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화. < 누굴 진짜 병신으로 아네(1) >
바하로사가, 조금 놀란 표정으로 되묻는다.
“나 말고 다른 드래곤을 본적이 있나? 아스가르드에서는 아닐 테고... 정말이지, 이상한 인간이군.’’
내가 놈의 정체를 안 이유는 하나밖에 없다.
파룡 바하무트.
놈에게서 느껴진 드래곤 특유의 존재감을, 나는 눈앞의 저놈에게서 느꼈으니까.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나는 에피소드 외의 존재, 그런 내가 에피소드에 난입을 한다면 내 존재는 소멸하게 될 터.”
그가, 로브의 앞섶을 붙잡고는 여유로운 표정으로 자기 약점을 드러낸다.
뭘까. 저 오만을 넘어 미친 것 같은 모습은.
아니, 자기 약점을 저렇게 당당하게 말한다고?
“그렇다고 해서 내가 난입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지는 마라. 아스가르드로 오라는 아룡님의 제안마저 거절한 나는, 굳이 오래 살 이유도 없고 오래 살 생각도 없으니까.”
그때였다.
띠링!
[악惡을 지배하는 자가 당신에게 대화를 요청합니다.]
대화?
고개를 끄덕이자.
[어때? 내가 말했지?]
머릿속에, 여화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내가 격을 초월했기 때문인가.
간접 메시지가 아닌 이렇게 귓속말 수준의 직접 메시지를 보낼 줄은 몰랐다. 진심이다.
말없이 가만히 있자.
[왜 대답이 없니? 너도 알잖아? 어떻게 메시지 보내는지.]
당연히 알고 있다.
기운을 끌어올린 채로, 머릿속에 울리는 그 희미한 격의 끈을 향해, 말을 보냈다.
[...유토피아가 망할 거라고 말한 건, 이런 의미였나?]
머릿속에 여화의 작은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그건 아닌데, 왜 자꾸 말 놓니? 도와주려고 했는데 자꾸 그러면 그냥 확 이거 끊어버린다?]
...도와준다고?
네가?
개소리를 듣다보니 슬슬 짜증이 올라온다.
[여하튼, 마저 말하자면 쟤는 말 그대로 방랑자야. 방랑자가 뭔지는 알고 있니?]
대충은 알고 있다.
[아스가르드에 종속되지 않은 채 세상을 떠도는 초월자들, 그들을 방랑자라고 하거든, 그런데 시련자도 아니지만 아스가르드에 종속 되거나 방랑자가 되는 것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종족이 하나 있거든? 그게 바로 드래곤이란다.]
내가 아는 방랑자는 하나밖에 없었다.
파룡 바하무트.
놈은 아스가르드에도 종속되지 않았고 그저, 죽이는 것만을 목적으로 세상을 떠돌아다니는 존재다.
침식이고 나발이고, 놈은 그딴 것에도 관심하나 주지 않았던 존재.
그래서 놈이 파룡破童이라는 이명으로 불린 것이다.
여하튼 여화의 말은 엄밀히 말하면 내가 아는 한정된 정보를 조금 자세하게 풀어서 알려주는, 일종의 답안지 같은 역할을 해주고 있었다.
이건 명백한 호의다.
아스가르드에서의 호의가, 아직까지도 여전한 걸까.
[드래곤이라는 종은 각 세계마다 존재해. 지들 말로는 균형을 지킨다고 말하는데, 솔직히 의미가 없어. 진정한 균형자는 따로 존재하니까. 걔들은 그냥 머리까지 오만으로 똘똘 뭉친 그냥 힘쎈 도마뱀들이야. 수명은 대략 5천년 정도, 하지만 태어난 지 1 천년만 되도 자연스럽게 격을 초월하지. 매우 부럽게도 드래곤이라는 종은 마나의 사랑을 받는 존재들이거든. 우리 시련자들이랑 매우 달라, 어찌 보면 진짜 적이라고 할 수 있어.]
이건 또 무슨 개수작이야?
조용히 눈을 감았다.
확실하다.
여화는 나를 원한다.
그 감정의 바탕이 당연히 호감은 아닐 테고, 아마 매우 높은 확률로 소유욕이겠지.
그리고, 마지막 말.
진짜 적?
나한테, 자기의 목적을 심어 주려는 건가.
같이 아룡을 죽이자고?
정보를 슬며시 흘려주면서 자기는 만만한 존재라는 것처럼 가장하는 거, 혹시 이게 여화의 화법인가 싶기도 하다.
하지만 여화는 명실상부한 지배자이고, 악 성향의 모든 초월자들을 통솔하는 괴물 중의 괴물이다.
그런 존재가 허술 할리 없다.
...그럼 이건, 자기 목적을 넌지시 풀어서 말해준걸까.
그 정도의 의미만 담아야할까.
