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를 한다는 건-40화 (40/131)

40화. 단 한 사람을 위한 에피소드(4)-수정완료-

쯧.

가볍게 혀를 차고는 슈타이어를 허리춤에 꽂았다.

실드가 얼마나 버틸지는 모르겠으나 괜히 기력을 낭비 할 필요가 없다.

망설임 없이 허리춤의 란지에를 뽑아들었다.

스르릉하는 맑은 청명음이 울리고, 내 몸이, 앞으로 뻗어나간다.

총을 거둔 내가 우습게 보인 걸까.

놈이 실드를 거두고 발로 바닥을 내려찍는다.

쿠웅-!

바닥을 짚은 내 발이, 조금 더 깊게 파이고 몸이 둔해졌다.

무시하고 한걸음 더 내딛으며 란지에를 휘둘렀다.

그 순간 놈의 눈동자가 번뜩인다.

놈의 입술이 모여지더니 휘파람이 불어오고 놈의 손이 내 몸을 향해 뻗어진다.

예지 속에서, 놈은 저것으로 박유정의 몸 자체를 가루로 만들었다.

놈의 신체에 닿으면 안 되는 걸까 아니면 놈의 손에 닿으면 안 되는 걸까.

이놈은 판링링의 그것과 비슷한 조건일까?

처음 보는 권능이기에 정보가 한정된다.

그냥 주둥이를 찢어버릴까.

내 선택은 깔끔했다.

그 상태로 한걸음 내디뎠다.

내 몸이 잔상과 함께 흩어지고 놈의 손이 내 잔상을 꿰뚫는다.

축지의 하위 버전인 잔보殘歩.

당연히 몸에 무리는 없었다.

놈이 눈을 크게 뜬 채로 빠르게 고개를 돌린다.

놈이 나를 발견했다.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나는 볼 수 있었다.

놈의 눈동자가 살짝 번뜩이는 것을.

무언가 노리고 있다.

선택의 순간이다.

정면 돌파냐, 피하고 기회를 볼 것이냐.

속으로 웃고 말았다.

피하는 건 한번으로 족하다.

이번에는 정면으로 돌파한다.

망설임 없이 란지에를 휘둘렀다.

서걱-

놈의 팔이 팔뚝부터 그대로 잘려나간다.

순간 놈이 입고 있던 가죽 갑옷의 가슴 어림에서 무언가 튀어나온다.

굉장히, 빠르다.

하지만 반응했다.

고개를 젖히자 무언가 내 옆머리를 스친다.

총알인가? 아니, 총알이라기보다는 암기 같다.

허공에 무슨 액체 같은 게 살짝 흩날리는걸 보니, 독같은 걸 묻힌 것 같다.

놈의 한수를 피하자, 놈이 경악한 채로 다급하게 발로 바닥을 내려찍는다.

쿠웅-

중압감이 닥쳐오고, 균형을 잃었다.

아니 균형을 잃은 것처럼 연기했다.

절호의 기회라고 판단한 걸까.

놈의 오른손이 검은색으로 물든다.

스킬은 아니다.

저건, 기를 두른 거다.

동시에 놈이 휘파람을 불려고 입을 모은 그 순간,

타이밍에 맞춰 놈의 주먹과 공간, 그 틈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서걱-

놈이 내지른 주먹이, 쩍하고 그대로 갈려나갔다.

피가 흩뿌려지는 그 상황에서.

“..어?”

모여진 놈의 입에서 휘파람이 아닌 당황스러운 의문이 터져 나왔고 그건, 놈의 유언이 되었다.

내 몸이 회전한다.

직후, 바닥에 발이 닿고 내 란지에가 원심력을 담은채로 놈의 목을 스쳤다.

서걱-

털썩-

띠링!

[서브 퀘스트에 실패하셨습니다!]

[당신은 시련자 ‘에릭 마이어 로스차일드’를 죽였기에 보상을 획득하지 못합니다.]

