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 스스로 신화를 쌓아가는 자(2) >
"그래도 적응 잘하시던데요? 마치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고 계시는 것처럼?"
말없이 쎄쎄를 바라보았다.
이젠 모르겠다.
태도로 보나 상황으로 보아 저건 분명 나를 떠보려는 말인데.
유바의 신성, 그가 소멸되기 전에 내게 말해 주었던 것들이 머릿속을 헤집는다.
솔직히, 정리하자면 끝도 없다.
너무 많은 정보를 받았기 때문에.
딱 하나만 생각해보자.
그는, 왜 내게 그런 말을 한 걸까.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내가 지금껏 움직이던 행보와 내 입에서 나왔던 말들을 유바의 신성이 모르고 있었을까?
솔직히 유바의 신성이라는 이명을 들어본 적은 없었다.
최소 200명이 넘는 신들 중 내가 아는 이명은 약 70개.
하지만 유바의 신성은 여화를 알고 있었고, 에피소드도 알고 있었으며 지구에 대한 것도 알고 있었다.
심지어 내가 에피소드를 어떻게 대처해왔는지, 그리고 내가 어떤 심성을 가지고 있는지 까지도.
즉, 그는 Episode를 진행하는 신들 중의 한명이 확실하다.
메시지를 보내지도 않고, 후원도 하지 않으며 그저 바라만 보던 신 .
그런 그는 '마지막'에 여화에게 대적했고, 선신의 왕에게 외면 당했으며 아룡에게도 외면 당했다.
그렇다면 그는, 세 진영에 속한 신이 아니라는 뜻인가?
내가 알던 상식이, 조금씩 흔들린다.
젠장.
그는 내게서 무엇을 본걸까.
짐작 가는 게 없지는 않았다.
내가 움직이고 실제로 보여주는 행보, 그걸 시련자들이나 발바라 대륙의 주민들이 아무리 미친놈 보듯 해도 결국 내 행동은 멸망에 대처하는 가장 이상적인 방법이다.
유바의 신성이 내게 보았던 것은 아마도 '가능성'일 확률이 높다.
그게 아니고서야 내게 고블린 종족을 맡긴 것에 대한 합당한 이유를 찾아내기가 어렵다.
그래 그냥... 그게 전부라고 생각하자.
의문을 하나하나 풀어가기에는 내가 미뤄놓은 일들이 너무 많다.
그런 내게, 쎄쎄가 말을 건넨다.
"솔직히 놀랍네요. 침식을 그렇게 대처하는 시련자는 본 적이 없는데... 이도님은 상대방이 노리는 단 한명의 '표적'이 되려 하시는 건가요?"
쎄쎄의 말대로다.
앞으로 벌어질 모든 침식 전쟁에서 상대편 진영이 노리는 단하나의 표적.
나는 그 표적이 되려한다.
말없이 혈신 상태를 해제했다.
지속시켰던 시간이 길지 않았기 때문일까.
극심한 편두통과 몸이 찌그러지는 기분이 들었지만, 참을만하다.
주먹을 강하게 쥐고, 이를 악물자.
쎄쎄가 다른 건 몰라도 내가 고통을 참는 모습은 익숙하다는 듯 말을 잇는다.
"신기하네요. 처음에 오슨 발리 스타라는 마스터를 죽였을 때부터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은 했었는데, 설마 그때부터 '침식'을 대비하셨던 건가요?"
온몸을 옥죄던 고통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쎄쎄의 말이, 머릿속에 맴돈다.
그녀가 느낀 것처럼 나도, 이상함을 진작부터 느끼고 있었다.
앞선 쎄쎄의 말과 행동들은 단 한 가지 사실을 의미하고 있었으니까 즉, 그녀는 내 '권능'에 대해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뭔데?"
"별건 아닌데요. 이번에 공적을 꽤나 크게 쌓으셨잖아요?"
나는 쿤린을 죽이고 고블린 마스터 한명을 죽였다.
당연히 다른 시련자들은 마스터를 죽이지 못했으니, 이 혜택을 받는 것은 오직 나 혼자다.
