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 그런 거였어?(3) >
“이거.. 되게 충격 먹은 표정이네. 이런 표정 보는 건 또 처음인데, 기차에서 나랑 우리 탈레리안한테 시비 걸었을 때는 되게 당당하더니? 너 좀 귀엽네?”
미친년이 주둥이를 찢어버릴라.
“긴 말 필요 없겠네. 그냥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자. 너. [유토피아의 군주], 그 칭호. 나한테 넘기는 게 어때?”
이건 또 뭔 상황인데?
칭호를 넘기라고?
“칭호를 넘기는 것도 가능합니까?”
“당연하지. 칭호의 본질이 뭐겠어? 네가 왜 격을 갖췄다고 느끼는 건데? 칭호란 격이야. 그게 칭호의 본질이지.”
"..."
당황을 해야 하는 타이밍이 맞는데. 왜 당황보다는 어이가 없어지는 걸까.
“이곳에 있는 이들의 숫자만 무려 200이 넘어가는데, 이들 중에서 이종족을 묶은 이들이 단 한명도 없다는 겁니까?”
여하가 안타깝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엄밀히 말하면 이종족을 받아들인 이들은 분명 존재했었지. 하지만 그들은 [유토피아의 군주]와 비슷한 ‘성격'의 칭호를 얻지 못했거든. 왜 그랬을까?”
유바의 신성이 일탈이라고 말했던 부분이, 혹시 이 부분일까?
노예로 착취하지 말아달라는. 그리고 형님이 노예가 되었던 이들을 인격체로 대하자고 제안했던 부분들. 묘하게 매치되는 기분이다.
설마 이게 정답인가?
“그들은 이종족을 '노예'로 받아들여서입니까?”
“제법이네. 정답이야.”
나는, 조용히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
수많은 신들과, 눈앞에 있는 세 명의 최고신이 나를 바라본다.
왜 나를 불렀는지 알 것 같았다.
“저를 이곳으로 부른 이유가... 이것이었군요. 저라는 존재를 진영에 소속시키기 위해서, 그리고 [유토피아의 군주] 칭호를 가지고 싶어서.”
“그렇긴 하지. 사실 감당하지 못할 무게를 계속 어깨에 짊어지는걸 보는 게 조금 힘들 것 같아서. 걱정돼서 그래 걱정돼서.”
역시 이년은 미친 게 분명하다.
구역질이 나는 것을 필사적으로 참았다.
그때, 여화가 말했다.
“100억 코인 어때?”
무언가 말하려다, 그대로 입을 다물고 말았다.
“100억은 너무 적잖아, 300억 코인은 불러줘야지.”
아룡이 말을 받았고.
“그는 코인 따위에 대의를 버릴 인물이 아닐세. 코인 같은 것보다는 물질적인 것을 주어야겠지. 내가, 이 천군의 신화가 담긴 아이템을 그대에게 건네주겠네.”
그게 시작이었다.
무언가에 짓늘린 것처럼 조용히 있던 주변의 신들이, 나를 재촉하기 시작한 것이다.
귀가 아플 정도다.
그런데도 왜일까.
웃음이 터져 나온다.
생각보다 너무나도 많은 정보를 얻었다.
환호성과 점점 커져가는 목소리로 연회장이 달아올랐지만 도리어 내 머리는 싸늘하게 가라앉는다.
생각을, 정리하자.
침식을 일으키는 이유를 여화는 말해주지 않았다.
하지만 코인이라는 말을 계속해서 언급하는 것과, 아이템을 주겠다는 것, 그리고 이곳에 있는 대부분의 신들이 모두 시련자였다는 거. 아니, 아니다.
시련자 였다고 말하지는 않았다.
시련자 라고 말했지.
이들의 시련은 끝난걸까.
아니면 아직도 진행되고 있는 걸까.
에피소드 100 이후에, 또 다른 시련이 존재한다는 걸까?
밑그림은 그려졌다.
이제, 이들의 큰 목적만 알아내면 된다.
그 순간.
띠링!
