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 < 그런 거였어?(2) >
환하다.
나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을 정도로.
이내.
짝짝짝짝-!
사방에서 박수치는 소리가 들려온다.
순간, 온몸이 서늘해졌다.
이 시발. 왜 갑자기 트루먼 쇼가 떠오르는 거지?
엿 같은 기분을 감추고 슬며시 눈을 떴다
나는 거대한 오페라 극장 같은 곳에 있었으며, 내 주변으로 수많은 종족들이 나를 향해 일제히 박수를 쳐주고 있었다.
인간들도 있었고, 거인족부터 소인족까지, 거기다 머리에 뿔이 달린 요괴같이 생긴 이들도 있었으며, 심지어는 벌레같이 생긴 괴물도 존재했다.
숫자는 어림잡아 100, 아니 200정도.
그들이 계속해서 박수를 친다.
마치, 나를 환영 해 주는 것처럼.
얼떨떨한 표정을 지으며 그들을 바라보던 그때.
갑자기 뚝 하고 박수소리가 일제히 멎었다.
정면에서, 세 명의 ‘사람’이 걸어오고 있었다.
하나는 사람이라기보다는 천사 같다고 해야 할까.
등에는 8장의 날개를 달고 얼굴만 드러낸 중년 남성.
그리고 그 옆에서 걸음을 옮기고 있는 이는 지구에서 유행하던 A사의 삼선 트레이닝복을 입고 있는 꽤나 젊은 남자였다.
묘하게 그 남자가 신고 있는 신발이 눈에 밟힌다.
검은색 로퍼.
마이클 잭슨이 문 워크를 출 때 신었던 그 로퍼랑 꽤 닮아보이네.
...설마 아니겠지.
그리고 그 옆. 조금은 못마땅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일말의 기대감을 품고 있는 한 여인.
정말이지, 압도적이다.
외모는 한수아의 그것을 훨씬 능가할 정도였으며 허리까지 내려오는 검은색 머리카락은, 그 자체로 빛이 나는 듯했다.
몸매는 물론 단 한구석의 옥에 티도 없는 완벽한 미인.
설마 하던 내 의구심이, 이제 확신으로 변했다.
천사는 선에서 군림하는 자. 트레이닝복을 입고 있는 남자는 아룡, 그리고 마지막 저 개년은 악신의 왕, 여화다.
주변이 조용해지자, 천사가 내게 먼저 말을 걸었다.
“오느라 고생 많았네. 대의를 가진 새로운 우리의 ‘동지’여. 나는 천군天群이라하네. 이명은 선普에서 군림하는 자.”
이름이 천군인건 처음 들었다.
그런데 조금 거슬리는 말이 하나 있네.
동지 라고?
이어서 아룡이 입을 열었다.
“좋아하는 춤은 정해놨지? 그게 뭐든 난 너랑 듀엣으로 뛸 수 있거든. 내가 모르는 줌과 모르는 노래는 없어. 아 그리고 이 말은 꼭 해야겠네. 만나고 싶었어. 새로운 ‘동지’.”
신이라기보다는 철이 덜 든 어린애 같은 말투.
이상하다.
왜 자꾸 나를 동지라고 부르는 건데?
그때였다.
또각-
단화 굽이 바닥과 맞부딪치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여화가, 나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으니까.
“이상하지?”
"..."
“왜 너를 자꾸 동지라고 부르는 걸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농담이 아니라 표정 관리를 해야 되는데 지구를 멸망시킨 장본인이 눈앞에 있다.
아무리 전생에서 벌어진 일이라 해도 나와 형님을 죽인 여자다.
젠장. 그런 여자를 보고 어떻게 표정 관리를 할 수 있겠는가.
속병 터져 뒤지고 말지.
“에피소드를 지켜보면서 느낀 건데. 너, 대체 성향이 어느 쪽이야?”
“그 무슨 말인가, 그는 당연히 ‘선’계열이 어울리지.”
“너네 눈은 장식이냐? 누가 봐도 우리 이도는 ‘중립’이지.”
여화를 바라보자, 그녀가 한쪽 눈을 찡긋한다.
역겨워서 헛구역질이 나올 정도다.
그와 별개로, 지금 이 상황이 순식간에 이해가된다.
아니었으면 했는데 이렇게 노골적이라니.
지금 이놈들은 나를 자기 ‘진영’으로 데려가고 싶은 것이다.
일종의 스카우트.
그리고 순간 고민했다.
