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 이게 내 방식이다(3) >
그 이후에 벌어진 일은 별게 아니었다.
일단, 나는 한수아에게 이 대신전 안에 있는 성기사들에게 매혹을 걸라고 지시했다.
그것도 지속시키는 게 아니라 잠깐 걸었다 푸는 식의 약간 얌체 같은 방식으로.
이게 정말로 웃긴 건데.
언젠가 한수아가 지그문트에게 매혹을 걸었을 때. 지그문트는 대성통곡을 하며 한수아를 여신으로 떠받들어 모셨었다.
심지어 지그문트는 신관도 뭣도 아닌 그냥 마법사였는데도 그 정도의 반응이라면 진짜 신을 믿는 이들이 한수아의 매혹에 걸린다면 어떨까.
적어도 지그문트의 그것 이상일터.
그런데 이거, 직접 눈앞에서 펼쳐지는 모습을 보니 내 생각보다 효과가 너무 뛰어나다.
정령 소환술을 보았을 때랑 비슷했다.
이상하게 얘만 보면 항상 놀라네.
일단 한수아가 성기사들에게 매혹을 걸면 그들이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대성통곡을 했다.
진짜 성녀가 강림하셨도다 어쩌고저쩌고.
그대로 매혹을 풀면 성기사는 멍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엘리자베스와 한수아를 번갈아 쳐다보고는 망설임 없이 한수아의 곁에 와서 무릎을 꿇었다.
방금 한 성기사가 했던 말이 뇌리에 남는다.
그동안 진짜 성녀를 알아보지 못한 두 눈을 뽑아버리고 싶지만 이제라도 진짜 성녀를 알아보게 되었으니 용서를 해달라며 앞으로 쭉 모시겠다는 웃기지도 않는 충성서약.
매혹에 걸린 그 순간 성기사가 무엇을 느껴지는 모르겠으나 아마 그가 느낀 감정은 무조건 지켜야한다는 사명감과 흡사한 게 확실하다.
즉,이런 광신도들에게는 한순간의 확실한 임팩트, 그것만 보여주면 된다는 이야기.
“...눈으로 보고 있는데도 믿을 수가 없네요.”
율리우스의 동생, 엘리자베스.
그녀가 짤막한 감탄사를 토해냈다.
그녀에게 듣기로 대륙에 존재하는 신전은 총 330개, 즉 330명의 추기경이 존재하며 모든 신관을 합치면 그 숫자는 무려 4만, 거기에 일반 병사보다 월등한 성기사는 무려 40만에, 뭣도 모르고 신이라는 맹목적인 존재를 믿는 이들만 수천만.
당연히 그들 모두에게 매혹을 걸 생각은 없었다.
내가 노리는 건 딱 330명의 추기경. 그놈들이 전부다.
방금 전까지의 성기사들은 그냥 실험용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모든 추기경들을 매혹에 빠지게 만든 뒤, 내가 만들 제국에 통합시키는 것. 즉 신권神權과 왕권王權의 합치.
그게 진정한 중앙 집권의 시작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이건 약간 우연의 일치라고 할 만했는데, 메디치가 매우 중요하게 전파할 사항이라도 있었던 건지 그 330명의 추기경중 무려 120명의 추기경이 지금 이 대신전 안에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모조리 매혹에 걸리는 중이었다.
한정되긴 하지만 한수아의 능력은 광신도들에게 있어서는 ‘데우스 엑스 마키나’와 같은 효능을 발휘하고 있었다.
“...저는 이제, 어떻게 되는 거죠?”
일련의 상황을 지켜보던 엘리자베스가 약간 긴장한 표정으로 물었고, 나는 말없이 인벤토리에서 아이템을 꺼내 그녀에게 건넸다.
바로 율리우스가 녹음을 했다던 그 아이템.
“이게.. 뭔가요?”
“율리우스가 너한테 남기는 메시지. 듣고 판단해.”
