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 세계 최강의 귀신(1) >
갑작스럽게 쏟아지는 빛무리에 눈을 감았다.
어두워진 시야 속에서, 밖이 점점 밝아지는 게 안쪽 눈꺼풀 너머로 느껴진다.
눈을 떠야한다.
분명, 떠야하는데.
이상하게 망설임이 생긴다.
느낌상으로는 눈앞에 여전히 ‘누군가’ 존재한다.
방침장군은 아니다.
내 감각에 잡히는 눈앞의 상대는, 6미터에 이르던 방침장군의 덩치보다는 훨씬 작았으며 보는 것만으로도 오금이 저렸던 그 어마어마한 존재감도 완전히 사라진 상태였으니까.
...설마.
“뭐야? 못 본 사이에 심안이라도 깨우쳤냐?”
약간 굵은 허스키 같은 목소리, 그리고 그 안에 담겨있는 여유와 장난기까지.
나는 천천히 눈을 떴다.
"오랜만이다."
형님이, 밝게 웃으며 인사를 건네고 있었다.
나는, 또 다시 새하얀 공간에 와있었다.
아수라와 만났던 그때의 그 공간.
아수라는 분명 그곳을 시공간의 균열이라고 표현했었다.
절대적인 가치인 시간이라는 것을 왜곡시키는 그런 공간에, 형님이 있다는 건 무엇을 뜻하는 걸까.
형님과 나의 시간은 다르다는 걸까.
아수라는, 형님이 [균형자]의 자리를 거절했다고 했었다.
그리고 그전에 ‘간택’이라는 단어도 썼었는데. 형님은 그 자리를 거부하고 ‘나’를 선택했다.
아수라의 말을 어디까지 믿을지는 모르겠지만 솔직히 그놈이 나한테 구라를 칠 이유가 없다.
그냥 진실이라고 치자.
그나저나 오랜만이라니.
나도 인사를 해야 될 것 같은 느낌이다.
“오랜만입니다 형님.”
내 인사에 그가 피식 웃는다.
“정말 할 말이 많은데... 길게 이야기할 시간이 없네,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도 되지?”
고개를 끄덕이자.
“솔직히 지금 꽤나 놀란 상태야. 나는 네가 지옥도로 갈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거든.”
"..."
“하긴, 너라면 어떤 식으로든 ‘진실’에 다가갈 수 있을 테니. 방법이야 어쨌든, 어찌 보면 지금의 결과는 이미 예견되었을 수도 있겠네.”
분명 형님의 말에서 묘한 가시 같은 게 느껴지긴 했지만 나는 형님의 말을 끊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그리고 말없이 형님의 말을 경청했다.
“우선, 앞으로 내가 이렇게 나타나는 일은 거의 없을 거야.”
“일종의 제한이라고 해두자. 지금은 너한테 꼭 할 말이 있어서 나타난 거야.”
“...뭡니까 그게?”
장난기 어렸던 형님의 표정이, 순식간에 진지해졌다.
마치, 침식을 대비할 때 긴장하던 그때의 모습과 흡사하다.
“지옥도 3층에는 가지마라.”
“...예?”
“너는 지하 3층으로 가는 순간 죽어. 그것도 무조건. 거기엔 고대의 역사를 장식했던 온갖 괴물들이 득실거리거든. 네가 아수라의 시련을 이겨내려면 지하 2층에서 방침장군에게 ‘답’을 말하는 것 말고는 없어.”
결국 지하 3층으로 가는 방법은 존재했다는 이야기다.
“...아수라가 어디 있는지 답을 말해주고 싶은데, 미안하다. 나도 지금 ‘제약’을 받고 있어서 어쩔 수가 없네.”
제약이라는 단어가 내 머릿속에 그대로 저장된다.
하지만 그 외에는 갈피를 잡지 못했다.
무언가 물어보려고 입을 열려던 그때.
“혹시 그거 기억하냐?”
나보다 형님이 빨랐다.
‘‘...어떤 거요?”
“너랑 술 마시면서 우주에 대해 이야기했던 거.”
정확히 두 가지 이야기가 있다.
