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1차 침식(1)
밖으로 나온 나는, 나를 기다렸다는 듯 회랑에 자리를 잡고 있는 왕들을 보게 되었다.
우람한 체구의 권주를 기준으로 양옆에 서있는 창주와 궁주.
“이제 나오는군. 물을게 있다.”
권주의 물음에 그와 눈을 맞췄다.
“매캐넌은 왜 죽인거지?”
대답하지 않자.
“허.. 이놈이거 대련해달라고 떼쓰던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머리가 컸나? 묻지를 않았느냐 왜 죽였냐고.”
창주 발라티에가 거만한 표정으로 끼어든다.
“왜 죽였냐... 글쎄. 어차피 황제는 단 한명만 될 수 있는 거 아니던가?”
“...뭐?”
세 마스터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진다.
그리고 다급하게 주변을 살피는 게, 혹시 들은 자가 있나 확인하려는 것 같다.
그중 궁주는 황제라는 말이 나오기가 무섭게 손을 뻗어 기운으로 장막을 만들었다.
그 모습들에 웃음이 터져 나온다.
내게 죽은 오슨을 비롯해 매캐넌까지. 그 둘이 반란을 꾸미고 있었고 그 두 놈이 전생의 불씨를 당겼다고 해도, 나머지 왕들은 가만히 있었을까?
아니, 이 세 명도 반란을 꾸미고 있었다.
황제의 곁에 있는 고위급 귀족들과 커넥션을 갖고 안 보이는 곳에서 지들끼리 눈치싸움을 하는 등..
이 대륙은 그냥 개판 오 분 전 그 자체였고, 그 오분전 상황에 시련자들이 등장한 것이다.
정말, 생각 할수록 웃긴 상황이다.
“이놈이... 드디어 미친것이로구나. 그래서 매캐넌을 죽였다고? 반란을 꾸몄기에? 네놈도 마찬가지 아니더..!”
창주가 붉어진 얼굴로 외치자 권주가 손을 들어 창주의 어깨를 붙잡고 그의 말을 끊는다.
권주가,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게 전부인가?”
권주, 외모는 동양적인 외모와 서양적인 외모가 섞여 있다고 해야 할까.
내가 알기로 권주의 나이는 40대가 훌쩍 넘어간다.
그런데 꽤나 젊어 보인다.
지금 만나러간다는 영화 속에 나오는 남자 주인공과 매우 비슷하게 생겼다고 해야 할까.
그리고 그 몸에서 뿜어 나오는 기도 자체도 다른 마스터들과 다르다.
이놈은, 강자다.
그런데.
“그 이상 뭐가 필요하지?”
“...아니, 필요 없지. 그래 그거면 충분하지.”
권주가 피식 웃었고, 나는 그대로 걸음을 옮겼다.
그 셋을 지나쳐 갈 때는 긴장의 끈을 꽉 조였지만 이들 셋은 그저 나를 노려볼 뿐이었다.
하긴, 여긴 황궁이다.
거기다 침식이라는 말 같지도 않은 비현실적인 일이 벌어지고 있으니, 신중을 기하는 이 셋이 무언가를 한다는 건 개연성이 없다.
그런데.. 이 말은 해둬야겠다.
잠깐 멈춰선 채로 고개를 돌렸다.
눈매를 찌푸리고 있는 권주와 다시 눈이 마주친다.
“고블린들과 싸우다보면 말이야. 아마 누군가는 죽지 않을까?”
“무슨 말을 하려는 거지?”
다시 권주의 눈을 바라보았다.
정말로 내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모르는 듯한 눈빛이다.
아니, 이렇게 말해줬는데 눈치가 그렇게 없나?
“발바라 대륙 말고, 그쪽 세상에서 ‘대화’ 좀 나눠보자 이거지. 이쪽에서는 워낙 눈치 볼 게 많잖아? 황제는 물론 귀족들에다가 대신관까지, 나는 니들한테 할 말이 정말 많은데 그게 참 아쉬워.”
권주를 비롯한 둘의 이마에 힘줄이 돋아난다.
당연히 무시했다.
“난 게이트가 생겨나자마자 바로 거기로 들어갈 거다. 할 말 있으면 따라와.”
