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 지옥도(2) >
군자검으로 다시 바닥을 찍으려다 순간 멈칫했다.
밝게 빛나는 금속이 눈에 들어온다.
...이거 아다만티움이잖아.
조금 의아한 건 그 색채가 묘한 핏빛을 띄고 있다는 점이다.
문득 주변을 둘러보았다.
내가 짚고 서있는 부분 뿐만이 아니라, 전체가, 그러니까 이 동굴 전체가 아다만티움으로 이루어져있었다.
지하라는 단어가 무색할 정도다.
조금 미심쩍은 게 생기긴 했지만, 일단 신경 쓰지 않았다.
아다만티움이 아무리 단단하다한들,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적어도 아다만티움이 나무는 아니지만 열 번정도 찍어보면 알 수 있겠지.
군자검안에 기운을 몰아넣으려던 그 순간.
후우웅-!
묘한 공기의 유동이 느껴진다.
뭐라고 해야 할까.
허공에 벌레가 날아다니는 것 같은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평소라면 그냥 넘겼을 소린데, 여기는 지옥도다.
구울과 거인 같은 이지를 상실한 괴물들이 득실득실한 곳이기에 저런 잡소리조차 무시하기가 조금 그렇다.
슬며시 고개를 돌렸고, 곧바로 입을 쩍 하고 벌리고 말았다.
일단 앞서 말했듯 내가 있는 곳은 아다만티움으로 이루어진 ‘동굴’이었다.
그리고 한쪽 벽에서 괴물 한 마리가 나를 향해 매우 빠르게 접근하고 있었는데.
농담이 아니라 진심으로 놀랐다.
인간과 비슷한 형체의 괴물이 아다만티움 벽을 짚으면서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는데, 벽과 마찰할 때마다 들려와야하는 소리가 들려오지 않는다.
이거, 리얼... 시발
공포영화가 따로 없을 정도다.
그 순간, 놈과의 거리가 제로가 되었다.
외형은 인간과 흡사하지만 팔과 다리는 기이할 정도로 길었으며 온몸에는 검은색의 잔털이 나있는 이상한 생명체.
순간, 놈의 손아귀가 내 얼굴을 향해 직선으로 뻗어져온다
스아악-!
반사적으로 뒤로 고개를 젖혔지만, 짧았다.
이마에 긴 실선이 그어지며 허공에 핏물이 튄다.
...젠장.
이놈, 1성급의 초월자가 분명하다.
긴장의 끈이 조여지고, 자세가 잡혔다.
빠르게 놈의 몸을 살폈고 반사적으로 군자검을 휘두르려던 그때.
내 직감이, 다른 판단을 내린다.
공격으로 날리는 게 아니라, 그래플링 하듯 잡아채야 할 것 같은 느낌.
나는 직감을 따랐다.
군자검을 쥐고 있지 않은 반대쪽 손으로 코앞에 있는 놈의 팔목을 움켜잡았다.
미끌미끌하다.
그대로 놈을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콰아앙-!
이어서 놈의 팔을 뒤쪽으로 꺾고는 무릎으로 놈의 나머지 팔을 봉쇄한 뒤, 군자검의 검 손잡이 부분으로 놈의 뒤통수를 내려찍었다.
퍼어억!!
핏물 두세 방울이 튄다.
그런데, 색깔이 이상하다.
붉은색이 아니라 푸른색이다.
끝이 아니었다.
치지직-!
놈의 피에 닿은 내 살이 타들어가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나는 광전사의 갑주를 바하로사에게 잃었다.
즉, 지금 나는 팬티 한 장만 걸치고 있는 알몸상태.
아니 잠깐... 이 상태로 여태껏 움직이고 있었다고?
몰려오는 뒤늦은 쪽팔림은 뒤로하고 군자검으로 타들어 가고 있는 내 몸의 살을 그대로 도려냈다.
투둑-!
바닥에 살덩이가 떨어지고, 순식간에 살 자체가 녹아든다.
그러고 보니 분명히, 나는 이런 놈에 대해서 언젠가 들어본 적 있었다.
-타이탄에서 주워들었던 건데, 움직이는데도 소리가 나지 않고, 그 움직임은 바람보다 빠른 생명체가 존재했다더라. 어떻게든 잡아 죽인다 해도 몸속에서 나오는 피가 극독을 띄고 있기 때문에 그냥 상대하는 것 자체를 피하는 게 상책이라는 괴물. 그런데 수백 년 전에 이미 멸종했데, 사실 나도 실제로 본적은 없어. 고대의 생명체라나 뭐라나. 그래도 신기한건 수백 년이 지났는데도 타이탄에서는 거의 재앙 급으로 불리고 있더라고.