말을 높여야 할 지, 아니면 낮춰야 할 지.
고민은 짧았다.
높이자.
“지금 제가 진영을 선택해야 합니까?”
내 물음에 여하가 실소를 터트리고 천군과 아룡이 어깨를 으쓱한다.
“사실 꼭 지금은 아니어도 돼. 어차피 Episode가 끝날 때까지는 진영 선택이 ‘거의’ 무의미하거든.
내 질문에 대답한 것은 천군과 아룡이 아닌 여화였다.
젠장
계속해서 내게 정보를 주는 것도 여하, 내가 상황 파악을 하는데 도움을 주는 것도 여화.
이 개년이 대체 무슨 수작을 부리려는 거지?
“그런데 사실 진영을 따지기 이전에, 너한테 정말 궁금한 게 하나 있거든.”
“...뭡니까?”
구역질나는 것을 참고 물었다.
“너, 고유 권능이 뭐야?”
“그러게, 그건 나도 조금 궁금한데.’’
“나도.”
최대한 무표정을 유지하면서 대답했다.
“그게 왜 궁금하십니까?”
“왜? 궁금해 하면 안 돼?”
“제가 이유도 모르고 휘둘리는 건 딱히 좋아하지 않아서요.”
여화가 해맑게 웃는다.
마치, 한수아가 웃는 것처럼.
“어차피 말해주지 않아도 짐작은 하고 있어. [통찰] 혹은 [예지], 둘 중 하나 맞지?”
여기선 어떤 표정 변화를 보여줘야 할까.
웃어야할까.
아니면 들켰다는 표정을 연출해야할까.
그것도 아니면 무시해야할까.
선택지는 많았지만 당연히 내 선택은 하나였다.
무시한다.
“저도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뭔데?”
여화뿐만이 아니라, 최고신.
천군과 아룡까지 하나하나 눈을 맞추며 입을 열었다.
“왜 침식을 일으키는 겁니까?”
반드시 정답을 알아내야할 질문이자, 이 시련의 근본적인 목적에 다다르는 최적의 질문이었다.
하지만 모든 신들이 이 물음에는 침묵했다.
오직. 여화를 제외하고는.
여화가 의미심장하게 웃는다.
“글쎄, 왜 우리가 일으킨다고 생각해?”
아.. 이년이 또 개수작을 부리네.
“아닙니까?”
“꼭 우리라고는 할 수 없지. 이 시스템이 일으키는 것 일 수...”
“왜 일으키시는 겁니까? 어려운 질문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요.”
여하가 희미한 미소를 머금는다.
마치, 이놈 봐라? 하는 증조할머니의 웃음 같다고나 할까.
여화는 이 순간 확신했나보다.
내가, 어느 정도 시련에 대해 감을 잡고 있다는 사실을.
“제법이긴 한데... 그거 말해주기에는 네가 우리한테 보여준 게 별로 없는데?”
무언가 물으려다.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아니, 생각 자체를 척추 너머로 그냥 집어넣었다는 표현이 정확하리라.
지금 상황.
다시 생각해보니 뭔가 이상하다.
천군과 아룡은 그렇다 쳐도, 이 여화는 나에게 ‘적대감'을 가질 수밖에 없는 존재다.
이유는 하나밖에 없다.
내가 Episode #1 때 악신을 싸잡아서 욕했던 것을 시작으로 나는 지금까지 철저하게 악신들과 대비되는 행동을 해왔다.
제물 바치는 것을 멈추게 했으며 거기다 악신이 후원해주었다는 에릭을 죽였다.
그런데 그런 나에게 ‘호으|’를 보여준다?
순간, 내 머릿속에 그 동안 의식하지 못하고 물 흐르듯 흘렸던 단어 하나가 떠올랐다.
투자자.
이들은 투자자다.
왜 투자자라고 불릴까.
이들이 에피소드에 무언가를 투자했는지는 모른다.
대체 무엇을 투자 한 걸까, 그게 돈인지 힘인지, 심지어 코인인지는 모르겠지만 굳이 투자자라는 단어를 썼다는 것은 이들은 결국, 에 피소드로 이득을 보려는 존재를 뜻하는 것이 아닐까?
그런 그들이 보기에 에피소드에서 가장 유망하고 가장 강하고, 가장 괴물 같은 놈이 존재한다면?
당연히 어떻게든 선점하고 싶어 하지 않을까?
그러니까.. 나는 ‘블루칩’이다.
