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화. < 사고치지 말랬더니 사고를 당하고 있네.(1) >
주청윤, 랜버튼, 그리고 박유정.
이 셋의 신체 능력은 그리 높지 않았다.
하지만 가지고 있는 권능이 너무 사기였다.
철저하게 다수와의 싸움에 최적화 되어있는 그들의 권능은, 전쟁이라는 거대한 싸움판에서 압도적인 존재감을 보여줄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그 셋이 등장하면서 전세가 급격하게 변했다.
주청윤이 오른쪽 발끝으로 바닥을 두 번 치면 그가 목표로 한곳을 향해 번개가 뻗어나갔다.
일직선으로 나름 광범위 공격을 주는 주청윤의 그것은 다른 시련자들은 물론이고 인간 진영 쪽에 매우 큰 도움을 주고 있었다.
네 명의 장군급 기사들과 오크들을 학살하고 다니던 양규가, 슬며시 고개를 돌렸다.
전장을 파악한 그의 눈에는 보였다.
현재 오크들의 진영 중에서 가장 돋보이는 존재는 총 12명.
하나같이 입고 있는 갑옷에는 사자 문양이 그려져 있었는데, 농담이 아니라 하나하나가 마스터 급에 달하는 괴물들이 분명했다.
전장의 상황이, 순식간에 눈에 들어오고 머릿속에서 그림이 그려진다.
현재 침식 게이트의 길이는 어림잡아 100여 미터.
그곳에서 오크들이 끊임없이 생겨나고 있었지만 여기는 홈그라운드다.
오크들의 물량이 우리 쪽의 물량을 넘어서기 이전에, 확실한 승기를 잡아야한다.
양규는 그렇게 생각했고 그렇게 판단 내렸다.
그리고 갑작스럽게 등장한 저 세 명의 시련자. 번개와 염력과 바람.
저 정도면 분명 키 플레이어가 확실하다.
그리고 그들 중, 염력을 사용하는 시련자와 눈이 마주쳤다.
그가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신호일까.
그의 주변에 떠있던 무기와, 건물 파편들이 일시에 떠오르더니, 성기사들을 학살하던 사자문양의 오크를 향해 내리꽃히기 시작했다.
동시에 양규와 장군급 기사들이 움직였다.
그 오크가 날아오는 무기들을 쳐내고, 돌 파편을 박살내던 그때, 시간차를 두고 양규의 검과, 장군급 기사들의 검이 그 오크를 향해 꽃혀들었다.
“…이 치졸한 놈들이..”
그게, 그 오크의 유언이었다.
양규의 검은 허공을 벴지만 이어지는 기사들의 검이 오크의 몸에 틀어박히고 마지막으로 양규의 검이 오크의 목을 베었다.
현재까지 정리된 사자문양 오크는 총 셋.
양규는 확신했다.
이거, 이길 수도 있을 거라고.
이도가 말한 ‘그걸' 하지 않아도, 이길 수 있을 거라고.
***
양규의 생각이 무색하게도 전장의 승기가 기울었던 것은 잠깐 일시적인 현상이었다.
오크들은 바보가 아니었으며, 상황을 변하게 만든 세 명의 권능자와 나성진을 포착했고 그들을 죽이기 위해 지휘관급 오크들이 일제히 자리를 박찬 것.
양규를 비롯한 장군급 기사들이 네 명의 권능자를 보호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엄청난 화력을 쏟아내던 권능자들은 사자문양의 오크들을 피해서 도망치기 시작했으며, 게이트는 점점 넓어졌다.
발바라 대륙으로 넘어오는 오크들의 숫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기 시작했고, 머지않아 오크들의 숫자가 인간들의 숫자와 동등해지기 시작했다.
"..양규님. 어떻게 할까요?”
옆에 있던 장군급 기사, 카르나틴의 말에 양규는 짧은 신음을 삼켰다.
‘정말 그걸.. 해야 한단 말인가.’
가능하면 더 많은 오크들을 끌어모으고 싶었지만... 고민할 시간이 없었다.
“모든 병사들에게 알려라. 당장 후퇴하...”
양규의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콰아아아아앙-!!!
굉음이 울려퍼지며, 족히 수천에 달하는 성기사들이 사방으로 터져나갔으니까.
그리고 이어지는 어마어마한 기운의 파동.
오크들은 환호했고, 인간들은 긴장의 끈을 끌어당겼다.
지금 게이트에서 모습을 드러낸 한 마리의 오크.
그가 말했다.
“정찰만 하라고 했을 터인데, 왜 전쟁을 하고 있지?”
모든 오크들이 공격을 멈추고 뒤로 물러섰으며, 오크들이 물러나자 성기사들도 슬며시 뒤로 물러섰다.
일시적인 소강상태.
그 오크가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하자 이어서 사자 문양의 오크들이 그에게 다가가더니 망설임 없이 부복했다.
그 일련의 상황을 지켜보던 양규는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저 마스터 급에 달하는 괴물들이, 무릎을 꿇는 존재라고?
...설마 저놈이 황제?
