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화. < 공백의 왕(1) >
일단 몸 안의 기운을 끌어올렸다.
나는 평소에 몸 안의 혈기를 자극시킨 뒤, 몸의 한계를 극한으로 끌어올렸고 그 상태로 마나를 사용했다.
비록 지금 레이놀즈의 몸이라고는 하나, 놈도 마나를 사용했던 것은 매한가지.
내 몸이 푸르게 물들었고, 이어서 군자검도 부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망설임 없이 검을 휘두르자 참격이 뻗어나간다.
순간 천우의 눈매가 흠칫하고 떨린다.
내 참격의 형태가 이상했던 걸까.
뭔가 의아함을 감지한 그런 눈빛이다.
여하튼, 천우는 군자검에서 뻗어나가던 세 줄기의 참격을 피했다.
하나는 고개를 젖힌 뒤 피하고, 일병 계급장 처럼 날아가는 두 줄기의 참격은 자리를 살짝 박찬 뒤 곡예를 부리듯 몸을 회전시키며 피했다.
생각보다 너무나도 깔끔한 동작들이다.
이어서 바닥에 착지한 천우가, 자리를 박차고 번쩍하는 순간 그와 나의 난투극이 펼쳐졌다.
검을 휘두르고, 피하고, 반격하고, 빈틈을 포착해 공격하는 그 수어번의 공방이, 찰나의 순간 빠르게 펼쳐진다.
레이놀즈와 천우가 있던 공간은 분명 신전이었다.
중간 중간 여신 석상 같은 게 자리해 있는 것과 당연히 이때도 존재했을 레드원 신전의 상징도 걸려 있는 게, 확실히 신전이었다. 그리고 지금, 신전은 완전히 초토화가 되어있는 상황.
상황만 보자면 나는 지금 천우와 거의 대등한 싸움을 펼치고 있었다.
내가 파악한 천우의 신격은 2성.
즉, 레이놀즈와 동급이다.
아무리 내가 2성의 레이놀즈의 몸을 차지하고 있음에도 나는 3성의 초월자고, 조건부이기는 하나 그 이상의 힘을 몸에 두르기도했다. 그런 나와 천우가 동급을 이룬다는 건... 하나밖에 없다.
내가 바하로사와 겨뤘을 때 ‘기술’로 승부를 보았듯, 이놈도 지금 기술로 승부를 보고 있는 것.
아무래도 애초에 천우라는 초월자는 신격은 그저 밑바탕이었을 뿐이고 모든 공격과 방어는 최대한의 ‘기술’로 승부를 보는 유형이었나 보다.
내 사각을 향해 뻗어져오는 주먹과 시간차를 두고 휘둘러지는 니킥, 그리고 인지하지 못하는 각도에서 휘둘러지는 깔끔한 손등치기까지.
그 하나하나가 예리했고 솔직히 대단했다.
감탄이 새어나오지 않는 게 이상할 정도다.
마치 무武의 극을 깨우친 사람 같다고 해야 할까.
고개를 숙이자, 역시나 사각에서 천우의 손등이 휘둘러졌다.
평소라면 저 손을 잡은 채로 반격을 시도했겠지만 이번에는 아니다.
저걸 잡는다면 놈은 또 다시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공격을 시도할 터.
그대로 양다리에 힘을 주고 자리를 박찼다.
콰아앙-!!
내 머리가 천우의 몸통을 그대로 들이받자.
"큭..!"
그가 작은 신음을 토해 내며 나와 함께 날아간다.
그 와중에도 그의 다리에 기운이 몰려든다.
아무래도 거리를 벌리려하는 것 같다.
거참.
내가 왜 박치기까지 했는데, 그렇게 둘 순 없지.
양손을 뻗어 그의 허리를 감싸 쥐고는 그대로 바닥에 메다꽃았다.
콰아아앙-!!!
천우가 피를 토해내던 그때 나는 재빨리 놈의 몸 위로 올라탔다.
그가 당황하는 그 짧은 순간, 나는 양쪽 무릎으로 천우의 양팔을 봉쇄했다.
이어서 한쪽 손으로 그의 이마를 움켜쥐고는 바닥에 그대로 내리찍었다.
