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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를 한다는 건-69화 (68/131)

69화.  < 세상으로 도망가라(1) >

“...정말이지, 이해가 가지 않는군.”

문득 들려오는 툴칸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건물 더미를 헤치고 천천히 걸어 나오는 툴칸, 그의 옆머리가 터져 피가 주르륵하고 흘러내렸지만 이상하게, 고통은 없는듯하다.

“...이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는데도 무기 하나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가?”

말없이 주먹을 말아 쥐었다.

군자검이 없어도 테슬란 건틀렛이 있으니까.

자리를 박차려던 그때.

“그대는 고대의 전쟁의 맥을 이어가는 시련자, 맞나?”

멈칫.

고대의 뭐?

“맞나보군. 시련을 겪을수록 강해진다지?”

"..."

잠깐만, 뭔가 이상하다.

툴칸과 직접 싸웠던 형님이 말하기를 놈은 그저 싸움에 미친 돌대가리라고 표현했었다. ...그런데 고대의 전쟁이라고?

나조차도 처음 들어보는 주제가 놈의 입에서 튀어나와?

“꿈을 꾸고, 정신을 차려도 얻은 힘은 여전하다지?”

몸이, 움찔하고 떨려온다.

놈의 말은 시련자가 시련 도중에 죽어도 실제로 죽지 않는다는 걸 말하는 것 같은 뉘앙스였다.

적어도 내가 느끼기에는.

힐끗 고개를 돌려 메시지창을 훑어보니 갱신된 내용은 없었다.

없는 게, 더 이상했다.

“..모르는 모양이군. 그럼 이 이야기는 할 필요가 없겠군.”

그가, 무언가를 준비한다.

입고 있던 판금 갑옷을 벗어던지고는 팔목을 풀고, 목을 푼다.

마치 스트레칭을 하는 것처럼.

그런데, 하던 말은 마저 해야지.

“꿈을 꾼다는 게 무슨 뚯이지?”

“말 그대로 꿈을 꾼다는 건 꿈을 꾸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게 뭔 개소리야 또.

“너 시련에 대해서 어디까지 알고 있냐?”

툴칸이 피식 웃고는 답했다.

“방금 말한 게, 내가 아는 것의 전부였다.”

왠지 구라 같아 보이지는 않는데, 느낌이 쎄하다.

내가 놓치고 있는 게 있는 걸까.

“그런데, 언제까지 대화를 할 생각이지?”

"..."

우두둑하는 소리와 함께 툴칸의 기운이 사방으로 뻗어나가고 그의 몸이 뒤틀리기 시작했다.

근육이 부풀어 오르고 팔은 더 두꺼워졌으며, 붉은 색의 피부는 완전히 핏빛으로 변했다.

마치 혈기를 자극한 현재의 내 모습과 흡사하다.

그리고 확신했다.

저게, 툴칸의 전력이라고.

하긴, 놈의 말대로 이제 와서 시련에 대한 대화가 무슨 소용인가.

아스가르드에서 보았던 인어족의 시조였던 실페리온만 봐도 명확하다.

에피소드는 이미 오래전부터 진행되어왔었다.

우주에 존재하는 종족이, 얼마나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침식에 대한 역사적인 자료가 어딘가에는 존재할 확률이 높다.

없는게 더 이상하다.

그때, 4m가까이 몸을 부풀린 툴칸이 그 자리에서 완전히 사라진다.

조금 궁금한 게 한 가지 있긴 한데... 일단 반 죽여 놓고 물어보는 게 나을 듯싶다.

고개를 뒤로 젖혔다.

후우웅-!

툴칸의 주먹이 코앞을 스쳐지나간다.

다리에 힘을 주고, 허리춤의 주먹을 내질렀다.

퍼억!

가죽북 터지는 소리가 울렸지만 툴칸의 웃음은 오히려 짙어진다.

살점이 터져 나가고 뼈가 부러진 게 확실한데.

즐겁다는 듯 웃고 있는 그 모습은 절로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이놈, 확실히 미친거 맞네.

위빙으로 상체를 한번 더 뒤로 젖히자, 후우융하는 공기 찢는 소리와 함께 툴칸의 거대한 팔꿈치가 코앞을 스쳐지나간다.