이미 멸종한 고대의 생명체.
타이탄의 역사에 한 획을 그은 괴물.
이름은 ‘코타롯사’.
눈앞에 있는 이놈은, 분명 형님의 설명과 일치했다.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바닥에 쓰러진 채로 미동조차 없는 코타롯사의 옆구리를 그대로 걷어찼다.
퍼어억-!!
놈이 멀리 날아가다 갑자기 감고 있던 눈을 뜨고는 긴팔을 뻗어 벽에 튀어나와있는 아다만티움 돌기를 잡아챈다.
다시 보니 박살나있던 대가리가 원상복구 되고 있었다.
이곳에 오기 전에 보았던 다른 생명체들처럼 상처가 재생되는 모습인데. 이건 아무래도 지옥도의 특성인가보다.
죽인다는 게 불가능하다는 걸까.
조금, 답답하다.
남은 시간을 확인했다.
11분 40초.
다시 걸음을 옮기려던 그때, 잠깐 멈칫했다.
일단 뭐 좀 걸쳐야 할 것 같다.
빠르게 인벤토리에서 ‘쿤린’이 입었던 경번갑을 꺼내들어 착용했으며 그 겉에는 오슨 발리스타가 사용하던 용포를 걸쳤다.
장비 착용이 끝난 그 순간,
쌔애액-!
소리가 들려오기 무섭게 몸을 앞으로 날렸다.
바닥에 손을 내뻗으며 공중에서 도는 그 순간, 보았다.
방금 전까지 내가 있던 자리를 스쳤던 긴 팔과, 그 뒤로 다섯 마리가 넘는 괴물이 미친 듯이 달려오고 있는 것을.
코타롯사, 소리 없는 암살자.
그리고 이미 존재 자체가 사라졌다는 고대의 생명체.
그리고 상처를 입혀도 순식간에 재생되는 지옥도의 특성.
조금씩 이 지옥도에 대해 감이 잡히기 시작했다.
느낌인데, 이거 쉽게 생각해서는 안될 것 같다.
몸을 틀고, 스텝을 밟으며 천천히 뒤로 물러섰다.
코타롯사들의 손에 아다만티움이 푹푹 파이고, 금속 파편들이 사방으로 터져나간다.
싸울 생각?
없다.
죽여도 죽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되었는데, 뭐 하러 싸우겠는가.
조용히 기운을 퍼트렸다.
내가 강제로 길을 뚫었던 거대한 구멍을 제외하고 내가 갈 수 있는 방향은 앞과 뒤. 딱 두 군데다.
밀실이라기보다는.. 던전 같은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조금 의아스러운 건, 지상에서 지하 1층으로 이동하는 하이패스가 뚫렸는데, 지상에 있던 괴물들이 지하로 내려오지 않는다는 점이다. 마치, 규율 같은 게 정해져 있는 것처럼.
날아오는 코타롯사 한 마리의 팔을, 그대로 잡아채고는 놈들 무리를 향해 그대로 집어던졌다.
두 방향 중에 어디가 답일지 지금은 모른다.
뒤쪽 방향을 남쪽이라 치고, 일단 남쪽으로 한번 가보자.
그렇게 마음먹고 몸을 뒤로 돌린 그때.
찌이잉하는 이명과 함께, 예지가 보인다.
예지지만 죽는 느낌이 꽤나 불쾌하다.
일단 남쪽에는 아수라가 없다.
이번에는 그 정반대인 북쪽을 향해 자리를 박찼다.
예지가, 발동되지 않는다.
이쪽이다.
순간 쥐고 있던 군자검을 망설임 없이 휘둘렀다.
서걱-!
날아오던 코타롯사의 팔과 놈의 머리가 동시에 절단된다.
기운을 끌어올렸고, 치솟아 오르는 핏물들을 허공에 완전히 정지시켰다.
그리고는, 바닥으로 일제히 전진시키자 치지직하는 소리와 함께 아다만티움이 녹아들고 안 그래도 탁한 공기가 더 탁해진다.
당연히 독연기도 피어올랐고.
시야가 가려진 그때, 나는 그 자리에 없었다.
이미 멀리 달아난 상태였으니까.
**
계속해서 달렸다.
혹시나 이번에도 땅을 부수는 게 답일까 싶었는데, 그건 아니었다.