하나는 형님이 시련자가 되었고, 지구로 돌아왔을 때 시련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자연스럽게 우주로 넘어갔던 이야기와, 다른 하나는 형님이 시련자가 되기 전, 그러니까 내가 형님에게 복싱을 배우던 때 했던 이야기.
“내가 시련자가 되었을 때 말고, ‘그거’.”
“아... ‘그거’요?”
내 표정은 지금 어떨까.
그 답은 머지않아 형님이 말로 표현해주었다.
“짜식. 웃고 있는 거 보니까 감 잡고 있었나보네.”
“사실 그거 말고는 답이 없잖아요.”
이 기묘한 대화 속에서 형님은 내 대답에 매우 안도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리고는 이내 허탈하게 웃는다.
“...괜한 걱정이었네. 다행이다.”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내가 형님과 만나는 이 새하얀 공간이 곧 사라 질 것임을.
천천히, 전 방위에 있던 새하얀 공간에 쩌저적하며 금이 가기 시작했다. 조금씩 부스러기가 떨어져 내리고, 형님은 팔을 뻗어 내 어깨를 두드렸다. 그 다정한 모습을 바라보다. 결국 한마디 내뱉었다.
“형님은 다 좋은데. 딱 하나가 별로거든요. 그게 뭔지 알아요?”
“뭔데?”
“비밀이 생각보다 많다는 거."
“...삐진 건 아니지?”
형님이 어색하게 웃는다.
그 웃음을 바라보며 한마디 더 보탰다.
“거기다 쉽게 말해주면 될 것을 계속 숨기고 혼자서 다 안고 간다는 거.”
“음... 그럼 한 개가 아닌데?”
하늘이 무너져 내렸지만 여전히 형님의 웃음은 그대로였다.
그리고 나도 웃었다.
"그럼 두 개라고 칩시다."
형님이 내 어깨에 팔을 올린채로, 내 눈을 직시한다.
“...이도야.”
“...왜요?”
“너는 지구의 멸망을 막으려는 거냐. 아니면 [**의 왕]이 되려는 거냐.”
순간, 말을 잇지 못했다.
그때, 형님이 피식 웃고는 내 이마를 툭 치며 말한다.
“괜한 걸 물었네. 무언가에 억눌리지 말고, 너 하고 싶은 대로 해. 내 뒤를 따라온다는 걸 목적으로 삼지 말고, 너만의 길을 걸어가. 나는 네가 어떤 선택을 하건 전부 이해하고 넘어갈 거니까.”
그게 끝이었다.
잠깐 눈을 감았다 뜨자, 내 눈앞에 형님은 없었고 우람한 체격을 자랑하는 방침장군이 있었다.
...쩝
“무언가 말하려던 것 같은데... 무엇을 망설이지?”
슬며시 시간을 확인했다.
4분 11초.
분명, 내가 무언가를 말하고 나서부터 고작해야 1초밖에 지나지 않았다.
이건 뭐 인셉션이야?
시공간 속의 시공간인가.
보니까 방침장군은 내가 형님과 대화를 나눴다는걸 모르는 모양새다.
빛무리가 덮쳤던 것 같은데, 그건 나한테만 보였던 걸까.
“답을 말하거라. 그것도 아니면 스스로의 답에 확신이 없는 것인가?”
잡생각이 끊긴다.
...확신이 없냐고?
솔직히 형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긴가민가했었는데, 형님과 대화하며 그 생각은 결국 뚜렷한 확신이 되었다.
나는 형님과 생각보다 많은 시간을 함께했었고, 둘이서 술을 마시는 경우도 많았다.
그리고 그중에서 ‘우주’라는 주제가 튀어 나왔던 적은 고작해야 단 두 번.
놀랍게도, 그 순간과 상황들이 머릿속에 베토벤의 악보처럼 순식간에 그려진다.
‘이도야. 너 혹시 프랙탈 우주론이라는 거 들어봤냐?’
‘프랙탈 우주론이요?’
‘그래 그거.’
‘그거 아닙니까? 우주는 사실 어떤 거대한 생명체의 몸 속 일수도 있다는.’
‘...알고 있네?’
‘한때 유명했잖습니까. 그런데 그거 유사 과학 아닙니까? 개소리로 알고 있는데,’
그 외에 잡다한 대화가 더 이어지긴 했지만 당연히 쳐내고 핵심 내용만 간추렷다.
