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 유바의 신성(1)〉
"... 나도 제안하지.”
그 말에 고개를 저었다.
“아니, 너는 할 필요 없어. 미안한말이지만 너는 여기서 죽을 테니까.”
쿤린의 양쪽 입 꼬리가 동시에 꿈틀거리더니. 천천히 기운을 끌어올린다.
그의 검은 피부를 비롯해 그의 주변에 하얀 빛의 기운이 스멀스멀 흘러나오고, 그의 몸에서 어마어마한 존재감이 반경 수백 미터를 짓누르기 시작했다.
권주와 궁주의 아래에 있던 시련자들과 병사들, 그리고 고블린들까지, 그 모두가 뒤로 자리를 벌린다.
우습게도 그 와중에 싸우는 고블린과 인간은 없었다는 점이다.
그런데, 그들은 알고 있을까?
눈앞의 쿤린은, 고블린이라는 종에서 극한까지 신체를 끌어올린 괴물중의 괴물이라는 것을.
쿤린이, 조용히 말했다.
“나는 황제, 오로지 힘 하나로 제국을 세운 자. 인간족의 황제가 될 전사인 그대에게, 결투를 청하노라.”
잡스러운 의식은 무시했다.
띠링!
[선善에서 군림하는 자가 당신을 바라봅니다.]
[악惡을 지배하는 자가 한심한 표정으로 ’쿤린‘을 바라봅니다.]
[시작을 알린 아룡이 당신을 응원합니다.]
전부터 느낀 거지만 악을 지배하는 저 병신은 너무 마음에 들지 않는다.
농담이 아니고, 죽이고 싶을 정도다.
심호흡을 하고, 천천히 혈기의 흐름을 느꼈다.
이상은 없다.
20% 감소한다는 그 효과는, 아무래도 혈기에는 통하지 않나보다.
소모성 아이템과 장비 아이템에 걸린 효과에만 한정되는 걸까.
생각을 지웠다.
집중하자.
눈앞의 쿤린에게.
천천히 눈을 떴다.
다리에 힘을 주고,
거대한 존재감을 뿜어내는 쿤린을 향해, 자리를 박찼다.
콰아아앙-!!
땅이 터져나가며 내 몸이, 직선으로 뻗어나간다.
란지에가 휘둘러진다.
콰아앙-!
쿤린의 팔목에 막혔다.
숨을 몰아쉬고, 다리에 힘을 준다.
감각을 집중했다.
눈앞에 보인다.
땅이 접히는 길이.
망설임 없이 한걸음 앞으로 내디뎠다.
콰직-!
공간이 찢어지고 내 몸은 쿤린의 뒤쪽에 위치해있었다.
그대로 란지에를 위에서 아래로 내려찍자.
스아악-!
쿤린이 고개를 젖히며 피한다.
축지를 읽은 걸까.
아니면 살기를 읽은 걸까.
모르겠다.
이어서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온몸에 싸늘함이 밀려온다.
다리에 땅이 닿자마자, 옆으로 자리를 박찼다.
잔보.
내 잔상이 허공에 흐릿하게 남고, 그 잔상의 복부를 그대로 터트리는 쿤린의 주먹과, 이어서 쿤린이 내가 있는 방향으로 자리를 박차는 것까지.
모든 게 물 흐르듯 이어진다.
옆으로 이동하면서 검을 회전시켰다.
란지에를 역수로 꼬나 쥐고 바닥에 그대로 박아 넣자.
콰아아앙-!!
쿤린의 주먹이 내 란지에를 후려친다.
순간.
빠직-
...놀란 감정을 숨기지 못했다.
란지에, 절대로 부러지지 않는다는 옵션이 있던 란지에에 금이 갔으니까. 순간 쿤린의 눈동자가 빛난다.
무엇을 노리는 걸까.
뻔하다.
공격이다.
쿤린의 주먹이 란지에가 아닌 내 몸을 향해 내뻗어진다.
매우 빠르다.
그대로 검을 놓고 몸을 회전시켰다.
스악-!
쿤린의 주먹이 내 옆구리를 살짝 스치고, 회전한 내 발이 원심력을 담아 쿤린의 옆머리를 후려친다.