놈의 잘려진 목이 먼저 떨어지고, 그 옆으로 목이 없는 시체가 쓰러진다.

엑스트라는 엑스트라다워야 한다.

에릭은 본연의 역할에 충실했다.

그러고 보니, 기를 사용하는 시련자.. 광폭률을 조금 더 높일 기회다.

놈의 시체에 손을 가져다댔다.

갑주에서 붉은 빛이 어른거리더니 이내 놈의 시체를 감싼다.

밖으로 나온 혈기가, 놈의 몸의 선천지기를 빼앗으려던 그 순간, 혈기가 다시 갑주로 돌아왔다.

나도 모르게 입을 살짝 벌리고 말았다.

내가 사용하는 흡수는 ‘시체’에서 ‘생기’를 빨아들이는 일종의 마법이다.

그렇게 메커니즘이 짜여 있기에 시체가 아닌 존재에게 사용한다면 방금처럼 생기를 빨아들이지 못한다.

즉, 갑주는 에릭이 죽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었다.

의아하다.

이해가 가지 않는다.

놈은 목이 잘렸다.

퀘스트도 놈의 죽음을 확신했다.

이건 또 무슨 상황인거지?

그대로 란지에로 놈의 심장을 푹 찍었다.

여전히 변화가 없다.

그때, 잘려진 놈의 얼굴이 눈에 들어온다.

정확히는 그의 이마에 새겨져있던 아홉 개의 향로 문신.

무언가, 섬뜩하다.

이내 기묘한 빛을 머금고 있던 향로중 하나가 눈 녹듯이 사라지는 것과 동시에, 놈의 시체가 그 자리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악惡을 지배하는 자가 폭소를 터트립니다.]

이거, 생각보다 재미있는 짓을 꾸몄나보다.

이 무슨 엿 같은 클리셰야?

생각은 거기까지였다.

다시 눈을 감았다.

잡음을 지우고 바람의 소리에 집중했다.

그 소리 사이로...

-젠장!!!

놈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방향은 제국의 광장.

영문을 알 수 없었지만 일단 자리를 박찼다.

절대 놓치지 않는다.

죽지 않으면, 죽을 때까지 죽일 거니까.

그런 나를 박유정이 얼떨떨한 표정을 지은채로 바라본다.

*

“젠장!!”

광장에 ‘재소환’된 에릭은 멀쩡하게 재생된 손으로 목을 쓰다듬었다.

목이 잘리는 그 감각이, 너무나도 선명하다.

아직까지도 목이 붙어 있는 게 신기할 정도로.

시발..

“그 빌어먹을 새끼.. 대체 뭐야?!”

광장에 있던 몇몇 시련자와 주민들이 그런 에릭을 의아하게 쳐다본다.

마치 미친놈 쳐다보는 듯 한 시선이다.

분노로 머리가 뜨겁게 달아오른 에릭이 주변에 있는 모든 것들을 짓이기고 부수려던 그 순간.

띠링!

[악惡을 지배하는 자가 그 자리를 피하는 게 좋을 것 같다고 말합니다.]

“뭐?”

조용했다.

에릭은 슬며시, 알 수 없는 불안감이 몸을 덮치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악신의 대답은 정확히 그로부터 10초 뒤에 들려왔다.

[악惡을 지배하는 자가 이미 늦었다고 말합니다.]

“..?”

“여기 있었네.”

에릭의 표정이 일그러진다.

고개를 돌리는 것과 동시에, 목에서 똑같은 싸늘함이 느껴진다.

그렇게, 에릭의 의식이 흐릿해지고...

“향로가 8개... 혹시나 했는데 이건 여분의 목숨인가? 이제 7개가 되었으니, 7번만 더 죽이면 되겠군. 아니지, 원래 목숨까지 치면 8번 남은건가?”

멀어지는 의식 사이로 에릭은 절규했다.

*

화아아악-!

빛무리가 솟아오르며 에릭은 다시 판테온 제국에 소환되었다.

