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 < 유토피아의 군주(2) >
가볍게 언급했었지만 유토피아 제국의 내부는 일단 정리가 된 상황이었다.
그게 가능했던 건 전적으로 양규의 덕이었는데. 알고보니 양규는 율리우스를 단순히 옆에서 보필만 한 게 아니었다.
양규는 수도 내에 존재하는 장군급의 기사들, 그러니까 브릴란트 급의 기사들을 모조리 통솔하고 있었으며, 중앙 행정청장에게도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이른바 판테온 제국 내에서 2인자의 자리에 앉아있던 인물이었다.
장군급 기사들은 그나마 전력이라고 부를 수 있는 이들이었는데.
적어도 5명 정도가 짝을 지으면 마스터 한명 정도는 상대 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러니까 원래 장군급이었던 브릴란트는 특출나다 못해 그냥 빛나는 보석 수준이었으며 그들을 통솔하는 양규는 이미 빛이 번쩍번쩍 나는 다이아몬드였다.
양규는 그런 9명의 장군을 모조리 동원했다.
이후의 일은 간단했다.
내 명령을 거부한 이들에게 적용된 죄목은 바로 반역죄.
제국법에 의하면 반역을 저지른 당사자는 구족을 멸하는 게 기본이었고, 그에 연관만 되어도 최소 5족은 멸한다.
귀족들을 죽이라는 내 명령이 떨어진 그 즉시 양규는 행정청 전체를 통솔해 각 행정관들에게 귀족들의 반역 사실을 전 대륙에 전파하라는 메시지를 보냈으며, 그건 통신구를 통해 순식간에 전국 각지로 퍼져갔다.
그리고 그건 결국 귀족들의 아래에 있던 기사와 병사들을 내부적으로 분열시키는 결과를 만들었으니.
그렇게 여론전으로 일시에 흔들어버리고 9명의 장군급 기사와 소수 정예로 이루어진 기사들이 흉흉한 기세로 쳐들어가니, 당연히 귀족들은 맥을 추릴 수가 없었다.
여기서 조금 놀라웠던게 하나 있었는데, 어제까지만 해도 대륙 내에 존재하는 워프 게이트는 총 10개였다.
그리고 내 명령에 불응한 귀족의 수는 20~30, 거리적으로보면 절대로 하루만에 해결 될 숫자가 아니지만, 양규는 그것을 가능하게 했다는 점이다.
게이트 설치에 능하다는 것은 공간 이동 마법에 도가 텄다는 뜻인데, 양규는 그런 마법사들을 수십명 이상씩 데리고 다니면서 소수 정예로 모조리 부수고 다녔던 것.
앞서 말했지만 빠른 여론전과 심리를 노린 신속한 계획이었다.
말하고 나니 더 신기하긴 하지만, 분명 그 모든 일은 하루 만에 벌어진 사실이다.
마치 전부터 이런 계획을 미리 짜놓은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신속하고 매우 깔끔했다.
무엇보다 마음에 든 건 양규의 손속에는 자비가 없었다는 점이다.
그날, 자존심을 세우던 수십 명의 귀족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죽었으며, 양규는 그 가족들마저 모조리 죽여 버렸다.
아예 씨를 말려버린 것.
이후 양규는 수도로 돌아왔고 아퀴나스가 백마탑의 마법사들을 포위만 하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아직까지도 망설이는 모습을 보여주는 아퀴나스의 면상에 주먹을 꽃은 양규는 내가 죽이라던 백마탑의 마법사들을 모조리 산채로 묻어버렸다.
말 그대로 생매장. 그의 걸음에는 거침이 없었고 그 행동에는 자비조차 없었다.
백마탑의 마법사들이면 적어도 율리우스한테 충성을 바치던 이들이지만 지금 시점에서는 그저 내부를 분열시키는 요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걸 양규는 확실하게 알고 있었던 것이다.
딱, 내게 필요했던 인물이다.
내 눈에 들고자했던 시도를 한 것이었다면 분명 양규는 성공했다.
