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 이거 진짜 쓰레기였네(2) >
가상현실게임이 상용화되었다면 아마 이런 느낌이지 않았을까싶다.
눈앞에서 보여지는 일련의 상황들을 바라보며, 저 생각 말고는 들지가 않았다.
눈앞에서, 풍성한 금발 머리를 뒤로 질끈 묶은 굵직한 인상의 한 남자가 한 성벽 위를 천천히 걷고 있었다.
율리우스와 매우 닮은 외모였지만 굉장히 중후한 인상의 그는, 말없이 주변을 훑었다.
얼음, 빙산, 만년설, 그리고 휘몰아치는 눈보라.
분명히 발바라 대륙의 북부 쪽에 있는 장소가 분명하다.
정확한 지명은 ‘자하’다.
이게, 어떻게 알았냐는 물음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냥 알 수밖에 없다.
북부라는 거대한 토지를, 발바라 대륙의 주민들은 그냥 자하라는 이름으로 묶어서 부르고 있었으니까.
내가 알기로 자하는, 1년 365일 매일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지형이다.
즉, 사람이 살아갈 수 없는 극악의 환경.
그런데 그런 북부에... 저런 거대한 ‘성’이 존재한다고?
주변에는 건물 같은 게 보이지도 않았다.
그냥, 달랑 성 하나였다.
휴양지였거나, 혹은 누구의 무덤이었거나... 둘 중 하나가 확실하다.
그렇게 레이놀즈라고 강력하게 추정되는 인물이 주변을 둘러보고 있을 때, 동양적인 외모의 남자가 레이놀즈의 옆에 자연스럽게 서더니, 말했다.
“레이놀즈님.”
무언가 깊게 생각할 거리라도 있는 걸까.
레이놀즈는 답하지 않았다.
똥폼 잡고 있는 놈의 꼬락서니가 불만이긴 했지만 일단 기다렸다.
무슨 일이 진행되려거든 그 준비 절차가 진행되는 건 당연했으니까.
일단은 그냥 그러려니 하는 생각뿐이다.
"...레이놀즈님, 대체 ‘마테리아의 유산’에는 무엇이 적혀 있었던 겁니까.”
그제야 레이놀즈가 고개를 돌린다.
“천우야.”
저 동양인의 이름이 천우였나 보다.
마치, 무협지에나 등장할법한 이름이다.
“그때 기억 나느냐?”
"..."
“우리가 겪었던 마지막 시련.”
“...인어들 말씀이십니까?”
“그래, 인어.”
그 짤막한 말을 끝으로 레이놀즈는 다시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빙산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인어, 거인, 악마, 엘프, 하피...”
그 외에도 몇 가지 종족의 이름을 읊던 레이놀즈가, 느릿한 손길로 성벽에 양손을 얹는다.
“인간을 제외하고 우리가 만난 그 수많은 종족들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모두가 왕이 있었지.”
“그들의 왕은 모든 이들을 아우르는 힘을 갖춘 존재였어. 그런데... 우리 인간은? 어쭙잖은 세습으로 무능한 놈들이 왕이 되고 지배층이 되니, 대륙이 멀쩡할 리가 없지.”
“네가 보기엔 지금 이 발바라 대륙에서 가장 강한 자는 누구지?”
“레이놀즈님이십니다.”
“그런데, 내가 왜 힘없는 머저리 같은 놈한테 명령을 받고, 그 뒤를 닦아주면서 살아야할까.”
“...외람되지만 갑자기 왜 그러시는 겁니까. 힘을 가진 우리는 약자를 보호해야 한다고, 그렇게 말씀하시고, 그렇게 살아오지 않으셨습니까.”
천우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레이놀즈의 몸에서 미세한 기운이 피어오르고, 그가 짚고 있던 석벽이 그대로 짓이겨진다.
분명 저건, 분노였다.
그리고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읊조렸다.
“무엇을 하든 결국 멸망할 세상이라면, 누구 손에 멸망하든 상관없을 테고 그 결과가 정해져있다면... 누가 그 결과를 만들었는지도 중요하지 않을 터.”
