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 지옥도 (1) >
조용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새하얀 공간. 언젠가 와 본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아니, 나는 이곳에 온 적이 있었다.
분명 꿈속에서 형님과 조우했던 그 공간이 분명하다.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언제부터 있던 걸까.
이상한 괴물이 서있었다.
키는 약 2.5m정도, 머리는 한 개지만 눈동자는 여섯 개였으며 양옆으로 팔이 세 개씩, 총 여섯 개나 달려있는 괴물.
놈이 여섯 개의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상하게, 그 시선을 받자마자 싸늘해진다고 해야 할까.
온몸이 서늘하다.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너는 뭐지?”
“그대가 모르면 누구도 모르는 존재겠지.”
듣기 좋은 굵직한 목소리였지만 솔직히 이런 선문답.
이제는 짜증난다.
“아수라냐?”
그의 눈매가 꿈틀한다.
“이번 [통합의 군주]는 꽤나 건방지군.”
“통합의 군주?”
아수라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물끄러미 나를 바라볼 뿐.
그의 시선이, 마치 무언가를 읽어가듯 조용히 움직였다.
내 상태창을 보는 것 같은 모습이다.
그러다, 그가 작게 웃는다.
“[유토피아의 군주]라... [통합의 군주]는 시스템이 설정한 원형체의 성질, [유토피아의 군주]나 [통합의 군주]는 같은 것을 뜻한다. 거기다 [피로 물든 왕좌의 주인]... [게으른 왕], [이종족 구원자]. 가지고 있는 칭호는 적은데 하나하나가 범상치가않아.”
그러다, 그의 눈매가 살짝 꿈틀거린다.
“..[이레귤러]?”
말없이 가만히 있었다.
일단 상황부터 파악 해야 했으니까.
조용히 놈의 말을 정리하려던 그때.
“아하. 그대구나. 그가 말한 그가, 그대였구나.”
마치 나를 아는 것 같은 말투다.
“나를. 알아?”
“안다기보다는 들었지. 균형자로 간택당한 ‘그’가 그 자리를 버리면서까지 선택한 남자, 생각보다 이곳으로 빠르게 왔구나.” 잠깐만.
지금... 뭐라고?
뭔가 대화가 이상하다.
아니 대화가 이상하다기보다는 놈의 말에 들어있는 단어들이 이상하다.
선택한 남자라고?
잠깐 생각에 잠기...지는 않았다.
시발.
하나밖에 없잖아.
“형님을 알고 있나?”
아수라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는다.
조용히 한걸음 내딛으며, 놈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놈이 아무런 저항 없이 내게 멱살이 잡힌다.
"말해라. 정지혁을 알고 있냐고.”
놈의 눈동자에 비친 내 눈은, 흔들리고 있었다.
감정을 제대로 잡지 못하는 눈.
“그게 중요한가?”
"..."
“아직 감을 못 잡고 있는 거 같은데. 그대에게 제한 시간이 얼마나 남았지?”
머릿속에 번개가 친다.
[유토피아의 군주]를 달성했을 때 떠올랐던 그것.
그러니까. 종속된 종족의 숫자당 지속시간이 5분 증가한다는 그 옵션.
내가 이 [아수라]를 소환술로 알고 있었던 이유는 그 지속 시간이라는 옵션 때문이었다.
그런데, 소환술도 아니었다면.. 하나밖에 없지 않은가.
나는, 이 공간에 10분만 존재할 수 있다.
“어차피 그대가 힘을 얻고, [**의 왕]이 된다면 모든 것을 알게 될 터, 이곳으로 왔었던 천군과 여화, 그리고 발락투스는 이 자리에서만 무려 2분을 넘게 소비했었고 내 시련을 이겨내지도 못했지.”
“…뭐?”
“그럼에도 굳이 무언가에 대한 답을 들어야겠다면, 제대로 된 질문을 하거라. 그대가 지금 내게 해야 하는 질문은 그게 아니야.”
순간 정신이 멍해지긴 했지만, 필사적으로 가출하려는 정신의 끈을 부여잡았다.
이내 놈의 멱살을 놓고, 뒤로 한걸음 물러섰다.
"[**의 왕]이, 대체 뭐지?”
아수라가, 그것도 조금 애매하지만 나름 제대로 된 질문이라는 듯 작게 웃는다.