광장은 아니었다.

제국의 황성 구석에 위치한 곳,

정확히 이곳이 어딘지는 모른다.

에릭은 빠르게 주변을 살폈다.

떨리는 눈동자.

방금, 두 번 죽었다.

[악惡을 지배하는 자가 광소를 터트립니다.]

젠장.

미간이 처참하게 찌푸려진다.

[고대신 여화女禍의 향로][신화神話]

-사용자는 여분의 목숨을 가진다.[9회->7회]

-?

-?

나는 재앙이되, 세상을 멸망시킬 유일무이한 존재, 그 누구도 나를 죽일 수 없으리라. - 여화女禍

저 악을 지배한다는 신이 후원해준 아이템이다.

솔직히 에릭은 이 아이템을 받은 뒤 저 신처럼 웃음을 터트렸었다.

흡수라는 말도 안 되는 권능을 가졌다.

거기다 죽어도 부활하는 문신형 아이템이라니?

대체 그 누가 나를 죽일 수 있겠는가.

실제로 만난 대부분의 시련자들은 약했다.

너무나도 약했다.

그래서 에릭은 이 아이템을 후원받았을 때 확신했다.

이대로만 성장해도 신이 될 것이고, 그 무엇을 하건 결국 이 세상에서 최정상에 군림 할 수 있을 거라고.

하지만 방금 만났던 시련자.

이도.

젠장.

놈에게서 도저히 어찌 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격차를 느꼈다.

살면서 이런 기분은 처음이다.

빌어먹을 놈.

그 이상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에릭은 망설임 없이 자리를 박찼다.

여기가 어디든. 그 괴물 새끼한테서 도망쳐야한다.

하지만..

서걱-!

또 다시 목이 잘려나가고,

“셋.”

‘아..안돼...!!!’

에릭은 또 다시 절규했다.

[악惡을 지배하는 자가 배를 잡고 웃습니다.]

*

그렇게 5번을 더 죽고 나서야 에릭은 알 수 있었다.

이 모든 건 저 악신이 의도한 거라는 사실을.

이유는 하나밖에 없다.

건방을 떨었기 때문에.

적어도 에릭은 그렇게 생각했다.

속으로 신음을 삼킨 에릭은 도망치는 와중에 큰 목소리로 외쳤다.

“죄송합니다!”

평생 고개 숙여 본 적이 없던 에릭은 이 순간 처음으로 고개를 숙였다.

[악惡을 지배하는 자가 팔짱을 끼고 당신을 바라봅니다.]

...더해보라는 모습 같다.

“건방떨어서 죄송합니다!”

“알긴 아네.”

“..어?”

서거걱-!

‘너 말고... 아... 제발...’

“여덟.”

사신死神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린다.

에릭은 어마어마한 무력감을 느끼며 그렇게, 여덟 번째 죽음을 맞이했다.

*

재 소환된 에릭은 외쳤다.

제발..

“살려줘!!!”

[악惡을 지배하는 자가 당신에게 두 가지 조건을 제시합니다.]

“뭔데!! 아니 뭔데요!”

[악惡을 지배하는 자가 다시는 내 앞에서 건방 떨지 않는 것이 첫 번째고, 두 번째는 절대복종이라고 말합니다.]

그 순간에도 에릭은 망설였다.

이거, 왠지 모르게 심각하게 꺼림칙하다.

겨우 저거 두 개를 약속하면 살려준다는 이야기인가?

[악惡을 지배하는 자가 생각할 시간이 별로 없다고 말합니다.]

젠장!

분명 짧은 순간이었다.

서걱-!

또 다시 목이 잘려나간다.

그 뒤로.

“아홉. 이제 한번 남았군.”

‘개새끼.. 반드시 너만큼은...’

의식이 멀어졌다.

*

“하겠습니다! 한다고!”

[악惡을 지배하는 자가 고개를 끄덕입니다.]

띠링!

