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화. 건방지기도 하고(1)
잠깐 퀘스트창을 응시하던 나는, 말없이 슈타이어를 꺼내들어 아무것도 없는 빈 허공을 향해 겨눴다.
어디쯤이더라..
이쯤인가.
'목표'를 잡고 방아쇠를 당겼다.
타아앙-!
퍼걱-
“헛..!”
분명 아무것도 없는 허공이었지만 안에서 피가 튀기고 한 남자가 스파크를 튀기며 튀어나온다.
입고 있는 복장은 언젠가 판링링에게 세뇌 당했었던 암살자들, 그들과 비슷해보였지만 풍기는 기도 자체가 다르다.
그 남자가, 핏물이 새어나오는 자신의 팔을 반대쪽 손으로 붙잡고 나를 올려다 본다.
나를 바라보는 눈빛이 믿을 수 없다는 듯 흔들리고 있었는데..
그딴 건 관심 없고.
“너 뭐냐? 아까부터 계속 쫓아오던데.”
“...”
“대답 안 해? 그냥 죽일까?”
다시 총구를 들어 올리자 그가 마치 항복을 하는 것처럼 손을 들어올린다.
“대답은?”
“...황제 폐하께서 보내셨습니다. 무슨 일을 하는지 지켜보라고.”
눈매가 슬며시 찌푸려진다.
황제라..
그러고 보니 게이트를 타고 판테온으로 왔을 때 누가 나를 불렀던 거 같은데.. 그게 황제였나?
“...”
잠깐 말없이 생각에 잠겼다.
황제라는 주제가 튀어나오자, 묘하게... 이질감이 느껴진다.
침식 경쟁이 벌써 시작된 이유는 내가 너무나도 강해졌기 때문이다.
조금 구체적으로 이야기하면 투자자라 불리는 신들과 시스템이 나에게 모든 초점을 맞춘 것.
에피소드의 전개 자체가 이렇게 침식으로 넘어갈 정도라면 이건 단순히 악신들만의 소행이 아니다.
왜 진영이 나눠져 있겠는가.
그들의 근본은 같다고 해도 성향은 다르다.
즉 그들은 서로를 견제한다.
하지만 지금 이 상황은, 그 세 진영의 신들 모두가 뭉쳤다는 뜻이다.
이건...
젠장.
또 퍼즐이다.
머릿속에서, 퍼즐 조각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근본적인 의문.
신들은 왜 시련을 설계한 걸까.
대체 왜 하등 관련 없어 보이는 지구의 인간들을 시련자로 만들어서 싸우게 만드는 걸까.
언젠가 형님과 대화하던 그 순간이 떠오른다.
-우리가 시련자가 된 이유는 ‘자격’에 근접했기 때문이라고 하더라.
-자격이요?
-그래 자격, 신격을 갖추고 신이 될 수 있는 자격, 표정이 왜 그래?
-...저 놀리시는 겁니까?
내 기억속의 형님이, 웃으며 내 머리를 흐트러뜨린다.
-내가 널 왜 놀리냐. 그외에 절대적인 이유가 하나 더 있는데... 내가 그 이유를 정말로 말해주고 싶거든... 그런데 그럴 수가 없네.
-...
-조급해하지마 인마. 넌 살아만 남아. 내가 모든 걸 끝내버릴거니까.
그 대화가 끝이었다.
그 이후로 형님은 시련의 ‘본질’에 대한 이야기를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다.
정답은 모르겠지만 정답에 근접한 답을 나는 안다.
그 본질은 분명 절대로 우리에게 ‘이득’이 되는 부분이 아니었다는 거.
이 부분은 체크.
어차피 이건 시간적인 문제일 뿐이다.
나는 형님을 뛰어넘을 것이고, 형님이 하지 못했던 일을 끝내려한다.
그때가 되면 나도 자연스럽게 알게 되겠지.
두 번째. 시련에는 엄청난 변화가 생겨났다.
신들은 분명히 내게 무언가 바라는 게 있다.
그게 뭔지 알아야한다.
단순한 대의? 그럴 리가.
단순한 유희? 말도 안 된다.