레이놀즈의 저 말은, 천우라는 남자에게 하는 말이라기보다는 독백에 가까웠다.
마치 무언가 해탈한 듯 내뱉은 스님의 넋두리 같다고 해야 할까.
그때였다.
레이놀즈가, 품에서 웬 작은 상자 하나를 꺼내든다.
“...그거군요. 마테리아의 유산.”
천우의 말에 레이놀즈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한마디 더 보탰다.
“이건, 세상에 공개되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는 천우가 뭐라고 할 새도 없이 성벽 아래의 눈 더미 속으로 집어던졌다.
이어서. 레이놀즈의 몸에서 푸른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주변으로 넘실거리던 그 기운은, 천우라는 남자를 제외한 주변에 있던 ‘성’과, 성벽을 완전히 허물어버리기 시작했다.
천우라는 남자는 당황하지 않고 그 자리에서 허공으로 천천히 떠올라 균형을 잡았고, 이어서 콰과광하는 광음이 울려 퍼진다.
그렇게 자하라는 북부 지형에 있던 성 하나가 완전히 무너졌다.
레이놀즈는 멈추지 않았다.
뿜어낸 기운을 군자검으로 집중시키기 시작한 것.
이어서 군자검이 부르르 떨린다.
솔직히, 지켜보던 나는 조금 감탄했다.
저건 아수라의 시련을 겪기 전의 나보다는 강했지만, 바하로사보다는 약한.
그러니까 한 2성 정도의 신격이 분명했으니까.
더 놀라운 건 그 이후에 벌어진 일이다.
레이놀즈는 군자검을 내지르며 동시에 참격을 쏟아냈다.
콰아아앙-!!
설산이 무너지며, 성벽 아래에 지름 100미터는 훌쩍 넘는 거대한 크레이터가 파인다.
그리고는 그곳을 향해 두어 번 정도 참격을 더 쏟아낸 뒤 기운을 거두어들였다.
뭘까.
레이놀즈는 저 상자를 숨기려는 걸까?
아니 숨기려는 목적이었다면 애초에 파괴해버렸으면 될 것을 뭐 저렇게 복잡하게 일을 처리하는 걸까.
의문이 가시길 않는다.
그때, 레이놀즈가 나를 향해 고개를 돌린다.
정확히는 내가 아닌 천우를 향해서.
“나와 함께 하겠느냐.”
“대체 무엇을 하시려고...”
“두 번 묻지 않는다. 나와, 함께 하겠느냐.”
천우가, 결국 힘겹게 고개를 끄덕인다.
고작해야 30대 초반 정도에 불과해 보이는 그 남자는, 그렇게 레이놀즈의 뜻에 동참했다.
이어서 시야가 순식간에 바뀐다.
분명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았을 텐데 체감 상으로는 수년이 흐른 것 같다.
어느 순간 나는 군자검이 되어있었고, 어느 순간에는 군자검이 아닌 레이놀즈를 곁에서 지켜보는 제3자가 되어있었다.
그렇게 나는 레이놀즈가 행한 모든 일들을 보고, 직접적으로 느꼈다.
상황을 가볍게 묘사하자면, 지금으로부터 고작해야 20년 전인 이때 당시에는 정확히 서양인들이 주축이 되어있는 서부와, 동양인들이 주축으로 되어있는 동부, 이 두 개의 진영이 존재했고 레이놀즈는 서부 지역에 위치한 꽤나 큰 왕국의 수호기사였다.
심지어, 이미 레이놀즈는 영웅이라고까지 불리고 있었다.
하지만 주민들은 몰랐다.
레이놀즈가 준비하고 있는 일과, 그 결과로 벌어질 일들을.
얼음 성에서 레이놀즈가 다짐하고 나서부터 1년이 지난 뒤 레이놀즈가 수호기사로 있던 왕국의 왕이 동부의 자객에게 암살당했다.
그 여파는 절대로 작지 않았다.