“자유이자 지배할 권한임과 동시에 모든 것. 그리고 아스가르드의 모든 지배자들이 원하는 최고의 자리이자, 최고의 권력.”
그 말을 듣자마자 모든 걸 수긍하고 말았다.
아스가르드, 세 명의 지배자, 그리고 제약.
문득 눈앞을 가리는 머리카락이 거추장스러워 한손으로 쓸어 올렸다.
생각해보면, 정말 별게 아니었다.
힘없는 자의 정의는 짓밟히기 마련이라고 생각하고 또 그렇게 말하던 나이기에 가장 먼저 떠올렸던 가정.
아스가르드의 세 지배자들은 분명 이 세계에서 가장 강한 이들이다.
그런데도 그들이 서로 간에 싸움이 금지된 아스가르드에 묶여 있다는 건 그 안에서 무언가 얻을게 있다는 거고 그건 당연히 힘일 수밖에 없다.
그들은 서로들 간의 이상과 생각이 다른 존재들이니까.
모든 걸 지배할 수 있는 권한이라.
그렇다면 **의 왕에서 **는 ‘세계’를 뜻하는 걸까?
[**의 왕]은 세계의 왕.
문맥상으로 보면 어울리는 것 같긴 한데, 내가 너무 신중한 걸까.
세계의 왕이라면 왜 그 세계라는 단어가 가려진 채로 내게 들리지 않는 걸까.
솔직히, 세계라는 단어는 굳이 가릴 필요가 없다.
그 안에 무슨 비밀이 담겨있는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시스템이 개입하면서 삐 처리가 될 정도의 단어는 아니다.
후우
...딱 하나만 더 물어보자.
“나는 이곳에서 무엇을 하게 되는 거지?”
아수라가 그 질문을 기다렸다는 듯 대답했다.
“그대는 지금부터 내가 내려주는 시련을 클리어 해야 한다.”
시련이라...
새삼스럽지만 나는 시련자.
시련을 겪는 것쯤이야. 더 이상 새로울 것도 없다.
이젠 일상이다.
“남은 시간은 9분 40초, 퀘스트를 내려주지. [지옥도]에서 나를 찾아라.”
숨바꼭질을 하자는 건가.
그때 아수라가 한마디 더 보탰다.
“이곳은 시공간의 균열, 그대가 [아수라] 스킬을 사용한 그 순간, 이계의 시간은 멈추고 그대의 시간만이 흐르게 되지. 그러니, 그대는 모든 수단을 총 동원하라. 그러지 못한다면 전임자들처럼 아무것도 얻지 못한 채 이계로 돌아가야 할 터이니.”
...시간이 멈춘다?
그냥 신들이 개입할 수 없다는 말로만 정리하면 될 것 같다.
아니, 개입 수준이아니라 아예 그들은 이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볼 수도, 그냥 느끼지도 못한다는 말이 적당할까.
"...클리어 보상은?”
“내 힘의 원천인 귀기鬼氣를 얻게 될 것이다. 자 시험을 시작하지.”
그게 끝이었다.
눈앞에 있던 아수라의 모습이 흐릿해지더니.
띠링!
[메인 스토리 ##1(외전)]
[지옥도의 주인, 아수라의 시련을 이겨내십시오.]
[지옥도에서 아수라를 찾으십시오. (미완료)]
[실패시 「유토피아의 군주」를 잃게됩니다.]
퀘스트창이 떠오르고 주변 풍경이 바뀌었다.
동시에 숨이 턱 하고 막혀온다.
주변에서 들려오는 귀곡성과, 주변에서 느껴지는 무수한 인기척들.
몸에서 땀이 나기 시작했으며 모순되게도 추위마저 느껴지기 시작했다.
말도 안 되는 일인데. 그 말도 안 되는 일이 실제로 벌어지고 있었다.
눈앞에 보이는 용암지대.
그리고 그 옆에 보이는 얼음지대.
어떻게, 용암과 얼음이 공존 할 수 있는 거지?
거기다 아까부터 숨이 턱 막혀오는 이 엿 같은 느낌.
이건... 분명 독이다.
순간, 고개를 뒤로 젖히자.
팔 하나가 내 앞을 스쳐지나간다.
그 찰나의 순간 보았다.
모습은 인간의 팔과 흡사했지만 살점이 너덜너덜했으며 밖으로는 뼈가 삐죽 튀어나와있었다.