힘과 그 안에 담긴 기운이 약해지기는커녕 강해진 건 내 착각일까.

느낌이 좋지 않다.

왼쪽 다리에 힘을 주고, 기를 순환시켰다.

후웅-

잔보가 펼쳐지며 내 몸이 옆으로 이동한다.

순간 툴칸도 자리를 박찼다.

그것도 내가 있는 방향으로.

분명 나는 지금 격을 초월한 상태인데... 이놈은 뭐지.

상황을 읽은 건지 아니면 내 기운의 유동을 읽은 건지. 그 반응 속도가 실로 괴물같았다.

설마, 이놈도?

그 이상 생각하지 않고 공중에서 발을 내뻗었다.

동시에,

퍼어어억-!!

놈의 주먹이 내 복부에 박히고, 내 발이 툴칸의 명치를 밀어 찬 것은 거의 동시에 일어난 일.

콰아앙-!

놈과 나는, 동시에 바닥에 틀어박혔다.

오뚝이처럼 일어서고는 앞으로 달려 나갔다.

내 찰나의 판단은 옳았다.

툴칸은 현재 자리에서 일어서고 있는 상태였으니까.

무방비한 놈의 모습을 바라보며, 허리춤의 주먹에 기운을 집중시켰다.

콰지지직-!!!

공간과 공기가 완전히 찢어지고, 그 사이로 내 주먹이 뻗어나간다.

신화 스킬 권골奉骨,

뒤늦게 반응한 툴칸이, 왼쪽 어깨에 팔을 밀착시킨 상태로 가드 했지만.

콰아아아아앙-!!!

우두둑-!

그의 어깨와 팔이 완전히 으스러진다.

툴칸의 발이 땅을 깊숙하게 파고들어갔지만, 그는 버텼다.

다리에 필사적으로 힘을 준채로.

툴칸이 붉어진 눈으로 나를 노려본다.

무시했다.

무게 중심을 왼쪽 발로 옮기고는 오른 발을 들어올렸다.

그리고, 그대로 휘둘렀다.

콰지지직-!

내 발이 툴칸의 옆구리를 후려친다.

신화 스킬 각골脚骨

툴칸의 옆구리가 움푹 파이며 복부가 너덜너덜해진다.

속으로 승기는 이미 굳었다고 확신했지만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다.

순간, 툴칸의 어깨가 꿈틀하고 떨려온다.

분명, 방어가 아닌 공격이다.

아니, 이 상황에서도 공격을 한다고?

주먹인지 손바닥인지, 확실하지가 않다.

다리에 기를 순환시키고, 자리를 박찼다.

후웅-!

허공을 찢는 툴칸의 주먹,

나는 허공에 뜬 채로 몸을 회전시켰다.

발뒤꿈치에 힘을 주고, 그대로 내려찍자.

콰아아아앙-!!!!

툴칸이 멀쩡한 오른팔을 들어 막는다.

놀랍다.

농담이 아니라, 이미 툴칸은 격을 초월하기 일보직전의 상태가 분명하다.

그리고 그 끈기와 인내심, 그리고 맷집 자체가. 내가 본 그 어떤 몬스터들보다 월등했다.

놈이 고개를 든 순간, 나는 반대쪽 다리로 허공을 박차고 있었다.

신화스킬 축지縮地

툴칸의 뒤로 넘어간 나는, 다음 공격을 준비했지만 툴칸이 몸을 돌리며 손등을 휘두른다.

나는, 빠르게 판단했다.

정면으로 흘려서 카운터를 노릴까, 아니면 다시 한 번 잔보를 사용할까. 아니면 축지로 한 번 더 허를 찔러볼까.

가장 확률이 높고, 안전한 기술은 하나밖에 없었다.

축지.

눈앞에 보이는 접히는 땅의 길.

다리에 힘을 주자.

툭-!

나는 툴칸의 뒤쪽에 와있었다.

그는 방금 전까지 내가 있었던 곳을 후려친 상태였고. 혈강기를 끌어올렸다.

땅이 찢어지고,

공간이 찢어지고,

허공의 기운들이 요동친다.

반경 수백 미터가 떨려오는 기분이다.

툴칸이 이변을 느꼈을 때는 이미 늦은 상태.

내 주먹이 툴칸의 광대를 후려쳤다.

퍼어어어억 _!!!