마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왕위 후계자인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이, 세르비아의 가브릴로 프린치프에게 암살당한 사건으로 시작된 세계대전과 흡사했다.
순식간에 서부와 동부는 급속도로 냉각기에 진입했고. 2년이 지난 뒤 동부와 서부는 전쟁이 벌어졌으며, 3년이 지나고 1차 대륙 전쟁이 시작되었다.
레이놀즈는 유능했다.
사람들을 다루는 방법이나, 군중들의 공포를 이용하는 방법까지. 모르는 게 없었고 그의 행동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1차 대륙전쟁은 고작해야 한 달 만에 종료된다.
그것도 양측의 정전협정으로.
하지만, 당연히 그것도 시작에 불과했다.
그 이후 1년이 채 되기도 전에 본격적인 제2차 대륙전쟁이 시작되었고 동부와 서부는 모든 병력을 총 동원해 전쟁을 시작했다. 새삼스러울 것도 없지만 그 모든 일의 배후는 당연히 레이놀즈였다.
모시던 왕을 죽인 것도 레이놀즈, 그 왕의 가족들을 모조리 죽인 것도 레이놀즈. 심지어 1차 대륙 전쟁이 벌어졌을 당시에는 공개적인 자리에서 눈물까지 흘리는 퍼포먼스를 보여주기도 했고, 결국 2차 대륙 전쟁을 일으키면서 ‘판테온 왕국’을 건국했다.
그 과정에서 놈이 얻었을 칭호가 뭔지는 모르겠다.
다만 확실한건 레이놀즈는 자기 손으로 대륙을 멸망시키려는 야망을 품었고, 그걸 현실로 옮겼다는 것.
아니, 세상이 혼란스럽다면서 그 세상을 더욱 더 큰 혼란에 빠지게 하는 게 정상적인 사고로 가능한 일인가?
여기서 나는 두 가지 의문점을 포착했다.
우선 첫째. 이때의 발바라 대륙에는 주민들이 상당히 많았다.
어느 정도냐면, 현재 시점의 발바라 대륙의 인구수는 많아봐야 3억, 아니 2억도 채 되지 않는다.
하지만 언젠가 언급했듯 발바라 대륙의 크기는 지구의 수십 배를 훌쩍 넘는다.
그런데 내 눈에 보이는 인구의 수는 레이놀즈가 속한 서부만 해도 기본 억 단위를 가볍게 노는 것 같다.
대충 이어지는 대화들만 봐도 왕국 하나에 속한 병사가 최소 수십만에, 춘추 전국시대같이 수십 개의 왕국이 난립하는 그 상황에서 서부 전체를 합치면 그 병사의 수는 수천만이 넘어간다.
이게, 말이 되나?
병사를 수천만 단위로 쓸려면, 그에 따른 물자는 어떻게 보급 할 것이며, 그 보급을 책임지는 이들은 또 어떻게 관리 할 것인가. 아무리 이곳에 기와 마나라는 초월적인 힘이 작용한다 해도 이건 분명 비상식적인 일이 분명하다.
그러니까, 병사를 수천만이나 동원했을정도로 거대했던 대륙.
당연히 그 바탕에는 압도적인 ‘인구’가 받쳐주고 있었을 텐데, 그렇다면 그 많던 대륙의 주민들은 전부 어디로 갔단 말인가?
이게 첫 번째 의문이고, 두 번째 의문은 이 전체적인 상황에 대한 의문이었다.
나는 분명 군자검의 신화를 획득하기 위해서 지금 이 자리에 있다.
약간의 설명 같은걸 수용할 생각은 있었지만 이거, 서두 부분인 것 같은데 너무 지나치게 길다.
인내심 테스트 하는 것도 아니고.
내가 왜 레이놀즈가 왕비로 추정되는 한 여인에게 율리우스랑 엘리자베스를 만들어내는 과정을 지켜봐야 하는 건지도 모르겠고, 그냥 눈을 감아야할지를 진지하게 고민한 순간이었다.