심지어 그 주변에 굳어있는 검붉은 핏물까지.
이어서 주먹을 휘두르자.
퍼걱-!
나를 공격했던 무언가가 끼익하는 괴성을 내지르며 날아갔다.
뭐야 저건?
나를 공격한 것은 인간이었다.
그런데 썩은 몸으로 움직이는 인간이 존재하나?
그럼 그건 더 이상 인간이 아니지 않나.
조금 더 자세히 살폈다.
놈의 모습이 내 시야에 제대로 들어온다.
구울.
좀비의 상위 버전인 구울이 분명하다.
놈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독기毒氣가 그 증거다.
고개를 돌렸다.
그제야 나는, 방금 전까지의 놀람은 그저 워밍업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주변에서 나를 향해 몰려오는 수많은 괴물들.
온몸에 비늘이 돋아있는 미꾸라지 같이 생긴 해양 생물체가 보였고, 그 뒤로는 방금 전 나를 공격한 구울과 비슷한 모습의 생명체도 보였으며, 그 뒤에는 고블린과 오크, 그리고 거인과 하피, 엘프... 너무나도 많은 종족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공통적으로 그 모든 놈들의 눈깔에는 빛이 없었다.
마치 이곳의 불청객인 나를 죽이려고 움직이는 인형 같다고 해야 할까.
외나무다리에서 원수를 만난 것처럼 미친 듯이 달려오는 놈들의 모습을 보니, 그 이상 생각하기가 무의미하다고 느껴질 정도다. 확실한건, 저놈들은 이지가 있는 존재들이 아니다.
그러다 가까운 곳에서 느껴지는 기척에 고개를 돌렸다.
내 주먹에 얻어맞고 날아갔던 구울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서고 있었는데, 마치 재생되듯 놈의 터져나간 몸뚱이가 원상태로 복구되고 있었다.
조금 아이러니한건 구울 특성인지 썩어빠진 몸체는 그대로였다는 거.
순간 소름이 돋았다.
지옥도라더니... 헛구역질이 나올 정도다.
시발, 여기서 아수라를 찾으라고?
이딴 데서 숨바꼭질을 하자고?
느껴지는 인기척만 해도 수십만이 훌쩍 넘어가는데?
서울에서 김서방 찾는게 더 쉽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계속해서 기운을 퍼트리며 주변을 살폈다.
모든 게, 눈에 보인다.
그리고 느껴졌다.
하지만 그게 전부였다.
특별한 무언가는 존재하지 않았으며, 아수라는커녕 그 그림자조차 보이지도 않았다.
시간을 확인했다.
9분 3초.
너무 촉박하다.
그렇게 한발자국 내딛는 순간.
찌이잉-!
이명음이 들려온다.
**
하지만 내 기대와는 무색하게, 내게 보여지는 미래는 별게 아니었다.
눈앞에 거대한 발이 보인다.
그 안에 그려져 있는 주름과 코끼리 발바닥보다 더 단단해 보이는 가죽까지.
이건 바하로사의 발이 분명하다.
이 아수라라는 스킬을 발동하기 전, 놈의 발이 나를 향해 짓쳐들고 있었는데 그때랑 같은 상황.
그러니까.
내가 이 방향으로 가면 아수라를 찾아내지 못하고 결국 저 발에 깔려 죽게 된다는 걸까.
이어서 놈의 발이 내 머리를 짓밟고 내 몸이 찌그러진다.
**
"...후우"
한숨이 터져 나온다.
시간도 촉박하고 느껴지는 건 하나도 없다.
처음 내가 걸음을 옮기려던 방향은 정확히 정면.
이 방향으로 이동하면 아수라를 찾지 못한다. 아니, 이 방향에는 아수라가 없다.
예지로, 이렇게 감을 잡자.
그나마 믿을 수 있는 건 이 권능밖에 없으니까.
이번에는 정면이 아닌 반대 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걸음을 옮기려던 그 순간.
찌이잉-!!
다시 예지가 발동된다.
굳이 언급할 필요도 없는 미래였다.
방금 전, 보았던 그 미래였으니까.
처음 걸음을 옮기려던 곳을 북쪽이라 치고, 두 번째로 옮기려던 방향이 남쪽.
이번에는 서쪽으로 가겠다고 마음먹자.
