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 1차 침식(3)[여기부터 유료 시작입니다.] >
몸에 피 한 방울조차 묻히지 않은 나를, 모두가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본다.
무시하고 게이트 주변을 포위하고 있던 주체와 케인에게 손짓하자, 그 둘이 빠르게 다가오더니 부복했다.
“병사들을 2교대로 편성하고 경계 시작해. ‘사도’를 제외하고는 그 누구도 게이트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통제하고.”
“충!”
걸음을 옮겼다
이번에는 지그문트의 호위를 받고 있는 한수아에게 다가갔다.
그녀의 얼굴에 묽은 홍조가 깃든다.
무시하고 인벤토리에서 아이템 하나를 꺼내 그녀에게 건넸다.
작은 사각형 모양의 스피커같이 생긴 아이템. 이름은 윌의 속삭임 .
형님을 찾다가 불발돼서 반환되었던 그것이다.
한수아가 그것을 건네받는다.
“저안에서 절대로 감당하지 못할것 같은 ‘괴물’이 나타나면, 그때 이 아이템으로 나한테 연락해.”
“네 그렇게 할게요.”
그대로 몸을 돌리려다, 한마디 더 해줬다.
“상급 정령 이상은 절대로 소환하지 말고.”
한수아의 잠재력을 높게 평가하기는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상급 정령을 소환 하는 순간 그녀는 죽을 것이다.
그것도 몸이 터지는 식의 잔인한 모습으로.
그녀는 조금 더 성장해야한다.
내 말에 한수아가 고개를 끄덕이자 나는 조용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병사들은 불안에 떨고 있었고 에덴의 시련자들을 제외한 다른 시련자들은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의아스러움이 더 커 보인다.
“모든 사도들은 들어라.”
“안으로 들어가건 뭘 하건 막지 않는다. 하지만 이것만 알아둬라.”
지금은 발리스타 왕국 소속의 시련자지만 저들 대부분은 과거 매캐넌 왕국 소속의 시련자다.
“대기한다면 500만 코인을 얻을 것이고, 들어간다면 죽을 거다. 마스터라는 존재를 죽일 자신이 있으면 들어가라. 그게 아니라면 여기에서 대기하고.”
내 말에, 시련자들 모두가 고개를 번쩍 치켜든다.
내 입에서 이쪽 세상의 사람이 알 수 없는 단어가 계속해서 튀어나왔으니까.
무시하고 한수아 옆에 있던 나성진에게 시선을 옮겼다.
언급한 적은 없었지만 나성진의 고유 권능은 [변형]이라는 이름의 권능이다.
발바닥을 마주치는 것만으로 그는, 평평한 지면을 거대한 벽으로 ‘변형’시킬 수 있고, 잘 지어져있는 멀쩡한 집을 순식간에 지어지기 전 상태인 철과 흙무더기로 원상복귀 시킬 수 있다.
어찌 보면 시간 회귀처럼 보이기도 하는 그의 능력은, 확실히 공격이든 방어든 어느 쪽으로든 굉장히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다.
올라운더 플레이어.
그게 나성진의 가치다.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나성진에게 가까이 갔고 그의 귓가에 조용히 무언가를 속삭였다. 나성진의 눈이 크게 떠지는 것을 끝으로, 나는 그 자리를 벗어났다.
*
나성진은 생각했다.
방금, 이도가 귓가에 속삭이던 말이 머릿속에 맴돈다.
‘...시간 되면 발바닥을 마주쳐보라고?’
무슨 블랙코미디도 아니고, 이렇게 심각한 상황에서 농담을...
아니지.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이도라는 남자를 가까이서 지켜봤다.
그는 절대로 농담 따위를 할 사람이 아니다.
나성진은 고개를 돌려, 조금 멍한 표정을 짓고 있는 성미령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표정은 뭐랄까.
섭섭해 보인다고 해야 하나.
"이도님이 방금 뭐라고 하셨어요?"
나성진을 향해 질문을 던지는 성미령의 목소리는 호기심과 섭섭함으로 가득했다. 나성진은 망설였다.
하필이면 발바닥이라니.
“..별거 아닙니다. 그냥.. 별거 아니에요.”
“...그래요?”
그때 한수아가 끼어든다.
“미령 언니.”
"응?"
“어떻게 하실 거예요? 들어가실 거예요?”
“..아니. 내가 저기를 왜 들어가. 이도님이 말했잖아 들어가면 죽는다고.”