한명씩 매혹에 걸때마다 칭찬해달라는 듯 나를 바라보는 한수아, 나는 그런 그녀를 계속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런 상황이, 계속 유지될 거라고 생각했었다.
치직-칙-
엘리자베스가 옆에서 아이템의 재생 부분을 터치하는 순간까지는.
[...엘리야. 일단 미안하다는 말부터 해야겠구나.]
스피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그리고 눈앞에 뜬 홀로그램 창이... 내 생각과는 조금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었다.
[아마 네가 이 메시지를 보고 있다면 나는 죽었을 확률이 높아.]
그냥 다른 게 아니라 완전히 다르다.
영상 속에서 율리우스는 내가 그를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의 그 테이블에 앉아있었다.
술은 따지 않은 채로.
그러니까 나를 만나기 전의 모습이다.
율리우스는 내게 말한 것과는 별개로 이미 또 다른 ‘유언’을 남기고 있었던 것.
엘리자베스가 눈을 크게 뜨고 나를 바라본다.
...그렇게 보지마라. 나도 모르니까.
손을 뻗어 메시지를 중지시킬까 고민하던 그때.
[그 남자가 하려는 일이 정확히 어떤 일인지는 몰라. 하지만 그는 이 대륙을 구원해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다. 그러니까 그를 원망하지 마, 나는 내 의지로 죽음을 맞이한 거고, 그 죽음에는 한 점의 후회도 없으니까.]
그대로 손을 멈췄다.
멀리 있던 한수아도 무언가 이상한 걸 눈치 챘는지 내게 다가온다.
[다만 혼자 남게 될 네가, 너무 걱정이 되네.]
"..."
[너를 메디치에게 보냈던 그 순간을, 내가 얼마나 후회했는지 몰라. 내게 힘이 있었더라면 그런 선택을 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겠지. 오빠로서 면목이 없지만 황제로서는 최선의 판단을 했다고 변명 아닌 변명을... 하아.]
율리우스가, 약간 붉어진 눈시울로 빈 허공을 응시했다.
그런데 구도가 되게 묘하다.
그것을 바라보고 있는 엘리자베스와 눈이 마주치는 그런 구도였으니까.
[...변명은 하지 않으마. 그리고 이게 본론인데. 우리 아버지께서 사용하시던 ‘군자검’, 알지?]
슬쩍, 눈매가 꿈틀하고 떨려온다.
율리우스와 엘리자베스의 아버지는 레이놀즈 판테온.
판테온 제국의 선왕이자, 건국왕이다.
그리고 대전 문에 양각되어있는 조각의 주인공.
그런데, 그가 사용하던 검이라고?
[사도들한테 이야기를 들어보니까. 우리가 사용하는 신물들을 ‘아이템’이라고 부르더라고. 등급이 매겨지는 기준에는 여러가지가 있는 것 같은데, 그중 한 가지는 확실하게 알겠더라. 실제 했던 역사가 담겨져 있다면 그건 꽤 대단한 아이템으로 ‘판정' 되는 거. 그러면 우리 아버지가 사용하시던 군자검은, 대체 어느 정도의 등급을 가진 무기일까?]
무언가, 대박의 느낌이 물씬 풍기기 시작했다.
[내 침실의 침대 아래에 군자검을 숨겨놨어, 그 남자는 대기실이라는 휴식 공간이 있으니 아마 높은 확률로 내 침실에 들어가지 않을 거다. 들어가도 찾지 못할 테고. 네가 그 검을 찾아서 그 남자한테 건네줘. 그리고 너의 안전을 약속받아. 그는 적어도 무언가를 주는 사람에게 검을 겨누는 사람은 아닌 것 같으니까.]
뒤통수를 맞았다기보다는, 그냥... 웃음이 터져 나온다.
[아... 지금 밖에서 오고 있네. 여기까지 해야겠다. 엘리야. 미안하다. 행복해라.]
