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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를 한다는 건-83화 (82/131)

83화.  < 공백의 왕(2) >

검이라는 놈이 생각보다 말을 잘한다.

심지어 문장 구성과 주어, 서술어가 다 일치했으며. 맞춤법마저 틀리지 않고 있었다.

거참.

“기특하네.”

짧은 내 말은 분위기를 환기시켜주지 못했다.

군자검이 물었다.

[그대의 진정한 목적은 뭐지?]

나름 묵직한 질문인 것 같은데, 실소가 터져 나온다.

똑같은 질문을 몇 번이나 받는 건지 모르겠다.

그리고 똑같은 대답을 몇 번이나 해야 하는 건지도.

하지만 군자검은 내 대답을 예측했다.

[지구의 멸망을 막겠다는 그대의 목적은 답이 될 수 없다. 이미 그대는 너무나도 먼 길을 돌아가 버렸으니까.]

요약까지 해주네.

기특한 게 맞는듯하다.

“그래서?”

[그대는 죽이고 죽이는 길을 선택했다. 지구를 구한다는 목적과 그대의 행동은 평행선을 이루지 않고 있어.]

말없이 머릿속에 울리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꽤 흥미로운 이야기였으니까.

[지구를 구하는 게 그대의 목적이라면 아스가르드에 존재하는 세 명의 강자에게 고개를 숙이고 부탁했으면 될 일, 하지만 그대는 그러지 않았지. 그대가 하는 짓과 생각하는 모습을 보면 정말이지 난해하고, 난잡하기 그지없어.]

이 새끼, 말이 되게 노골적이다.

그런데 이상하게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사실 내가 봐도 틀린 말은 아니었으니까.

지금 신경 쓰이는 건 딱 하나였다.

시스템의 어조에 조금씩 ‘감정’이 들어가고 있었다는 거.

[나에 대해 궁금하다고? 아니, 그대는 나에 대해서 궁금한 게 아니야. 정확히 타르켄이라는 금속에 대해서 궁금한 것이겠지.]

착각이 아니었다.

문득 들고 있던 군자검이 마치 사람처럼 느껴진다.

조금 오싹할 정도다.

[타르켄은 그저 명칭 일 뿐이며 본질은 세상 그 자체였던 ‘공백의 왕’의 신체 부속품이자, 그의 의지가 담긴 ‘의념’이다.]

머릿속에 울리는 시스템의 어조가 점점 격해졌다.

[이게 궁금했던 것이냐? 더 말해주마. 그의 정신은 숭고했고 그의 의지와 그의 행동은 일치를 이뤘지. 하지만 그는 너무나도 오랫동안 부족한 이들을 보살피고 감싸며 많은 생명력을 소모했다. 결국 그는 영면에 들기로 결정했고 남은 힘으로 후계자를 뽑는 과정을 만들었지.]

할 말이 없어질 정도다.

생각보다 많은 정보를 줄 것 같은 기대감에 나는 군자검을 바닥에 꽃고는 죽어있는 천우의 등위에 털퍼덕 주저앉았다.

[그게 너희가 말하는 시련이고 시스템은 새로운 왕을 뽑는 전체적인 과정을 중재하며 균형자는 공백의 왕이 관리하던 ‘시설’을 임시적으로 대행해주는 이들이다. 하지만 그들은 세상외의 존재, 이면의 세계의 질서를 유지시키는 그들은 시스템의 지배를 받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시스템을 벗어날 수도 없지. 이게 균형자라는 존재들과 시스템이라는 장치의 정의다.]

거참, 어떻게 반응해야할지 모른다고 해야 할까.

지금 내 심정은 이어지는 짧은 말로 설명이 가능했다.

“당황스럽네.”

[이미 예상하고 있던 것 아닌가? 다시 묻지. 회귀를 한 그대는 대체 무엇을 보고, 대체 무엇을 이루기 위해 여기까지 달려온 것이지?]

문득, 품안에 담배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까지의 내 행보와 내 생각, 그리고 내 행동들은 일치를 이루는 것 같지만 자세히 보면 또 그렇지도 않았다.

언젠가는 사이코처럼 행동했고 언젠가는 성인成仁처럼 행동했다.

겉으로 지구의 멸망을 막겠다고 합리화를 하며 살생을 거리끼지 않았던 나는, 지금 다시 한 번 뒤를 돌아볼 기회를 얻었다.

내 목적은 무엇인가.

나는, 무엇을 이루려고 하는가.

[대답을 듣기 전에, 먼저 이걸 말해주고 싶군.]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왜 너뿐만이 아니라 아스가르드에 속한 모든 초월자들을 시련자라 부르는지 아는가?]