[악惡을 지배하는 자가 당신에게 ‘대현자의 텔레포트 두루마리’를 후원합니다.]

허공에 빛이 생겨나고, 그 빛무리에서 두루마리가 내려오며, 에릭이 손을 내뻗어 두루마리를 잡아채는 것.

그리고, 뒤에서 지면이 움푹 파이는 굉음이 들리는 것까지.

이 모든 것은 고작해야 2초, 2초안에 벌어진 일이었다.

에릭은 본능적으로 두루마리를 찢었다.

이제 살았다.

그 안도감이 에릭의 표정에 자리하고.

빛무리가 에릭의 몸을 감싸던 그 순간,

타아앙-!!

퍼걱-

타앙-!

에릭이 마지막으로 느낀 감각은 세 가지였다.

하나는 가슴 어림에서 느껴지는 어마어마한 고통, 그리고 나머지는 그 이후에 생각 자체가 끊기는 듯한 ‘죽음’의 감각.

그리고 마지막은 죽기 직전에 반응한 청각.

띠링!

[악惡을 지배하는 자가 한심하다는 듯 고개를 젓습니다.]

그게 끝이었다.

에릭은, 그렇게 허망하게 죽었다.

**

아무리 생각해도 에릭이라는 놈의 존재는 너무나도 기이하다.

시련자가 아니었던 놈이, 시련자가 되었다고?

그런데 회귀자도 아니었다?

기이한 수준을 넘어 괴상하기까지 하다.

심지어 놈은 가지고 있는 권능조차 너무나도 유망하다.

그래서 여분의 목숨을 준걸까?

아니, 말하고 나니 더 웃기다.

여분의 목숨이라니?

내가 알기로 그런 아이템은 존재하지 않았고 그런 스킬도 존재하지 않았다.

악신의 왕이 관심을 가지고 있는 건 확실한데.. 그런 ‘아이템’을 후원 해줄 정도라고?

내가 아는 악신의 왕은, 그냥 악惡 그 자체다.

너무나도 순수한 악.

멸망을 일으키고, 생명체를 죽이는 것에서 희열을 느끼며, 누군가를 속이는 것에서 거대한 쾌락을 느낀다.

욕망의 결정체.

그게 악신의 왕이다.

무슨 일인지 영문을 모르겠다.

에릭이, 악신의 왕에게 개기기라도 한 것일까.

잠깐, 그러고 보니 서브 퀘스트는 악신의 왕이 내려준 게 아니었다.

선신의 왕과 아룡이 내려준 퀘스트.

그러니까...

저 두 신이 악신과 뜻을 함께했다?

그 이상 생각을 이어갈 수 없었다.

눈앞에 보인다.

에릭 마이어 로스차일드.

솔직히 놈이 건방떨어서 죄송하다고 하는 순간 코웃음이 터져 나왔었다.

그걸 알면 깝치지 말고 조용히 쥐 죽은 듯이 살고 있어야지.

그때, 변수가 생겼다.

눈앞에 보이는 놈의 코앞에서 빛무리가 일렁거리고, 그 안에서 ‘두루마리’가 생겨난 것이다.

젠장.

저놈이 지금 무언가를 후원받았다.

뭔지는 모르겠으나, 망설일 시간이 없다.

놈과의 거리는 얼추 20미터.

놈이 두루마리를 찢으려한다.

스킬 스크롤일까.

달려 나가기엔 늦다.

빠르게 슈타이어를 꺼내들었고 있는 힘껏, 내 몸의 모든 기를 끌어 모은 채로 방아쇠를 당겼다.

그것도 두 번.

타아아앙-!!

퍼걱-!

타아앙-!!

퍼석-!!

놈의 심장에 명중하고, 놈의 머리가 터진다.

사방으로 핏물과 뼈 파편이 흩날리고, 놈의 몸을 감쌌던 빛이, 완전히 사그라졌다.

자리를 박찼다.

시선을 아래로 내리자 방금 전까지 에릭이었던 놈의 시체가 보인다.