나는 그런 양규에게 엘리자베스를 맡겼으며 그녀에게 괜찮은 자리를 하나 마련해주라고 잠시 자리를 피하게 만든 상황.
일단 현재까지는 그렇게 일이 처리되었다.
맞물린 톱니바퀴가 제대로 돌아갈지 아니면 중간에 삐걱이면서 내 신경을 건드릴지는 모르겠으나, 일단 지금까지는 제대로 돌아가고 있었다.
중요한건 내가 싸우려는 ‘무대’의 준비가 완성되느냐 완성되지 않느냐. 이 두 가지가 전부니까.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
눈앞에 모여 잇는 수백 명의 시련자들.
정확히 그들의 숫자는 577명이다.
의아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나는 딱 한 가지 생각을 했다.
생각보다 많은 이들이 살아있었구나 하는 생각.
조용히 그들을 쭉 훑었다.
솔직히 눈에 띄는 인물들이 없다.
무엇보다 고유 권능을 가진 시련자가 단 한명도 보이지 않는다.
생각보다 에릭이라는 놈을 일찍 찾아서 죽였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던 걸까. 그게 아니라면 개화하기도 전에 몬스터들에게 죽어버렸다는 이야기인데. 이런 게 진정한 나비 효과가 아니겠는가.
쯧.
가볍게 혀를 차고는 안내창을 다시 바라보았다.
안내창에 의하면 나를 제외하고 이 제국에 존재하는 모든 시련자들의 숫자는 총 580명 .
그중 눈에 띄는 이름이 정확히 세 개있었다.
주청윤, 랜버튼, 박유정.
그리고 이 자리에 없는 세 명도 딱 그 세 명이다.
뭘까.
대륙의 모든 행정관들에게 사도들은 모두 수도 황성으로 집합하라고 전파 시켰고 이렇게 에덴에 소속된 대부분의 시련자들이 이렇게 모였다.
즉, 이건 그들이 의도적으로 자리를 피했다는 건데...
박유정은 그렇다 쳐도 주청윤과 랜버튼은 뭘까.
나를 한 번도 보지 못한 놈들이 이 자리를 피해?
시련에서 단 한 번도 보지 못해서 조금, 거슬릴 정도다.
가볍게 혀를 차고는 본론으로 들어갔다.
“모두, 에피소드는 확인했겠지.”
“너희들도 알다시피 우리는 이방인이다. 내가 개국을 선언하며 말했듯이 나는 대륙의 주민들에게 무언가를 요구 할 생각이 없다. 그러니, 너희들도 주민들에게 무언가를 요구하지마라.”
앞쪽 단상에 서있는 나성진과 성미령, 그리고 내 옆에 서있는 한수아, 이렇게 세 명은 두말 할 것도 없이 에덴의 핵심 인물들이다. 아직 보여준 건 없지만... 그나마 내가 믿을만한 이들은 여기 세 명이 전부니까.
“너희들이 확실히 알아둬야 할 두 가지 사항을 알려주지, 딱 한번만 말할 테니 뼈에 새겨라. 첫째. 앞으로 벌어질 침식에서 시련자라 불리는 너희들은 그 방향이 어떻게 진행되건 무조건 참가한다. 선봉에 서건 후방에 서건 그건 너희 자유 의지에 맡긴다. 둘째. 싸우...”
“왜 저희가..”
한 시련자가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내 말을 도중에 끊는다.
무시하고 다시 말을 이었다.
“둘째, 싸우고 싶지 않은 이들은 지금이라도 말해라. ‘해방’ 시켜 줄 테니까”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내 말을 끊었던 시련자가 한쪽 손을 들어올리고, 그에 맞춰 20명 정도의 시련자가 손을 들어올린다.
총 21명.
싸우고 싶지 않다는 이들이, 지금 21명이다.
나는, 그게 어떤 것이건 한번 한 약속은 반드시 지킨다.
해방시켜 준다고 했으니 해방시켜줄 수밖에.