말없이 군자검을 응시했다.

그런 내 행동을 모른다는 의미로 받아들인 걸까.

[모를 수밖에, 지금 이런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이유도 그대가 균형자의 시험을 통과했기 때문이니, 어찌 보면 무의미한 질문이었겠군.]

자문자답인가.

자기 혼자 묻고 자기 혼자 답하는 군자검의 모습이 조금 우스꽝스럽긴 했지만 신경 쓰이지는 않는다.

정확히는 집중의 끈을 놓을 수가 없다고 해야 할까.

[그대들은 신이 아니다. 말 그대로 시련자. 그저 힘을 가지고 세상에 균형과 질서를 가지고 올 ‘신’이 될 기회만 부여받은 자들일 뿐.]

"..."

[이 세상에 존재했던 신은 단 한명, 진정한 신을 영접하지도 못한 이들이 스스로를 신이라 칭하며 마지막 보루였던 Episode로 세상을 어지럽히는 꼴이 우습다. 너무나도 우스워.]

시스템의 목소리는 이제 기계적인 목소리가 아닌 너무나도 인간적인 목소리로 변한 상태였다.

[자. 이제는 대답을 듣고 싶군. 세상 유일한 회귀자인 그대의, 진정한 목적이 뭐지?]

대답을 잘 해야 한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지금 내 입에서 나오려는 말은, 앞으로의 내 행동 방향과 내가 걸어갈 길의 방향을 확실하게 제시해주는 길잡이가 될 테니까. 생각해보자.

나는 지구의 멸망을 막으려한다.

그렇다면 여기서 짚고넘어가야할 점은 하나다.

지구는 대체 왜 멸망했나?

곧바로 답이 도출된다.

침식과 여화 때문이다.

침식부터 짚고 넘어가보자.

이야기를 들어보고 직접 겪어본 내가 내린 결론은 하나다.

결국 침식이라는 건 시스템에 적혀있는 과정에 불과하며, 아스가르드의 초월자들은 무언가 수작을 부려 침식을 앞당긴 것뿐이다.

그렇다면 지구는 왜 침식의 대상이 되었나.

“...시련이 끝난 지구는, 침식의 준비가 끝난 상태가 된다는 건가?”

원하는 대답이 아니었다는 듯 군자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거에 대해서 대답을 해줘야 내가 명확한 답을 내려 줄 수 있을 것 같은데.”

살짝 달래주자.

[...애초에 침식이라는 건 왕의 자격을 시험하는 과정에 불과하다.]

만족스러운 답은 아니었다.

“자세하게.”

[침식의 범위는 우주 전체에 적용되며 시련이 끝난 세상이라면 언제든지 침식의 대상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이 전체적인 과정은 기본적으로 공정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침식의 대상이 되기 전 시스템은 그 세상에 시련자들을 뽑고 그들에게 시련을 겪게 해주며 힘을 얻을 기회를 주지. 그 과정이 끝나면 시스템은 아스가르드의 초월자들의 의견을 반영하고 침식을 매칭 한다.]

말끔하게 궁금증이 풀렸다.

처음 아스가르드로 갔을 때 실페리온이라는 초월자를 만났었다.

그는 분명 말했다.

내 시련이 끝나는 순간 아스가르드의 세 지배자들에게 칼을 겨눌 거라고.

그 말도 결국 한 가지를 뜻한다.

“...지구는 우주에서 유일하게 시련을 진행하지 않은 세상이고, 내가 진행하는 지금의 이 에피소드는 시스템이 관장하는 최후의 에피소드다... 이거냐?”

[그렇다.]

“그리고 최후의 에피소드가 끝나면 아스가르드의 제약도 풀리고?”

[그렇다.]

너무나도 깔끔한 대답이다.

그런데 이거, 생각보다 일이 심각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얻은 정보를 종합하면 내가 지금 겪고 있는 이 시련은 최후의 시련이고 이 시련이 끝나면 이 우주에 시련을 진행하지 않은 세상은 존재하지 않는다.

즉, 모든 세상이 침식의 대상이 된다는 이야기.

그리고 그 이전에, 아스가르드에서의 힘의 제약이 풀린다는 건 초월자들의 전쟁이 벌어진다는 이야기.

그렇다면... 잠깐.

“...결국 여화가 공백의 왕이 되었다는 말이잖아?”

[...]

나의 시련이 끝나는 순간 아스가르드는 전쟁이 벌어진다.

그리고 전생에서 지구는 여화의 소환술에 멸망했다.