한수아가 해맑게 웃는다.
“그러게요. 들어가면 죽을 텐데...”
성미령은 문득 팔목을 쓸어내렸다.
이상하게, 겨울도 아닌데 갑자기 왜 이렇게 싸해진 걸까. 해맑게 웃는 한수아를 바라보며, 성미령도 작게 웃었다.
**
나는 걷고 있었다.
내가 가려는 곳은 왕성 외곽.
그러니까 워프 게이트가 설치되어있는 그곳이다.
걸으면서 생각했다.
내가 가지고 있는 킹 슬레이어 칭호.
전생에서 형님은 이 칭호를 얻었고 2명의 왕을 죽였다.
그러니까. 이 칭호를 끝까지 진화시킨 시련자는 없다는 이야기.
대체 인간의 허물을 벗는다는 그 옵션은 대체 뭘까.
아무리 봐도 이건 발바라 대륙의 다섯 명의 왕을 죽이라는 일종의 퀘스트와도 비슷한데.. 솔직히, 버리고 싶지가 않다.
이 왕의 기준에는 설마 고블린들도 들어가는 걸까 하는 생각은 그냥 하지 않았다.
너무나도 불확실하기에 그냥 생각할 필요가 없다는 게 정확하겠지.
조용히 걸었다.
쿤린은 어떤 반응을 보여줄까.
솔직히, 발바라 대륙의 마스터들을 직접 보고 판단하라고 하긴 했지만, 아마 99%의 확률로 그들은 고블린들과 전쟁을 벌일 것이다.
가진 거라곤 자존심과 선민의식 밖에 없는 놈들이니까.
그리고 쿤린은 모른다.
이쪽 세상의 마스터들이, 얼마나 욕심이 많은 지를.
머지않아 쿤린은 자신이 이상에 젖어있었음을 깨닫게 될 것이고 힘이 없음을 한탄할 것이다.
그리고 매우 안타깝지만 이번 침식 전쟁은 무조건 인간 쪽이 승리한다.
승리 할 수밖에 없다.
종의 차이가 너무 극심하기에.
이 종의 차이가, 가장 중요하다.
극 명확한 예시를 들자면 드래곤이 신격을 갖추는 것과 인간이 신격을 갖추는 것, 이 두 가지를 예시로 들 수 있다.
둘의 기본 베이스 자체가 다르기에 이건 애초에 게임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형님이 괴물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종의 차이를 무시하고, 오로지 스스로의 재능과 잠재력만으로 용종은 물론 악마종까지 모조리 쓸어 담고 죽이고 찢었으니까.
나는 그런 형님보다 더 강해져야한다.
그러니까..
‘킹 슬레이어 칭호.’
형님도 얻지 못했던 이 칭호를 끝까지 개화 시킬 것이다.
손으로 허리춤에 있던 슈타이어를 쓰다듬었다.
가을이 왔으니 이제 추수를 해야 한다.
세 번째 왕은, 누구로 하는 게 좋을까.
가장 거슬렸던 놈,
창주槍主 발라티에.
그래, 그놈부터 시작하자.
어느새 나는 게이트가 설치된 곳에 와있었다.
고개를 들자 게이트 앞에 있던 마법사와 눈이 마주쳤다.
그가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당연히 저 마법사의 이름은 모른다.
율리우스가 컨트롤하는 마탑중, 흑마탑 소속의 마법사라는 건 분명한데.. 그거랑은 좀 별개로 그가 입고 있는 로브가, 꽤나 괜찮아 보인다.
얼굴을 툭 쳤다.
오슨의 얼굴과 체형이 사라지고, 내 본래의 체형이 드러난다.
조용히 마법사를 바라보자, 시선을 느낀 마법사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는 변한 내 외모에 뒤로 주춤 물러선다.
당황한 표정을 넘어 저건 경악에 가까운 표정이었다.
“입고 있는 그 로브 벗고 게이트 열어.”
오슨 발리스타라는 이름을 방패로 나는 꽤나 많은 일을 하려고 했었다.
조금 자세하게 언급하면, 대신관을 죽이고 귀족을 죽이고, 남은 마스터를 모조리 죽이고, 한수아의 매혹을 이용해 다른 이를 오슨으로 바꾼 뒤에 이도라는 내 이름으로 그를 죽인다.
그게 침식이 시작되기 전 까지의 내 계획이었다.
하지만 판이 뒤집어졌으니, 새로운 판을 짜야하지 않겠는가.