퍼억 하는 소리가 울리고 그가 뒤로 주춤하기가 무섭게, 쿤린이 고개를 곧바로 치켜든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틀었다.
미약했던 걸까.
퍼걱-!
쿤린의 주먹이 내 얼굴을 살짝 스친다.
빠직하는 소리와 함께 변장의 가면에 금이 갔다.
이어서 내 발이 땅에 닿고, 쿤린이 재차 주먹을 내뻗는다.
이번에는 심상치 않다.
모든 기운을 끌어올린 것 같은 공격.
기회를 봤다 이건가.
그 순간 내 몸이 기이하게 움직인다.
양옆으로 살짝살짝 잔상을 남기면서 움직이는 내 모습은 마치 잔상인 것처럼 보이기도 했으며 실체와 분신이 따로 떨어지려는 모습처럼 보이기도 했다.
정확히 이 기술의 이름은 ’분보分步‘, 축지가 상대의 뒤를 잡으려는 보법이라면 이 보법은 상대의 공격을 정면에서 피하는 보법이다.
몸이 잔상처럼 흐릿하게 움직이기에 상대의 공격 타점이 흐트러지는 최상위 보법.
참고로 신화 스킬이다.
아니나 다를까, 쿤린의 주먹이 내 옆구리 쪽을 스쳐지나간다.
그가 당황한 표정을 짓고, 나는 기다렸다는 듯 반응했다.
쿤린의 팔을 내 왼쪽 어깨 쪽에 끼우고 팔뚝 관절을 접으면서 아래로 당겼다.
우두두둑-!!
“끄윽..!"
택견, 활개꺾기.
쿤린의 주먹에 담긴 에너지를 완벽히 카운터로 바꾼 공격,
그의 팔이 완전히 으스러지고.
이어서, 내 몸이 산이 움직이는 것처럼, 고요하게 앞으로 뻗어나간다.
쿤린과 근접한 거리에서 쿤린이 나와 눈을 맞춘다.
나도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 비친 내 모습은, 온 몸 전체가 붉게 빛나는 광전사의 모습.
그러면서 싸늘하게 가라앉아있는 내 눈동자.
쿤린의 눈동자를 바라보고는 확신했다.
그는 지금 직감했다.
자신의 패배를.
내 오른 주먹이 쿤린의 명치를 강타했다.
느릿하지만, 매우 빠르게.
그의 몸이 들썩이는 순간, 내 왼 주먹이 한 번 더 그의 명치를 가격한다.
그건 시작이었다.
부드럽지만 경쾌하게, 경쾌하지만 이질적이게, 쿤린의 목숨을 노리는 살의殺意의 공격.
퍼버버버버벅-!!
쿤린의 몸이 들썩거린다.
반격하려는 듯 부서진 그의 팔이 움직이고 멀쩡한 팔도 움직였지만 전부 무의미했다.
나는 고개를 숙이거나, 그 팔 자체를 공격하는 것으로 그의 모든 행동을 강제적으로 막아버렸으니까.
퍼버버벅-!!!!
미친 듯한 내 난타에, 쿤린의 눈에서 점점, 빛이 흐릿해져간다.
피가 터져 나오고, 그의 살점이 묻어나오고, 그의 몸 전체가 걸레짝이 되어갔다.
싸움은, 그렇게 끝났다.
혈기를 주먹에 모으자.
우우웅-!
내 주먹이 붉게 물들고 또 다시 그 겉면을 붉은 기운들이 감싸기 시작했다.
혈강기, 눈에 띄다 못해 공간을 전체를 집어 삼키는 그 기운에 주변 공기가 완전히 떨려온다. 혈강기가 덧씌워진 주먹을, 그대로 내질렀다.
푸우우욱-!!
쿤린의 복부를 꿰뚫고, 내 주먹이 밖으로 튀어나온다.
파아아앙-!!
그 파공음에, 뒤쪽에 있던 건물 서너 개가 그대로 무너진다.
“쿨럭..”
쿤린의 입에서 검은 피가 터져 나오는 것으로 확신했다.
싸움이 끝났다는 것을.
주변에서 안도의 한숨이 피어오르고, 어딘가 에서는 절망의 한숨이 터져 나온다.
주먹을 빼내자.
털썩-
쿤린이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었다.
복부가 꿰뚫린 쿤린이, 오릇이 서있는 나를 조용히 올려다본다.