툴칸의 고개가 그대로 돌아간다.

그의 한쪽 다리가 꿇렸지만, 나는 멈추지 않았다.

이어서 자리를 박차고는 무릎으로 툴칸의 복부를 올려치고, 자리에 착지하기 전, 손을 뻗어 툴칸의 오른쪽 어깨를 잡아채고는 왼쪽 팔꿈치로 놈의 안면을 후려쳤다.

퍼어억-!

소리가 섬뜩하다.

퍼어억-!!

한 번 더 후려쳤다.

그때, 툴칸의 부러진 팔이 나를 향해 뻗어온다.

아까까지의 그 강대한 힘은 들어있지 않은, 그저 미약한 반항.

한손으로 그 팔을 그대로 잡아채고, 반대쪽 팔꿈치로 툴칸의 팔목 부분을 내려찍었다.

우두득-!

살이 찢어지고 그 사이로 뼈가 튀어나온다.

잡아챈 툴칸의 팔을 끌어당기고, 주먹으로 놈의 옆구리를 한 번 더 후려쳤다.

일방적인 구타.

"쿨럭-!”

머리위로 툴칸의 피가 쏟아진다.

팔을 놓고 뒤로 살짝 스텝을 밟으며 발을 휘둘렀다.

퍼걱 하는 소리와 함께 툴칸의 턱이 돌아간다.

깔끔한 하이킥.

나는 공격을 멈췄다.

잠깐 나를 바라보던 놈이, 만족스럽다는 듯 웃고는 뒤로 넘어갔다.

쿠웅-

승자가, 정해졌다.

**

황성에서 대기하던 랜버튼과 주청윤이 허탈한 표정으로 말했다.

"저게 사람인가...”

“....이건 밸런스가 너무 파괴되는데..”

이도의 주먹이 휘둘러질 때마다 땅이 터져나가고, 단순한 충격파에 건물이 무너져 내린다.

그렇다고 이도와 싸우는 툴칸이 약하느냐.

그것도 아니었다.

둘의 주먹이 맞부딪칠 때마다 사방에는 거대한 크레이터가 생겨나고, 자연스럽게 오크들이 뒤로 멀찍이 물러난다.

아니, 그 여파에 휩쓸린 오크는 그대로 터져나갔다.

콰아아앙-!!

그리고 지금, 또 다시 건물 서너 개가 무너져 내린다.

동시에 건물 파편들과 같이 터져 나오는 기이한 액체들과 이상한 과일 파편들은 또 뭐란 말인가.

주청윤은 허탈한 표정을 숨길 수가 없었다.

“여기 괜히 왔나...”

“그러게.”

주청윤의 말을 받은 랜버튼이 미간을 좁혔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굳이 피 튀기며 싸울 필요가 없었다.

이도라는 시련자가 저렇게 강한 걸 미리 알았더라면 농담이 아니고 랜버튼은 이 세상을 조용히 유랑이나 하면서 시간이나 보냈을 것이다.

지구의 우유니 사막이나 스톤 헨지 같은 명소가 우습게 보일 정도로 새로운게 가득한 세상. 즉 즐기려고만 한다면 천국이나 다름 없는 곳이 바로 발바라 대륙이다.

지구에서도 관광을 다니는 것을 낙으로 여기던 랜버튼이 자신과 정반대의 성향을 가진 주청윤에게 조용히 다가가 속삭인다.

‘이거, 만개의 언어를 깨우쳤다던 그 새끼가 우리 죽이려고 함정 판 거 아니야?’

주청윤의 눈매가 종잇장처럼 구겨진다.

주청윤과 랜버튼, 이 두 시련자 사이에는 공통분모가 하나 있었는데. 그건 바로 이 둘이 만개의 언어를 깨우친 자에게 어마어마한 후원을 받았다는 점이다.

그 덕분에 모든 능력치가 60을 넘었고 유니크급 스킬만 무려 10개에, 전설급 스킬도 두 개나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최근, 만개의 언어를 깨우친 자가 한 가지 일만 완수한다면 무려 1억 코인을 후원해주겠다고 했는데, 그 일이 바로 이도라는 시련자의 밑으로 들어가 그를 배신하라는 것이었다.