침식을 일으키는 주체는 신들이 분명하다.
아무리 범접할 수 없는 힘을 가진 존재들이라도 이런 말 같지도 않은 짓들을 벌이는데 합당한 이유가 없을 리 없다.
젠장.
머릿속에서 퍼즐이 맞춰지려고 해도 알고 있는 정보가 너무 없다.
회귀를 했음에도 이런 무력감이라니.
역시 답은 하나다.
힘을, 가져야한다.
생각은 천천히, 행동은 빠르게.
‘황제’. 그 업적부터 깨자.
순간 상황의 심각성이 잊히고 묘하게 군침이 돈다.
신들이 아무리 지랄 발광을 해봐야 놈들은 내가 회귀자라는 사실을 모른다.
내가 미래에 대해 무언가 해박하게 알고 있다는 그 사실은 아마 내 권능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겠지.
그게 예지력이거나, 혹시 정보 파악이라거나.
그리고 나는 형님에게 들어서 알고 있다.
Episode #39가 끝났을 때 형님의 신체 능력은 정확히 올 스텟 64레벨이었으며, 가지고 있는 스킬들은 대부분이 전설에서 신화급 스킬들이었다.
지금의 내가 혈기를 끌어올린다면 조금 대등하게 싸울 수 있을 정도라고 해야 할까.
그런 형님이 ‘황제가 되었다면 지금껏 얻었던 모든 코인은 우습게 보일 정도의 보상을 받으셨을 텐데요.’ 라는 말을 들었다.
하루 빨리 신격을 갖추려면 나는 필요하다.
코인이라는 수단이.
그 이상 생각을 이어가지 못했다.
“...저...”
여전히 팔 한쪽을 부여잡고 있는 그 황제의 ‘첩자’가 무언가를 말하려다 계속 망설인다.
“가서 황제한테 전해.”
“...뭐라고 전할까요?”
슈타이어를 허리춤에 꽂고, 시간을 확인했다.
현재 시간 18시 45분.
약 1시간 15분 뒤 침식 전쟁이 시작된다.
“10분... 아니, 20분 안으로 전 대륙의 마스터들과 대신관을 황궁으로 집합시키라고.”
“...예?”
“두 번 말하게 하지 말고,”
“..알겠습니다.”
그대로 몸을 돌렸다.
바로 황성에서 대기해도 되겠지만.. 굳이 그러고 싶지는 않다.
일단, ‘내 사람’들부터 챙겨야하지 않겠는가.
아 그전에.
미리 처리 해 둬야 할 일이 있다.
나는 자리를 박찼다.
주변 풍경이 훅훅 뒤바뀌고, 나는 처음 에릭을 만났던 그 장소에 와있었다.
그런데 내가 찾던 인물, 박유정이 없다.
그녀가 있던 자리에 이상한 종이 하나가 단검에 꽂힌 채 바닥에 박혀 있을 뿐.
천천히 걸어가 종이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실소를 터트리고 말았다.
이것 봐라?
-배지를 부순 건 정말 미안해요. 그 에릭이라는 남자가 저를 죽이려고 했고 어떻게든 살아나고 싶었어요. 배지로 계속 신호를 보냈고 결국 부쉈어요. 당신이 제발 찾아와줬으면 했는데.. 정말로 왔네요. 그래도 배지를 부순 건 정말 죄송해요. 사과드릴게요.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저를 구해주신 건 맞잖아요. 어떻게 해서든지 성장해서 당신한테 도움이 되어드릴게요. 그리고.. 다시 한 번 말씀드리면 배지를 부순 건 정말로 죄송해요. 그리고 시련자들 뒤통수도 안칠게요.
하하.. 박유정, 그 여자한테도 이런 면이 있었구나.
그 냉철하고 차갑디 차가운 표정을 유지하던 풍신의 이런 모습이라니.
연예인의 리즈 시절을 보는 게 이런 기분이지 않을까.
배지를 부순 게 미안하다고 무려 네 번이나 강조했다.
세 번도 아니고 네 번,
이건 그냥. 살려달라는 말이 아닌가.
조금 더 나아가면 그녀는 내게 빚을 졌고, 그 빚을 갚겠다고 이야기까지 한 상황.