“...이도. 부탁 하나 해도 되겠는가.”
말없이 그를 내려다보자.
“...우리 종족이 착취당하는 것만은 막아주게.”
끝까지 백성을 생각하는 모습이라.
지구에 있던 정치인 놈들이 이 남자의 반만 닮았으면 좋았을 텐데.
하지만..
“부탁치고는 꽤나 어려운 주제를 꺼내놓네.”
쿤린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때였다.
쿠궁-!
하늘에서 굉음이 울리고, 그 곳에서 한줄기 빛이 쿤린을 향해 내리쬐기 시작했다. 이건 또 뭐야?
긴장어린 표정으로 자세를 잡자.
"그럴 필요 없네."
"..."
“우리의 시조이자, 나의 조상인 ’유바의 신성‘이 그대와 대화를 하고자 하시는군.”
경계를 풀지 않은 채로 쿤린을 바라보았다.
그때, 그의 눈이 흰색으로 물들더니.
쿠우우웅-!!
어마어마한 압력이, 주변 전체를 짓누른다.
이거, 언젠가 느껴 본 적 있었다.
파룡 바하무트가 지구에 현신되던 그때, 중국의 베이징이 완전히 짓뭉개졌던 그때와 흡사하다. 그놈에 비하면 매우 미약하긴 했지만.
고개를 들자 하얀 눈의 쿤린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내 그의 입이 열린다.
-그대로구나. 우리 종족을 멸망시킬 사도가.
내 머릿속에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마치 바하무트에게 들었던 언령과 흡사하다.
그러니까, 이 말을 듣는 자는 나 밖에 없다는 뜻.
[선善에서 군림하는 자가 그는 대의를 위해서 움직였을 뿐이라고 말합니다.]
조금 정정해야 할 듯싶다.
이건 나와 신들끼리의 대화다.
“멸망이라... 틀린 말은 아니지만 내 잘못은 아니지 않나?”
-그건 그렇지, 그대는 잘못이 없지. 그저 판을 만든 신이라는 작자들이 문제였을 뿐.
[악을 지배하는 자가 코웃음 칩니다.]
나는 메시지 창을 바라보았고 쿤린은, 아니 유바의 신성은 하늘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더러운 취미를 즐기는구나. 재앙의 시조여.
[악惡을 지배하는 자가 죽고 싶냐고 묻습니다.]
유바의 신성이 실소를 터트렸다.
-이미 죽게 될 몸, 격을 바쳐서 현신까지 한 마당에 무엇이 두렵겠는가.
[악惡을 지배하는 자가....]
나와 유바의 신성은 통하기라도 한 것일까.
이어지는 메시지를 동시에 무시하고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대는 ‘시련’을 받는 ‘시련자’, 기회를 얻은 ‘지구’의 인간이 맞는가?
지구라..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이었으니까.
-그대에게 내 후손들을 부탁하고 싶지만... 위에서 지켜본 내 소견으로, 그대는 단순히 누군가가 부탁을 한다고 해서 그것을 쉽게 들어줄 인간은 아닌 것 같더군.
말없이 쿤린이자 유바의 신성인 그를 바라보았다.
확실히 누군가 부탁을 한다고 해도 나는 그런걸 그냥 들어줄 생각은 없다.
그런건 호구나 하는 짓이 아니던가.
신성이 조용히 웃는다.
-잘 듣게, 딱 한번만 말할 수 있으니 .
뭘까.
이 '신’은, 고블린을 맡기는 대가로 대체 무엇을 주려는 걸까.
-수많은 세상에서, 그 누구도 달성하지 못했던 업적이 하나 있었네.
[선善에서 군림하는 자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납니다.]
[악을 지배하는 자가 시스템에 제재를 요청합니다.]
[시작을 알린 아룡이 조용히 팔짱을 끼고 상황을 관망합니다.]
무언가 심상치 않게 돌아가고 있었다.
유바의 신성이 말을 잇는다.
-유토피아,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종족들이 터를 이루고 살아가는 단 하나의 국가. 그 국가를 만든 자는 그 누구보다 뛰어난 격을 갖추게 될 것이며. 그 누구보다 강대한 업적을 쌓게 되지.
띠링!!
[시스템이 Episode에 개입합니다.]
