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를 한다는 건-42화 (42/131)

42화. 건방지기도 하고(2)

제국에 도착했다.

주변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높게 솟은 첨탑만 무려 여섯 개, 거대한 돔이 서너 개, 어마어마하게 드넓은 광장과 고딕 양식의 화려하게 지어진 건축물들.

아름다웠다.

지구에서 한 20세기의 바티칸 시티가 이런 모습이지 않았을까.

그리고 내가 있는 곳은, 그 어떤 건물들보다 높았으며 그 어떤 건물들보다 웅장했다.

베르사유 궁전은 거의 어린애가 만든 건축물이 아닌가 싶을 정도다.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지리? 모른다.

하지만 이 황성 내부에서부터 뿜어져 나오는 농도 짙은 기운들.

굳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이건 마스터들이다.

그 기운이 밀집해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회랑을 지나, 대리석 계단을 올라갔으며 여유롭게 거대한 샹들리에를 감상했다.

그리고, 눈앞에 보인다.

거대한 문,

주변에는 위압감이 넘치는 기사 조각상이 두 개, 그 옆으로는 마법사 조각상이 두개 자리해있었으며 문에는 그림이 양각되어있었다.

무시하려다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림이, 꽤나 사실적이다.

전쟁을 표현 한 걸까.

피가 튀기고 살점이 사방으로 터져나가는 그 서늘함이 온몸으로 느껴 질 정도다.

그리고 그 한중간에서 검 한 자루를 하늘 높이 치켜들고 있는 인물이 보인다.

왕관을 쓴 채로 홀로 빛나는 그의 모습은 유독 다른 이들에 비해 압도적인 존재감을 뿜어내고 있었다.

아... 이게 그거구나.

그 말로만 듣던 제1차 대륙 전쟁에서 대륙 전체를 통일한 선왕 레이놀즈 판테온.

문득, 그 남자가 입고 있는 갑옷과 무기가 눈에 걸린다.

저거... 분명 이쪽 대륙 어딘가에 있을 텐데.

유물로 존재할까. 아니면 전설급으로 존재할까.

혹은, 더 나아가 신화급으로 존재 할 수도...

감상은 여기까지였다.

황궁의 대전.

그 앞에 있던 근위병이, 조용히 문을 열었다.

천천히 안으로 들어가자 가장 높은 단상위에 앉아있던 율리우스와, 그 아래 단상에서 짜증난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세 명의 마스터들. 그리고 호위가 목적인지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근위병들이 보인다.

가장 보고 싶었던 대신관은 없었다.

대전에 있던 모두의 시선이 내게 집중된다.

내가 아무 말 않고 가만히 있자, 등에 거대한 활을 걸치고 있던 한 남자가 먼저 물었다.

“중대하게 발표할게 있다고 하더니 그게 대체 뭐지?”

힐끗 고개를 돌려 율리우스를 바라보자 놈이 슬쩍 한쪽 눈을 찡긋한다.

픽 웃었다.

“..웃어?”

궁주弓主 에르큘, 그가 나를 노려본다.

나도 모르게 혀로 입술을 핥았다.

그뿐만이 아니라 그 옆에 있는 남자.

마치, 사막에서 온 것 같은 구릿빛 피부와 양 팔을 완전히 감싸고 있는 꽤나 두꺼운 건틀렛.

저건 딱 봐도 최소 전설 이상의 아이템이 분명하다.

그 옆에는 언젠가 보았던 암살자들처럼 꽤나 마른 체격의 남자가 거의 2m에 달하는 장창을 들고 있었는데,

마치 장팔사모를 들고 있는 멸치를 보는 것 같다.

메시지창이 갱신되지는 않았으나 악신들과 선신들도 나를 지켜보고 있을 것이다.

정말로 흥미진진하게.

하아..

지겹도록 언급했지만 나는 황제가 되려한다.

당연히 황제가 되려면 거슬리는 돌들을 모조리 치워야하는데, 그 돌들이 지금 눈앞에 전부 존재한다.

