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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를 한다는 건-53화 (53/131)

54화.  < 이 자리가, 탐나십니까?(2) >

카툰 산맥에 도착한 나는, 슬며시 기운을 퍼트렸다.

울창한 수풀과 군데군데 존재하는 늪지대까지.

아무리 봐도 이건 튜토리얼 #1 때 보았던 정글의 배경과 매우 흡사하다.

조용히 기척이 느껴지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다지 먼 거리는 아니었고, 그렇게 5분가량을 걸었을 때 서너 마리의 고블린과 눈이 마주쳤다.

도끼로 나무를 찍고 있다가 그대로 멈칫한 그들의 모습이, 묘하게 패잔병과 비슷해 보인다.

쩝.

그 멈칫한 고블린들이, 나를 뭐라고 불러야할지, 헷갈려하는 표정으로 우물쭈물 대는데.

조용히 걸어가 그들의 머리를 가볍게 토닥여주고는 그들을 스쳐지나갔다.

그런 나를, 서너 마리의 고블린들이 자신들의 머리를 매만지며 지켜보다 결국 도끼를 내려놓고 내 뒤를 따라온다.

다시 걸음을 옮겼다.

머지않아 눈앞에 보인다.

고대 유적이라고 했었나.

무너져 내린 석벽, 정체불명의 양식으로 만들어진 건물 하나하나에는 이미 풍화의 흔적이 극심해보였으며, 한쪽 구석에는 나무로 만들어진 작은 통나무집이 여러 개 보인다.

통나무집의 상태가, 생각보다 괜찮다.

비교적 최근에 지어진 집으로 보아, 아마 이 고블린들은 '협동해서 하루 만에 나름의 보금자리를 만들었나보다. 그리고 침울한 표정을 지은채로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고 있는 고블린들의 모습. 나는 그들의 모습에서 과거, 지구로 이주했던 이들의 모습을 보았다.

삶의 의욕을 잃고 시키는 일만 처리했던 이들,

고블린들이 나를 발견하고, 그 자리에서 정지하고, 무슨 일인가 하고 이쪽에 관심을 기울인 이들이 똑같이 하던 행동 그대로 정지하고 나를 바라보는 그 일련의 과정들이 계속해서 이어진다.

그들의 눈을 바라보았다.

자신들의 처지를 받아들이고, 나름대로 살아남고자하는 그런 모습 같다.

중요한건 그 살아남고자 하는 모습에서 전의라던가, 희망 같은 게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거.

문득 떠오른다.

미국의 심리학자가 죽음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감정 변화를 5단계로 구분했었는데, 눈앞의 고블린들은 그 마지막 단계인 ‘수용’에 가까운 태도를 보여주고 있었다.

이건 아니다.

내가 아무리 막나간다 해도 반드시 지키는 원칙이 하나 있다.

누군가와 한번 한 약속은 그게 어떤 약속이건 간에 반드시 지키는 것.

"...당신이군요."

문득 들려온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살짝 놀랐다.

나한테 말을 걸었던 고블린은 쿤린과 비슷한 피부색을 가지고, 키는 거의 185cm에 달하는 나와 맞먹는 신체를 가지고 있었으니까.

자세히 보니 생긴 것도 쿤린과 매우 닮아보인다.

혹시..

“너, 쿤린의 아들이냐?”

“예. 가장 빨리 달리는 눈의 아들이자, 현재 ‘임시대표’를 맡고 있는 ‘네스레자’입니다.”

네스레자..

이름이 되게 특이하네.

“나를, 원망하나?”

뜬금없는 질문이었지만 네스레자는 망설임 없이, 그리고 한 치의 고민도 없이 고개를 저었다.

“침식이라는 그 기이한 일을 일으킨 것은 신이라는 존재이며 당신과 아버지, 그리고 우리 종족은 그 피해자였을 뿐, 저는 물론 고블린들은 당신을 원망하지 않습니다.”