인벤토리에서 수리가 완료된 슈타이어를 꺼내들었다.
손을 들어 올렸던 시련자들이 설마 하는 표정을 짓고, 몇몇이 손을 내렸지만, 이미 얼굴은 다 기억한 상황.
망설임 없이 슈타이어를 겨눴고, 방아쇠를 당겼다.
탕탕-탕-!
손을 들었던 다섯 명의 머리가 그대로 터지고.
“..어..?”
의문 가득한 시련자들의 짤막한 말을 시작으로 슈타이어에서 시작된 굉음이 대전 전체를 휩쓸기 시작했다.
긴 시간은 아니었다.
고작해야 3초.
싸우기 싫다고 손을 들어올린 21명의 시련자가 죽는 시간은 고작해야 3초밖에 걸리지 않았다.
“이..미친..!”
머지않아 상황을 파악한 시련자들이 사방으로 도망치려한다.
권총을 겨누고 이번에는 내 본연의 기운을 끌어올렸다.
농도 짙은, 기氣라기 보다는 생명체 본연의 기운을 건드리는 제3의 힘.
누군가는 이것을 영혼의 힘이라 부르고, 누군가는 신의 힘이라 불렀으며, 시스템은 이것을 격格이라고 부른다.
쿠구궁-!!!
대전이 들썩이고, 도망치려던 수백 명의 시련자들이 그 자리에서 그대로 주저앉는다.
완급 조절부터 범위 조절까지, 완벽했다.
나는, 이 대전을 완전히 지배하고 있었다.
“내가 자선사업가처럼 보이나?”
"..끄으윽..’’
왕좌에 앉은 채로, 바닥에 엎드려 있는 이들을 내려다보았다.
힘을 가지나 갖지 않으나 결국 끊임없이 아랫놈들을 쥐어짜고, 자극하고, 몰아붙여야하는 이 상황이 우습기까지 하다.
“싸우기 싫다... 싸우고 싶지 않으면 어쩔 수 없지. 죽일 수밖에.”
“저번 침식에서 너희들이 뭘 할 수 있었지? 권주나, 창주, 그리고 궁주 같은 놈들 밑에서 침식 해결에 전혀 도움이 안 되는 고블린들이나 죽이던 너희들이, 내가 침식을 끝내는데 단 하나의 도움이라도 준 적이 있었나?”
당연한 사실이고, 그 당연한 사실들로 인해 시련자들 모두가 입을 다물었다.
“그럼에도 너희는 500만 코인이라는 보상을 얻었지. 이번 침식에서는 무려 1000만 코인이 걸려있는데... 싸우지 않겠다? 이건 그냥 무임승차하겠다 이건데... 내가 우습게 보인건가... 수도 없이 말..”
“하..하지만.. 커헉-”
무언가 말하려던 시련자의 머리에, 총알을 한발 박아 넣었다.
“나는 너희에 대해 자세히 모른다. 알고 싶지도 않고 알 생각도 없다. 지금 이 순간부터 내 말을 한번이라도 끊는 새끼는 무조건 죽인다. 자, 다시 묻지. 싸우기 싫어하는 시련자는 손을 들도록.”
미치지 않고서야 손을 들 리가 없었다.
기운을 거두고, 딱 한마디 내뱉었다.
“전부 기상.”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모든 시련자들이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다.
누군가 내 이런 성격을 보고 딱 한마디로 정의 한 적이 있었다.
적을 만드는 성격이라고.
그리고 배신을 부르는 성격이라고.
그런데 어쩌겠는가.
원래 이렇게 생겨먹은 것을.
그리고 그런 내가, 아무런 대비조차 하지 않았을 리 없다.
나는 그대로 한수아에게 눈짓했다.
기다렸다는 듯 신호를 받은 그녀가 나성진과 성미령을 대동하고 시련자들에게 다가간다.
그리고 이어지는 그녀의 행동은 별게 아니었다.
그냥 내가 시킨 행동.