[시스템이 고블린 황제 쿤린은 전투 불능 상태라고 판단, 그 외 조건이었던 다섯의 마스터의 죽음을 확인했습니다.]
[시스템이 침식 전쟁의 승자는 발바라 대륙이라고 선언합니다.]
띠링!
[시스템이 유바의 신성의 격을 떨어트리기 시작합니다.]
[악惡을 지배하는 자가 ‘신들의 징벌’에 자신이 나서겠다고 선포합니다.]
유바의 신성, 쿤린의 몸에서 빛이 조금씩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가 고통스러운 듯 인상을 찌푸린다.
지금, 혈신 상태인 나조차도 느끼지 못할 다른 차원의 힘이 그에게 가해지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조금 얼떨떨한 표정을 지은채로 그것을 바라볼 뿐.
무언가 말하려던 그때 .
-마저 듣게. 잠깐의 ‘일탈’이 아니라, 수많은 종족이 공존하게 만들고 그 땅의 군주가 되어 그 땅을 완전히 그대라는 존재에게 복속하는 것을 목표로 삼아보시게. 그대가 이루려는 게 무엇인지는 정확히 모르겠으나. 그 일 하나를 하는 것만으로 그대는 종의 초월자를 넘어 진정한 [**의 왕] 으로 갈수 있는 '자격'을 획득 할 수 있을 터이니.
무심결에 고개를 끄덕이려다 흠칫했다.
뒷머리를 망치로 맞은 듯한 기분이다. 잠깐의 일탈?
< 유바의 신성 (2)-400자 추가 >
단어 선택이 이상하다.
왜 일탈이라고 하는 거지?
앞서 말했듯 나는 에피소드의 전개 방향이 어찌 될지 확실하게 알지 못한다.
내가 아는 전생에서는 Episode #39 이후 타이탄으로 넘어갔지만, 이번에도 그렇게 진행 될까?
솔직히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기에, 최대한 발바라 대록을 '성장' 시키려는 내 나름의 안배는 현재에 머물러 있고, 그 결과가 어떻게 남건 간에 결국에 나는 발바라 대륙을 떠날 것이다.
그렇기에 내 행동은 지금을 대비한 것이든 후일을 대비한 것이든 '일탈'이라는 단어로 정의내리기에 충분하다.
하지만 타이탄으로 넘어가는 게 아니라 ‘시련자’가 죽어서 본래 세계로 돌아가는 걸 이 상황에 대입한다면?
그것도 어찌 보면 일탈이다.
그래서 '복속'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걸까?
왜 이 신성의 말이, 너는 본래 세계로 돌아 갈 생각 하지 말고 유토피아를 만들어 그 세계에서 평생을 살아가라는 말로 들리는 걸까.
순간, 온 몸에 서늘함이 몰려온다.
이건 내가 너무 예민하게 반응한 걸까.
심리가 복잡했지만 나는, 최대한 표정을 관리했다.
그리고 그것은 분명 성공했다.
적어도 나와 대화를 하고 있는 유바의 신성은 내 변화를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있는 걸로 보였으니까.
잠깐 말을 멈춘 신성이 힘겨운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이 정도 정보면, 부탁의 대가로 충분한가?
대가라기엔 너무나도 큰 정보를 얻었다.
거기에 플러스로 작은 의구심까지.
충분하다 못해 넘칠 정도다.
조용히 그를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신성이 후련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천천히 눈을 감는다.
그러다 문득 떠올랐다는 듯, 한마디 더 던졌다.
-재앙의 시조 여화여. 스스로의 격을 바쳐서 시련자를 키우려던 헛짓거리를 하더니 실성한것인가. 아니면 의도한 대로 진행되지 않아 발악하는 것인가. 한심하다 못해 처절해보일지경이야.
띠링!!
[악惡을 지배하는 자가 Episode에 개입합니다. ]
[시스템이 개입을 거부…]
[악惡을 지배하는 자가 스스로의 격을 대가로 시스템의 요청을 묵살합니다.]
[시작을 알린 아룡이 끼어들까 고민하다, 결국 상황을 관망하기로 결정합니다.]
[선善에서 군림하는 자가 유바의 신성에게 조의를 표합니다.]
