, 수 십만 년이 지나고 눈을 떴었지. 그런데... 세상은 엉망이 되어있었고 그분은 이미 죽었더군.”
이건 정보 수준이 아니라. 그냥 배경 설명 수준이었다.
“하긴, 힘드셨을 거야. 감정을 가진 존재가 이 우주 전체를 관리한다는 것은 너무나도 힘든 일이지. 나는 알아. 그분은 자신의 다음 대를 이어갈 새로운 신에게 새로운 질서를 맡기고 싶은 것이라고.”
무언가 물어보려던 나는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내가 물어보려던 것은 정확히 두 가지였다.
일단 지옥도와 비슷한 다른 도로 넘어가는 방법.
그리고 있는데도 없는 것 같은 칭호인 ‘이레귤러’ 칭호에 대한 질문.
그런데 지금 더 중요한 게 생겼다.
나는 물었다.
매우 핵심적인 질문을.
“그래서 공백의 왕이 되시려는 겁니까?”
발락투스가 고개를 젓는다.
“내가 원하는 건 균형자의 자리, 정확히는 공백의 왕을 보필하는 그 옆자리를 원한다. 그대는 왜 아스가르드에 중립이라는 진영이 생겨 났다고 생각하지?”
“천군과 여화 사이에서 갈피를 못 잡는 존재들이라서가 아니었습니까?”
“그런 시답잖은 이유일 리가 없지. 애초에 중립이라는 것은 선과 악이 만들어지고 나서 후에 생기는 법. 나는 그저 기다릴 뿐이야. 내가 알던 그분의 뒤를 이어가려는 새로운 신의 탄생을.”
이건 또, 생각지도 못한 정보였다.
“이거 방음은 되는 겁니까?”
잠깐 고개를 끄덕이던 발락투스가 마저 말을 이었다.
“중간에 영면에 들었던 나는, 그분을 곁에서 돕지 못했지. 만약 내가 영면에 들지 않고 그분을 곁에서 도왔더라면, 시스템이라던지 침식이라던지. 이런 일들이 벌어지지는 않았을 터. 나는 그게 아쉬워. 그래서 직접 아스가르드로 왔지.”
"..."
발락투스는 확실하게 신과 초월자를 구분 짓고 있었다.
즉, 군자검이 말하던 신의 존재를 영접하지 못했던 이들이 어쩌고저쩌고했던 그 말은, 발락투스가 아닌 여화와 천군을 대상으로 한 말 이었다.
하나만 더 물어보자.
“침식을 매칭 한다고 하던데, 실제로 침식 매칭에 참가하신 적이 있으십니까?”
매칭이라는 게 정확히 어떤 식으로 진행되는지는 모르겠으나 반장 선거 하듯 손을 들던지 혹은 다른 어떤 식으로든 의견을 내는 절차가 있는 것만큼은 확실하다.
그리고 발락투스는 내 질문에 고개를 저었다.
“단 한 번도 참가 한 적이 없다. 나뿐만이 아니라 내 뜻에 동조하는 이들까지. 단 한 번도 의견을 행사한 적이 없지. 이제는 세 가지씩 묻고 답한다는 게 무의미해졌군. 하나만 묻지.”
“뭡니까?”
“그대는, 공백의 왕이 되려하는가?”
잠깐 말없이 발락투스를 응시했다.
그 진지하고 묘하게 가라앉아있는 눈빛.
솔직히 말하면 느낌이 좋다.
일이 이렇게 진행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었는데, 생각 외로 너무 커다란 물고기가 아닌가.
“되겠다고 하면, 도와주실 겁니까?”
“도와는 주겠지만... 모자라.”
“그대의 신격은 3성, 에피소드가 끝나기 전까지 그대는 최소 두 자리 수의 신격을 갖춰야해.”
숙제를 내는 건가.
“그리고 여화와 관계를 조금은 원만하게 해 둘 필요도 있어.”
“...제가 잘못들은 겁니까?”
아르페지오를 다시 한 모금 마시던 발락투스가 대답했다.
“여화는 명실상부한 지배자. 그의 밑에 있는 초월자들은 강력하고 악하기가 그지없지. 그들이 발바라 대륙에 간섭하는 게 어려울 거라 생각하나?”
"..."
“물론 간섭하려면 격을 바쳐야하지. 그런데 그 격을, 나눠서 바칠 경우는 생각 못 해봤나?”
시발.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욕설을 터트릴 뻔했다.
오랜만에 나온 수작질 제 7탄이다.
아니, 6탄이었는지 7탄이었는지 헷갈리는데 솔직히 이건 나도 몰랐다.
격을 나눠서 바친다고?
“...그게 가능합니까?”