그 이후에 벌어진 일은 내가 대전 문을 열고 들어가고, 그의 앞에 앉아서 그와 대화하고, 그리고 율리우스의 심장을 찌르고, 그의 시체를 흡수하는 부분이었다.
그렇게 영상이 끝났다.
엘리자베스의 눈가에서, 눈물 한 방울이 흘러내린다.
“한수아.”
조용히 옆에 있던 한수아의 이름을 불렀다.
그녀가 대답하려던 그 순간.
“네놈은 뭐기에 우리 여신님에게 말을 놓는 것이야!”
한 추기경이 핏대 솟은 면상으로 대화를 끊는다.
뭔가... 데자뷰가 느껴지네.
내가 뭐냐니... 그냥... 기둥서방이라고 하자.
한수아에게 힐끗 눈짓하니 그녀가 추기경에게 다가가 귓가에 무언가를 속삭였다.
뭐라고 하는지 궁금해서 나도 모르게 귀를 기울였는데.
‘제가 모시는 분이에요. 앞으로 우리 이도님한테 말 놓으시면 사지를 찢어버릴 거예요.’
안 듣는 게 나을 뻔했다.
그 말을 듣자마자 추기경이 그 자리에서 대성통곡을 한다.
죄송하다고, 자신이 저지른 실수를 제발 용서해달라고.
그러면서 필사적으로 기도를 하는 그 모습은 조금... 안타까워 보일 정도 였다.
대충 신경 끄고 한수아에게 이리 오라는 듯 손짓했다.
남은 추기경들은 이미 황성으로 모이라고 언질을 줬으니 이곳에서의 볼일은 끝났다.
일단 그 군자검을 챙기러 가보자.
나는 그 길로 두 여인을 데리고 황성으로 이동했고 망설임없이 황성 거의 꼭대기에 위치한 율리우스의 침실로 들어갔다. 화려했던 복도와는 다르게 꽤나 조촐해 보이는 황제의 침실.
평소 율리우스가 어떤 성품을 지닌 지를 보여주는 듯 했다.
나는 조용히 기운을 퍼트렸다.
퍼져나간 내 기운이 침실 전체를 뒤덮었다.
..음..
유물급이나 신화급 아이템이라면 묘한 이질감 같은 게 느껴져야 하는데 이상하게도 아무런 반응이 없다.
영상에 의하면 율리우스는 내가 이 방안에 들어왔어도 찾지 못할 거라고 확신하는 듯했는데.
이거... 기운을 숨겨주는 그런 아이템이 있는 걸까.
일단 기운을 거두고는 율리우스의 침대를 들춰냈다.
그곳에 있었다
가로 70cm에, 세로 2m에 달하는 사각형 모양의 상자가.
손을 뻗어 상자를 열자, 화악하며 꽤나 큰 빛무리가 터져 나온다.
속으로 직감했다.
이거, 신화 아이템이라고.
그것도 중급에 속하는 신화가 담긴 아이템이 분명하다.
그렇게 잠시간의 시간이 흐르자 빛이 사그라진다.
그제야 상자 안의 내용물이 자세하게 보인다.
꽤나 긴 모양의 장검. 손잡이는 무슨 가죽 같은 걸로 둘둘 말려져있었으며 날은 보이지 않았다.
그나마 눈에 보이는 검집이, 정말이지 아름답다 못해 휘황찬란하다.
일단 이 아이템의 정체를 모르고 보았다면 거의 장식용 예물처럼 보였으리라.
검집에 양각 되어 있는 이상한 글자가 묘하게 내 시선을 잡아 끈다.
언젠가 본 적 있는 것 같은데.
음.
그대로 검집을 끼내들고, 검 날을 살펴보려던 그때,
왠 종이 한 장이 나풀거리며 바닥에 떨어진다.
종이를 잡아채고는 펼쳐보자, 맨 처음 ‘엘리자베스에게’ 라는 문자가 눈에 들어왔다.
율리우스의 편지였던 걸까.
혹시 몰라 조용히 읽어 내려갔다.