그 메시지를 시작으로 하늘이 찢어지고 그 사이로 공간이 열린다.
쿠구구궁-!
열린 공간에서 거대한 ‘운석’이 천천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한개가 아니었다.
무려 두 개, 아니 세 개.
멀리서 보이는데도 그 크기는 달과 비슷..아니, 달보다는 작아 보인다.
그게 무려 세 개나 소환되고 있었다.
-격을 얼마나 바쳤는지는 몰라도 스스로 현신하는 것 까지는 힘들었나보군. 하긴, 그게 가능하면 에피소드는 더 이상 에피소드가 아니겠지. 그런데 시조라는 이름이 참 아까워. 이건 진심이라네 .
[악을 지배하는 자가 괴성을 토해냅니다.]
젠장.
귀가 따갑다.
어딘가에서, 차원을 뚫고 내질러지는 괴성.
귀가 따가운 게 아니라 아프다.
분명 저 악신이 내지르는 괴성일 텐데 이상하게 근원지조차 잡히지 않는다.
유바의 신성에게 가해지는 다른 차원의 압력처럼, 내가 인지하지 못하는 다른 범주의 것.
그런데 그게 ‘조금’이나마 느껴질 정도라는 건, 내가 조금 성장했다는 뜻일까.
빌어먹을.
나는 표정을 일그러트렸고. 신성은 허탈하게 웃는다.
“발바라 대륙으로 이동해라!! 빨리!!!”
내가 다급하게 외쳤음에도 패닉에 빠진 병사들은 빠르게 움직이지 못했다.
슈타이어를 꺼내들고는 기운을 집중시켰다.
슈타이어가, 부들부들 떨리고, 한계치에 다다른 듯 금이 가기 시작했다.
무시하고 방아쇠를 당기자.
콰아아아아아앙-!!!!
굉음과 함께 기탄이 하늘높이 발사된다.
콰아아앙-!!
기탄이 허공에서 폭죽처럼 터지며 굉음을 한 번 더 울리자 그제야 모두의 시선이 내게 집중된다.
“발바라 대륙으로 이동해라. 지금 당장.”
인간들이 재빨리 움직이고. 고블린들이 어찌할 줄 몰라 할 때.
잠깐 신성을 바라보았다.
쿤린의 얼굴을 한, 하얀 눈의 그가 조용히 기다린다.
상상조차 하지 못할 고통을 느끼는 그런 표정으로.
정말이지..
나 같은 놈의 대체 뭘 믿고 종족의 운명을 맡기는 거지?
-혹시 그대는, 이 거대한 판을 뒤집으려하는가?
뜬금없는 신성의 말이었지만, 대답하지는 않았다.
신성이 말을 잇는다.
-그대가 무엇을 원하건, 결국에 그대는 판에 들어갈 수밖에 없지. 아니 이미 판에 들어와 있을 수도, 결국 그대는‘마지막’을 대비해야 할 것이네.
젠장.
“고블린들, 살아남은 고블린들도 전부 들어가. 당장.”
내 말에 신성이 고통조차 잊은 듯 환하게 웃었다.
그때였다.
유바의 신성의 몸에서, 미약한 기운이 흘러들어와 내 몸에 맞닿는다.
그와 동시에.
-마지막으로 이것만 기억하시게. 신들 중에는 ‘침식’을 좋아하지 않는 이들이 꽤나 많아.
의념이자, 메시지. 그 이상의 것.
직감했다.
이건, 다른 신들에게 들리지 않게 오직 나만 들을 수 있도록 한 신성의 최후의 메시지라는 것을.
그것을 끝으로 순식간에 쿤린의 몸에서 빛이 완전히 사라졌다.
아니, 사라졌다기보다는 소멸했다는 표현이 맞으리라.
애도를 표한다거나 그런 감정은 없었다.
그저 조금 안타까운 감정, 그게 전부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방금, 이 유바의 신성이라는 신이 내게 말해준 것들은 보통 정보가 아니었다.
일단 내가 만들려는 발바라 대륙의 구도가, 실제로 업적에 있었으며 그 업적은 자연스럽게 '칭호'가 된다는 사실.
그 과정에서 격이라는 단어와 정체불명의 [**의 왕], 그리고 복속을 하라고?
종의 초월자를 넘는다는 건.. 대체 무슨 의미지?