당연히 여기서 그 배신이라는 것의 정의는 이도라는 시련자의 죽음을 뜻하는데. 이렇게 직접 보니까 그의 밑으로 들어가는 건 그렇다쳐도 죽이는 건 절대로 불가능할 것 같다.

차이가, 너무 심하다.

아니.

‘저런 괴물을 대체 어떻게 죽여?’

‘...그걸 왜 나한테 물어?’

‘몰라서 묻냐? 시발. 네가 여기로 오자매’

'내가 죽으라면 죽을 거냐? 미친 새끼야 네가 선택한 걸 가지고 나한테 왜 지랄인데?’

언제부턴가 서로 전음 스킬로 의사를 주고받는 둘이었지만, 그 분위기를 박유정이 읽지 못했을 리 없다.

'적당히 하시고요. 배신은 꿈도 꾸지 마세요. 저 남자, 그렇게 호락호락한 인간 아니니까.’

두 남자가 박유정을 노려본다.

생각해보면 이곳에 온건 만개의 언어를 깨우친 자뿐만이 아니라 저 여자 때문이기도 했다.

‘더 많은 코인을 얻게 해줄 수 있다고 했던 게 이거였어?’

‘제가 틀린 말 한 것 같지는 않은데요. 오크들 죽이면서 코인 꽤 얻으셨잖아요?'

‘그거랑 다르잖아. 저 이도라는 인간을 죽이기만 하면 1억 코인이라고, 너도 애초에 그거 생각하고 말한 거 아니었나?’

'아니었는데요.’

‘두 분 능력이 매우 좋아서 같이 전쟁에 참가하자고 했고, 두 분은 오케이 외치신거잖아요? 거기서 뭐가 더 필요한데요? 설마 제가, 저 남자를 죽이는 걸 도와줄 거라고 생각한건 아니시죠?’

주청윤의 미간이, 처참하게 구겨진다.

'너, 처음부터 저 이도라는 인간의 밑에 있었던 거냐?’

‘그건 아닌데, 처음부터 말씀 드렸잖아요. 은혜 갚으려한다고.’

주청윤과 랜버튼이 서로를 바라본다.

처음 둘에게 접근했던 박유정이 했던 짧은 이야기가 동시에 떠올랐다.

권능 사냥꾼에게 죽을 뻔했다가 살아났다고, 그리고 자기는 빚지고는 못산다고.

‘마지막으로 경고할게요. 배신은 하지마세요. 장담하는데 절대로 성공 못할 테니까. 아시겠어요?’

박유정의 전음에 주청윤은 주먹을 쥐고 부들부들 몸을 떨었다.

빌어먹을 년.

그때, 성미령이 인벤토리에서 붉은 포션을 들이마시며 물었다.

“도와주신 건 고마운데요… 그쪽들, 도대체 누구시죠?”

주청윤은 못마땅하다는 듯 팔짱을 끼고 랜버튼은 어깨를 으쓱하며 시선을 피했다.

결국 박유정이 대표격으로 말했다.

“그냥 지원군이라고 생각해주세요. 뒤늦게 소집된 그런 지원군.”

"..."

“자세한건 나중에 여유가 되면 이야기 드릴게요. 지금은 아무리 봐도 대화할 분위기가 아닌 거 같으니까.”

박유정이 가볍게 웃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들리지 않는 소리에 모두가 고개를 돌린다.

거의 초토화가 된 광장 한 중간에 이도가 서있었고, 그 앞에는 툴칸이 쓰러져있었다.

승부가. 끝난 것이다.

모두가 속으로 환호성을 외치고 있을 때, 오직 한수아만이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다.

한수아는 이도가 아닌, 다른 방향을 보고 있었는데, 한수아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린 나성진이 의문 섞인 말을 내뱉는다.

“…저 오크는 뭐지?”

모든 오크들이 제자리에서 정지한 채 멍하니 있는 것과는 다르게, 한 오크가 천천히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몸 전체를 푸른색 로브로 감싸고 있는 그 오크는, 묘하게 신경을 잡아끈다고 해야 할까.

다른 이들은 그냥 이상한 오크구나 싶었겠지만 한수아는 달랐다.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솟아오르는 기이한 불안감.

마치 Episode #1에서 독에 중독되어 죽을 뻔했던 그때의 그 느낌과 흡사하다.

한수아는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키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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