내용은 별게 아니었다.
‘나’가 여태껏 해왔던 일들을 율리우스가 자기 식으로 해석한 내용들과 동생인 엘리자베스를 향한 무한한 걱정.
가족애라..
조금 감동받을 정도다.
그리고 그 밑에 적혀있었다.
‘만약 이도님이 이 쪽지를 발견하시게 되거든, 하나만 기억해주십시오. 이 군자검은 제가 이도님께 건네준 게 아니라 제 동생인 엘리자베스가 이도님에게 건네준 겁니다. 그렇게, 생각해도 되겠습니까?’
질문으로 끝나는 그 추신이, 자연스럽게 웃음을 짓게 만들었다.
기운을 퍼트려서 율리우스의 방안을 뒤졌음에도 전혀 파악하지 못했다.
이 검이 아니라 상자 자체가 무슨 마법적인 작용이 가해져있는 상태였을 터.
심지어 그 상자는 내용물을 확인하는 그 즉시 빛이 되어 완전히 사라졌다.
확실히 내가 율리우스의 방을 전부 뒤집어 엎지 않는 이상 이걸 발견할 확률은 매우 적었다.
정말이지, 생각할수록 여러모로 아쉬운 남자다.
나는 그 쪽지를 엘리자베스에게 건네주었고, 쪽지를 받아든 엘리자베스가 쪽지를 읽기 전 내게 말했다.
“이거 맞아요. 아버지께서 사용하시던 군자검. 분명해요.”
굳이 그녀가 확인시켜줄 필요는 없었다.
나는 정보창을 열람하고 있었으니까.
[군자검君子劍] [신화神話]
-?
-?
-?
모두에게 알려라. 이제 대륙에 흩뿌려질 피는 없을 거라고. - 레이놀즈 판테온 검 손잡이를 잡고, 검을 뽑아냈다.
스릉-!
검을 뽑아내자마자,
“와아...”
한수아가 감탄사를 토해냈다.
날 전체가 신의 금속인 ‘타르켄’으로 만들어져 있었으며 시간이 꽤나 흐른게 분명하지만 날은 여전히 날카로웠다. 당장이라도 휘두르면 그 무엇이든 잘라 낼 것 같은 무기.
이거, 보통 명검이 아니다.
그리고 나조차도 확실하게 감지해내지 못하는 묘한 기운까지 느껴진다.
아마 무기에 담긴 레이놀즈의 신격이 아닐까.
그때였다.
띠링!
[황제의 길을 걸었던 전사가 당신은 절대로 그 검의 주인이 되지 못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눈매가 찌푸려진다.
율리우스를 죽였을 때 눈을 질끈 감았다던 그 신.
무언가 이상하다고 느끼긴 했었는데, 저 신이 바로 레이놀즈였나 보다.
그런데 저 말이 거슬린다.
저걸 내식대로 해석하자면 검 그 자체로서 사용하는 걸 막지는 않겠지만 그 안에 담긴 자신의 신화와 그 아이템만의 고유 효과는 누리지 못하게 하겠다는.. 일종의 협박이다.
격을 갖추지 못한 현재의 내게는 조금이지만 확실히, 먹혔다.
말없이 검을 들어 올리자 이번에는 빛무리를 받아 검신이 번쩍인다.
[황제의 길을 걸었던 전사가 괴성을 토해냅니다.]
이상하다.
왜 웃음이 터져 나오는 걸까.
“선왕 레이놀즈라... 그는 내가 이 검의 주인이 되는걸 원치 않나본데?”
의아한 표정의 엘리자베스.
그리고 도끼눈을 뜨고 허공을 응시하고 있는 한수아.
“생각해보면 웃기지. 이 침식을 일으키는 건 분명 신들인데 그 신들 중 한명이 율리우스의 아버지라... 성향이 어떤지는 모르겠는데, 판테온이라는 국가를 건설한 건국왕이,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나보다 더 잘 알고 있을 그 건국왕이 나를 도와주려고 하지를 않네? 이건 어떻게 보면 대륙의 멸망을 부추긴다고 볼 수도 있는 거 아닌가? 뭘까. 이 모순의 극치는.”