에피소드가 초반부까지밖에 진행되지 않았지만 인간종으로서 극한까지 성장해버린 괴물 .
거기다, 스스로의 신화까지 써내려가며 이제는 신격을 초월할 준비를 하고 있는 인간.
즉, 블루칩을 넘어 투자대비 수천 퍼센트의 이득을 볼 수 있는 완벽한 투자 상품.
나라는 존재의 가치는 과연 현재에 머물러 있는 걸까 아니면 미래로 향하는 걸까.
절대적 가치의 기준을 정하기 이전에, 그런 블루칩인 나를 가지고 이들은 무엇을 얻으려는 걸까?
뭔지는 모르겠지만, 내게 적대감을 가져야할 악신들마저 내게 박수를 쳐주고 그의 왕인 여화마저 내게 ‘호의'를 드러내고 있다.
이거, 내가 고개를 숙이고 들어가야 하는 상황이 아니다.
눈앞에 있는 세 명의 지배자.
밖에서는 에피소드가 끝나는 순간 이 지배들에게 칼을 겨눌 제 4의 진영이 존재하고. 이 안에서는 이 세 명이 서로를 견제하는 상황... 이거, 유바의 신성의 말 대로 나는 이미 판에 들어와 있었다.
그러면 여기서 내가 취해야할 최적의 포지션은 뭘까.
에피소드는 아직 끝나지도 않았고 솔직히, 아직 초반부에 머물러있다.
그러면.. 제4의 진영은 일단 옆으로 치워두고, 눈앞에 있는 저 셋을, 그러니까 서로 견제하는 저 셋을 경쟁 붙여 보는 건 어떨까?
“왜 대답을 망설여?”
아, 제가 보여준 게 없다고 말씀하셨습니까?”
나는, 조금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마저 말을 이었다.
“보여준 게 없다고 말하기에는 제가... 보여드린 게 너무 많은 거 같은데요.”
여화가 이번에는 손자의 재롱을 받아주는 할아버지의 표정을 짓는다.
무시했다.
“Episode가 중반부에 이르지도 않았는데 이미 격을 갖췄고, 소설 속에서나 등장할법한 저만의 신화까지 만들었고, 유토피아라는 국가까지 세웠습니다. 이래도. 제가 보여준 게 없다고요?”
“그러게, 내가 괜한 걸 물었네, 그런데 제국은... 사실 별거 아니잖아? 어차피 무너질 텐데.”
눈매가, 슬쩍 떨려온다.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싶어도 그럴 수 없게 만드는 말이다.
거기다 저 말을 내뱉은 게 다른 이도 아닌 여화.
유토피아의 건국이 별게 아니다? 어차피 무너질 거라고?
“왜 그렇게 생각하시죠?”
여화가 씩 웃는다.
“그러면 반대로 물어볼까? 너, 단순하게 ‘힘’ 하나로 모든 이종족들을 묶을 수 있다고 생각하니?”
대답하지 않았다.
여화와 나의 대화를, 모두가 집중한다.
천군은 물론 아룡까지.
“네가 대단한 인간이라는 건 인정해, 가능성이 너무나도 무궁무진하지. 그것도 인정할게. 이곳에 있는 수많은 ‘시련자’들 중에서 너만큼 초반부터 치고 올라왔던 시련자는 없었어. 나는 물론 천군이나 춤추기 좋아하는 ‘발락투스’까지도. 전부 인정할게. 이제 와서 부정 하는 건 더 웃기니까. 그런데... 그들 모두를 묶는다는 건 조금 다른 이야기... 표정이 왜 그래?”
젠장.
표정... 표정 관리를 해야 하는데.
하지 못했다.
시발.
지금 내가 뭘 들은 거지?
나에 대한 칭찬? 무궁무진한 가능성? 여화로부터의 인정?
그딴 게 아니다.
-이곳에 있는 수많은 시련자들 중에서 너만큼 초반부터 치고 올라왔던 시련자는 없었어.
이 시발.... 지금 내가 들은 게 맞아?
시련자라고?
“아... 내가 말실수를 했네. 그래도 여기까지 왔으니까 침식에 대한 정보는 주지 못해도. 그 정도의 정보까지는 줄게. 뭘 숨기겠어? 너를 비롯한 여기 있는 이들 모두가 시련자거든 나를 포함해서.”
사고가 정지한 느낌이다.
극 소수가 아니라 이들 모두가, 그러니까, 이곳에 있는 전부가... 시련자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