그 말을 끝으로 나는 그들을 지나쳤다.
*
이도의 모습이 모퉁이 너머로 사라지자 궁주가 어이가 없다는 듯 말을 토해냈다.
“...권주님 방금 보셨습니까? 저 새끼 웃던데요?”
“명색이 마스턴데, 말은 좀 골라서 하거라.”
궁주가 머리를 긁적인다.
권주는, 말없이 고개를 돌렸다.
이도가 사라진 모퉁이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권주는 생각했다.
율리우스와 오슨 발리스타.
이 두 놈이 합친 건 확실한데, 대체 무엇을 노리는 건지 짐작조차 가지 않는다.
오슨은 야욕이 대단한 놈이다.
그런데 최근 모습을 보니, 마치 아예 황제 쪽에 붙기로 작정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권주는 확신했다.
놈이, 다른 이들도 아닌 오슨 발리스타 그놈이 황제의 자리를 포기 할 리 없다.
권력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놈이니까.
행동 자체가 너무 모순적이다.
그리고 뭐? 대화를 나눠보자? 이쪽 대륙이 아닌 저쪽 세상에서?
그리고, 고블린한테 누군가는 죽을 거라고?
저건 사실상 '도전'이나 다름이 없었다.
“...에르큘.”
“예?”
권주가, 모퉁이에서 시선을 거두지 않은 채 말을 이었다.
“오늘, 오슨 발리스타를 죽인다.”
“...권주님도 꺼림칙하죠? 사실 저도 그러고 싶었는데. 우리 통한 겁니까?”
가볍게 웃는 궁주와 창주와는 다르게, 권주는 웃지도 않았다.
그저 말없이 모퉁이를 바라보며 한마디 툭 내던질 뿐.
“그래, 통했다.”
**
모퉁이에서 멈춰서있던 나는,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그들이 들려준 대화다.
마스터의 경지에 이른 그들이 모퉁이에서 멈춰있는 나를 감지하지 못하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
그런데, 말이 참 거슬린다.
나를 죽이겠다라...
뉘앙스가 너무 뻔했다.
이건 경고다.
더 이상 기어오르지 말라는.
그리고 다시 와서 고개를 숙이라는 최후통첩.
당연히 받아들일 생각은 없다.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하는데, 사람이라고 다를까.
‘이 정도 도발로는 모자라지만... 적어도 두 놈 이상은 오겠지.’
내가 하려는 일은 간단하다.
오늘, 1차 침식이 끝나기 전 저 셋은 모조리 죽는다.
고블린들이 아닌 내 손에.
나는 권주가 준 ‘기회’를 걷어차고 그대로 발리스타 왕국으로 돌아갔다.
*
막혀있던 둑이 무너져 물이 터져 나오듯, 이후의 일들은 모두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저마다 무슨 생각을 품었건 간에, 전 대륙이 ‘전쟁’ 준비를 시작했고, 당연히 발리스타 왕국도 예외가 아니었다.
내 말이 기폭제가 되었을지는 모른다.
어차피 놈들은 살아남기 위해서건 유명세를 떨치기 위해서건 그 어떤 이유로든 움직이게 되어있으니까.
혹은 나를 죽이기 위해서라도 놈들은 무조건 움직인다.
나는 광장에 마련되어있던 높은 단상에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현재 발리스타 왕국 소속의 모든 시련자들, 숫자는 대략 130, 그리고 내 뒤에서 대기하고 있는 에덴 소속의 세 시련자까지.
그들을 제외하고 발리스타 왕국의 수많은 주민들까지.
어림잡아 수십만이 넘는 이들이 광장에 있었고 그 너머 건물들 뒤편에도 사람들이 빼곡하다.
심지어 그 주민들 중에는 기사들과 병사들도 존재했다.
즉, 발리스타 왕국에 소속된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자리에 있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온건 아니겠지만, 그래도 확실히 올만한 사람은 다 왔다.
소천의 일처리가 생각보다 뛰어난 듯싶다.
조용히 옆에 있는 한수아에게 눈짓하자. 한수아가 그 뒤에 서있던 지그문트에게 무언가를 속삭였다.