[너의 권능이 통찰이라면 내가 주는 정보는 무의미하겠지만 예지라면 다르겠지. 말 돌려서 말하지 않을게. 나는 너를 원해. 너 같은 남자, 가지고 싶거든. 소유욕을 자극한다고 해야 할까. 아주... 볼 때마다 미치겠어.]
그 목소리 안에는 숨기지 못할 탐욕과 거대한 소유욕이 느껴지고 있었다.
오물을 끼얹은 것 마냥 기분이, 더럽다.
[아스가르드에서는 내가 조금 노골적이었지? 적어도 너한테 거짓말한건 없지만 그때의 이야기는 그냥 잊으렴. 유토피아의 군주, 그것도 그냥 가지고 있어. 성장시키든 팔아버리든 그건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 나는 욕심내지 않을게. 하지만 너라는 존재는 내가 꼭 가지고 싶네. 내 밑으로 들어오기 싫으면 내 남자가 돼. 그러면 저 도마뱀. 내가 어떻게 해서든 막아줄게.]
방랑자는 에피소드 외의 존재다.
바하로사가 말한 것처럼 놈은 에피소드에 개입하는 순간 소멸하게 되는데 여기서 그 개입의 기준은 에피소드를 진행하는 시련자를 죽이는 순간이다.
그러니까, 놈이 나를 죽이는 순간 소멸하게 된다는 뜻.
그리고 놈은 최소 2성에서 3성의 드래곤이 확실하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 놈은 에피소드의 외의 존재.
여화가 1차 침식에서 격을 소모했다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이건 에피소드에 개입하는 게 아니라, 에피소드 외적인 존재의 개입을 막는, 일종의 ‘정당한 수법’이니까.
확실히 말하건대. 여화라면 분명히 놈을 막을 수 있다.
[뭘 고민하니? 시련은 아직 길게 남아있어. 내 남자가 된다고 해서 시련을 진행 못하는 건 아니야. 더 성장하고 격을 성장시켜봐. 원하면 신화 아이템들도 죄다 후원해줄게. 딱 한마디만 하면 돼. 내 남자가 되겠다고, 내게 종속되겠다고. 딱 한마디만 하면 내가 살려줄 게. 내가, 너 살려준다고.]
아... 미치겠다.
오랜만에, 얼굴을 감싸고 말았다.
달콤하기도 하지만, 독이 든 성배 수준이 아니다.
그냥 역겹다.
내가 여지껏 달려온 이유가 여화의 시다바리 짓을 하기 위해서였다면 쌍수를 들고 환영했겠지만, 이건 아니지.
[왜? 나는 너랑 접점이 거의 없잖아? 내가 계속 양보 해주는 거 못 느끼겠니? 우리는 좋은 사이가 될 수 있을 거야.]
언젠가, 기차에서 마키아벨리가 내게 했던 소리가 떠오른다.
그 미친놈은 내가 자기와 닮았다고 했었다.
매우 닮아서 우린 좋은 듀오가 될 수 있을 거라고.
나는 그에 대한 답으로 놈의 미간에 총알을 박아주었다.
[고민할 시간이 필요하니? 고민 하는 것도 꽤 섹시하네.]
그 이상 들으면 귀가 썩어 버릴 것 같다.
답하지 않고 머릿속의 격의 끈을 끊어버렸다.
고개를 들자, 바하로사가 여유로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내가 자신의 제안을 수락할 것을 확신하는 것처럼.
“그러니까, 정리하면 네 말은, 그냥 닥치고 오크들이 발바라 대륙을 엉망으로 만드는 걸 지켜봐라? 그러지 않으면 나를 죽이겠다?
바하로사가 고개를 끄덕인다.
아... 이 개새끼들이 진짜.
사람을 병신으로 아네 .
조용히 격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쿠구구궁-!!!
아까와는 차원이 다른 격.
유토피아의 군주이자, 피로 물든 왕좌의 주인, 그 칭호에서부터 뿜어져 나오는 신격. 그리고 1성 초월자에 혈기를 증폭시킨, 그 극한의 힘.
다른 말로는 영혼의 힘이자 혼기魂氣라 부르는 그것.
이내 바하로사의 표정이 굳어진다.
“...고작해야 1성의 초월자에 불과한 놈이, 뭐하자는 거지? 적어도 나는 네놈이 무모하다고 생각지는 않았...”
“아가리, 닥치시고.”
조용히 품에서 ‘스크롤’을 꺼내들었다.
바하로사가 의아한 표정을 짓던 그때, 바하로사보다 빠르게 황성 쪽에 거대한 실드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변을 깨달은 바하로사.
나는 망설임 없이 스크롤을 찢었다.
그 안에 담긴 기운이 수도로 조용히 뻗어나가던 그때, 바하로사가 손을 들어올린다.
막으려는 것 같은데, 내가 그걸 그냥 두고 볼 리가 없다.
나도 손을 들어올려, 놈의 기운을 허공에서 막았다.
본체로 현신도 하지 않은 놈은, 제대로 된 힘을 뿜어내지 못한다.