예지가. 발동하지 않는다.
설마... 이거야?
그대로 걸음을 옮기지 않고, 동쪽으로 가겠다고 마음먹었다.
찌이잉하며 똑같은 예지가 눈앞에 보인다.
순식간에 현실로 돌아온 나는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이 예지력은, 역시 사기였다.
내가 갈 길을 알려주는 이정표.
그 이상 생각할 필요가 없다.
몰려오는 이들을 무시하고, 예지가 발동되지 않았던 서쪽으로 자리를 박찼다.
콰아아앙-!!!
내 몸이, 빛이 되어 앞으로 뻗어나간다.
눈앞에 보이는 장애물들은 그냥 무시했다.
길을 막으면 몸통 박치기로 그냥 터트렸고, 공격을 시도해도 그냥 무시했다.
그렇게 10초, 20초.
약 1 분가량을 뛰었을 때 .
찌이잉하며 똑같은 미래가 보인다.
그 자리에서 그대로 정지했다.
그대로 멈춰 서고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지옥도의 괴물들이 나를 향해 개떼처럼 몰려오고 있는 건 이제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솔직히, 내가 신경 쓸 정도의 힘을 가진 이들이 아니었으니까.
더 애매한건, 위치를 파악할 수 없다는 점이다.
하늘에서는 빛 한 점 내려오지 않는 칠흑의 대지.
격을 초월한 시야로 그나마 분별은 할 수 있었지만 그게 전부였다.
자. 생각해보자.
이 자리에서, 앞으로 걸음을 옮기면 예지가 발동된다.
그렇다면 여기는 종착역인가?
그럴 리가.
그렇다면 아수라가 움직이고 있는 걸까?
무엇하나 배제 할 수가 없다.
남은 시간은 약 8분.
서쪽을 기준으로, 이번에는 왼쪽으로 걸음을 옮기자 똑같은 예지가 보인다.
이쪽은 아닌가보다.
뒤로 움직였다.
예지가 보인다.
대각선으로 움직였다.
여전하다.
동서남북,동북,서남,남동 등등등.
시발.
모든 방향이 내 죽음을 알린다.
이상하다.
뭐야 이거?
순간, 머리에 빠진 나사가 끼워 맞춰지는 기분이 들었다.
표현이 이상하긴 했지만 분명, 무언가 끼워 맞춰졌다.
상하좌우가 아니면, 아래가 아닐까?
인벤토리를 열어 군자검을 꺼내들었다.
그 누구도 개입할 수 없는 특별 메인스토리, 아스가르드의 신들은 나를 보지 못하니, 당연히 레이놀즈도 이 검에 자신의 의지를 담을 수 없다.
군자검을 꼬나 쥐고는 그대로 바닥을 내려찍었다.
콰아아앙-
크레이터가 생겨나며 파편들이 비상한다.
깊이가 얼마인지는 모르겠지만 딱 하나. 예지가, 발동하지 않는다.
이게, 정답이다.
군자검에 기운을 끌어 모으고는 땅을 한 번 더 내려찍자.
콰아앙-!!!
순식간에 나를 기준으로 땅이 갈라져나가며 달려오던 괴물들이 사방으로 터져나간다.
괴물들은 관심 없었다.
깊이는... 대략 400미터 가량.
하지만 조금, 모자라다.
격을 뿜어내며 한 번 더 내려찍었다.
쿠우우웅-!!
땅이 푹 하고 가라앉으며 부유감이 느껴진다.
머지않아.
터억-
내 두 다리가 땅에 닿았다.
띠링!
[지옥도, 지하 1층에 진입합니다.]
[남은 시간이 5분 추가됩니다.]
[현재 남은 시간 12분 08초]
지하 1층이라...
맵 자체가 히든 맵이라 그런가.
아수라는 아무래도 지하에 있나보다.
그러다 작은 의문 하나가 생겨난다.
아스가르드의 세 지배자들은 대체 어디까지 갔었을까.
그들조차 해내지 못한 걸 내가 해낸다면, 나는 더 이상 그들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는 존재가 되지 않을까?
문득 이런 말이 떠오른다.
기회는 준비된 자에게 온다는 말.
이건, 내게 온 기회가 아닐까?
솔직히, 이제 와서 말하는 건데.
이거 왠지... 클리어 할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