웃음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나는 종이를 그대로 인벤토리 안에 집어넣었다.
그런데 조만간 다시 보게 될 텐데 그건 예상 했으려나.
픽 웃고는 제국에 위치한 워프 게이트를 타고 발리스타 왕국으로 돌아갔다.
*
이건 타이밍이 어긋났다고 하는 게 좋을까 아니면 타이밍이 맞았다고 하는 게 좋을까.
발리스타 왕국으로 돌아오자 소천이 한 중년 남성을 데리고 내게 고개를 꾸벅 숙인다.
“전하, 이분이 황제 폐하께서 보내신...”
“백마탑의 탑주, 지그문트라하오. 그대가 오슨을 죽였다던 그 사도요?”
눈매가 꿈틀 하고 떨려온다.
“대답을 하시오. 이 내가 묻질 않소이까.”
내가알기로, 제국에는 두 개의 마탑이 존재한다.
하나는 백마탑, 그리고 하나는 흑마탑.
그 두 탑을 다스리는 탑주는 마스터에 버금가는 힘을 가지고 있지만 엄밀히 말하면 마스터보다 아래다.
조금 자세하게 말하자면 그들은 마스터에게 대항할 수 없다.
이유는 스킬의 매커니즘이 결국 마법에서부터 파생 된 것이고 그 원류라 할 수 있는 마법은 주문을 외우고 마나를 자신들만의 술식에 맞춰서 재배치해야한다.
즉, 주문 하나를 외울 때마다 시간이 걸린다.
그 시간을 인간의 신체를 초월한 마스터가 지켜만 보고 있겠는가.
즉, 이들은 마스터들에게 굽힐 수밖에 없는 존재다.
그런데 그 마스터를 죽인 내게 이렇게 건방지게 나오는 건 무슨 이유일까.
지그문트에게서 시선을 떼고 소천을 바라보았다.
“가서 한수아 불러와.”
“...그리하겠습니다.”
그대로 팔짱을 끼고 눈을 감았다.
지그문트의 눈썹이 꿈틀하고 그가 뭐라뭐라 지껄이는데.. 그냥 무시했다.
1분 정도 지났을까.
가까워져오는 두 개의 인기척에 눈을 떴다.
근처에 있었던 건지 한수아가 소천과 함께 내게 다가오고 있었다.
“하... 저 여자도 사도인가... 신전의 계시로 인해서 불려온..”
블라블라.
다가오는 한수아를 향해 시선을 던졌다.
언젠가, 그녀에게 보냈던 눈짓이다.
한수아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지그문트에게 다가간다.
“저기...”
“?”
지그문트가 한수아와 눈이 마주친다.
그리고, 한수아가 그의 몸을 살짝 터치했다.
이내.
지그문트의 눈동자가 몽롱하게 풀린다.
그리고는 나조차도 예상하지 못한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크...크흐어허어엉...”
그대로 무릎을 꿇더니 울기 시작한 것이다.
“흐..흐어어.. 여신이시여.. 제가 잘못했습니다... 이런 불경한 마음을.. 크허흐어엉...”
....
소천이 당황한 채로 뒤로 물러서고, 한수아도 조금 당황한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그렇게 보지마 나도 당황스러우니까.
결국 한수아가 지그문트에게 다가갔다.
“괜...찮으세요?”
그대로 고개를 든 지그문트,
그의 얼굴은 정말.. 엉망이었다.
눈물과 콧물로 얼룩진 그 모습은 그냥 보기 안쓰러울 정도다.
만약 내가 매혹에 걸린다면 나도 저런 모습을 연출하게 되는 걸까.
무릎 꿇고 눈물 콧물 질질 짜는... 후.. 생각하기도 싫다.
“한수아.”
“예 이도님”
그때 지그문트가 끼어들었다.
“..무엄하다!! 감히 여신님께!!”
...에휴
“쟤 좀 입 닥치게 하고.”
한수아가 지그문트에게 다가가더니, 그의 귓가에 무언가를 속삭인다.
이내 지그문트가 또 눈물을 흘리며 죄송하다고 연신 고개를 숙이는데..