내가 이 군자검의 신화를 획득하려는 이유는 별게 아니다.
신격,
내 신격을 성장시키기 위해서다.
이 군자검의 주인이었던 레이놀즈는 지금 눈앞에 보이는 것만으로 최소 2성의 초월자다.
초월을 한다는 건, 결국 어마어마한 업적을 쌓았다는 뜻이다.
그건 변하지 않는 필연이며, 그가 사용했던 군자검은 당연히 그의 신화가 깃들어있고, 그 등급은 사용자였던 레이놀즈와 동급일 수밖에 없다.
신의 금속 타르켄은 그런 성질을 가지고 있으니까.
내가 여기서 군자검의 자격을 획득한다면 나는 ‘경험치’를 획득하게 된다.
신격을 성장시키는 최고의 방법은 다른 신화 아이템의 경험치를 흡수하는 것.
결국, 지금 상황은 한 가지를 의미했다.
군자검이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적어도 네가 ‘나’의 주인이 되고 싶다면 전 주인이 어떤 놈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알고 있어라. 그것도 아니라면 너는 저놈과 뭐가 다르냐고 묻는 그런 뉘앙스이기도 했다.
그냥, 코웃음이 터져 나온다.
그렇게 기다렸다.
마음을 비우고, 명경지수의 마음으로 오랜만에 명상을 하자 군자검이, 아니 이 세계가 당황해 하는 게 느껴진다.
정작 집중해야 할 놈이 집중은 안하고 딴 생각을 하고 있으니 당황할 수밖에.
그렇게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고.
콰아아아앙-!!
갑작스럽게 느껴지는 굉음과, 이어지는 격통에 이를 악물 수밖에 없었다.
고요했던 마음은 순식간에 깨지고 내 몸은 뒤쪽으로 멀리 날아갔다.
쿨럭-!
입가에서 피를 토해 내고 말았다.
젠장.
이게 갑자기 뭔...
그대로 고개를 들었다.
눈앞에 보인다.
나를 향해 주먹을 내뻗은 채로 멈춰있는 한 남자가.
바로 레이놀즈를 곁에서 호위했던 천우라는 그 동양인이 분명하다.
그가, 나를 향해 분노한 얼굴로 외친다.
“대체 왜!!!!”
왜라는 질문을 왜 나한테 하는 거지.
상황을 파악해야겠다는 생각보다는, 일단 선빵을 먹인 저놈을 최소 반 이상 죽여 놔야겠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지배했다.
망설임 없이 자리를 박차려던 그때.
흠칫하고, 몸이 떨린다.
이거 느낌이 쎄하다.
평소보다 시야의 눈높이가 높다.
심지어 입고 있는 갑옷은 움직이기 거추장스러워서 단 한 번도 입지 않았던 판금갑옷이었으며 온몸에 느껴지는 힘과 심장어림에 자리 잡고 있을 귀기가, 없다.
문득, 손에서 이질감이 느껴진다.
검이었다.
군자검.
은색으로 완전히 물들어있는 그 군자검의 검면에는 내 얼굴이 비춰보였다.
금발 머리에, 뒤로 질끈 묶은 머리.
나는, 레이놀즈였다.
띠링!
[시련을 시작합니다.]
[당신은 군자검의 전 주인이었던 레이놀즈 판테온과 같은 길을 걸을 필요가 없습니다.]
[당신 스스로를 증명하십시오.]
[무운을 빌겠습니다.]
"..."
"당신을 따랐어!!”
미치겠네.
“당신을 따랐다고!! 그런데 왜!! 내 가족을.... 대체 왜!!!”
눈앞에서 절규하는 천우는, 정말로 미안한 말이지만 관심 밖이었다.
어차피 과거에 일어난 일이고. 내가 한 일도 아니다.
한 번 더 강조하자면, 관심 없다.
그리고 나는 한 대 맞으면 두 대를 돌려주는 성격이다.
그러니까.
두 대만 맞자.
나는 말없이 자리를 박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