“대체 무엇을 하고 있던 거냐.”
“...죄송합니다. 인간들의 준비 태세가 너무 노골적이어서 이곳을 점령해야겠다고 판단했습니다.”
오크, 디나스티스모가 고개를 젓는다.
“그런 게 아니라, 왜 아직까지도 끝을 내지 못했냐고 묻고 있는 것이다.”
“..죄송합니다!!”
그가 가볍게 고개를 젓고는 천천히 정면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그곳에 있었다.
네 명의 권능자.
박유정, 나성진, 주청윤, 랜버튼,
“신기한 기운을 가진 인간들이군, 그런데... 저들중 인간족의 황제로 추정되는 이는 보이지 않는구나.”
"...이잡듯 뒤지긴 했지만 황제로 추정되는 자는 없었습니다.”
그가, 실소를 터트렸다.
“저들을 전부 죽이면 그때는 나타나겠지.”
“설마 단장님..”
“폐하께서 오시기 전에, 모든 것을 끝낼 것이다.”
그 말이 끝이었다.
철혈 사자단의 단장 디나스티스모가 허리춤의 도끼를 꺼내들고는 자리를 박찼다.
굉장한 기세. 마치 전차가 달리는 것 같은 그 기세에 먼저 반응한 것은 주청윤이었다.
그가 발끝으로 바닥을 두 번 치자, 빛이 번쩍인다.
이어서 디나스티스모가 고개를 숙이고, 그의 머리로 번개가 스쳐지나가는 것은 거의 찰나의 순간 벌어진 일.
짜악-!
박수가 쳐지고 주청윤과 오크 사이에 거대한 바람이 일렁이며 오크가 주줌하고, 랜버튼의 주변에 떠있던 수백 개의 무기가 일제히 오크를 향해 날아갔다.
이어서 땅이 뒤집히는 마법 같은 일을 바라보던 양규는, 미간을 좁혔다.
말로 미루어보아 저 오크는 황제가 아니다.
아닌데도 저 오크가 등장하자마자 방금 전까지만 해도 사생결단을 내던 오크들이 그 자리에서 정지했다.
몇몇은 무릎까지 꿇고 있었으니. 아무리 봐도 저 오크는 중요인물이 확실하다.
슬며시 고개를 들어 옥상에 있는 한수아를 바라보았다.
그녀도 마침 양규를 바라보았고 서로의 눈이 마주친다.
양규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중요한건 지금, 전장이 저 오크와 네 명의 시련자들을 제외하고는 일시적인 소강상태에 빠졌다는 점이다.
“조용히 모든 병사들을 ‘황성’안으로 진입시키고, 부상 인원은 다른 곳으로 워프시켜. 그리고 마법사들에게 알려라.”
“무엇을 말씀이십니까?”
“한수아님이 오시는 그 즉시, 수도를 폭발시킨다.”
“...알겠습니다.”
자폭할 생각으로 세운 계획이 아니었기에 당연히 폭발시키기 전 모든 병사들은 이 자리를 벗어나야 한다.
폭발의 범위는 수도 전체이며, 그나마 안전한 장소는 황궁을 기준으로 반경 80미터.
시선을 돌리는 역할을 권능자들이 맡아주고 있으니, 이건 뜻밖의 천운.
양규는 권능자들과 싸우는 오크를 향해 자리를 박찼고 그의 곁에 있던 장군급 기사들은 병사들을 향해 자리를 박찼다.
**
“쿨럭-"
랜버튼을 비롯한, 권능자들이 모두 피를 토해냈다.
나성진은 팔 하나가 잘려나가 있었으며 성미령은 그 자리에서 비틀거리더니 결국 쓰러졌다.
박유정은 몸을 떨고 있었으며, 랜버튼과 주청윤은 호기롭게 등장한 것과는 다르게 공포에 질린 얼굴로 눈앞의 오크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 말고는 이들이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격의 차이.
그 어떤 공격도 통하지 않았으며, 그 어떤 시도도 통하지 않았다.
스스로를 철혈 사자단의 단장인 디나스티스모라 소개한 오크가 울상을 짓는다.
“이게... 인간들의 저력인 것이냐.”
손을 뻗어 바닥에 쓰러져있던 박유정의 목을 움켜쥐며 들어올렸다.
“고작해야. 이딴 게 저력인 것이냐.”
디나스티스모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멸망을 대가로 싸우는 전투가, 이렇게 허접하다니. 그래도 일말의 기대 정도는 했는데... 이 정도면 내가 공을 세워도 세웠다고 말하기도 부끄러운 수준이 아니더냐!!!”
너무나도 약한 인간들의 저력에 분노를 터트린 그가, 손에 힘을 주려던 그 순간.
쩌저적-!!
찢어지는 굉음이 전장 전체에 울려퍼지기 시작했다.
손에 힘을 푼 디나스티스모가 고개를 돌린다.
한 건물의 옥상,
수십여 명의 인간들에게 호위를 받고 있는 한 인간이 눈에 보인다.
이어서.
쿠구궁-!