내가 왜 프랙탈 우주론을 떠올렸나면, 이게... 솔직히 상황상 저거 말고는 매칭 되는 게 없었다.
아래로 내려갈수록 초월자들은 더 강해지고, 그들이 뿜어내는 존재감만으로 나는 그대로 압사당해 죽는다.
심지어 현재 세계에서 가장 강한 초월자인 세 지배자들도 통과하지 못한 시련이다.
이건 완벽히 허를 찌르는, 그러니까 그게 말이 되나? 싶을 정도는 돼야 정답이 된다는 이야기다.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이미 힌트는 생각보다 꽤나 많이 보여진 상황이다.
우선 전혼장군은 이 시련을 클리어 하는데 격을 갖췄건 갖추지 않았건 상관이 없다고 했으며, 방침장군은 다짜고짜 답을 내놓으라고 했다.
이건 내 주변에 답이 있다는 이야기다.
거기다가 내가 전혼장군의 퀴즈를 맞출 때와 상황이 매우 유사하다.
놈은 내게 문제를 냈고 행동으로 답을 보여주기를 원했다.
분명 그건 심리적인 트릭이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명색이 장군이라는 놈이 그런 말장난이나 하려고 그 자리에 앉아 있는 걸까.
그럴 리가.
제한 시간이 적은 만큼 그에 대한 힌트를 생각보다 꽤나 많이 내려주고 있었다.
종합해서 내가 내린 결론은 하나였다.
영화는 물론 드라마에서도 쏠쏠하게 써먹는 연출인, 바로 반전.
그 반전의 내용은 총 세 가지였다.
1. 방침장군은 아수라다.
2. 지옥도는 아수라 그 자체다.
그리고 조금 애매한 게 세 번째다.
세 번째는 프랙탈 우주론을 그대로 가져온 모델인데.
지금 내가 서 있는 곳은 아수라의 뱃속이라는 가정.
....일단 답부터 내리자.
“너, 아수라냐?”
형님과 만나러가기 직전, 내가 하려던 말이 바로 이것이었다.
방침장군이 고개를 젓는다.
그리고, 내 다음 해답이 이어졌다.
“이 지옥도는, 아수라 그 자체다.”
그의 손가락이 꿈틀한다.
하지만 정답이라는 말이 나오지는 않는다.
조금 더 보태라는 건가.
나는 내가 생각한 이유들을 구구절절 늘어놓았다.
그것도 무려 1분 동안이나.
현재 남은 시간은 약 2분.
이내.
“크... 하하하하하하하하하!!!!”
방침장군이 폭소를 터트린다.
동시에.
띠링!
[축하합니다!]
[당신은 최초로 아수라의 시련을 클리어 하셨습니다.]
[칭호! 「균형자 후보」를 획득하셨습니다.]
[당신의 모든 능력치와 신격이 1성씩 상승합니다.]
중략...-
이어지는 업적 메시지 창들까지.
눈앞이 어지러워질 정도였다.
방침장군이, 웃음을 뚝 그치고는 나를 뚫어 질 듯 바라본다.
정말로, 뚫어 질 것 같다.
“침식에 패한 이들은 자연스럽게 이 지옥도로 온다.”
“원래의 침식은 정당했지만 지금은 정당을 무기삼아 아스가르드의 머저리들이 악용하고 있지. 그리고 단순히 패배했다는 이유만으로 패자들은 이지를 빼앗겼고, 이곳에서 영원히 고통 받으며 또한 환생조차 하지 못한다.”
방침장군은 매우 진지했다.
“그대가 어떤 존재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이곳에 왔던 수십 명의 시련자중 아수라님의 시련을 통과한 건 그대가 처음이다. 이건 개인적인 질문인데, 그대는 어떤 길을 걸으려 하는가.”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다.
형님의 질문에도 대답하지 못했고 방침장군의 질문에도 대답하지 못했다.
아니, 못할 뻔했다.
이 질문에는 답을 망설여서는 안 된다.
내가 걸어가고, 내가 걸어야 할, 그리고 내가 걷기로 스스로에게 약속한 길.