젠장.
이거, 받은 정보가 너무 많다.
단순히 하루 이틀 생각해서 정리 될 양이 아니다.
대충 고개를 털어내고는 생각을 정리했다.
조금 후에, 일단 일이 끝나고 천천히 생각해보자.
시선을 돌리자 때마침 하늘에서 정지해있던 운석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익숙해서 기억하고 싶지 않은 개 같은 기억이 떠오른다.
띠링!
[Episode #5~#9 종료까지 9분 남았습니다.]
[서브 퀘스트가 발생합니다.]
[고블린 황제 쿤린은 죽지 않았습니다. ]
[고블린 황제 쿤린을 죽이십시오.]
[보상:5,000,000 코인]
[제한 시간 : 9분]
에피소드 전개에 충실하려는 시스템과, 스스로의 존재를 지워가면서 종족의 운명을 맡기는 신과, 어떻게 해서든 멸망시키려고 개입하려는 악신, 그걸 막을 수 있음에도 관망하는 선신과 중립신.
정말이지... 이런 게 개판이지 않을까.
인간들은 대부분 게이트를 타고 넘어간 상황.
하지만 고블린들은 여전히 눈물을 흘리며 게이트 앞에서 이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말귀를 못알아처먹은 건가.
뭐라고 한마디 하려던 그때, 시선이 느껴진다.
반대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검은빛의 동공을 가진 ‘쿤린’과 눈이 마주쳤다.
쿨럭. 신성께서는 먼저 가셨군.. 마무리를 하시게.”
박살나서 너덜너덜해진 슈타이어를 인벤토리에 집어넣고 손을 뻗자. 멀리 있던 란지에가 내 손으로 빨려 들어온다.
검을 고쳐 쥐자.
“그대의 앞길이, 밝기를 기원하겠네.”
죽음을 목전에 둔 쿤린이, 목에 차고 있던 목걸이를 풀어내더니 내게 던졌다.
한손으로 그걸 잡아채자. 쿤린이 고개를 끄덕인다.
나는 망설임 없이 그의 심장을 향해 검을 찔러 넣었다.
푸욱-!
동시에.
파아앙!
그의 심장부분이 완전히 터지고, 쿤린의 눈에서 빛이 사라진다.
그 와중에도, 쿤린은 웃고 있었다.
띠링!
[업적!「나는 강자에게 강하고, 약자에게도 강하다.」를 달성하셨습니다.]
[5,000,000 코인을 획득하셨습니다.]
[칭호!「황제 학살자」를 획득하셨습니다.]
[칭호「황제 학살자」가「피로 물든 왕좌의 주인」에 흡수됩니다.]
[칭호에 걸맞는 보상을 산정중입니다. ]
[서브 퀘스트 완료!]
[5,000,000 코인을 획득하셨습니다.]
[Episode 종료까지 8분 42초 남았습니다.]
잠깐 쿤린의 시체를 응시했다.
꽤나, 마음에 드는 남자였다.
진심이다 이건.
조용히 그의 시체에 흡수를 사용하자 그의 시체가 쪼그라들고.
[광폭률이 49%로 상승합니다. ]
그가 남긴 경번갑을 인벤토리에 집어넣고, 발바라 대륙으로 향하는 게이트를 향해 자리를 박찼다.
그나마 다행인걸까.
침식 게이트는 굉장히 넓어진 상태였다.
시스템이 시간을 줄였다는 건 예상하지 못했지만 상관없다.
승자는 정해졌고, 결말도 정해졌으니까.
게이트의 크기는 얼추 1km정도.
게이트 앞으로 다다르자 고블린들이 보인다.
나는 이 세상에 고블린이라는 종족이 대체 얼마나 있었던 건지는 모른다.
수천만일지 억대일지, 그것도 아니면 십억 대일지.
중요한건 지금 남아있는 고블린의 수는 어림잡아서 4만? 잘 모르겠다.
십 만이 넘지 않는 건 확실하다.
아마도 이 수도 내부에 있던 고블린일 테고, 다른 지역에 있던 고블린들은... 글쎄.
미안한 말이지만 시간이 없다.
나는 고블린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쿤린과 유바의 신성이라는 신이, 내게 너희를 맡겼고, 나는 그들의 ‘부탁’을 대부분 들어줄 생각이다.”