[Episode #10~#19가 30분 뒤 시작됩니다.]
표정이 굳어졌다.
이게... 뭐야?
왜 지금 30분이 남았다는 말이 나오는 거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아룡과, 여화와, 천군을 바라보았다.
조용히 웃고 있는 아룡과, 한쪽 입꼬리만 비틀어 올린 여화.
그리고 표정 없는 천군.
섬뜩했다.
...이 씨발 새끼들이.
보내준다며?
“...지금 뭐하자는 겁니까?”
“혹시 에피소드가 시작된다는 알림음이 뜬 건가?”
천군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이자.
“왜 그래? 지금 발바라 대륙으로 넘어가면 되잖아.”
아룡이 말을 받았다.
뭔가 느낌이 이상하다 싶었는데, 역시 이 새끼들은 죄다 믿을만한 놈들이 아니었다.
젠장.
“분명히 시간은 충분하다고 말했던 것 같은데, 후우... 뭐하자는 거지 이게?”
여화가 씩 웃는다.
"세 가지 선택지가 있어."
"..."
“첫 번째, [유토피아의 군주] 칭호를 우리에게 건네주는 것.”
더 생각할 필요도 없다. 바로 기각이다.
“둘째. 시련을 포기하는 것.”
흠칫.
“...포기?”
“그래 포기, 네가 시련을 포기하면 너를 포함한 모든 시련자들을 지구로 보내주도록 할게. 다소의 격이 소모되긴 하겠지만 우리 셋이 그걸 분담한다면 그다지 어려운 것도 아니거든. 당연히 처음 에피소드가 시작될 때 보았던 지구의 멸망도 막아 줄 거고. 어때? 아 그리고 자연스럽게 말 놓지 말고.”
뒷말은 무시했다.
시련을 포기? 이년이 개수작을 부리네.
지금 나를 포함한 모든 시련자들이 ‘영체’상태인걸, 내가 몰랐더라면 분명 혹했을 테지만 나는 안다.
시련자들이 시련 도중에 죽는다 해도 본체로 돌아갈 수 있다는 그 사실을.
그런데 이거, 다시 보니까 [유토피아의 군주] 칭호를 원하는 게 아니라 이 칭호를 끝까지 성장시키지 못하게 하려는 것 같은...
그 순간 머릿속에서 번개가 쳤다.
유바의 신성이 내게 해주었던 말은 유토피아를 건국하라는 말이 전부가 아니었다.
이명이 섞여서 제대로 듣지 못했던 그 단어, [**의 왕], 젠장!
그거다.
[유토피아의 군주]는 수단이다.
저 [**의 왕]으로 가기 위한 수단.
즉, 이들은 내가 [**의 왕]이 되지 못하도록 막으려는 것.
그때, 천군이 끼어들었다.
“잠깐.”
중년 천사가, 한쪽 눈매를 일그러트리며 여화에 말에 한 번 더 찬물을 끼얹었다.
“난 그 의견들에 동의 한적이 없다네.”
“미친년 혼자 북치고 장구를 치네. 네가 뭔데 에피소드를 중지시켜?”
곁에서 화룡정점을 찍는 아룡까지.
무시하고 물었다.
“그래서 세 번째는 뭐지?”
“말 놓지 말라니까... 고집 있네. 그냥 넘어가줄게. 사실 지금부터 말하려는 게 본론이야. 별건 아니고, 네가 내 남자가 되는 거지. 전에 있었던 일들 전부 잊고 새롭게 시작하자 뭐 그런 거. 덤으로 내 밑으로 들어오고, 괜찮지?”
개소리도 이 정도면 병이다.
그리고 반박은 내가 하지 않아도 다른 이들이 충분히 해주기 시작했다.
“이게 미쳤나.”
아룡을 시작으로.
“격을 소모하더니 정신이 나간 것인가.”
천군이 말을 받자 여화의 표정이 구겨진다.
그 아름다운 얼굴이 구겨지는 모습은 정말 팝콘이 절로 생각날 정도였다.