즉, 초월자들의 전쟁, 그 전쟁에서 최후의 승자는 여화라는 이야기다.

...그 미친년이 생각보다 더 어마어마한 괴물이라는 점에서 조금 소름이 돋았다.

군자검은 말없이 내 대답을 기다리고, 나는 군자검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군자검의 말에 틀린 점은 없다.

여화는 나를 원한다.

내가 여화의 밑에 들어간다면 아마도 지구는 멸망을 피할 수 있을 것이다.

뿐이랴.

아스가르드의 전쟁에서 여화는 최후의 승자가 될 테고 그 옆에 붙어있을 나는 당연히 일인지하만인지상의 자리에 앉게 될 터.

확실히 내가 여화의 곁에 붙으면 모든 일이 깔끔하게 풀린다.

그리고 그 즉시 이 모든 이야기가 끝나겠지.

그런데.

내가 누구 밑에서 똥 닦아주는 일은 못하겠다.

“확실히 내가, 돼야겠네.”

[무엇이?]

군자검의 빛나는 몸체를 바라보며, 말했다.

“공백의 왕, 그거... 내가 돼야겠다고.”

군자검은 침묵했다.

분위기가 되게 묘하다.

마치 다른 대답을 원한 것 같다고 해야 할까.

“하나 묻고 싶은 게 있는데.”

[뭐지?]

정말 궁금했고, 반드시 했어야할 질문이다.

“형님은, 아니, 정지혁은 지금 어디에 있는 거냐?”

이면의 진실이니 여화가 공백의 왕이 되었다느니, 이딴 건 솔직히 짐작은 하고 있었던 일들이다.

하지만 유일하게 짐작도 되지 않고, 답조차 명확하게 도출되지 않은 게 딱 하나 있었는데, 그게 바로 형님에 대한 일이다.

왜, 형님은 내게 말해주지 않고 있는 걸까.

내가 회귀를 한건 분명 형님과 관련이 있다.

벌어지는 일련의 상황들로 보면 결국 ‘나’라는 존재와 정지혁은 깊게 연관되어있었다.

기왕 말이 나왔으니 다시 짚어보자. 내가 회귀를 한 것을 시스템은 알고 있지만 아스가르드의 존재들은 모른다.

일부러 회귀를 한 것 같은 티를 내기도했지만 결국 그들이 내린 결론은 내가 미래를 알고 있는 예지 능력자라는 것뿐. 그 누구도 내게 ‘회귀’를 언급 한 적은 없었으며 회귀자라고 의심한 이들도 없었다.

지금의 상황도 마찬가지다.

신화 아이템의 자격 검증은 결국 시스템이 가상 세계를 만들어주고 그 세계로 이동한 채 그곳에서 시스템의 주관 하에 신화를 획득하면 된다.

마치 퀘스트를 진행하는것처럼 편하게 따라가면 된다는 뜻.

여기서 퀘스트 클리어에는 정확히 두 가지 방법이 있는데 하나는 원래 아이템의 주인이 이룩한 신화와 비슷하거나 그를 넘어서는 업적을 이룩하면 된다.

이게 첫 번째 방법이고, 가장 베스트는 두 번째다.

그 신화를 이룩한 자, 즉 그 신화 아이템의 주인에게 인정받는 것.

첫 번째와 두 번째는 비슷하긴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다르다.

그리고 지금의 상황은 거의 두 번째에 해당되고 있었다.

군자검은 주인이 없는 검이다.

원래 주인이라고 생각되던 레이놀즈는 단순한 사용자에 불과했으니, 지금 나는 군자검안에 내재되어있는 공백의 왕의 잔류 사념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것이다.

거기다 이런 대화가 가능한 이유는 앞서 군자검이 말했듯 내가 균형자였던 아수라에게 인정받았기 때문일 터.

그게 지금의 상황이다.

거기다 군자검은 정보까지 주려고 한다.

그렇다면 뽕을 뽑아야하지 않겠는가.

[정지혁... 정지혁이라…]

군자검이 조용히 형님의 이름을 곱씹는다.

그리고, 말했다.

[‘천계도’의 자리를 거절한 그 인간을 말하는 것이겠지?]

천계도라...

혹시 불교의 천상도를 모티브로 딴 걸까.

지옥도, 천계도, 현재까지 두 개가 등장했다.

그럼 뒤에 이어지는건 축생도 뭐 이런건가?

그 이상 생각을 이어가지 못했다.

뒤에 이어지는 군자검의 말이 너무 충격적이었기에.

[왜 그 인간이 살아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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