아다만티움을 부수려는 행동을 하려고하면 내가 죽는 미래가 보였으니까.
답은, 정면이다.
남은 시간, 10분.
계속 달리던 내 몸은 엉망진창이었다.
용포 곳곳에는 코타롯사의 손톱에 찢긴 흔적이 즐비했고 내 몸을 감싸고 있는 경번갑은 거의 갑옷의 효과를 상실한 상황.
굳이 뒤돌아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소리를 내지는 않지만 미친 듯이 달려오고 있을 대략 수백 마리의 코타롯사.
그리고 정면에서도 끊임없이 코타롯사가 튀어나오고 있었다.
코타롯사의 동굴인가 싶은 생각이 들 정도다.
그렇게 계속 달리다보니,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정면에서 나타나는 코타롯사는 없어졌고, 뒤에서 따라오는 놈들도 그대로 사라졌다.
이젠 답답한 수준을 넘어 머리가 멍해진다.
아니, 나는 분명 나름 합리적으로 생각하고 있는데 계속해서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은 비합리적인 일들 투성이니, 이건 내가 잘못 된 건지 아니면 그냥 생각하지 말고 움직이기만 하라는 건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다.
그때였다.
찌릿-!!!
거대한 살기가 느껴진다.
그것도 그냥 가만히 있어도 온몸이 찢길 것 같은 농도 짙은 살기.
다른 존재가 등장한건 아닌 것 같은데. 마치 누군가 싸우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무시하고 계속 달렸다.
달릴수록 그 살기가 더욱 더 짙어지고 있었는데, 후우.
기운을 끌어올리며 저항했다.
동시에 주변을 살피던 내 눈이, 이질감을 잡아낸다.
점점 앞으로 갈수록 동굴의 넓이가 급속도로 넓어지고 있었다.
그러다 결국 멈춰서고 말았다.
나는, 동굴 끝자락에 서있었다.
내 시야가 자연스럽게 아래로 내려간다.
젠장, 속이... 정말로 메스껍다.
눈앞에서 장기가 쏟아지는걸 보면서 밥을 먹었던 적도 있던 나였지만, 이건 아니잖아.
나를 기준으로 대략 깊이 5km정도 아래에 존재하는 거대한 넓이의 공동.
분명, 인위적인 힘이 가해지면서 만들어진게 분명하다.
그리고 그 안에서 수천이 훌쩍 넘는 이들이 대상을 가리지 않고 피를 튀기며 싸우고 있었다.
내가 느낀 살기의 정체가, 이것이었다.
사방으로 터져나가는 장기들과 핏물들.
내가, 여태껏 언급한 적은 없었지만, 아다만티움이라는 광석은 액체를 흡수하는 특성이 있다.
비록 극소량이지만 그게 사람의 피건 드래곤의 피건, 심지어 독이건 간에 아다만티움은 그것의 성질을 흡수한다.
왜 뜬금없이 이런 말을 하냐면. 젠장.
앞서 눈으로 직접 확인했지만 이 동굴은 거대한 아다만티움으로 만들어져있었다.
그리고 눈앞에 보이는 넓이 수만 미터에 달하는 공동은 물론, 높이가 어느 정도인지 모를 정도의 천장까지.
그 모든 곳이 진한 핏빛으로 물들어있는 상황이다.
대체 얼마나 이곳에서 싸움을 벌인 건지 짐작조차 되지 않는다.
피로 만들어진 강은 아다만티움에 끊임없이 흡수되고, 또 다른 피가 끊임없이 생겨나며 저 괴생물체들의 싸움의 여파로 증발하고, 장기가 사라진다.
더 놀라운 건 저들 중에는 3성에 달하는 초월자들도 존재한다는 점이다.
아니, 대부분이 0성에서 3성 사이의 존재가 확실하다.
저런 존재가 무려 수천이라니...
그러다 내 시선이 어느 한쪽에서 멈춰 섰다.
검은 피부에, 맨 주먹으로 코앞에 있는 '코타롯사’와 혈투를 벌이고 있는 남자.
이내 코타롯사의 피가 그 남자의 몸을 완전히 덮었으며, 그의 머리부터 신체가 완전히 녹기 시작했다.
그가 핏물에 완전히 녹아들었을 때, 이내 그의 몸이 또 다시 재생되기 시작했다.
이후 벌어진 일은, 잠시 중단된 혈투의 재시작이었다.
그렇게 둘은, 싸움을 다시 이어갔다.
저 검은 피부의 남자.
모를 수가 없다.