“구원, 구원의 길이다.”
나는 지구를 구원하고, 발바라 대륙도 구원 할 것이다.
내가 가는 길은, 분명 구원이 길이 맞다.
방침장군이 투구 너머로 작은 웃음소리를 내더니, 조용히 손짓했다.
동시에 주변 풍경이 일그러진다.
순간 눈을 한번 깜빡이자.
내 눈에 웃고 있던 방침장군은 사라졌고 처음 이곳으로 왔을 때 보았던 아수라가, 여섯 개의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솔직히, 아직 두 번밖에 보지 않았지만 그 이상 더 보고 싶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는 시선과 모습이다.
아니, 팔은 무슨 돈벌레같이 양옆으로 달린데다가 하필이면 인간 얼굴에 6개의 눈이라니, 이건 말로만 들으면 모른다.
마치 B급 감성의 호러 영화 한복판에 들어와 있는 기분이라고 해야할까.
그때였다.
“중간에 ‘그’와 만난 것 같은데...”
아수라의 대수롭지 않은 말에 내심 뜨끔했다.
방침장군은 몰랐던 게 확실하지만 아수라는 아니었나보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변명할 생각은 없었고, 솔직히 형님과 만난 건 사실이니까.
그래도 컨닝 같은 건 하지 않았다.
자신할 수 있다.
그때 아수라가 말을 잇는다.
"하긴. 시스템이 관장하는 일이니 확실한 제약을 받고 있었을 터, 결국 그대는 시스템의 인정을 받았구나.”
"..."
이어서 아수라가 여섯 개의 눈으로 일제히 내 눈을 노려보기 시작했다.
“[통합의 군주], 아니 [유토피아의 군주] 이도여. 그대는 [공백의 왕]의 자리를 노리는가?”
이명음이 들려오지 않는다.
자격을 갖췄다는 걸까.
땡땡이 뭔가 싶었는데, 공백이란다.
공백.
빈란.
비어있는 공간.
비어있는 왕?
묘한 게, 내가 느끼기에 지금 아수라의 말과 형님이 내게 마지막으로 했던 말이 서로 꽤나 흡사하다.
착각은... 아닐 것 같은데.
“하긴, 그게 뭐가 중요할까. 어차피 이번 시련은 마지막 시련, 그대는 마지막 시련이 절반조차 진행되지도 않았는데 새로운 변수로 자리 잡게 되었구나.”
아수라와의 대화는 그게 끝이었다.
그가 오른쪽에 있던 팔 하나를 뻗으며 검지로 내 이마에 밀착시킨다.
이건 뭔 뜬금없는 짓일까 싶었지만 역시 가만히 있었다.
이내, 아수라의 검지를 타고 무언가가 내 몸 안으로 깊게 빨려 들어온다.
이어서 내 몸 전체로 뻗어나간 그 기운은 마지막으로 내 심장안쪽에 자리했고, 그곳에 똬리를 틀었다.
“귀기鬼氣, 나를 이 자리에 있게 한 힘이자, 이면의 세상에서는 그 누구도 존재를 모르는 힘이다.”
"..."
그게 끝이었다.
나는 뒤쪽으로 흡수되듯 빨려 들어갔다.
순식간에 아수라의 몸과 손이 멀어진다.
....아니 잠깐만, 설명은 제대로 해줘야 될 거 아니야.
이게 끝이야?
"..."
눈을 떴다.
코앞에, 바하로사의 앞발이 보인다.
거리는 대략 10m. 주변에 공기가 찢어져있는 걸 보니 속도가 굉장한가보다.
하지만, 이상하게 느리게 느껴진다.
띠링!
[능력치에 귀기鬼氣가 추가됩니다.]
[한정 칭호! 「세계 최강의 귀신」을 획득하셨습니다.]
[당신의 격이 대폭 상승합니다.]
[한정 칭호! 「세계 유일의 귀신」을 획득하셨습니다.]
[당신의 격이 대폭 상승합니다.]
[시공간에서 얻은 보상과 지금의 보상이 합산되었습니다.]
[이 보상은 귀기를 제외한 모든 능력치에 적용됩니다.]
[지금 격을 초월하시겠습니까?]