내게 부여된 3가지 선택지. 그중 후자였던 두 가지는 그냥 볼 필요가 없다.
가장 중요한 첫 번째.
선택형 신화 아이템.
"이도님은 신화 아이템을 고르실 거 같은데요. 저는 개인적으로 2번 유물 아이템을 고르시는 게 어떨까 싶... "
"1번 신화 아이템에 대한 카데고리 보여 줘봐."
이제는 익숙해질 법도한데 쎄쎄는 아닌가보다.
말을 끊은 나를 눈을 껌뻑이면서 쳐다보고 있었으니까.
그녀가 한숨을 푹 내쉰다.
"하아... 신들이 파악한 이도님의 권능은 아무리 봐도 미래 정보를 알수 있는 그런 성격의 권능이거든요. 예를 들면 [파악] 이라거나, [예지 ] 라거나, [통찰] 이라거나, 이도님은 수많은 선택지들 중에서 가장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방향으로 움직이시는 거 같은데요. 이거 알아 두셔야 해요."
침대 쪽에 걸터앉은 채로 쎄쎄의 말을 경청했다.
쎄쎄가 말한 [예지]는 말 그대로 미래를 바라보는 것을 말하는 것일 테지만 내가 가지고 있는 [예지력]과는 그 성격을 달리한다.
내 예지력은 죽음에 가까운 위협이 단초가 되지 않는 이상 발동되지 않으니까.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보자 쎄쎄가 말을 잇는다.
"신화 아이템은요. 자격이 되지 않는자가 가지게 되면 스스로를 파멸 시킬 뿐만이 아니라그 아이템 본연의 가치를 끌어 올릴 수가 없게 돼요. 이도님이 가지고 있는 란지에라는 유물급 무기보다 성능이 낮을 수가 있다는 거죠."
사실이다.
전설 아래 급의 아이템들은 제한이 없다.
막말로 갓 시련자가 된 이들도 전설급의 아이템을 아무런 페널티 없이 사용할 수 있다.
하지만 신화급 아이템은 다르다.
말 그대로 신화, 신들을 둘러싼 이야기이자 그 신들이 원래의 종족에서 신격을 획득했을 때나 혹은 종의 격을 초월했을 때 쌓게 된 그 수많은 역사들과 잊혀진 고대의 역사들까지 그 모두가 함축되어 있는 아이템. 그게 신화 아이템이다.
당연히 그 이야기들은 허구가 아닌 실제로 벌어겠던 일들이며 그때의 가치와 그때의 상징이 들어있는 아이템을, 아무런 시련자가 아무 제한 없이 다를 수 있다는 건 그 자체로 말이 되지 않는다.
물론 예외는 존재한다.
그 신화의 '주인'이 직접 누군가를 인정했을 경우.
그게 아닌 경우, 신화급 아이템을 사용하려면 일종의 '시험'을 봐야한다.
그러고 보니.
"여분의 목숨을 가지고 있던 시련자가 있던데..."
"그래서요?"
"그냥 그렇다고."
당연히 내가 말하는 시련자는 에릭 마이어 로스차일드다.
놈의 성향이나 힘은 둘째로 치고 놈이 가지고 있던 여분의 목숨. 그게 계속해서 내 신경을 건드린다.
내가 아무리 회귀를 했어도 모든 걸 알지는 못한다.
하지만, 여분의 목숨이라는 건 듣도 보도 못한 수준이 아니라 아예 밸런스 파괴 수준의 능력이라는 것은 확신할 수 있다.
그런 능력을 일개 시련자가 얻었다?
유바의 신성이 했던 말들로 미루어보아 여화가 무슨 수작을 부린 게 확실하다.
설마, 정말로 자신의 신화가 담긴 아이템을 넘겨준 걸까?
재앙의 시조라 불리는 악신의 왕이라면 그 정도의 밸런스 파괴급 능력을 가진 것도 충분히 이해가 가지만. 다른 이들도 아닌 아직 초창기의 햇병아리 시련자에게? 여화가 그런 미친 짓을 했다고?
순간 흠칫했다.