깔끔한 마운트에 이어 허튼짓하기라도 하면 대가리를 터트려버리겠다는 내 무언의 협박에 그가, 분노한 얼굴로 나를 노려본다. 그런데 이게 참, 뭐라고 표현하기 어려운 기분이다.
일단... 몇 대만 좀 맞자.
가볍게 주먹으로 놈의 옆얼굴을 후려쳤다.
퍼억-!
가만, 내가 몇 대 맞았더라.
한 대 맞고 세 번 막았으니까.
그냥 여덟 대만 맞자.
퍼억! 퍼억!! 퍼억-!!
정확히 여덟 번 후려갈겼다.
네 번은 놈의 왼쪽 광대에, 나머지 네 번은 오른쪽 광대에.
천우가 피를 줄줄 흘리며, 나를 올려다본다.
그런데,
그 시선이 묘하다.
그리고, 묻는다.
“…너, 누구지?”
“알아서 뭐하게?”
"...레이놀즈가 아니군.”
확신하듯 중얼거리는 그 말이, 조금 안쓰럽다.
“그럼... 레이놀즈는 어디로 간 거지? 아니, 설마...”
마치 무언가 깨달았다는 듯 천우가 눈을 크게 뜬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실소를 터트리고 말았다.
과거의 세상이 눈앞에 펼쳐지고 이미 죽은 이와 대화를 나누는 이 상황 자체가, 신기하기도 하고 우습기도하다.
지금 이 시련은, 군자검이 시스템의 도움을 받아 내게 내려주는 시련이다.
당연히 나는 그 시련에 대해서 나름대로 추측했었다.
그런 내가 내린 결론은 하나다.
레이놀즈가 전 대륙을 통일하는 그 순간은 놈이 살아있었던 순간 중 가장 화려했던 순간이었을 것이다.
레이놀즈가 군자검의 주인이었다면, 내가 치루게 될 시험은 그 순간 일 확률이 높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군자검은 계속해서 내게 다른 걸 보여주고 있었다.
그리고 눈앞의 이 천우라는 놈.
이놈은 대체 왜 나타난 걸까.
의문을 품던 그 순간.
“설마... 지금 이건, 과거에 벌어진 일인가?”
이거, 생각보다 재미있다.
이 천우라는 남자. 단순하게 눈치가 빠른 수준이 아니다.
자신의 처지와 지금이 어떤 상황인지를 파악한 게 확실하다.
“‘천룡의天査衣’는 아닐 테고... 혹시, ‘군자검’인가?”
“천룡의?”
“내가 초월자가 되고 자격 획득에 실패했던 신물이다. 말과 표정으로 보니 군자검의 시련을 겪고 있나보군.”
역시, 이 남자는 신격이 담긴 아이템의 시험을 본 경험이 있는 남자였다.
그리고, 그의 몸에서 피어오르던 기운이 순식간에 꺼져들었고, 그의 몸에 미약하게나마 남아있던 분노라는 감정의 찌꺼기가 눈녹듯이 사라졌다.
너무나도 갑작스러운 변화다.
아무래도, 시스템이나 군자검이 개입한 것 같다.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헛웃음을 터트린다.
“재미있구나. 3성에 근접해있던 레이놀즈조차 주인이 되지 못하고 휘두르는 것을 ‘허락’받는 게 고작이었던 그 군자검의, 주인이 되겠다고?”
“...뭐?”
내 의문에, 그가 덩달아 의아한 표정으로 되묻는다.
“모르고 있었는가?”
알 턱이 없다.
대체 이게 무슨 상황인거지?
툴칸과 싸울 때, 그리고 처음 이 군자검을 발견했을 때 레이놀즈는 아스가르드에 있는 채로 군자검에 ‘개입’했었다.
그런데 놈이 주인이 아니다?
그럼 그건 레이놀즈의 개입이 아니라, 군자검 자체의 개입이었다는 뜻인가?
"그대의 신격은, 몇 성이지?”
뭐라고 답해야하나.
3성이긴 하지만 제한적으로 5성 이상의 힘을 가진다고 해야 하나.
그냥 깔끔하게 답하기로 했다.
“3성.”
“그렇군. 3성이면... 그대도 허락받는 것에서 멈추겠군.”
듣다보니 묘하게 거슬린다.
"확신 하냐?”
“무엇을?”
“내가 군자검의 주인이 되지 못 할 거라는 거.”