이마를 확인 할 수는 없었다.

완전히 터져버렸기에.

그 순간 띠링하는 알림음과 함께 광기의 학살자를 죽였다는 메시지가 보인다.

확인 사살일까.

아니, 아직 모자르다.

손을 뻗어 놈의 시체에 가져다댔다.

혈기가 놈의 몸을 감싸고,

띠링!

[광폭률이 18%로 상승합니다.]

이게 진짜 확인 사살이다.

에릭은, 죽었다.

띠링!

[악惡을 지배하는 자가 당신에게 박수갈채를 보냅니다.]

[선善에서 군림하는 자가 당신을 흐뭇하게 바라봅니다.]

[시작을 알린 아룡이 어깨를 들썩거립니다.]

...상황이, 곧 바로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젠장.

내가 병신이었다.

내가 너무 깊게 생각했다.

신들은 여전하다.

검증하고, 누가 더 강한지, 누가 더 신격을 갖출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지.

이 모든 것은 저놈들에게 유희다.

단순한 쾌락의 매개체.

에릭은 분명 악신이 키운 시련자다.

저 셋은 아마 생각도 하지 못하고 있었을 것이다.

내가 에릭과 만난 건 말 그대로 우연의 일치.

박유정에게 맹의 증표를 주고 판테온 대륙으로 보내지 않았더라면 나는 에릭과 절대로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내가 놈과 만났다.

신들의 입장에서 어마어마한 유희거리가 제공된 것이다.

악신이 나를 죽이려고 키우던 히든카드가 우연찮게도 나와 만난 것.

그리고 거기서 나는 또 한 번 기행을 저질렀다.

퀘스트 보상을 포기하고, 놈을 죽이겠다고 마음먹었던 것.

에릭의 성향이 분명히 ‘악’이라고 판단한 내가 무려 2천만 코인을 포기하면서 놈을 죽였다는 건, 선신과 중립신에게 호감을 얻었다는 이야기.

느낌이 이상하다.

그냥 하고 싶은 대로 행동했는데 결국 무언가 일이 잘 풀리고 있으니까.

그런데, 왜 이렇게 구충제 다섯 알 정도를 입에 넣고 한꺼번에 씹은 것처럼 입 안이 텁텁할까.

언제까지 저놈들의 손에서 놀아나야할까.

여전히 가슴의 불안감은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그래도 한 가지 확실한건 악신의 왕은 여기서 멈추지 않을 것이라는 거.

나라는 존재는 그에게 말 그대로 꽤나 흥미로운 장난감이니까.

나라는 장난감을 부수기 위해 또 다른 방도를 찾겠지.

시발새끼.

잠깐 허공을 응시하다가, 한숨을 내쉬고는 들고 있던 슈타이어를 허리춤에 꽂았다.

상황은 정리됐고 머리도 정리되었다.

그제야 주변 상황이 눈에 들어온다.

주변에 있던 몇몇 시련자들과 주민들이 뒤로 주춤거리더니 몸을 돌려 도망치는 게, 마치 내가 악역이 된 기분이다.

...생각해보니 틀린 말은 아닐 수도.

잡념을 털어내자 이어서 새로운 잡념이 떠오른다.

퀘스트창.

아까 보니까 뭔가, 엄청 빼곡하게 적혀 있었던 것 같은데...

망설임 없이 확인했다.

눈앞에 홀로그램이 떠오른다.

[Episode #5~#9]

[우주에는 수많은 생명체가 살아가고, 또 존재합니다.]

[페넬리움 대륙은 고블린들이 지배하고 있는 세상입니다.]

[금일 20시부터, 페넬리움 대륙과 발바라 대륙간에 ‘침식 전쟁’이 활성화됩니다.]

[패배한 대륙은 그대로 신들의 징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

[침식 전쟁에서 승리하십시오.]

[침식 전쟁 승리 조건]

[1. 고블린 황제, ‘쿤린’을 죽이십시오.]