미치겠다.
고개를 돌렸다.
“인벤토리에 이그라실 있지?”
“네.”
그녀가 마치 자랑하듯 인벤토리에서 과일 서너 개를 꺼내더니 내게 보여주었다.
그거, 나한테 주지 말고.
“저기, 지그문트한테 주고 성분 분석해서 대량 생산하라고 시켜봐.”
그녀가 아하! 하는 표정을 짓는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챈 것.
이그라실의 위력은 어마어마하다.
끝이 아니다.
“그리고 쟤한테 정보 같은 거 모조리 받아내. 황제가 무슨 모략을 꾸미고 있던 건지, 마탑의 구조라든지, 뭐 시간 나면 마나 심법 같은 것도 알려 달라고 하고.”
내 말이 이어지면 이어질수록 그녀의 고개가 더더욱 힘차게 끄덕여지고 있었다.
알아듣긴 한 건가?
“그리고 혼자하기 힘들 테니까 나성진이랑 성미령 데리고 같이 이야기 나눠.”
고개를 끄덕이던 그녀가 멈칫한다.
“...미령언니도요?”
..?
무언가 말투가 심상치 않다.
“...가능하면이라고 했잖아. 네 능력은 사람을 완전히 네 충신으로 만드는 권능이다. 저 마탑주는 이제 네 사람이야. 네가 싫으면 하지 말고.”
“아.. 아니에요. 그렇게 할게요.”
그 외에는 딱히 지시할게 없었다.
아니다 하나 남았다.
“우리 왕국 소속의 모든 시련자들, 전부 광장에 모아놔. 가능하면 주민들까지도. 시간은 20시까지. 그건 저기 소천한테 말하면 도와줄 거다.”
“네!”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던 그녀와는 다르게 소천은 침을 꿀꺽 삼키고 있었다.
이 기상천외하고도 말 같지도 않은 일을 코앞에서 지켜봤으니까.
그대로 시간을 확인했다.
현재 시간 19시 18분.
퀘스트를 받은 시련자들과 비슷하게 대신전에서도 계시가 내려왔을 테고, 당연히 심각하게 여기고 있을 것이다.
당연히 그 계시를 황제와 마스터들도 알고 있을 테니 분명히 놈들은 황궁으로 모여들 터.
그 외에는 율리우스의 역량이지만 명색이 황제라는 놈이 그것도 못하지는 않겠지.
“그런데 정령술은?”
“보여드릴까요?”
기다렸다는 듯 훅 치고 들어왔다.
마치 숙제 검사를 받으려는 아이처럼.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가 조용히 소환이라고 외친다.
후우웅-!
허공에서 기운이 뭉치더니 기이한 마법진의 형태를 띄기 시작했다.
그곳에서 빛이 흘러나오더니.
[****...!!]
[****..!!]
기이한 목소리와 함께 작은 두 생명체가 소환되었다.
하나는 손바닥만 한 크기의 참새 형태였으며 온몸 전체가 하얀색으로 물들어있었고 다른 하나는 그와 정반대되는 검은색의 비둘기 형태를 하고 있었다.
전자는 빛의 하급 정령 프라이어즈, 후자는 어둠의 하급 정령 데스파이어.
솔직히 조금 놀랐다.
한 개의 속성도 아니고 무려 두 개의 속성을 소환해?
뭐라고 입을 열려던 그때.
빛이, 점점 커져갔다.
그리고..
[****...!!]
[****...!!]
[****...!!]
[****...!!]
!!!
뒤로 한걸음 물러서고 말았다.
기이한 목소리와 함께 어마어마한 수의 정령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으니까.
이건 또 뭐야?
빛의 정령과 어둠의 정령이 사방을 떠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정신이 없을 정도다.
마치 클럽에 와있는 기분이라고 해야 할까.
심지어 정령들의 감정이 느껴지기까지 한다.
매우 기뻐하고 있으며 행복하다는 듯 한 그 이상하디 야릇한 그 감정을.
그때 한수아가 조용히 손을 들어 올리자 미쳐 날뛰던 정령들이 그 자리에서 합죽이가 된 것처럼 조용해졌다.