잠깐 인상을 굳힌 지그문트가, 감격한 표정으로 손을 들어 올리고는 주문을 외운다.
마나가 그의 주변으로 모이더니, 이내 그곳에서 수많은 아이템들이 후드득하고 쏟아지기 시작했다.
발리스타 왕국 창고 안에 있던 아이템들과, 매캐넌 왕국 창고에 있던 아이템들이다.
그 수는 무려 수백이었으며, 하나하나 최소 레어 등급에서 높게는 유니크 등급까지 매겨진 아이템들이다.
물론, ‘내 사람’인 세 명의 시련자에게는 유니크 아이템들로 떡칠해주고, 이건 그 남은 부스러기들이다.
당연히 내가 원하는 아이템은 없었다.
평범한 시련자들의 눈동자가 약간의 탐욕으로 번들거리던 그때.
“짧게 말하지.”
모두가 나를 바라본다.
“발리스타 왕국은 물론 대륙 전체는 오늘부터 전시체제로 돌변한다.”
뜬금없는 내 말에, 조금씩 동요하는 자들이 생긴다.
신경 쓰지 않았다.
“우리는 다른 세상과의 전쟁을 해야 할 것이며, 패배하는 즉시 발바라 대륙은 멸망한다.”
천천히, 란지에의 검집에 손을 올려놓았다.
“이번 전쟁’의 승리 요건은 두 가지다. 상대 쪽의 황제를 죽이고 그 황제를 호위하는 다섯의 ‘마스터’를 죽이는 것.”
누군가는 생각할 것이다.
그러면 결국에는 마스터끼리 싸움이 아니냐고.
맞다.
부정할 생각도 없다.
내가 왜 거슬리는 시련자들을 모조리 죽였겠는가.
내가 필요한 건 소수 정예다.
앞으로 벌어질 모든 ‘침식 전쟁’은, 모두가 이런 식으로 힘을 가진 자들 간의 싸움이다.
막말로 상대 쪽의 마스터들과 황제, 그리고 우리 쪽의 마스터들이 한 곳에 자리 잡고 일기토를 벌이면 승자와 패자가 너무나도 깔끔하게 갈려진다.
하지만 그건 거의 동화속 에서나 일어날 법 한 일.
이쪽 세상에는 병사가 존재한다.
상대쪽 세상에는 병사가 없을까?
그 병사로 물량 공세를 펼쳐서 상대의 힘을 약화시킨다면?
힘을 약화시킨 상태에서 싸운다면?
어차피 지는 쪽은 멸망 할 수밖에 없다.
그러니까.
저쪽에서는 병력을 몰고 올 것이다.
당연히 우리도 병력을 몰고가야한다.
하지만,
“희생을 강요할 생각은 없다. 대의를 위해 희생하라고 등을 떠밀 생각도 없다. 목숨 걸고 싸우라고 강요 하지도 않는다. 그저 살아남아라. 발리스타 왕국의 모든 주민들은 방어에만 치중하라. 이 내가, 상대의 모든 왕들을 죽일 테니까.”
이게 내 방식이다.
잠깐 말을 멈추고는, 정면을 응시했다.
“이 대륙의 멸망을 막기 위해 나는 멈추지 않을 것이다.”
확신과 단호함이 새겨진 내 말에, 누구는 울먹이고, 누구는 감격했는지 몸을 떤다.
조용히 허리춤의 란지에를 뽑아들었다.
스르릉하는 청명음이, 광장 전체를 둘러싼다.
그리고, 땅에 꽂았다.
항상 생각하고, 항상 되짚었던 그 한 구절을, 속으로 생각했다.
'내 한 목숨, 세상과 인류를 위해 바치노라.'
어차피 내게 뒤는 없다.
지금껏 저질렀던, 그리고 앞으로 저지를 미친 짓은 결국엔 승리를 위한 것.
조용히 고개를 들었다.
"우리는, 오늘 승리한다."
내 말이 파동이 되어 널리 퍼져나가고, 그 안에 내 진심이 담긴다.
잠시간 적막이 주변을 휩쓸었다.
[천상의 학살자가 감회어린 눈으로 당신을 바라봅니다.]
모두가 그 자리에서 천천히 무릎을 꿇는다.