그가, 피식 웃는다.
“군자검의 유래에 대해서 아는가?”
고개를 저었다.
“길게 말할 필요 없겠지. 군자검은 존재조차 모를 이름 없는 왕의 유산이자, 그 일생의 사념이 깃든 물건. 내가 알기로 5성의 초월자도 주인이 되지 못했다. 그런데, 3성의 그대가 주인이 되겠다고?”
조용히 놈을 바라보았다.
머지않아 서부와 동부의 총력전이 벌어질 것이고, 그곳에서 레이놀즈는 압도적인 무력으로 세상을 통일할 것이다.
대륙을 혼란에 빠트린 것과 대륙을 한 번에 정리하는 일을 동시에 해버렸으니, 그게 어떤 것이건 간에 놈은 어마어마한 ‘신격’을 획득 했을 확률이 높다.
그것도 매우 많이.
지금 이 시점에서 레이놀즈가 2성이라면 아스가르드에 있는 ‘황제의 길을 걸었던 전사’, 즉 레이놀즈는 최소 3성에서 최대 4성 사이의 초월자가 확실하다.
잠깐 내가 명상을 하는 사이 이미 모든 게 끝난 상황 일 수도 있다.
여하튼, 어떻게 끼워 맞춰보면 앞뒤는 다 맞출 수 있는데.
이름 없는 왕의 유산이라는 말과 일생의 사념이 깃들었다는 게 조금 묘하다.
군자검의 시련이 지나치게 길었던 게, 그래서였던 걸까.
“신기하군 레이놀즈의 그 얼굴에서 그렇게 생각이 많다는 노골적인 표정을 보는 게 얼마만인지.”
시스템은, 천우가 감정을 정리하는 선에서만 도움을 주고있는 걸까.
이게 호의인지, 적의인지.
알 수가 없다.
일단은 수용했다.
“그 개자식은, 미래에 어떻게 되었지?”
대답하지 않고 슬며시 손을 내뻗자 바닥에 널브러져 있던 군자검이 내 손안으로 빨려 들어온다.
여전히, 그립감이 좋다.
그대로 놈의 목에 겨누자 날에 닿은 놈의 목에서 작은 핏물이 흘러내린다.
놈은 반항조차 하지 않았다.
내가 이대로 검을 그대로 옆으로 움직이면 놈의 목은 잘려나갈 확률이 높다.
그냥 그어버리려다, 멈추고 말았다.
“군자검을 그대가 가지고 있다는 건 놈이 죽었거나... 결국 아스가르드에 종속되었다는 건데. 어차피 나는 죽지 않아. 그러니 말해주게."
“죽지 않는다? 아니, 너는 죽어. 내가 있는 미래에 천우라는 이름은 존재하지도 않으니까.”
“...그대가 3성의 초월자라면 모를 리 없을 텐데?”
“에피소드가 끝난 시련자는 언제든지 아스가르드로 넘어가 그곳에서 새로운 ‘시련’을 시작할 수 있다. 그런데, 그렇게 계속 질문만 하고 대답은 해주지 않을 건가?”
시발.
진작부터 느끼고 있었다.
내가 여태껏 알고 있던 정보들이 조금씩이지만 군데군데 구멍이 뚫려있다는 것을.
여천에 대한 이야기와, 시스템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신화 아이템에 대한 이야기와 아스가르드에 대한 이야기들까지.
내색하지 않고 나름 최대한 상황에 맞게 합리적으로 생각하려고 노력했었다.
형님의 이야기는, 어디부터 어디까지가 진실이었던 걸까.
이해가 가지 않는다.
7성의 초월자였던 형님은, 왜 내게 그런 것들을 말해주지 않은 걸까.
“하긴, 물어봤자 소용없겠군, 그 빌어먹을 놈이 죽었을 리는 없고, 보나마나 아스가르드로 갔을 테지.”
그 말로 직감했다.
눈앞의 이놈은 과거가 아닌 지금, 그러니까 유토피아 제국이 존재하는 현재의 시간대의 아스가르드에 존재한다.
이명이 뭔지는 모르겠으나 시간 내서 아스가르드로 가게 되면 만나게 되겠지.
천우가 무언가 말하려던 그때. 그냥 군자검에 힘을 주었다.
서걱-!!