“...”
할말이 없다.
나도 이런 건 처음 본다.
정령의 수는 어림잡아도 수백이 넘어갔으니까.
심지어 중간 중간에는 언젠가 보았던 중급 정령까지 보인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쩌저저적-!!
빛안에서 무언가가 공간을 찢고 나오려한다.
나는 반사적으로 한수아의 표정을 살폈다.
아니나 다를까. 그녀의 미간이 고통으로 점점 찌푸려지고 있었다.
이건, 마나 역류 현상.
식은땀까지 나는걸 보니 저거, 위험하다.
“그만!”
한수아의 어깨를 틀어잡으며 외치자 후웅하는 바람 소리와 함께 수백의 정령들이 일시에 사라졌다.
나는 그 상태로 물끄러미 한수아를 바라보았다.
방금 전 상황, 모를 수가 없다.
정령 소환술은 일종의 ‘통로’를 만드는 스킬이다.
그러니까 정령계로 향하는 통로, 그 통로가 강제로 넓혀진다는 것은 한수아의 마력의 한계치를 강제로 찢는다는 이야기.
마치, 위장이 주먹막한 사람에게 계속해서 무언가를 먹이려는 그런 상황과 흡사하다.
당연히 그 이후에 벌어질 절차는 신체 내부와 외부의 파괴다.
그게 마나 역류 현상이다.
주변을 둘러보자 무릎을 꿇고 경배하고 있는 지그문트와 언제였는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양손으로 머리를 감싸고 있는 소천이 보인다.
“...이도님이 말씀하신대로 대기실에서 연습해봤어요.”
한수아는 여전했다.
방금 전의 고통은, 분명 온몸을 찌르는 듯 한 고통이었을 텐데도 지금은 매우 평화로웠다.
그냥 칭찬 받기를 원하는 아이 같은 모습.
그런데, 이건 심하잖아.
“너 정령 소환술 레벨이 몇이야?”
“저 10레벨이요.”
“...”
10레벨?
대기실에서 정령 소환술을 얼마나 해댔기에 벌써 10레벨이야?
내가 스킬을 배울 수 없었기에 굳이 언급하지 않았지만 스킬의 최고 레벨은 100레벨이다.
정령 소환술을 예로 들면 20레벨은 되어야 중급 정령을 소환할 수 있으며 50레벨은 되어야 상급 정령을 소환할 수 있고, 100레벨은 되어야 정령왕을 소환할 수 있다.
그 이후는 모른다.
정령 소환술을 100레벨까지 달성했던 시련자는 단 한명도 없었기 때문에.
그런데 한수아는 지금, 고작해야 10레벨에 하급 정령 수백 마리와 중급 정령까지 소환했다.
특히 그 마지막에 공간을 찢으려고 나오던 존재는 분명 상급 정령이다.
혹시나 싶었다.
-나도 들은 건데, 이 권능이라는 건 말이야. 시전자의 영혼 안에 내재된 힘이라고 하더라고.
정말 언젠가 형님이 가볍게 지나가던 말로 했던 말이었는데, 이제 확실해졌다.
권능이라는 힘의 본질은 영혼에서 뿜어져 나오는 힘의 발현이다.
한수아는 매혹이라는 권능을 가졌고 그녀의 영혼 자체가 사람을 끌어들이는 매력을 뿜어낸다.
다만 그 매력이 사람에게 한정 된 게 아니라 정령에게까지 영향을 끼친 것.
굳이 매혹을 사용하지 않았음에도 말이다.
아마도 영령과 영체 상태로 '영혼'의 힘을 가장 확실하게 느끼는 정령들이기에 가능한 일일터.
미치겠다.
그녀는 단순한 재앙이 아니었다.
어마어마한 전력이 될 수도 있는 여자.
“너... 대단하네.”
진심어린 내 말에 한수아가 환하게 웃는다.
솔직히 약간 도박에 가까웠다.
내가 한수아에게 정령 소환술을 배우라고 한 이유는 그게 단순히 그녀와 궁합이 좋아보였기 때문이다.
정확히는 이런 생각을 했었다.