바로 모든 시련자들에게 매혹을 거는 것.
손을 터치하고 눈을 마주치는 그 짧은 행동을 하나하나 이어간다.
처음에는 의아한 표정과 후일을 다짐하는듯한 표정을 짓던 시련자들의 시선이 결국 몽롱하게 풀린다.
잠깐 그들을 지켜보다 내 옆에 있던 소천에게 눈짓했다.
그가 기다렸다는 듯 준비되어있는 수많은 종이와 펜을 시련자들에게 하나씩 나눠주기 시작했다.
머지않아 모든 준비가 끝났다.
손을 들어 한쪽 손을 튕기며 한수아에게 신호를 보내자 그녀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고는 내성적인 성격이 무색하게 꽤나 밝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여러분!! 잘 들으세요!”
몽롱하게 변한 시련자들이 한수아를 바라본다.
그녀가, 말을 이었다.
“지구에 꼭 지켜야 하는 분들이 계시거나, 꼭 살아야하는 목적이 있으시다면 지금 주는 종이에 모두 적어주세요. 이름, 주소, 국적 하나도 빠짐없이요.”
꿀꺽-
누군가 침을 삼키는 목소리가, 내 귓가에 또렷이 들려온다.
그 누군가는 소천을 비롯한 성미령과 나성진이었다.
그들이 약속이나 한 것처럼 동시에 침을 삼킨 것.
한수아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시련자들이 코앞에 있는 펜으로 종이에 무언가를 신나게 써내려간다.
이건 일종의 담보였다.
그들이 배신하거나 내 말을 거역했을 때 그들의 숨통을 조일 목숨줄.
왕좌에 몸을 파묻었다.
3일.
내가 시킨 일들은 빠르게 진행되고 있었고, 이제 내가 간섭할 거리는 없었다.
이미 귀족들은 협조하고 있었으며, 그러지 않는 놈들은 이미 내가 보여준 본보기처럼 되기 싫어서라도 내게 협조할 테고 그러지 않는다면 나름의 실세가 된 양규가 가만히 있지 않을 테니까.
일단 최대한 짧은 시간 내에 제국 전체를 휘어잡긴 했지만... 앞서 말했듯 이건 분명 일시적인 현상일 뿐이다.
이런 상황이 얼마나 유지될지는 불확실하며, 당연히 계속 유지될 거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조용히 한손으로 턱을 짚었다.
제국의 현재 상황과 앞으로 제국의 상황이 어떻게 변할지는 이미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을 돌려봤고 현재까지는 모두가 예상했던 범주 안에 들어가 있다.
하지만 딱 하나. 이건 달랐다.
[당신은 신들의 도시, 아스가르드에 초청되셨습니다. 초청에 응하시겠습니까? Y/N]
신들의 도시.
3일안에, 이곳에 갔다 오는 게 가능할까?
솔직히 말하면 일단 너무 가고 싶다.
가서 직접 신들을 보고 싶은데... 그거 이전에 내가 들은 정보들이랑 너무 다르다.
침식을 비롯한 대부분의 일들은 예상했었지만, 이 초청장은 조금... 문제가 있다.
내가 알기로 이 신들의 도시로 초청받는 ‘조건’은, 격을 초월하는 이들에 한정 된다.
그러니까, 아니 이게 생각할수록 어이가 없는 건데, 나는 격을 갖춘 것일 뿐, 초월한 게 아니다.
수많은 지구의 시련자중에서 격을 초월한 것은 오직 형님밖에 없었으며, 형님만이 아스가르드라는 곳에 가봤다.
언젠가 말한 적이 있었는데, 형님이 내게 말해주지 않은 이야기중 하나가 바로 시련의 본질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리고 이 아스가르드가 그 본질에 대한 이야기의 연장선.
길게 이야기 할 것도 없다.
내가 이번에 아스가르드로 가면 이 시련의 본질에 대해서 알 수 있거나 본질에 대한 감을 확실하게 잡을 수 있다.