“아스가드르에는 생각보다 맹점이 많아.”
입을 다물었다
이것도 처음 듣는 이야긴데.
“뭐 그 종류까지는 굳이 알아 둘 필요는 없다. 그대가 아스가르드로 오지 않는 이상 알아 둘 필요도 없고, 어차피 내가 지켜본 그대라면 자연스럽게 알게 될 방법들일 테니까. 이거 자꾸 이야기가 새는데,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내 도움을 받고 싶다면 아스가르드에서의 일을 그대의 시련에 넣으려고 하지 말라는 이야기다.”
“말이 조금 복잡한데요?”
“여화를 자극하면 처음에는 웃으면서 넘어가겠지. 그년은 미친년이니까. 그게 한 번, 두 번, 세 번. 그렇게 쌓이다보면 결국 어느 순간 터지기 마련이지.”
“발바라 대륙을 멸망시키는 게, 여화에게 있어서 어렵다고 생각하나?”
“꽤. 겁을 주시네요.”
“여화 정도라면 아마 수중에 있는 삼분의 일 정도의 수하들을 희생시키는 것을 대가로 발바라 대륙을 지워버릴 수 있지. 효율을 따지면 너무나도 무의미한 짓이지만... 그년이라면 충분히 하고도 남아.”
겁이 난다는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그러니까, 지금은 고래들끼리 싸우고 있으니까. 새우는 알아서 박쥐노릇 하라는 겁니까?”
발락투스가 실소를 터트린다.
“틀린 말은 아니군.”
“제가 그 모든 말들을 믿을거라고 확신하십니까?”
“내 말 중에 거짓은 없다. 그러니 굳이 거짓과 진실을 구분 지을 필요도 없어. 중요한건 하나다. 나는 천군도 마음에 들지 않고 여화도 마음에 들지 않아. 그렇다면 사도 이도, 그대는 마음에 드느냐 묻는다면, 내 대답은 예스다.”
“비록 내 후손인 바하로사를 죽이긴 했으나, 어차피 그것은 필연적인 일. 오만과 자만으로 뭉친 그는 옳지 못한 선택을 했고 결국 죽었지. 내가 그대에게 걸고 있는 것은 단 하나. 그대가 천군과 여화. 그 둘과는 다를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다.”
의자에 깊숙이 몸을 파묻었다.
재미있네.
저게 만약 진실이라면 정말 흥미로운 이야기고 거짓이라면 나를 속이려고 저렇게 구라를 친다는 건데. 그것도 꽤나 흥미롭다.
그의 말을 일단 진실이라고 쳐도, 실질적으로 내가 얻어 가는 건 없다.
지금 무언가라도 얻어가야 저 말에 신빙성이 생긴다.
“지옥도와 비슷한 다른 두 개의 도. 그쪽의 균형자를 만나보고 싶은데 알고 있는 곳 있으십니까?”
발락투스가, 기다렸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언제였는지 확실하게 기억은 나지 않지만. 여화의 진영에 있는 레이놀즈라는 인간이 가지고 있었지.”
무엇을 가지고 있었냐고 물어보지는 않았다.
아니 못했다.
머릿속에 번개가 쳤으니까.
군자검이 보여주었던 과거에 의하면 레이놀즈는 무언가를 북부에 파묻었다.
지금 발락투스의 말과 이어지는 상황들을 보면 그 물건이 열쇠일 확률이 높다.
발락투스가 말을 잇는다.
“그게, ‘정령도’로 향하는 열쇠의 위치를 알려주는 물건이었는데, 찾아내는 건 그대가 직접 해야 돼. 할 수 있겠나?”
실제로 발락투스는 내게 도움을 주고 있었다.
이거 재미있네.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자리에서 일어선다.
그리고는 내 어깨를 살짝 두드리더니, 그대로 주점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나는 멍하니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정말이지, 내가 알던 [시작을 알린 아룡]의 이미지와 너무 딴판이다.
무게감이 지나치게 중하다고 해야 할까.
‘이중인격도 아니고.’
춤을 좋아하며 가벼운 말투를 쓰던 발락투스와 방금 나와 대화를 나누던 발락투스.
‘진짜 이중인격인가.’
진심으로 궁금해질 정도다.
그렇게 탁자 위에 놓인 아르페지오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일단 목이라도 축이자 라는 그런 생각이었는데, 불쑥 뻗어 나온 손이 아르페지오를 잡아챈다.
손으로 빈 허공을 만지작거리던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여화였다.
발락투스가 나가고 여화가 들어온 것.
이거, 밖에서 대기했나보다.
그녀가 아르페지오를 한 모금 들이키더니 내게 말했다.
“너, 나랑 잘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