내가, 여태껏 살면서 누군가를 보고 그 남자와 ‘형님’을 매치시킨 적은 없었다.
단 한번을 제외하고는.
그러니까... 고블린 황제 쿤린, 그 남자다.
그때였다.
쿤린보다 덩치는 작지만 온몸이 새하얗게 물들어있는 고블린이, 갑자기 쿤린을 향해 달려든다.
그 순간 내 양 주먹에 채워져 있던 ‘테슬란 건틀렛’이 미약하게 진동했다.
...그 순간 떠올랐다.
테슬란 건틀렛에 적혀있던 옵션.
분명히, 이 건틀렛에는 잠시간 머물렀던 신성의 힘이 깃들어있다고 했었다.
뜬금없이 이게 반응했을 리는 없다.
그러니까. 저 새하얀 고블린은 유바의 신성이다.
이내 새하얀 고블린이 쿤린과 싸우던 코타롯사를 저 멀리 던져버리고는 코앞에 있던 쿤린의 양쪽 어깨를 잡아챘다.
...설마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후 새하얀 고블린이 검은 고블린의 머리를 그대로 씹어 먹는다.
결국, 나는 속에 있는 것을 게워내고 말았다.
“우웩-"
시발.
나는, 지구를 지옥이라고 표현했었다.
그런데 지금 눈앞에 펼쳐진 광경, 이게 진짜 지옥이 아닌가 싶다.
적어도 내가 살던 지구에서는 동족이 동족의 머리를 씹어 먹는 저런 엿 같은 모습은 연출되지 않았으니까.
아직도 기억난다.
분명히 쿤린은 내게 말했었다.
유바의 신성은 시조였다고.
즉, 조상이다.
지금 그 조상을 충실히 따르던 후손이, 조상에게 머리를 씹어 먹혔다.
참고로 현재 진행형이다.
아직 목 끝에 남아있는 위액을 그대로 삼키며 짧게 심호흡했다.
여기서 내가, 쿤린을 구해 줄 수 있는가.
밑에서 싸우고 있는 수백 마리의 초월자들을 뚫고 쿤린과 유바의 신성을 구한다는 건 목숨을 걸어야한다는 건데, 솔직히 팔다리를 전부 잃겠다고 작정한다면 가능은 할 것 같다.
하지만 그 이후에는?
저 둘이 이지를 잃은 이유도 확실하게 알지 못하는 지금의 내가, 저 둘을 구해준다고해서 뭐가 달라지겠는가.
내가 저 둘을 구하자마자 갑자기 저 두 명의 이지가 회복된다는 가정 따위는 애초에 하지도 않았다.
이게 개연성 없이 흘러가는 막장 드라마라면 모를까.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다.
미안하지만 나는, 한눈을 팔수가 없다.
잠깐, 쿤린과 유바의 신성을 바라보다,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붉은 피부의 오크가 눈에 보인다.
...툴칸이었다.
분명 저놈은 툴칸이었고 그 근처에서 드래곤에게 잡아먹히고 있는 오크는 디나스티스모가 분명했다.
...무시하고 다시 주변을 살폈다.
그러다 발견했다.
정면에, 또 다른 동굴로 가는 입구.
거리는 약 20...아니, 24km.
저기로 가자.
이를 악물고, 자리를 박찼다.
콰아앙-!!
내 몸이 앞으로 쏘아진다.
이어서 허공에 기로 만들어진 발판을 만들었다.
그 발판을 밟고 다시 앞으로 나아가려던 그때.
- 끼이익!!!
괴성과 함께, 돌풍이 나를 덮쳤다.
바하로사의 날갯짓이 떠오를 정도다.
내 몸을 가리고 있던 용포가 완전히 찢겨져나갔으며 경번갑이 박살났다.
그리고 내 몸에서 터져 나오는 핏물이 사방으로 터져나간다.
허공에서 몸을 회전시키며 자세를 잡고는, 나를 공격한 놈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익조翼祖, 마치 백악기 시대에 등장했던 프테라돈같이 생긴 웬 익룡 한 마리가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신격은 최소 1성, 아니, 2성 정도는 되는 것 같다.
놈을 무시하고 다시 자리를 박차려던 그때.
등골이, 오싹해졌다.
왜 이렇게, 조용한 거지?
시선을 아래로 내리자마자 입술을 잘근 깨물고 말았다.
수키로 미터 아래서 싸우던 초월자들이, 일제히 싸움을 멈추고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으니까.
정확히는 허공에 떠있는 나를,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었다.
분위기가, 싸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