그 말을 들으면서 속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쿤린은 분명 정의를 가지고 신념을 가진 ‘남자’였다.

그의 아들인 네스레자.

지닌바 힘은 아직 미약해보이지만... 싹수가 보인다.

“한 가지만 확실히 하자. 너희는 노예가 아니다.”

“내가 이 세상에 있는 한, 고블린이라는 종족은 절대로 노예로 취급받지 않게 해주지. 다만 그게 얼마가 될지는 몰라. 그러니까 너희는 너희만의 '무기’를 갈고닦아라.”

“무기라 하시면...”

“모든 세상에는 물류가 가장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지. 상권 쪽에 능통한 고블린이 있으면 상회를 열어보는 것도 괜찮겠고, 그것도 아니면 너희들만의 지식이라던지, 아니면 나는 모르는 너희들만의 장기로 너희들의 가치를 스스로 증명해봐. 이 대륙에서 확고하게 고블린이라는 종족의 기틀을 마련하라고.”

길게 이어지는 내 말을 경청하던 네스레자가 고개를 끄덕인다.

고블린들이 어떤 재주가 있는지 나는 모른다.

하지만 무엇이 필요한지는 안다.

“일단 이쪽 세상의 돈이 필요 할 테고,”

잠깐 말을 멈추고는 주변을 한 번 더 둘러보았다.

환경 자체가, 너무 열악하다.

“식량은 더 필요 할 거 같고, 주거지도 필요하겠네. 오늘 중으로 전부 보내주지.”

“..아…"

그가 무언가 말하려던 때, 나는 조용히 손을 들어 내 목에 있던 목걸이를 손가락으로 툭 쳤다.

네스레자의 눈시울이 살짝 붉어진다.

“이게 황제의 증표라지? 나를 어떻게 부를지 몰라 하는 거 같은데, 앞으로 나를 부를 때는 황제라고 불러라.” 그가, 결국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는다.

주변 고블린들이 네스레자를 따라하는 모습을 지켜보다, 마저 말을 이었다.

“지금부터 이 지역은 고블린들의 왕국이며, 네스레자, 너를 왕으로 임명하고 너의 이름을 따, 이 왕국에 네스레자라는 이름을 내려주지.”

알림음은 떠오르지 않았다.

사실, 당연한 거다.

나는 아직 황제도 뭣도 아닌 그냥, 강한 시련자일뿐이니까.

그 감투를 써야 모든 게 정리된다.

그리고 테슬란 건틀렛의 옵션은 여전히 개방되지 않았다.

고블린들과 대화하는 건 조건이 아니었나보다.

여하튼.

“일단 그렇게만 알고 있어. 따로 몇 가지 지시할게 있긴 하지만... 그건 ‘인간 쪽’의 일이 정리 되는대로 따로 불러서 이야기해주지.”

네스레자는 물론, 고블린들이 모조리 고개를 숙인다.

그리고, 외쳤다.

“감사합니다! 황제시여!”

인간들도 나를, 황제라고 부르지 않는데 고블린들한테 먼저 황제라 불린다니.

이 얼마나 아이러니한가.

그때였다.

띠링!

[칭호! 「이종족 구원자」를 획득하셨습니다.]

[50,000,000 코인을 획득하셨습니다.]

[당신의 격이 소폭 상승합니다.]

잠깐 메시지창을 응시하다, 순간이동 반지를 작동시켰다. 율리우스 폰 판테온.

그는 대체 무엇을 준비했을까.

내 몸이 빛무리에 휩싸였다.

***

황성에 도착한 나는 망설임 없이 걸음을 옮겼다.

당연히 기운을 퍼트린 상태로.

수도의 분위기는 약간 침울하긴 했지만 그게 전부였다.

파괴된 곳도 없었으며 청소라도 한 것인지 주변에는 핏물 한 방울도 존재하지 않았다.

확실히, 저번 침식은 대륙의 완승이었다.