이제 방패 따위는 필요 없다.
겁먹은 표정의 마법사가 황급히 로브를 벗어서 건네준다.
입고 있던 곤룡포를 인벤토리에 집어넣고 마법사의 로브를 걸쳤다. 그런 나를 향해, 마법사가 묻는다.
“게이트...게이트는.. 어디로..?”
뒤에 달려있던 후드로 얼굴을 가리고 대답했다.
“발라티에 왕국.”
*
“대화를 하고자...”
서걱-!
창주槍主 발라티에는 조용히 창날에 묻은 피를 털어냈다.
그리고는 싸늘한 눈으로 죽어있는 ‘고블린’을 내려다보았다.
방금 뭐라고 했더라.
굳이 전쟁을 할 필요가 없다고? 대화를 하자고?
개소리다.
고블린은 그저 죽여야 할 대상일 뿐, 대화를 할 대상은 아니다.
적어도 발라티에는 그렇게 생각했다.
주변을 둘러보자, 수많은 사람들이 물자를 나르고, 제각기 갑옷을 챙겨 입는다.
하지만, 너무 느리다.
“서두르거라!! 물자를 챙겨놓으라고 명령한 게 대체 언젠데 아직까지도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야!!!”
“죄.. 죄송합니다!!!”
발라티에는 매우 못마땅한 표정으로 주민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번 일갈을 터트려주자 사람들이 움직이는 속도가 한층 더 빨라지긴 했지만, 이것도 만족스럽지가 않다.
젠장.
발라티에는 고개를 들어 눈앞에 있는 게이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고개를 돌려 긴장한 표정을 짓고 있는 ‘사도’들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아무리 생각해도.
‘사도라는 존재가... 굳이 필요한가?’
그들은 약하다.
솔직히 잠재력은 인정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병사들과 사도들을 방패로 삼아 고블린들을 몰아내고.. 상대 마스터 고블린을 죽이면... 그래, 이건 기회다.
발라티에는 슬며시 웃고 말았다.
‘더 높이 올라갈수 있는 기회,’
문득, 머릿속에 권주와 궁주가 대화하던 모습이 떠오른다.
황궁에서, 오슨을 죽이자고 이야기하던 그때의 그 모습.
‘병신들.’
오슨의 말대로 대륙의 모든 마스터들은 제각각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다.
아니, 일종의 반역이라고 하는 게 좋을 듯싶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이렇게 고블린 세상으로 쳐들어가려는 이유는 하나였다.
머릿속에, 대신관 베네딕 메디치와 대화하던 그 순간이 떠오른다.
-나는 말이야. 다른 이들보다 그대가 황제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있었네 .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 겁니까?
-뭐겠나? 내가 그대를 지원해주겠다는 이야기지. 그대가 율리우스를 죽인다면 내가 데리고 있는 엘리자베스와 그대를 한번 맺어보게 만들까 하는데... 어떤가? 마음에 드나?
발라티에는 코웃음을 쳤었다.
-믿으라고 하시는 말씀은 아니시겠죠.
-그 증거로 그대에게 2만의 전투 신관들을 지원해주겠네. 그 신관들로 고블린들을 죽이시게. 위명을 쌓아보라는 말일세. 다른 이들에 비해 그대는 특히 위명이 부족해. 그건 자네가 더 잘 알지 않은가?
발라티에는 미심쩍었지만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대신관 베네딕 메디치.
교황이자 대륙에 존재하는 수백 개의 신전을 다스리는 뒷세계의 지배자.
그는 황제의 명령을 무시하고 황궁으로 오지도 않았다.
정말로 미심쩍지만, 대신관은 적으로 삼기에는 너무 위험하다.
반란에 성공해서 황제가 된다고 해도 메디치와는 양립해야한다.
그가 데리고 있는 병력은 어림잡아 수십 만이 넘어가고 성녀라는 존재를 어필하면 신전에 소속된 어린 아이고 노인이고 여성이고 할 것 없이 그 모두가 전투원이 될 테니까.
생각은 끝났다.
그렇게..
“전군! 진입한다!”
“충!!!"
발라티에가 게이트로 걸음을 옮기는 것과 동시에 10만의 병사들과 약 2만 명가량의 신관들이 발라티에를 따라 움직였다
시련자들도 만반의 준비를 갖춘 그때, 후드를 뒤집어 쓴 한 남자가, 조용히 발라티에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