- 사실, 이도님이 짐작하셨다시피 에릭은 악을 지배하는 자, 여화의 소행이었어요.
머릿속에서 쎄쎄의 목소리가 울렸으니까.
바하무트가 했었고 유바의 신성이 비슷하게 구현해냈던 언령, 그것과 흡사하지만 분명 다르다.
뭐지 이건.
설마 전음입밀?
아니다.
그 수준을 아득히 뛰어넘었다.
이건 그냥 말이 아닌 '뜻'을 전달하는 것 같은 느낌.
젠장.
알 것 같다.
혜광심어養光心語, 전음보다 상위의 기술이며 언령보다도 높은 전달력을 가진 통신 기술.
그리고, 신화급 스킬이자 그 많은 시련자중에서 오직 형님만 배웠던 스킬.
아니... 이거 너무하잖아.
이걸 네가 왜 쓰는 건데?
- 유바의 신성이 전부 말했듯이. 여화女禍님은 에릭이라는 시련자에게 신화급 아이템을 후원해줬죠. 시도는 좋았고 의도도 확실했지만 안타깝게도 투자를 했던 것에 비해 에릭이 너무 일찍 죽어버렸어요. 자만하기도 했고.
-저는 지금 정보를 드리는 거예요. 다른 건 몰라도 이거만 알고계세요. 여화님은요. 이번에 꽤나 큰 대가를 치르셨기에 당분간은 시련에 개입하지 못해요. 빈말이 아니라 Episode #60정도에 이른다 해도 개입하지 못할걸요? 물론 다른 악신들이 개입하지 못한다는 건 아니지만.
나는 말없이 그녀의 이야기를 들었다.
이 여자.
아니, 이 안내자.
뭘까.
갑자기 정보를 퍼주는 것도 이상하고 태도가 변한 건 더 이상하다.
내 경계심을 읽은 걸까.
-역시 의심이 많으시네요. 유바의 신성이 말했던 거 혹시 기억하시나요?
고블린들을 부탁한다던 그 이야기를 말하는 건 아닐 터 .
이건 하나밖에 없다.
침식이라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아한다는 신들, 그들이 다수 존재한다는 그 말을 말하고 있는 것.
-재미 있는 거 알려드릴까요?
대답하지 않았다.
-저는 과연 신일까요 아니면 단순한 안내자일까요?
...지금 장난하는 건가.
-전이었다면 이런 정보는 못 드렸을 거예요. 하지만 이미 이도님은 유바의 신성에게 꽤나 많은 정보를 들으셨죠, 제가 말씀드리는 건 그 정보들을 조금 세세하게 풀어 준 것에 불과해요. 이렇게 한걸음씩 이면의 진실에 대해 다가가는 거, 이런 거 좋아하시잖아요?
퍽이나.
-이야기는 여기까지 에요. 가능하면 1번 선택지에서 아이템을 고르세요. 시험을 치르셔야하겠지만 이도님이라면 어떻게든 통과하시겠죠. 저는 계속해서 2번을 추쳔할거에요. 기억하세요. 저는 물론 유바의 신성이 포함되어있는 제 4의 진영의 이름은 '대의의 이면 '. 조금 더 분발하세요 이도님.
그게 끝이었다.
나와 계속해서 눈을 맞추고 있던 쎄쎄가 조금 당황한 표정을 짓는다.
"1번을 선택하시겠다고요? 힘드실 텐데... 2번이 낫지 않을까요? 유물 사냥꾼 칭호의 효과로 코인도 보너스로 받으실 수 있고요. 다시 생각해보시는 게 어때요?"
빈말이 아니라 이쪽 세계에는 왜 이렇게 연기를 잘 하는 사람이 많은 걸까.
한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젠장.
숨겨지지 않는다.
결국 나는, 그 상태로 폭소를 터트리고 말았다.
미친 듯이 웃었다.
침대에 앉은 채로 고개를 뒤로 젖혀 웃고 있는 나를, 쎄쎄가 물끄러미 응시한다.
아.. 미치겠다.
쎄세가 말한 모든 말들을 믿느냐고?
아니.
믿지 않는다.