놈의 목이 그대로 잘린다.
눈을 크게 뜬 채로 죽어있는 천우의 머리를 잠깐 바라보았다.
혹시나했는데, 역시나였다.
천우의 몸이 빛이 되어 하늘로 천천히 사라지기 시작했으니까.
실제로 본 적은 없지만 확실하다.
그냥 보는 순간 알 수 있었다.
이건, 아스가르드로 넘어가는 것이라고.
아마 군자검은 내게 보여주고 싶었나보다.
지금의 이 상황과 저 모습들을.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군자검을, 다시 살폈다.
생각해보면 이상하다.
전생에서 형님에게 자기가 사용하던 무기를 후원해준 ‘크로노스’는 왜 후원을 해준 걸까.
아스가르드에서는 무기가 필요하지 않다는 건가?
합당한 이유가 되지 않는다.
거기다 레이놀즈도 마찬가지다.
놈이 아스가르드로 가건 말건, 그딴 건 관심 밖이다.
대륙의 주민들의 숫자가 차이가 나는 것도 솔직히 이제는 관심이 없다.
짐작 가는 게 없는 것도 아니다.
놈이 황제가 되어 역사를 새롭게 썼을 확률이 높고, 놈의 정치 수완이라면 관련자도 모조리 죽였을 것이며, 판테온 제국 이전의 정보가 남아있지 않은 이유는 초월적인 괴물들의 집합소인 아스가르드의 도움을 받았을 확률이 높다.
새삼스럽지만 아스가르드가 개입하지 못하는 건 Episode를 진행하고 있는 세상들이다.
당시에 발바라 대륙은 Episode가 진행되는 세상이 아니었다.
Episode가 끝난 세상이기에, 아스가르드의 신들이 무슨 짓을 하건 이상하지가 않다.
이야기가 잠깐 샌 것 같다.
다시 본론으로 들어가자면 아스가르드로 넘어가는 놈들은, 자신들의 무기가 필요 없던 걸까?
대체 왜?
아스가르드에서 서로 간에 싸울 수 없는 제약이 걸려있기 때문에?
이딴 건 답도 되지 않는다.
레이놀즈는 군자검을 이곳에 내팽겨 둔 채로 넘어갔고, 혼란을 초래하는 거인 크로노스는 전생에서 형님에게 무기를 후원해주었다.
왜라는 질문이 생기지 않을 수가 없다.
내가 알던 정보들에 뚫린 구멍들은, 이렇게 인과적인 결론들이 대부분이었다.
군자검을 들어올리며, 물었다.
"너는, 아니, 너희들은 대체 뭐지?”
뜬금없는 말은 아니다.
전설에 의하면 신의 금속 타르켄으로 만들어진 무기들에는 일종의 자아가 깃든다고 했다.
즉, 에고가 깃드는 물건.
내가 궁금해 하는 이유들은 사물들에게 들을 수 있다.
머지않아 군자검이 부르르 떨려온다.
평소라면 이렇게 떨리는 것으로 약간의 의사를 전달할 수 있겠지만 이곳에서는 다르다.
띠링!
[군자검이 당신을 바라봅니다.]
지금 이 세상은, 군자검이 시스템의 도움을 받는 상황이다.
정확히는 신화 스토리를 관장하는 시스템의 도움을 받는 지금 이 상황을, 군자검이 보고도 가만히 있을 리 없다.
“물었다. 뭐냐고.”
[군자검이 답합니다.]
순간, 주변 모든 것이 멈췄다.
잘려있던 천우의 목에서 흘러나오던 피가 멈췄고, 공기가 멈췄고, 모든 게 멈췄다.
마치 내가 아수라를 사용했을 때처럼.
그때의 변화와 흡사하다.
동시에 내 머릿속에, 시스템의 기계적인 목소리가 울린다.
[우리는 공백의 왕, 그리고 나는 그가 사용했던 유산.]
공백의 왕.
아수라에게 들었던 [유토피아의 군주]의 최종 형태다.
끝이 아니었다.
시스템을 빌린 군자검의 목소리가 조금 더 뚜렷해지며, 조금씩 ‘인간미'를 띄기 시작했다.
그렇게 군자검의 말이 이어진다.
매우 충격적인 형태로.
[회귀자 이도. 이번에는 내가 질문을 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