입을 여는 자도, 속삭이는 자도 없었다.
수십만이 넘는 이들이, 나를 바라보고 나를 향해 경배한다.
내 의지를 읽었기에.
띠링!
[천상의 학살자가 당신에게 10,000,000 코인을 후원합니다.]
[시작을 알린 아룡이 당신에게 10,000,000 코인을 후원합니다.]
[선善에서 군림하는 자가 당신에게 10,000,000 코인을 후원합니다.]
벌어지는 일련의 상황들로 눈치 챘겠지만 신들은 내가 드래곤 하트와 광전사의 갑주를 후원 받고 난 뒤, 그 이후로 나에게 후원을 해주지 않고 있었다.
이유는 뻔했다.
내가, 지금 가지고 있는 게 너무나도 많기 때문에.
하지만 지금, 나는 셋의 마음을 움직였다.
이걸 노린 거냐고? 아니다.
띠링!
[업적! 「죽음을 각오한 지휘관」을 달성하셨습니다.]
[당신, 연기를 잘하시는 건가요. 아니면 합리화를 잘하시는 건가요. 설마.. 진심은 아니겠죠?]
[10,000,000 코인을 획득하셨습니다.]
...중략-
그러면 이걸 노린 거냐고?
이것도 아니다.
나는 지구를 구할 것이다.
이건 내 각오다.
절대로 변하지 않을 것이며, 모진 풍파를 앞에서 모두 받아내겠다는 내 진심어린 각오.
그 각오를 다시 한 번 내 몸에 새기려는 목적이 더 크다.
언젠가 언급 한 적이 있었다.
내 목적들은 대의大義가 아닌 자기만족自己滿足이라고.
당연히 누군가를 설득 할 생각도 없고 이해를 바랄 생각도 없다.
나는, 내가 해야 할 일이 뭔지 알고 있다.
침식을 가장 안전하고 피해 없이 끝내는 것.
항상 생각했었다.
대체 어떻게 해야 침식을 가장 안전하게 막아낼 수 있을까.
지구로 돌아가서 멸망을 막으려면, 대체 어떤 방법이 가장 확실한 방법일까.
당연히 나는 그 답을 안다.
누구보다 강해지고, 침식이라는 거대한 ‘장치’와 시스템이 나를 세상의 대표로 인정하게 만드는 것.
그렇게 모든 적들의 시선을 나에게 집중시키는 것.
형님은 그 방식을 고수했었지만 딱 하나가 부족했다.
너무나도 우유부단 성격.
그 성격 때문에 지구의 인류와 시련자들 그 모두를 통합 시키지 못했다.
하지만 나는 다르다.
나는, 형님과 다르게 거슬리는 놈들을 모조리 죽일 거니까.
그게, 내가 걸어가려는 길이다.
그 이후의 일? 모른다.
생각하고 싶지도 않다.
나는 앞만 보고 걸을 거니까.
그러다 보면 이 에피소드의 결말 부분에 다다를 수 있겠지.
땅에 박힌 란지에를 뽑아들었다.
현재 시간 19시 59분 50초.
51초... 52초..
20시가 되는 순간.
찌이이이잉-!!
앞쪽에서 거대한 빛무리가 내려찍힌다.
빛이 퍼져나가며 허공이 기이하게 일렁이기 시작했고, 이내 금이 가듯 쩌쩌적 하는 소리와 함께 공간이 찢어졌다.
정확히는 침식 게이트, 차원문이라 불리기도 하지만 통칭 그냥 '게이트'다.
그렇게, 작았던 게이트가 점점 공간을 넓혀간다.
광장에 있던 사람들과 게이트와 가까워졌던 이들이 뒤로 물러서기 시작했고, 게이트는 길이가 약 백여 미터에 달하고 나서야 멈췄다.
띠링!
[제 1차 침식, 발바라 대륙과 페넬리움 대륙과의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침식 게이트는 판테온 제국 광장, 발리스타 왕국 광장, 에르큘 왕국 광장, 리오넬 왕국 광장, 발라티에 왕국 광장 총 5개의 국가에 활성화됩니다.]
[카운트가 시작됩니다.]
[71:59:59]
[무운을 빌겠습니다.]
자. 시작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