그것도 너무 가지런하게.

하지만 지금은 참아야한다.

이놈들을 써먹을 데가 딱 한군데 남아있으니까.

고개를 들었다.

의아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마스터들과 황제가 보인다.

짧게 심호흡하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제가 데리고 있는 사도중 이도라는 사도가 있습니다. 그가 제게 재미있는 말을 하더군요.”

뜬금없는 내 말에 궁주는 물론, 모든 마스터들과 황제까지 모두가 내 입을 주목한다.

“이렇게 말하더랍니다. 이 침식이라는 건 전쟁의 또 다른 형태이며, 패배하는 세상은 그 세상의 생명체 자체가 그대로 멸망한다는 새로운 개념이라고.”

“...”

“맞습니다. 이건 일종의 게임입니다. 운영자라는 ‘신’들이 두 개의 진영을 싸우게 만들고 승리하는 한쪽만 살아남게 하는 좆같은 게임. 그리고 이 침식은 계속해서 벌어지게 될 겁니다.”

감정이, 또 다시 들끓어 오르려한다.

란지에의 검 손잡이에 팔목을 슬며시 올려놓았다.

검이 살짝 빛나며 들끓던 감정이 가라앉는다.

후우..

지구에서 벌어진 침식 전쟁은 무려 13번.

그리고 형님과 시련자들은 12번의 침식을 막아냈다.

마지막 침식은 정확히 지구의 패배라기보다는 ‘무승부’에 가까웠다.

젠장.

무승부도 기적이었다.

형님과 형님 쪽에 서있던 시련자들은 침식을 막기에도 바쁜데 중간 중간 소환되는 몬스터들로 일반인들의 피해가 속출하고, 판링링같은 정신병 걸린 년들은 잡으라는 몬스터는 안 잡고 막으라는 침식도 막지 않고 권력을 쌓고 즐기는 데에만 시간을 소비했으니.

씨발.

12번을 버틴 것도 기적이나 다름이 없었다.

천천히 심호흡했다.

그런 미래를 아는 건, 나 혼자면 족하다.

란지에를 쥐고 있었음에도 피어나오는 내 감정이, 조금씩 흘러나와 대전을 잠식한다.

마스터들과 황제의 눈빛이 묘하게 변했다.

무시하고 말을 이었다.

“지금부터 우리는 사도들과 함께 그들이 겪는 ‘시련’이라는 걸 함께 겪어야합니다.”

“잠깐.”

그때 황제가 끼어들었다.

“침식이라는 것에 대해서 대신전 조차 모르고 있던 그 사실을, 그 ‘이도’라는 사도가 어떻게 알고 있는 건가?”

놈의 눈동자가 호기심으로 일렁인다.

내 정체를 알고 있는 놈이 나를 떠보려는 걸까. 아니면 내 말의 진위성을 파악하려는 걸까.

놈의 페이스에 말려들 생각은 전혀 없었다.

“믿지 않으시면 그대로 대륙은 멸망할겁니다. 고블린들이라 해도 ‘마스터’라는 칭호라 불린다는 건 일반 고블린이 아니라 검강을 사용하는 고블린이라는 뜻입니다. 종의 차이를 감안하면 이번 침식은 비교적 쉽겠지만 그 뒤에는 대체 어떤 존재들이 모습을 드러낼지, 한번 생각해보셨습니까?”

대전 전체가 침묵에 잠겼다.

저마다 무언가를 생각하는 표정이다.

나와 황제의 대화, 그 속에 담긴 것들을 어떻게 이용해야 자신들에게 이득이 될까, 혹은 저 말을 어디까지 믿어야할까.

그런 잡생각 이상의 것을 하고 있겠지.

무시하고 말을 이어갔다.

“사도들은 지금 너무나도 약합니다. 그들을 일일이 키워서 멸망을 막는다? 대체 어느 세월에? 그래서 이 자리를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대체 하고 싶은 말이 뭔가?”