율리우스의 죽음은 어차피 내가 죽이지 않았더라도 다른 이들에게 죽었을 운명이고, 대륙은 완전히 난장판이 될 게 뻔한 상황을, 위에서 지켜보는 그가 모른다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
그런데 이건 뭔 개짓거리지?
이건 정말로 궁금했다.
엘리자베스를 바라보며 물었다.
“혹시, 너희 아버지.”
“"네?”
“말년에 치매라도 걸렸었냐?”
난데없는 패드립에 엘리자베스가 눈을 크게 뜨고.
띠링!
[황제의 길을 걸었던 전사가 당신을 향해 쌍욕을 터트립니다.]
아니, 내가 웬만하면 선은 지키는데, 이건 아니잖아.
“틀린 말도 아닌 것 같은데, 침식을 막으려는 나를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훼방을 놓으려고 한다고? 이건 뭐, 이쪽 세계의 신종 병신이냐? 한수아. 네가 보기엔 어때?”
“제가 봐도 조금 모자라신 분 같아요.”
죽이 척척 맞는다.
그때, 엘리자베스가 믿지 못하겠다는 듯 큰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제가 이해가 안가서 그러는데, 저희 아버지가.. 대륙을 멸망시키려 한다고요?”
무언가 말하려던 그때.
[황제의 길을 걸었던 전사가 그 이상 말하지 말라고 합니다.]
엘리자베스가 다급히 내 팔을 잡아채려던 그때, 한수아가 그녀의 팔을 중간에서 쳐냈다.
“우리 이도님한테 함부로 손대시면 안돼요.”
엘리자베스가 어찌할 줄 모른다는 표정으로 그 자리에서 무너진다.
[황제의 길을 걸었던 전사가 침울한 눈으로 엘리자베스 폰 판테온을 바라봅니다.]
“..제발.. 말씀해주세요. 그게... 사실인가요?”
이번에도 무언가 말하려던 그때.
[황제의 길을 걸었던 전사가, 제발 그 이상 말하지 말아달라고 합니다.]
말하지 말아 달라는 것과 그게 아니라고 부정하는 것은, 뉘앙스뿐만이 아니라 단어 선택 자체가 다르다.
재차 강조하는 저 메시지로 나는 확신했다.
레이놀즈는 침식을 일으키는 세 진영중 하나에 속해있다는 것을.
농담이 아니라, 짜증으로 머리에 김이 날 정도다.
유바의 신성은 자신의 대륙이 멸망하는 그 상황에서 내게 정보를 주며 종족의 멸실을 막았다.
그 대가는 스스로의 소멸.
그런데 이놈은 뭐란 말인가.
판테온 제국을 만들고, 심지어 인간으로서 종의 격을 초월해 신이 된 놈이, 침식을 막는 쪽이 아니라 침식을 일으키는 쪽에 가담을 한다?
이건 단순히 자기 아들인 율리우스를 내가 죽였기에 내뱉는 적대감 문제가 아니다.
이해가, 가지 않는다.
내가 알기로 레이놀즈는 전생에서 그 어떤 시련자들에게도 무언가를 후원해주지 않았으며 자기 신화가 담긴 아이템은 물론, 그냥 아예 간섭조차 하지 않았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황제의 길을 걸었다는 저 전사의 진명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전생에서 발바라 대륙을 구하는데 가장 큰 도움을 준건 건국왕인 레이놀즈가 아닌 #39이후로 넘어갈 타이탄 대륙에서 탄생한 신이었던 혼란을 초래하는 거인, ’크로노스'였다.
그는 필살의 건틀렛의 신화와 효과, 그 모든 것을 형님에게 '허락'해주었으니까.
이건, 생각하면 할수록 욕밖에 안 나오는 상황이다.