황궁 안으로 들어가자 퍼트렸던 내 기운이 이질감을 감지해냈다.

마법인가?

마치 일정 법칙이 있는 것처럼 배열되어있는 그 기운들에는 살기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공격계열은 아닌 거 같고, 그렇다고 정신계열이나 그런 쪽도 아닌 거 같은데.

느낌이 되게 묘하다.

어느새 나는, 회랑을 걷고 있었고 눈앞에 대전으로 들어가는 입구가 보인다.

입구만 보이는 게 아니었다.

문 앞에 서있는 이십여 명의 사람들.

그들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솔직히 말하면, 다 처음 보는 인물들이다.

약간의 권위적인 모습을 하고 있는 몇몇과 몸 안에 꽤나 큰 기운을 품고 있는 노인까지. 뭐, 그 외 기타 등등.

권위적인 모습의 이들은 귀족들일 테고, 저기 강해보이는 노인은 흑마탑의 탑주겠지.

그들앞에서 멈춰 서자 귀족이라 추정되는 이들중 한 중년 남성이 내게 물었다.

“그대가, 사도 이도인가?”

듣자마자 짜증이 몰려온다.

저 목소리.

묘한 분노가 담겨져 있는 것 같기도 하고 호감이 담겨져 있는 것 같기도 하며, 그렇다고 완전히 적대감을 가진 것도 아닌.

그냥.. 흔한 정치인들이 감정을 숨기는 목소리다.

대답하지 않자. 그가 다시 말했다.

“...황제 폐하께서 기다리고 계시니. 들어가거라.”

농담이 아니고 웃을 뻔했다.

들어가거라.. 라고?

이쪽 세상 새끼들이나 저쪽 세상 새끼들이나, 권력층이라는 놈들은 아랫사람 다루듯이 말하는 패시브 스킬이라도 자연스럽게 장착한 건가.

“후우...”

한걸음 내딛었다.

당연히, 기운을 퍼트린 채로.

흑마탑의 탑주는 물론 그 남자들이 그대로 뒤로 한걸음 물러선다.

몇몇은 다리까지 떨기 시작했다.

손을 뻗어 내게 명령했던 놈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내가 병신으로 보이나?”

“끄.. 끄윽..”

그가 몸을 떨면서 옆에 있던 흑마탑을 바라보았지만 그는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내 기운에 짓눌려있었으니까.

놈의 면상을 코앞으로 끌고 왔다.

“그것도 아니면 내가지금껏 해 왔던 일들이 전부 우연으로 보이나?”

“크흑..”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오슨을 죽이고, 매캐넌을 죽이고, 나머지 마스터를 모조리 죽이고, 쿤린을 죽인 내가, 너 따위 버러지새끼한테 명령을 받아야하는 놈으로 보이냔 말이다.”

“제..제발...”

놈이 애원했지만 무시했다.

내 몸에서, 점점 기운이 피어나온다.

이건 혈기가 아니다.

그냥 살기.

“내가 대륙을 구한 게 니 새끼들한테 충성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하는 거냐? 병신 같은 놈들이 뭘 잘했다고, 뭘 할 줄 안다고 나한테 명령을 하는 거지?”

놈의 얼굴에서 핏기가 완전히 사라졌다.

“들어가거라? 내가 니 아랫사람으로 보이나?”

“크흑 살.. ”

그 이상 주저리주저리 떠들지 않았다.

손에 강하게 힘을 주자.

뚜둑-!

놈의 목이 그대로 꺾인다.

그대로 놈의 시체를 구석에 있던 석상을 향해 집어던지자.

푸욱-

석상의 검에 놈의 복부가 그대로 틀어박혔다.

그게 끝이었다.

기운을 거두어들이자 흑마탑의 탑주를 비롯한 다른 귀족들이 그 자리에서 주저앉았다.

공포에 짓눌린 얼굴로.

“기상.”