터전을 마련해주지. 쿤린이 어떤 존재였는지는 나보다 너희가 잘 알 터. 추모하는 건 살아남고 나서 해라.
그리고 조용히 턱짓했다.
고블린들이 울면서 게이트 안으로 들어간다.
잠깐 그것들을 지켜보다 조용히 고개를 돌렸다.
운석은 너무나도 천천히 떨어지고 있었다.
저 상태에서 곧 속도를 붙이겠지.
젠장.
악을 지배하는 자, 여화女禍. 전생에서 지구를 멸망시킨 신이자. 악신들의 왕.
스스로를 중성이라고 외치긴 하지만 남자라 불리는걸 가장 치욕스럽게 받아들이는 신.
빌어먹을 놈.
개 같은 새끼.
그러다 의구심 하나가 떠오른다.
지금, 신이라는 존재가 에피소드에 개입했다.
내가 아는 '신들의 협약'에 의하면 신들은 에피소드에 저렇게 '직접적'으로 개입 할 수 없다.
언젠가 언급 한 적이 있었는데.
발바라 대륙의 황제와 왕들은 매달 제물을 바쳤다.
그걸 내가 막은 이유는 하나다.
바로 지금 같은 상황을 방지하기 위해서.
제물이라는 건 결국 신들에게 바치는 일종의 음식물이나 다름이 없는데, 그 음식물이 하필이면 인간들이고, 그 인간들을 산채로 죽여서 바친다는 것은 그것의 의도가 어떻건간에 그 성향은 절대로 '선'이 아닌 '악'이다.
자연스럽게 신들은 이런 상황에서 한가지 수작을 부릴수가 있는데, 제물들이 바쳐지는 전체적인 상황을'대륙민들이 원한다' 라는 명목으로 탈바꿈 시켜 시스템이라는 나름'공정한 관리 체계'를 우회하는 신들의 강림 수법.
즉, 제물이라는 건 신이 세상에 강림할 수 있는 수단이다.
이게 신들의 수작질 제 5탄이다.
전생에서 형님은 뒤늦게라도 제물을 바치지 말자고 하긴 했지만 이미 제물은 바쳐질 대로 바쳐진 상황.
시련자들과 몬스터들에게 시달리던 주민들은 결국 염원했다.
신들의 강림을.
결국 1만개의 언어를 깨우친 자', 탈레리안이 발바라 대륙에 강림했고, 그는 Episode #36을 정리 해주는 것과 동시에 수백만 명에 이르는 주민들의 목숨을 앗아갔다.
그런데 지금은 여화가 직접 자신의 '격'을 대가로 바쳤다고 한다.
얼마나 바쳤는지는 모르겠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이건 매우 불공평하다는 거 .
시발.
저런 상황이면 다른 신들도 그 격이라는 걸 대가로 에피소드에 강제로 강림해서 깽판을 칠게 뻔한데.
이건 대비책이 거의 없다시피 하지 않은가.
젠장.
이건 텔레비전 속의 코미디언 수준이 아니다.
그냥 어항 속의 금붕어 .
주는 먹이를 그대로 받아먹는 금붕어의 처지가. 지금 나를 포함한 시련자들의 처지였다.
쌍욕이 절로 터져 나온다.
그나마 대비책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선신의 왕과 아룡이다.
분명 메시지 창에 언급되었다.
개입을 하려다 그냥 관망하겠다는 결정을 내렸다고.
선신은 그저 조의를 표한다고 했지만 어차피 그게 그거 아닌가.
즉. 저 둘은 여화의 행동을 막을 수 있었지만 막지 않았다.
그러니까 저 둘은 무조건 내 편으로 만들어야한다.
평생이든 아니면 일시적이든...
젠장.
머리가 너무 복잡하다.
처리해야 할 일이 끝나면 이후에 또 새로운 일이 터지는 이 상황이 이제는 짜증이 날 정도다. 후우...
그러다 문득 생각이 난다.
지금 내 옆에는 누가 있는가.
아무도 없다.
내가 쉬었던 적이 언제였던가.
단 한 번도 쉰 적이 없었다.
언젠가는...
젠장.
잠깐 운석을 응시하다, 게이트로 몸을 밀어 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