아니. 싸우는 도중에 격을 초월하는 병신이 세상에 어디있단 말인가.
무언가 계속해서 눈앞을 간지럽힌다.
끊임없이 떠오르는 업적들과, 듣도 보도 못한 한정 칭호라는 이상한 이름까지.
동시에 나는 내 몸 안에서 꿈틀거리는 기운을 느꼈다.
평소 사용하던 ‘마나’와 비슷하지만 그 기운의 농도와 기질 자체가 다른 기운, 바로 지금 얻은 ,귀기,다.
심지어 이건, 어둡다 못해 너무나도 칙칙했다.
하지만 나는 망설임없이 귀기를 끌어올렸다.
혈기를 끌어올리는 것과 차원이 다른 기운이, 내 몸을 감싸고 내 몸이 강제로 한계를 찢는다.
쩌저적하며 내 주변의 허공들이 균열을 일으키며 찢겨져나가던 그때, 바하로사의 앞발이 나를 향해 내려찍혔다.
콰아아앙-!!
**
콰아아앙-!
바하로사는 앞발을 내려찍으면서 확신했다.
이 공격으로 놈은 그대로 짓뭉개져 쥐포가 될 거라고, 그리고 자신은 곧바로 소멸 할 것이라고.
하지만 달라졌다.
놈을 찍은 앞발에서 느껴지는 기이한 이질감.
느껴진다.
그 이질감이 점점 커져가더니, 주변을 잠식해나가는 것을.
이내,
콰아아앙-!!!
바하로사의 몸이 뒤로 날아간다.
날개를 펄럭이며 하늘로 날아오른 바하로사는, 괴성을 토해내며 기파를 쏟아냈다.
굉음이 울려 퍼졌지만 순식간에 바하로사의 기운은 사방으로 밀려나갔으며, 그의 눈이 믿을 수 없다는 듯 크게 떠지는 일련의 과정들이 물 흐르듯 이어진다.
이내, 이도의 모습이 드러났다.
온몸을 검은색으로 물들어있는 이도의 모습은 아까까지의 모습과는 전혀 딴판이었다.
이도가 고개를 들었고, 바하로사와 눈이 마주쳤다.
순간 바하로사는 공중에서 떨어질 뻔했다.
그 눈동자에 담긴 짙은 살기.
그 눈빛에, 주눅이 들었다.
뿐이라. 온몸이 오싹하다.
마치, 인간이 아닌, 초월자도 아닌, 말도 안되는 인외의 괴물을 보는 것 같은 기분.
그리고 그게 끝이었다.
괴물이 그 자리에서 사라진다.
바하로사는 반응조차 하지 못했다.
눈동자 하나가 터졌을 때는 고통이 아닌 의아함이 들었고, 이어서 나머지 눈동자가 터졌을 때는 의아함이 아닌 내가 왜 눈을 감고 있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으며, 이어서 날개가 떨어졌을 때는 오랜만에 하는 변신이라 날갯짓이 서툴렀을까 하는 생각을 했으며, 양 다리가 잘려나가고 목이 잘려 나갈 때는 그저 내가 피곤했나 하는 생각을 했다.
그게 끝이었다.
바하로사는 온몸이 잘리고, 터진 채로 죽었다.
자신의 죽음조차 느끼지 못하는 채로.
**
아스가르드의 모든 신들이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천군은 물론이고, 아룡, 그리고 여화까지.
모두가, 침을 꿀꺽 삼킨다.
“...아수라의 시련을 통과했다고?”
“그 햇병아리가?”
모두가 전율했다.
이건 있을 수가 없는 일이다.
아니, 대체 어떻게?
“이런 말도 안 되는...”
여화가 나지막하게 중얼거리고, 그 소리는 연회장 전체에 파동처럼 퍼져나갔다.
황제의 길을 걸었던 전사, 레이놀즈는 자리에서 주저앉았고 탈레리안은 멍하니 서있었으며 극장이 아닌 아스가르드 외곽에서 따로 준비된 작은 모니터로 이도와 바하로사의 싸움을 지켜보던 대의의 이면 소속 신들은 전율했다.
그들은 보고 있었다.
세계의 판도가 완전히 바뀌게 될 역사의 서막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