놈은 지금의 나와 동급, 혹은 그 이하다.
파지직하며 스파크가 튀기던 그때. 사방으로 도망치던 수천만에 이르는 어마어마한 수의 오크들이 이상함을 감지하고 고개를 돌린다.
하지만 늦었다.
콰아아아아아앙-!!!!
귀를 완전히 찢어 버릴 것 같은 어마어마한 폭음이 울려 퍼지고, 땅이 진동한다.
사방으로 먼지 구름이 터져나가고, 사방으로 불길이 솟구쳤다.
황성이 위치해있던 수도의 크기는 어림잡아 미국의 로스앤젤레스 정도다.
그리고 지금, 황성이 위치한 3천 제곱미터를 제외한 모든 지역이 터졌다.
솔직히, 이걸 이렇게 일찍 써먹을 줄은 몰랐다.
그냥 나 죽고 너 죽자하는 심정으로 만든 최후의 보루였는데. 이렇게 사람 성질을 건드려대니 어쩌겠나.
써먹을 수밖에.
귀를 기울였다.
계속해서 굉음이 울려 퍼지고 그 안에 오크들의 비명소리가 울려 퍼진다.
오크들의 생사?
확실하다.
최소 80% 이상이 죽었다.
내가 설치하라고 지시한 함정 마법진과 건물에 때려 박아 넣으라했던 이그라실은 수도의 바깥쪽부터 쌓인 상태였으니까.
알림음으로 미친 학살자니 뭐니, 오크 몰이 사냥이니 하는 이상한 업적이 미친 듯이 떠올랐지만 무시했다.
심지어 땅도 미친 듯이 진동하는 게 거슬리긴 했지만 그보다 더 관심 가는 게 있었으니까.
찌릿찌릿한 시선에 고개를 돌렸다.
바하로사가, 흉신악살처럼 일그러진 얼굴로 나를 노려본다.
그런데, 네가 그렇게 꼬라 보면 어쩔 건데?
뒤에서 번지는 불길을 그을음삼아, 조용히 오른손 중지를 치켜들었다.
“좆 까는 소리가 너무 길어.”
바하로사가, 천천히 한걸음 내딛는다.
“...내가 준 기회가 우스워보였더냐.”
장난치듯 중지를 까닥였다.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우습다 못해 어이가 없었지. 뭐? 기회를 줘? 도마뱀 새끼가 누구한테 명령질이냐? 네가 말하면 내가 아 그렇습니까. 감사합니다 하고 넘어갈 줄 알았냐?”
우두둑하는 소리와 함께 바하로사의 몸이 점점 커지기 시작하고, 머지않아 어마어마한 혼기가 주변 전체를 짓눌렀다.
피어오르던 먼지구름과 불길이 순식간에 사라질 정도였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한마디 더 던졌다.
“너는 명령이 아니라 나한테 대가리를 숙이고 부탁을 했어야했어.”
계속해서 튀어나오던 오크들은 갑자기 벌어진 참사에 주저앉았고 넓게 피어오르는 바하로사의 기운에 완전히 짓눌렸다.
황성에 있던 이들의 실드는 무너졌고, 수도 전체를 감싸고 있던 결계가 와장창하며 깨졌다.
폴리모프를 푼 바하로사의 모습을 보자마자, 웃을 수밖에 없었다.
눈앞에, 30여 미터에 달하는 드래곤이 번들거리는 눈으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리고 놈의 면상과 몸을 감싸고 있는 푸른색의 돌기와 고등어처럼 푸른색과 흰색이 혼합되어있는 피부색까지.
그런데 묘하게, 놈의 생김새가 바하무트와 닮았다.
피부색이 다르긴 한데... 이상하게 계속 그런 느낌이 드네.
그때 놈이 거대한 주둥이를 벌리며 말했다.
“네놈은 내가 준 기회를 버렸다. 오늘 나는 소멸 할 것이고 네놈도 소멸할 것이다.”
웃는 얼굴로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전생에서 나는, 바하무트를 멀리서 바라보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성물로 진화한 광전사의 갑주를 차고 있었음에도 그게 한계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다르다.
힘을 얻을 기회도 얻었고, 그 길을 충실히 걸어갔다.
계단을 하나 올라갈 때마다 그 다음 계단으로 가는 걸음에는 더욱 더 거대한 무게가 실리는 것을 나는 안다.
알기 때문에 멈추지 않았고, 계속해서 준비했다.
그런데, 바하무트보다 못한 이놈한테 대가리를 숙인다고?
그리고 이딴 변수 때문에 여화에게 손을 내밀어야한다고?
내가, 그렇게 구질구질하게는 못산다.
그렇게 살 바에는 전부 때려치우고 그냥 뒤지는 게 낫지.
드래곤 브레스를 준비하는 바하로사의 모습이, 퍽이나 흥미롭다.
그전에.
“뒤지기 전에 이거 하나만 알아둬라. 이 대륙의 주인은 나다. 씨발놈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