조용히 주변을 둘러보며 마지막 비수를 꽂았다.

“같이 좀 살자는 겁니다. 헛짓거리 하다가 같이 뒤지고 싶진 않으니까.”

*

그 이후 이어지는 내 이야기는 길지 않았다.

그냥, 헛짓거리 하지 말고 침식이 시작되면 일단 힘을 합치자라는 그런 이야기를 조금 풀어서 이야기 했을 뿐.

그렇게 모두를 돌려보내고 나는 황제와 짧은 독대의 시간을 가졌다.

명목상으로는 매캐넌을 죽인 이유에 대한 추궁이지만 실상은 거의 칭찬에 가까웠다.

“어디, 몸은 좀 괜찮습니까?”

“일단은.”

대전에서 존대를 하던 나와, 반말을 하던 황제의 위치가 완전히 반전되었다.

황제가, 아니 율리우스가 희미한 미소를 피우며 나를 바라본다.

“매캐넌을 죽여준 건 정말 감사드립니다. 그때 말씀 하셨던 것처럼 술이라도 한잔 하고 싶지만, 아쉽게도 시간이 별로 없네요.”

아쉬운 건 나도 마찬가지다.

술을 같이 못해서?

아니.

나는 율리우스와 직접 대면하는 그 순간을, 내 ‘계획’의 클라이막스 부분에 집어넣었었다.

그런데 일이 틀어진 것이다.

정말, 여러모로 아쉽다.

“그런데 아까 말씀하셨던 그거, 정말입니까?”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자.

“신들이 게임을 한다는 부분이랑, 침식 전쟁에서 졌을 때 당하게 될 신들의 징벌이라는 게, 멸망을 뜻하는 거라는 그 부분이요.”

“그래, 사실이다.”

“...그렇군요.. 이번 침식에서 제가 도와줄 거라도 있습니까?”

놈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해맑다고 해야 하나.

감투를 벗어 던진 율리우스의 모습은 대전에서 보여주었던 묘한 존재감은 거의 없는, 마치 사람의 분위기 자체가 완전히 바뀐 것 같은 모습이었다.

“됐고, 이렇게 따로 부른 거보니까 나한테 뭐 줄거 있는 것 같은데. 시간별로 없으니까 깔끔하게 본론으로 들어가자.”

율리우스가 웃으며 손짓했다.

그러자 허공에서 작은 균열이 생기더니, 언젠가 내게 총 맞았던 그 '첩자'가 모습을 드러낸다.

“신기하네. 투명화 마법인가?”

첩자가 품에서 작은 상자 하나를 꺼내 율리우스에게 정중하게 건넸다.

상자를 건네받은 율리우스가 내 물음에 대답했다.

“정확히는 투명화 마법에 은신술이 겹쳐진 결과죠. 제가  가장 신뢰하는 이들 중 한명입니다.”

첩자 놈이 몸을 움찔 떠는 게 느껴진다.

그 모습에 나도 모르게 실소를 짓고 말았다.

율리우스야 너 혹시 그거 알고 있냐?

저놈 말이야. 자기 목숨 위험해지니까 바로 네 이름 팔던데.

웃는 얼굴로 율리우스를 바라보자, 그가 첩자에게서 건네받은 상자를 내게 건네준다.

열어보니 아무 무늬 없이 평범해 보이는 은색 반지 하나가 들어있었다.

들어 올리고는 정보를 확인했다.

[마테리아의 골렘 소환석][유물遺物]

-두기의 골렘을 소환할 수 있다.

-골렘은 시전자의 명령에 절대적으로 복종하며 그 힘은 시전자의 수준에 따라 달라진다.

-골렘은 산산조각 나도 복구된다.

이런 젠장! 이건 실패작이라고!! 이딴 게 무슨 골렘이야!! -???

동시에 띠링 하는 소리와 함께 유물을 획득했다며 100만 코인을 얻었다는 메시지창이 떠올랐다.