그럼에도 망설이는 이유는 하나다.
나는 아직 격을 초월하지 못했다는 거.
단순히 신격을 갖춘 존재인 내게 초청장이 날아온다고?
나도 모르는 진실에 조금씩 발걸음을 옮기게 되자 묘하게 미심쩍은 게 계속 눈에 들어온다.
내가 고민하는 게 너무 노골적이었던 걸까.
띠링!
[시작을 알린 아룡이 초청에 응하지 않을 거냐고 묻습니다.]
“...이거 하나만 말씀해주시죠. 침식이 진행되기 전까지 제가 아스가르드에서 빠져나올 수 있습니까?”
[시작을 알린 아룡이 충분하다고 말합니다.]
정말 그렇게만 된다면 이야기가 달라지긴 하지만 그다지 신뢰가 가지는 않는다.
그때였다.
[선善에서 군림하는 자가 시간은 충분하다고 재차 강조합니다.]
끝이 아니었다.
[선善에서 군림하는 자가 당신을 직접 보고 싶어 합니다.]
직접 보고 싶은 건 나도 마찬가지다.
“잠깐 고민 좀 해보겠습니다.”
[시작을 알린 아룡이 콧노래를 부릅니다.]
[악惡을 지배하는 자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당신을 바라봅니다.]
[선善에서 군림하는 자가 충분히 이해한다며 당신의 선택을 존중하겠다고 말합니다.]
내가 들었던 이야기들의 실체는 결국 타인에게 들었던 이야기들에 불과하다.
단편적인 이야기였기에 확실성이 부족했으며, 그 불확실성 하나만 보고 계속해서 침식을 겪기엔 불안 요소가 너무 많다. 여화랑은 척을 진다고 해도 나머지 두 신과는 가능하면 척을 지지 않아야하니까.
후우.
“...소천.”
혼잣말하는 나를 의아하게 바라보던 소천이 화들짝 놀라며 대답한다.
"예...예! 폐하."
"지그문트가 연구하고 개량했던 이그라실 알지?”
소천이 고개를 끄덕인다.
지그문트는 꽤나 유능한 ‘학자’였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 개 같은 짓거리를 했다 해도 그가 했던 일까지 부정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지그문트는 한수아가 명령했던 일들을 제대로 처리했었다.
이그라실을 분석했고, 그 주성분에 마법적 작용을 일으켜서 개량시키는 쪽으로 연구도 진행했는데, 놀랍게도 그 모든 일이 처리된 시간은 하루.
단 하루 만에 지그문트는 기적을 일으킨 것이다.
그 이후에 자살했고.
살아있었으면 조금 더 써먹을 구석이 있었을 텐데..
조금 아쉽기도 하다.
“인력이 되는대로 동원해서 이그라실을 대량 생산해. 만들어진 결과물은 수도 주변에 있는 모든 건물들에 때려 박아놓고.”
“대량 생산이라 하시면..”
“최대한 많이, 동원할 인력이 부족하면 주민들이라도 동원하던지.”
개국 선언할 때 주민들에게 싸우라고 강요하지 않는다고는 했지만 그건 말 그대로 무기를 들고 싸우는 자유 의지를 말하는 것이었다.
이건 다른 문제다.
재료를 구하고 그 재료로 과일 몇 개 만드는 것조차 하기 싫다? 그런 버러지는 그냥 살아있을 가치가 없다.
그런 놈들은 내가 방금 죽인 시련자들 만큼이나 쓰레기 같은 마인드를 가지고 있는 놈들이니까.
“...그러면 수도의 주민들은 어떻게 할까요?”
침식이 진행되는 방식은 간단하다.
각자의 세상에서 생겨나는 침식 게이트의 기준은 상대 쪽의 ‘힘’있는 자가 있는 방향이다.
그리고 높은 확률로 이번 침식도 내가있는 이 수도의 광장에 생겨나겠지.
그래서 수도 곳곳에 함정 마법진을 설치하라 시켰고 궁극적으로는 이 수도 전체를 감싸는 결계 마법진의 제작도 요구했다.