찢어진 공간이 뒤틀리고 그 안에서 수천마리의 정령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빛과 어둠.
분명 지금은 대낮인데도 너무나도 찬란했으며, 그에 대비되는 짙은 어둠은 묘하게 대비를 이루면서도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철혈 사자단의 모든 오크를 비롯해, 인간들은 물론, 모두가 입을 벌린다.
처음에는 소환 계열 마법인 줄 알았다.
하지만, 그 어떤 소환 계열 마법도 공간 자체가 뒤틀리는 경우는 없었다.
“...저게... 대체 뭐란 말인가.”
기현상이었다.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던 기현상.
이내, 그의 표정이 구겨진다.
공간이 한 번 더 찢어지더니, 그곳에서 온몸을 근육으로 무장한 황금빛의 괴물과, 그 옆에는 비슷한 형태지만 짙은 흑색으로 물들어있는 괴물이 튀어나왔으니까.
그 일련의 과정을 바라보며, 디나스티스모는 웃고 말았다.
“...이 정도면, 부끄러운 상대는 아닌...”
그는 말을 잇지 못했다.
거대한 괴물 두 마리가, 날아오기 시작했으니까.
그것도 흉흉한 기세로.
디나스티스모는 웃음을 띄운 채로 기운을 끌어올렸다.
그의 도끼가, 이내 정령들을 향해 휘둘러진다.
**
옥상 위에 있던 한수아는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수많은 정령들, 무려 만 단위가 넘는 그들이 계속해서 목소리를 낸다.
간택해달라고, 자기랑 계약해달라고.
한수아는 고개를 저었다.
“일단 눈앞에 있는 오크들을 모조리 죽여줘요. 하나도 빠짐없이.”
그 말이 신호탄이었다.
정령들이 매혹에라도 빠진 것처럼 전장을 향해 미친 듯이 달려 나간다.
이어서, 공간이 한 번 더 찢어졌다.
그 안에서 나타난 것은 빛의 상급 정령 위스프와 어둠의 상급 정령 스프라이트,
한수아의 미간이 고통으로 구겨지긴 했지만, 그녀는 참았다.
전이랑은 달랐으니까.
거대한 존재감을 뿜어내는 두 정령이 완전히 모습을 드러낸다.
덩치만 무려 5m에 달하며 그 몸 전체를 감싸고 있는 근육과 겉면에 도포되듯 발라져있는 속성의 기운까지.
그 두 존재가, 동시에 입을 열었다.
[계약을 하겠나?]
[계약을 하겠나?]
목소리 안에 담긴 기운이 상반되고 있음에도, 반발 작용이 전혀 없었다.
그녀의 성향이, 그 정도로 정령들과 완벽하게 녹아들었다는 뜻.
정령의 물음에 한수아가 고개를 젓는다.
“눈앞에 있는 오크들을 모조리 죽여줘요. 계약은 그때 이야기해요.”
아까 했던 말의 연장선 .
두 정령은 약간 미심쩍은 표정을 짓기 했지만, 그게 전부였다.
그들이 움직이려던 그때, 정령문에서 또 다른 상급 정령이 나타났다.
형태는 비슷했지만 생김새는 다른.
그리고 한수아는 똑같은 말을 반복했는데. 앞서 소환된 두 정령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그 표정은 찜해놓은 먹이를 빼앗길 것 같다는 그런 표정이었고, 둘은 경쟁이라도 하듯 미친 듯이 달려 나갔다.
목표는 가장 강해보이는 오크.
그리고 그 뒤를 소환된 네 마리의 상급 정령이 기차놀이하듯 앞선 둘의 뒤를 쫓기 시작했다.
마치 악순환... 이 아니라, 그런 선순환이 반복된다.
때마침 침식 게이트가 점점 더 넓어진다.
1초가 지날 때마다 수십에서 많으면 백정도가 넘어왔던 것과는 다르게 지금은 1초에 1천에서 2천이 넘는 오크들이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렇게 광장 수도에는 수없이 많은 오크들이 자리하게 되었지만, 오크들은 이제 인간들을 신경 쓰지 않았다.
계속해서 소환되는 수십만 마리의 정령들이 딱 하나만 보고 움직였으니까.
바로 오크의 죽음.
하나가 안 되면 둘이 붙었고, 둘이 안 되면 셋, 셋이 안 되면 넷이 붙었다.
오크들은 정령들과 사활을 건 싸움을 시작했고 인간 쪽의 병사들은 황성 내지 게이트 존으로 빠져나가기 시작했으며 한수아에게 매혹에 걸린 500여명의 시련자중, 살아남은 12명의 시련자도 몸을 빼내기 시작했다.
모두가 한수아의 존재를 인지했다.
이도에 미치지는 못하지만 그녀는 분명 괴물이었다.
그렇게, 전장의 상황이 급변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건 전부 일시적인 현상.
굵직한 인상에 사각 턱이 인상적인 시련자, 주청윤이 작게 말했다.
“...이봐요 박유정씨 그래서 그 이도라는 새끼는 왜 안 나타나는 건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