즉, 전생에서 레이놀즈는 발바라 대륙에 절망이 닥쳐오는 것을 방관했다.
아니, 율리우스와 엘리자베스의 아버지이자 건국왕이라는 놈이 대륙의 멸망을 바라고 있다고?
그러면서 자식이 그 ‘진실’을 알게 되는 걸 꺼려한다?
이거 완전히, 미친 새끼 아니야?
"...레이놀즈, 네가 왜 침식을 일으키는 쪽에 가담하고 있는지는 모른다. 그런데 내가 이 군자검을 사용해야겠거든. 그러니까 이 안에 담긴 모든 효과를 해방시켜.”
이런 새끼한테는 존댓말도 아깝다.
하지만 여전히 메시지창은 갱신이 되지 않았고, 엘리자베스는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화가, 치밀어 오른다.
신화급의 검.
내가 사용하던 란지에와는 비교조차 되지 않는 압도적인 성능을 가진 무기가 확실하며, 또한 앞으로 내가 하려는 일에는 이런 신화급 아이템이 무조건 필요하다.
이렇게 종잡을 수 없는 개새끼가 썼던 검일지라도, 내게는 필요하다는 말이다.
그게 너무 좇같다
치밀어 오르던 화가, 이제는 농도 짙은 살기로 변환된다.
쿠구구궁-!!
율리우스의 방 전체가, 진동하듯 떨려오기 시작했다.
“하나만 해라!!! 레이놀즈 판테온!! 대륙을 멸망시키던지!! 아니면 대륙을 구원하고 핏줄을 살리던지!! 선택해!!”
엘리자베스가 멀리 날아가 벽에 쳐 박히고, 한수아가 바닥을 짚은 채로 필사적으로 버틴다.
굉음과, 돌풍이 몰아치던 그때.
띠링!
[군자검君子劍의 신화 획득 자격을 획득하셨습니다.]
기운을 천천히 가라앉혔다.
능력을 개방 시켜 준 게 아니라 단순히 자격을 준다고?
이건 말 그대로 '기회'만 준다는 이야기.
도리어 그 행동으로 앞서 확신했던 그 사실들이 더욱 더 뚜렷해졌다.
레이놀즈 이 새끼는, 대륙을 멸망시키려고 한다.
[황제의 길을 걸었던 전사가 조용히 자리를 피합니다.]
레이놀즈 판테온.
내 머릿속에 그의 정보가 저장되었다.
병신이자, 모순을 넘어 괴상한 짓을 하고 있는 존재. 즉 쓰레기 새끼.
엘리자베스가 엉망이 된 책상을 짚고 일어서고, 한수아는 그에 지지 않겠다는 듯 오뚝이처럼 일어서서 내게 다가왔다.
작은 한숨을 내뱉고는 군자검을 허리춤에 채웠다.
시험 자격을 얻었다는 것만으로 만족하자.
아니, 오히려 바라던 바다.
란지에를 인벤토리에 집어넣으려다 검집 채로 한수아에게 건넸다.
그녀가 란지에를 받아드는 모습을 지켜보다, 잠깐 고개를 돌려 엘리자베스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확신하고 있는 표정이었다.
그의 아버지, 판테온 제국을 세웠던 선왕 레이놀즈 판테온은 신이 되었고 이 대륙에 침식이라는 기이한 일을 가져온 존재들과 매우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을.
엘리자베스의 흔들리던 눈동자에, 계속해서 눈물이 맺힌다.
그 눈물이 바닥에 뚝뚝 떨어지는 모습을 보면서, 한번 더 한숨을 터트리고 말았다.
율리우스는 이 진실을 알지 못하고 죽었으니,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하지만 그 동생은 그 진실을 알게 되었다.
아무래도 율리우스가 그녀에게 남긴 행복하라는 유언은 생각보다 쉽게 이루어질 것 같지는 않다.
에휴...
회귀를 해도, 개판은 여전히 개판이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