놈들이 벌벌 떨면서 자리에서 일어선다.

뭐라고 할 말은 많았지만, 이 이상 말하는 건 구질구질해보일 것 같아 그냥.. 여기까지만 해야겠다.

“너, 흑마탑의 탑주냐?”

“그... 그렇소.”

“오늘부터 네가 백마탑의 탑주까지 겸한다. 모든 마법사들을 모아서 전국에 있는 모든 도시들에 게이트를 설치해."

“그리고 발리스타 왕국에 있을 수뇌부들을 모조리 수도로 불러들이고, 함정 마법진 설치에 능한 마법사들도 모조리 불러놔.”

내 말이 이어질수록 탑주의 표정이 점점 굳어지고 있었다.

“너도 눈이 있고 머리가 있으니까 상황이 어떻게 흘러가는지는 알고 있겠지. 목숨 걸고 싸우라고 하지는 않아. 하지만 할 수 있는 일이 있음에도 도망치지마라. 특히 지그문트처럼 자살하면서 책임 회피하는 병신 같은 짓거리를 할 시 에는... 자살하는 놈과 그놈과 관련되어있는 놈들 죄다 잡아다가 산채로 묻어주지.”

"..."

“너, 이름이 뭐지?”

선 명령, 후 통성명이라니.

“로널드 아퀴나스..입니다.”

로널드 아퀴나스. 기억했다.

이번에는 그 옆에 있던 놈들을 향해 말했다.

“너희들은 오늘 중으로 모든 귀족들을 황성으로 집합시켜라. 대신관도 부르고 모조리 불러. 단 한명도 빼놓지 마라. 시간은 2시간 주지.”

놈들이 일시에 고개를 끄덕인다.

아.. 이 말도 덧붙여야겠다.

“혹여나, 니들 정치싸움에 나를 이용하거나 하는 개 같은 짓을 할 시에는 네놈들부터 죽일 거다. 귀족자리를 대체 할 놈들은 많아. 본보기가 되고 싶으면 한번 해보던지.”

"..명.. 명심하겠습니다.”

명목상의 황제가 되지 못했다 뿐이지. 나는 이미 이 대륙을 지배하고 있었다.

힘을 가진 이들은 모조리 내게 죽었으니까.

그들을 무시하고 천천히 대전 문을 열어젖혔다.

쿠구궁-

이건 또 뭐야?

열자마자, 나는 이번에도 표정관리를 해야 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장면이 눈앞에 펼쳐진 상태였으니까.

일단 눈앞에 의자 두 개가 있었고 그 한중간에 목조로 된 테이블이 하나 놓여 있었다.

당연히 한 의자에는 율리우스가 앉아있었고 다른 의자는 비어있는 상황.

내 머리로는 조금 이해가 가지 않는다.

왕좌에서 내려온 채로 그 아래에 ‘술상’을 만든다고?

조용히 걸었다.

뒤에서 대전 문이 자연스럽게 닫힌다.

주변을 경계하고 있던 근위병은 물론, 분명히 수도에 거주하고 있을 장군 급의 기사들까지도.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언젠가 율리우스의 곁에서 은신술을 펼치고 있던 그 이름 모를 남자. 내가 ‘첩자’라 부르는 그 남자도 보이지 않는 걸로 보아.

'..나랑 독대를 하고 싶었다?’

뭘까.

율리우스는 뭘 꾸미고 있는 걸까.

그런 생각을 가슴에 파묻은 채, 나는 율리우스 앞에 있는 의자를 뒤로 빼고 그곳에 앉았다.

내가 앉자 율리우스가 중간에 놓인 꽤나 고급진 술을 내 앞에 놓인 잔에 따르고 이어서 자기 잔에 따른다. 잠깐의 침묵.

나는 율리우스를 바라보았고 율리우스도 나를 바라본다.

그가, 말없이 술을 들이켰다.

꿀꺽-

“후우... 독하네요. 명주는 명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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