고개를 돌려 천군을 바라보며, 물었다.
“여기까지하시죠. 제가, 발바라 대륙으로 넘어가야겠는데요.”
천군에게는 말을 높이는 나를 여화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지켜보았지만 당연히 이번에도 무시했다.
“...가시게,”
“...어떻게요?”
“그대는 가는 방법을 알고 있네, 그대는 미약하지만 신격을 갖춘 존재. 별들의 운하에 의념을 보내시게, 그러면 그대만의 운송수단이 생겨날것이니.”
짜증난다.
이 무슨 우문에 현답이란 말인가.
하지만 방법이 없다.
언급 한 적 있지만 오크들은 어마어마하게 호전적인 놈들이다.
특히 놈들의 황제 툴칸, 놈은 오크로서 그 신체의 극의를 갖춘 괴물.
이를테면 나와 같이 신격을 갖춘 존재다.
그놈이 발바라 대륙으로 넘어가면 그 누구도 놈을 막을 수 없다.
나는 잠깐 신들을 응시하다 그대로 몸을 돌렸다.
“시간은 많으니 쭉 생각해보시게. 적어도 에피소드가 끝나기 전까지 우리는 그대를 계속 지켜볼 터이니.”
천군의 말에, 돌린 몸을 다시 원상복귀 시키고 말았다.
말이, 되게 묘하다.
협박인가?
대의를 중요시한다는 그 ‘천군’이?
그런데, 생각해보니까 저놈도 여화만큼이나 웃긴 존재가 아닌가.
대의를 중시한다는 놈이 침식으로 세상을 멸망시켜?
세상을 멸망시키면서 관철시켜야할 그 대의가 대체 뭔데?
왠지 모르게, 천군이 조금 역겨워지려고 한다.
그를 잠깐 바라보다, 그 옆에 있는 아룡이 손을 흔드는 것을 목격했다.
이어서 그가 문 워크를 추면서 손을 휘적휘적 내젓는 것까지.
정말이지... 미안한데, 너도 조금 역겹다.
속내와는 다르게 나는 웃음을 머금은 채로 그들에게 가볍게 인사를 건넸다.
“곧, 다시 뵙게 될 겁니다.”
몸을 돌리자 눈앞에 보인다.
이곳으로 이동했을 때 보았던 ‘오벨리스크'.
그곳에 손을 얹자 홀로그램이 떠오른다.
그 목록에 있었다.
별들의 운하.
나는 망설임 없이 터치했다.
***
입구에 위치한 오벨리스크를 누르고, 별들의 운하로 사라지는 이도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여화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놈도 [**의 왕]이 될 수 있다고?"
“충분히.”
확신 가득한 천군의 말에 여화는 인상을 찌푸렸다.
그리고, 아룡이 끼어들었다.
“천사라는 종에서 초월한 너나, '악마'라는 종을 초월한 너나, 아무리 봐도 우리 이도가 너희보다는 뛰어난 것 같은데.’’
천군과 여화가 동시에 아룡을 바라본다.
“너네 둘 중 하나가 [**의 왕]이 되는 건 솔직히 별로였거든... 그런데 선택지가 하나 늘어나서 나는 기분이 참 좋아. 진심이야 이거는."
아룡의 말에 두 최고신은 아무 말 하지 않았다.
그저 아룡을 노려볼 뿐.
결국, 입을 다물고 있던 천군이 입을 열었다.
“그의 대의가 나의 대의와 뜻을 같이한다면 그때는 어찌 할 거지? '균형자'를 노리는 그대의 '대의'는, 바뀌지 않겠지?”
아룡이 코웃음을 쳤다.
“구역질나게 왜이래? 너처럼 선이라는 감투를 걸치고 그 감투로 패악질을 일삼는 건 대의가 아니잖아? 언제까지 가면을 쓰고 있을 건데? 그리고 그 대의와 이도의 뜻이 같다? 개소리도 정도껏해라. 구역질나니까.”