저 말 중에 분명 진실도 있겠지만 휘둘릴 생각은 없다.
대의의 이면? 웃기는 소리다.
무턱대고 믿기엔 내가 지금껏 겪어온 세월들이 너무 처절하다.
그냥 저 말들은 가슴속 한 구석에 박아놓자.
그런데, 정말 재미있다.
이게 다른 시련자들은 몰랐던 이야기일까.
그 누구에게도 듣지 못했고, 형님에게조차 듣지 못했던 이야기.
그게 지금 내 앞에 펼쳐져있다.
웃음이 뚝 하고 멈췄다.
"1번 선택지 보여 줘봐. "
쎄쎄는 끝까지 연기했다.
아쉬운 표정으로 내게 홀로그램으로 된 카탈로그를 보여 주었고, 나는 하나하나 살펴갔다.
‘격을 갖췄던 순간의 숨결 ', '정령의 사랑을 받았던 남자의 목걸이 ', '공간을 자유자재로 이동하던 마법사의 반지 ' 등등등.
내 눈에 보이는 수십 가지의 아이템들은 마치 판에 박힌 것처럼 거의 흡사했다.
대충 이런 식이다.
[격을 갖췄던 순간의 숨결] [신하神話]
-?
-?
-?
이런 정보창에서 이름만 달라진 상황. 그러니까 그 어느 것 하나 효과가 제대로 적혀 있는 게 없었다.
조용히, 그리고 꼼꼼하게 카탈로그를 훑었다.
언젠가 들어 본적 있던 아이템과, 직접 보았던 신화 아이템들까지.
골고루 있긴 했지만 내가 원하는 건 없었다.
천상의 학살자가 격을 초월하기 전 드래곤들의 두개골을 죄다 박살냈던 [대전사의 망치]라거나, 형님이 사용했던 혼란을 초래하는 거인 크로노스의 [필살의 건틀렛] 같은 상위 급의 아이템이 있나 싶었는데, 괜한 기대였나보다.
이건 정말 심한 말이지만 1차 침식의 배경이 되었던 고블린들은 약했다.
신들의 장난감이자, 완벽한 피해자.
그런 이들의 황제를 죽이고 다른 시련자들에 비해 압도적인 업적을 쌓았다 해도 상대의 수준이 저조했으니 보상도 그에 맞춰질게 뻔했다.
내가 갖고자하는 상위급 이상의 신화급 아이템들은 에피소드 후반부에나 등장할 터 .
그렇다고 이중에서 고를 아이템이 없냐고 묻는다면 당연히 아니다.
딱 하나.
내가 가장 필요하고 가장 가져야했던 아이템이 이 목록에 있었다.
나는 망설임 없이 그 아이템을 집어 들었다.
아무런 무늬 없이 경말로 평범해 보이는 팔찌였다.
하지만 명색이 신화급 아이템인데 평범할 리가.
아무런 무늬 없이 은색으로 물들어있는 이 팔찌는 신의 금속이라 불리는 '타르켄'으로 만들어진 나름의 신물이다.
"...그걸 고르셨네요? '스스로의 신화를 쌓아가는자'. 와... 역시 이도님이시네요. 그 많은 것들 중에 하필이면 그걸?"
역시나, 쎄쎄가 감탄을 토해낸다.
조용히 팔찌를 손목에 채웠다.
효과는 앞서 말했듯 다른 신화 아이템들처럼 전부 물음표로 되어있었지만 사실, 엄밀히 말하면 이 아이템 안에는 효과가 없다.
신화를 담을 수 있는 신물이지만 신화가 없는 아이템.
이 안에는 내가 앞으로 쌓아갈 신화를 넣을 것이다.
나만의 아이템.
내가 만드는 역사.
형님이 '멈추지 않고 걷는 초월자' 라는 신격의 이명을 갖췄듯이 나도 신화를 만들 것이다.
오직 나만의 신화.
이 아이템에 담을 나만의 첫 번째 신화, 내 신화의 첫 시작을 알릴 그 이름은 '유토피아의 건국'이다. 슬며시 웃고 말았다.
이번에는 많은 게 다를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