아퀴나스의 머리에서 김이 나고 있을게 뻔 하지만 그래도 명색이 대마법사라 불리는 놈인데, 그것도 못하면 나가 죽어야지.
“아직까지도 다른 지역으로 이주하지 않은 이들은 최대한 빠르게 다른 지역으로 이주시켜. 어차피 이곳 수도는 전쟁터가 될 테니까. 그리고 양규랑 상의해서 이그라실만 전문적으로 만드는 공장을 만들고. 그곳에 능력 있는 놈도 파견시켜놔.”
“그리하겠습니다.”
“병사들 모집하는 것도 잊지 말고.”
“각 영지들로 이미 전파해놨으니, 곧 소식이 올 겁니다. 폐하.”
힐끗 고개를 돌려 한수아를 바라보았다.
성녀가 된 한수아는 이미 신전을 지배하고 있었다.
신전을 담당하는 추기경들에게 주민들을 무장시켜서 대기하라는 명령만 전파하면 아래로 쭉쭉 뻗어나가 변방에 있는 신관에게까지 한수아의 명령이 전파되고, 광신도들이 두 팔 벌린 채로 미친 듯이 달려 나올 것이다.
확실히 유용한 병력이긴 하지만... 그래도 병사와 주민은 구분해야겠지.
“추기경들은?”
“황궁 바깥에서 대기 중입니다. 그.. 성녀님의 얼굴을 한번만 더 보고 싶다면서...”
밖에서 대기 중인 추기경들이라..
이미 결정은 끝났다.
아스가르드로 간다.
천천히 심호흡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한수아.”
“네!”
“잠깐 자리 비울 테니까. 사고치지 말고 있어.”
“..네.."
시무룩해하는 그녀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끝나고 함께 하자고 했었지?”
그녀의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는 게, 되게 신기하다.
그녀의 볼을 살짝 터치했다.
“네 말대로 하자. 모든 일이 끝나면, 내가 하려는 모든 게 끝나면, 그때도 네가 나랑 함께하고 싶다고 생각한다면, 그때 가서 진지하게 생각해보자.”
한수아가, 정말로 밝아진 얼굴로 나를 바라본다.
세상을 구원할 사람을 바라본다면, 아마 저렇지 않을까.
“그러니까. 그때까지는 앞만 보고 걷자. 오케이?”
“네!”
“그리고 추기경들한테 말해놔. 모든 성기사들은 3일 안으로 수도로 진입해서 대기하라고.”
“네! 걱정 마세요!”
수도 없이 언급했지만 나는 신들의 말을 전부 믿지는 않는다.
“소천."
“예 폐하.”
“양규한테 말해놔. 제국내의 모든 장군급 기사들과 싸우겠다고 마음먹은 이들은 전부 수도로 진입시키라고.”
소천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려던 그때, 손을 들어 올려 그의 말을 막았다.
“이 말을 깜빡 할 뻔 했네. 만약 내가 제 시간에 돌아오지 못할 경우에는 최대한 시간을 끌거나 아니면... 그냥 전부 터트려버리라고 전해. 그렇게 말하면 알거다.”
“...명을 받듭니다. 폐하!”
고개를 돌려 조금 시무룩해하는 성미령과, 눈을 껌뻑이고 있는 금붕어 같은 나성진을 바라보았다.
아직까지는 그렇게 믿음직스럽지는 않지만... 일단 조금만 더 지켜보자.
나는 그대로 손을 들어 올려 초청에 응하시겠습니까 라는 창에 Y버튼을 터치했다.
지구를 멸망시킨 장본인, 여화.
그리고 정확하게는 모르겠지만 ‘대의'를 추구하는 선신들의 왕. 내게 끊임없이 호감을 보여주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내 편도 아닌 아룡.
그들의 실체를, 이제 보게 된다.
조금 두근거리는 마음을 가슴속에 파묻고, 나는 아스가르드로 이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