장난기 어린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진지한 표정으로 일침을 가하는 아룡의 말에 천군은 그저 말없이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니들, 알고도 모르는 척 하는 거야 아니면 진짜 모르는 거야?”
“..뭐를?”
“무엇이?”
여하가,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이도가 사라진 그 자리를 바라보며 말했다.
“쟤 말이야, 영혼에 기이한 기운이 하나 더 들어 있던 거.”
“이상해, 왜일까 언젠가 느껴 본 것 같은 기운인데.. 처음 보는 거 같기도 하고, 뭘까”
아룡이,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그 말을 받았다.
“이도는 아직 영체상태, 그 고유 권능에 담긴 힘이 밖으로 삐져나온 거겠지.”
여화가 피식 웃는다.
“도마뱀 새끼라 그런가. 눈에 못 박았니?”
아룡이, 일그러진 얼굴로 여화를 노려본다.
“그렇게 노려보면 어쩔 건데? 어차피 너도 시스템의 지배를 받고 있잖아. 격을 뿜어내시게? 한번 소멸돼보려고?”
“이 개년이...”
여화가 해맑게 웃었다.
“기대해도 좋아. 이번 시련이 끝나면 제약은 풀리잖아? 그때 기대해, 균형자고 나발이고 나는 너부터 죽일 거니까."
아룡의 입꼬리가 씰룩였다.
“여전히 주제파악 못하는 년이네, 오냐. 그때가 되면 나도 너부터 죽여주지.”
여화의 웃음은 사라지지 않았다.
여화는 그대로 몸을 돌려 한쪽에 마련되어있는 자신의 지정석을 향해 걸어갔다.
‘유토피아의 군주라...’
그때, 그녀를 향해 한 남자가 다가온다.
“여화님 괜찮으십니까? 그 이도라는 놈, 건방진 게 아주 하늘을 찌르던데, 그냥 제가 현신해서 죽여 버릴까요?”
그냥 하는 말이라는 것을 여화는 안다.
현신이 쉬운 것도 아니고, 현신을 해서 시련자를 죽인다면 그는 무저갱에서 영겁의 시간동안 고통에 떨며 살아갈 테니까.
즉, 저건 그냥 아부다.
“내가 진행하라는 건 어떻게 됐어?”
“시련자 포섭 말씀이시죠? 주청윤이라는 시련자와 랜버튼이라는 시련자에게 계속해서 후원 해주고 있는데.. 아직 입질이 오지는 않고 있습니다.”
“조금 더 지켜봐. 그 둘 정도면 이도만큼은 아니더라도 격을 초월할 가능성이 있는 놈들이니까."
여화에게 말을 건넸던 남자.
탈레리안이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하... 유토피아의 군주? 햇병아리가 몇 번 운이 좋았던 걸 가지고 전부 자기 실력이라고 믿고 있네... 탈레리안아.”
“예."
“나는 정말 궁금해, 이번 침식이 끝났을 때 그놈이 어떤 표정을 지을지.”
탈레리안은 말없이, 머리 위에서 느껴지는 광기와 너무나도 순수한 악, 그 자체인 여왕의 감정을 조용히 느꼈다.
“그런데 볼수록 이상한 게, 걔는 아무리 봐도 성향이 우리 쪽인데... 왜 그렇게 건방진 걸까. 이거 혹시 후원해달라는 건가?”
정말로 궁금하다는 듯 여화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럼 후원을 한 번 해볼까요?"
"너미쳤니?"
"...죄송합니다."
여화가 손가락을 까닥이자 탈레리안은 조건반사처럼 여화의 앞에 엎드렸다.
자연스럽게 여화는 발을 들어 탈레리안의 등을 받침삼아 다리를 꼬기 시작했고, 그런 여화를 아룡이 노려보고, 그 옆에는 천군이 눈을 감은 채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한다.
잠깐의 시간이 흐르고, 그들 모두는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중앙 무대에 크게 떠오르는 화면을 일제히 응시하기 시작했다.
그 화면에는 발바라 대륙의 상황이 아닌, 릴로드 대륙의 황제, 툴칸이 떠올라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