매혹이라는 권능을 소환되는 정령에게 사용한다면 어떻게 될까.
단순히 ‘힘’을 빌려주는 존재인 정령들이 매혹에 걸린다면 한수아의 마력을 잡아먹지 않고 스스로의 힘을 가지고 한수아를 도와주지 않을까?
그 예상이 맞았다.
한수아가 소환한건 정확히 두 마리의 정령이었지만 그 외에 수백 마리의 정령들이 한수아에게 ‘간택’ 받기위해 강제로 정령계를 뚫고 나왔다.
농담이 아니고 팔에 닭살이 돋아날 정도다.
정령이라는 건, 가볍게 말하면 연비를 어마어마하게 잡아먹는 고물차다.
소환하는데도 마력이 필요하고, 유지시키는 데에도 마력이 필요하며, 공격을 하건 방어를 하건 보조 수단으로 사용하던 간에 필수적으로 마력이 필요하다.
그렇다고 그 위력이 천지를 뒤집어엎을 정도냐?
당연히 아니다.
하급 정령은 전력 외로 생각해야하며 중급 정령쯤은 되어야 일반 기사 한명의 성능을 기대할 수 있다.
진짜 전력이 되는 건 상급 정령부터다.
방금 공간을 찢고나오려던 그 존재.
그가 소멸을 각오하고 싸운다면 브릴란트 정도의 힘을 기대 할 수 있을 거고, 정령왕쯤 되면 마스터 정도는 한손으로 눌러죽일 수 있다.
아직 한수아는 상급 정령을 불러 낼 정도로 스킬 숙련도가 쌓이지도않았고 그릇도 안정되지 않은 상태.
미치겠다.
말려 올라가는 입 꼬리를 정말로, 막을 수가 없었다.
손을 들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좋다.
이거면 된다.
아직은 미약하지만 이걸.. 조금만 더 키우면 앞으로의 일에 어마어마한 도움이 될 것이다.
확실하다.
“이상하게... 자꾸 너만 보면 놀라네.”
그녀가 쑥스럽다는 듯 붉어진 얼굴을 숙인다.
마음이, 편해진다.
그러다 문득 시간을 확인했다.
19시 25분.
이거, 지금 가도 꽤나 늦겠지만 별로 신경 쓰이지는 않았다.
어차피 주인공은 가장 나중에 등장하는 법이니까.
그녀의 이마를 툭 쳤다.
“일단 내가 시킨 거만 끝내놔, 바로 돌아올 테니까”
그녀가 밝아진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나는 그대로 몸을 돌렸다.
일단 제국부터 가자.
그리고 나는 듣지 못했다.
그 뒤에 이어지는 한수아와 소천의 이야기를.
**
이도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한수아가,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죽여도 되는지 여쭤봤어야 했는데...라며 중얼거리자 옆에있던 소천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 그게 누구인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약간의 두려움이 담겨있긴 했지만 이도에게 좋은 모습으로 남고싶은 소천은 내심 찔리는 감이 없지않아 있었다.
이도라면 감히 이런말을 꺼내지도 못했겠지만 한수아는 달랐다.
적어도 소천이 느끼기에는 이도에게는 범접 할 수 없는 느낌이 가득했지만 한수아는 아니었으니까.
한수아가, 그런 소천을 바라보며 싱긋 웃었다.
"말해줘야 되나요? 제가?"
순간 소천은, 이상하게 온몸에 소름이 돋는것을 느꼈다.
이상하다.
평소와 별반 다를 바 없는 말투인데..
"소천 할아버지."
"..예?"
"방금 이도님이 말씀하신 거요. 도와주실 수 있죠?"
소천은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그럴 수 밖에 없다고 하는게 정확하리라.
옆에 있던 지그문트가, 왜 저렇게 눈을 부릅 뜬 채로 노려보고 있겠는가.
소천은 반성했다.
자신의 눈이 여지껏 썩어있었다는 사실을.
한수아는 이도와는 전혀 다른 부류의 사도지만 만만하게 볼 수 있는 사도가 아니다.
그걸 지금에서라도 깨달은 소천은 왠지 모를 안도감에 가슴을 쓸어내렸다.
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