"고대 제국 마테리아에서 만들어졌다던 소환석입니다. 마나를 불어넣으면 두기의 골렘을 소환할 수 있죠. 제가 해 드릴 수 있는 게 이것 말고는 없네요."

조용히 율리우스와 눈을 맞췄다.

상승된 감각과 내 경험을 바탕으로 놈을 봐도, 솔직히 잘 모르겠다.

진심인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그 안에 미약한 경계심 비슷한 것도 담겨져 있으며. 그 안에는 묘한 호감까지도 보인다.

감정을 숨겨주는 ‘신물’ 같은 게 있는 걸까.

아이템을 구경하는 척 하면서 계속 생각했다.

황제인 율리우스의 입장에서 사도라는 존재는 정말이지 너무나도 좋은 카드다.

조금만 자세하게 말하자면.

율리우스뿐만이 아니라 왕들은 물론 제국에만 존재하는 귀족들까지. 그들 모두는 사도들에 대한 정보를 수집 했을 것이다.

명색이 사도라 불리지만, 같은 지성을 가진 인간이다.

사도들이 멸망을 막는다는 계시가 내려왔다고는 해도 그들에 대한 조사를 하지 않는다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

길게 말할 것도 없다.

사도들은, 결국 지구로 돌아가기 위해서건, 혹은 힘을 얻기 위해서건 무조건 발바라 대륙의 편에 설 수 밖에 없고, 당연히 그런 사도들을 대하는 발바라 대륙의 기득권층의 태도도 당연히 우호적일 수 밖에 없다.

일단 나만 봐도 이미 오슨을 죽이고 매캐넌을 죽인 괴물이다.

언젠가는 돌아가게 될 이들이지만 대륙의 편에 서서 싸워 줄 뛰어난 전력.

너무나도 좋은 카드, 아니 그 이상이다.

사실, 이게 당연한 결과고 이게 당연하게 벌어졌어야하는 과정이다.

전생에서 악마라 불리며 권력 싸움의 희생양이 되어 몬스터와 인간을 동시에 학살하던 시련자들은, 이 세상에 없다.

내가 그렇게 만들거니까.

생각을 정리하고, 율리우스를 바라보며 물었다.

“만약에.”

놈의 반응과 표정, 그 모든 것에 감각을 집중했다.

“대륙을 구원하기 위해서, 네가 황제의 자리에서 내려와야 한다면 어떻게 할 거지?”

율리우스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피어오른다.

“내려올 겁니다. 망설임 없이.”

율리우스의 표정에는 변함이 없었다.

아니, ‘진심’이 보이기는 하지만 이걸 믿어야할까.

한번만 더 묻자.

“대륙을 구원하기 위해 네 목숨을 바쳐야한다면?”

“당연히 바칠 겁니다. 제 목숨 따위.”

율리우스의 표정과 감정에는 한 점의 떨림조차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걸로 확신했다.

이놈은 여전히 가면을 쓰고 있다는 것을.

어쩌면 전에 통신을 했을 때도 내게 표정을 보여주던 그 모든 순간들이 전부 ‘의도’ 했던 것 일수도 있다.

내가 직접 보고 파악한 율리우스는 그런 놈이다.

감정을 쉽게 드러내지 않는 남자.

튜토리얼에서 내 뒤통수를 치던 한태식을 처음 봤을 때 이런 느낌이었지 아마?

약간 흔들리려던 내 마음이, 중심을 잡는다.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침식부터 막고, 왕들도 정리하고 그때 다시 보지. 아마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다.”

그대로 몸을 돌려 응접실 출구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순간, 구석에 있던 거울이 내 얼굴을 비춘다.

내 눈은, 확고한 결심과 함께 싸늘하게 가라앉아있었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

이도의 뒷모습을 응시하던 율리우스는, 그가 완전히 밖으로 나가자 저도 모르게 실소를 터트리고 말았다.

“...재미있는 놈이네... 건방지기도 하고.”

율리우스의 눈동자도, 이도의 그것과 비슷하게 매우 싸늘하게 가라앉아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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