[2. 쿤린을 호위하는 다섯 명의 마스터를 죽이십시오.]

[위 두 가지 조건 모두를 충족하셔야 승리로 인정됩니다.]

[이 퀘스트는 발바라 대륙의 모든 시련자들에게 공통으로 적용되는 ‘파티 퀘스트’입니다.]

[퀘스트 보상은 5,000,000 코인으로 동일합니다.]

[제한 시간 : 72시간]

...할 말을 잃었다.

전에 말했듯이 에피소드의 방향이 조금은 바뀔 거라고 생각했다.

안했다면 그건 거짓이리라.

하지만 이런 방향은 아니었다.

고작해야 몬스터가 소환되는 위치를 바꾼다거나, 몬스터의 수가 조금 늘어나거나 하는 수준에서 그칠 줄 알았다.

이런 젠장.

화가 치밀어 오르고 쌍욕이 절로 터져 나온다.

아니, 침식이라고?

이쪽에서의 ‘침식’이라는 개념은 세계와 세계의 결합을 뜻한다.

다른 말로는 이면세계라고 하며, 두 개의 세계가 하나로 결합되는 과정이자 그 결과물.

그게 침식이다.

여태까지 진행되던 에피소드는 일종의 '기권'이 가능했다.

그러니까, 완료 조건인 몬스터를 죽이라거나, 인간을 죽이라거나 하는 그 두 선택지를 거부한다해도 단순히 코인만 얻지 못할 뿐 죽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건 다르다.

에피소드를 진행하지 않고 침식을 그대로 방치하면 대상이 된 두개의 세상은 합쳐지고, 결국 반발작용으로 두 세계 모두 소멸하게 된다.

즉, 기권이라는 건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상대를 죽이느냐, 혹은 죽느냐. 그 두 가지의 선택지가 전부다.

신들의 게임이자. 신들이 만든 싸움판.

그런데 지금, 그 침식 전쟁이 고작해야 Episode 극 초반부에서 등장했다.

빌어먹을.

이를 악물었다.

언급했지만 내가 없던 전생에서, 형님을 비롯한 시련자들은 발바라 대륙을 '구원'했다.

하지만 그걸 구원이라고 할 수 있을까?

당시 발바라 대륙에 남은 인간들의 수는 고작해야 5만, 아니 5만도 채 되지 않는다.

전 대륙민의 숫자가 수천만을 가볍게 넘어가는 상황에서 5만이라는 건 그냥 종말 수준을 맞이했다는 뜻이다.

그래, 그냥 다 죽었다.

구원이되 구원이 아닌 구원.

그 재앙은 마스터들로부터 시작되었다.

내가, 왜 싸이코 짓을 하고, 왜 적을 만들고, 왜 왕을 죽이고 왜 내 목숨을 담보로 계속해서 강해지려고 했던가.

한번 언급 했듯이, 이건 지구를 구하기 전의 전초전이다.

지구는 침식 전쟁에서 졌기 때문에 멸망했다.

그런데, 지구도 아닌 이 세상의 '멸망'도 막지 못하는 놈이 대체 무슨 수로 지구의 멸망을 막겠는가.

앞으로 이 침식 전쟁은 계속해서 벌어질 텐데.

조용히 가슴 어림으로 손을 올렸다.

심장이. 빠르게 뛴다.

나는 확신했다.

이거다.

대기실에서부터 느꼈던 그 불안감.

그 불안감의 근원은 에릭 같은 쩌리는 물론 악신의 수작 같은 것을 예고했던 게 아니었다.

그 근원은 바로 이것이었다.

에피소드의 메인 스토리, 침식.

Episode #39 에서부터 등장하게 될 그 메인 스토리가, 지금 등장하다니.

이건 나 때문이다.

나 때문에 에피소드의 방향과 전개 자체가 완전히 달라졌다.

부정 할 생각도 없다.

당연히 피할 생각도 없다.

이건 나만을 위한 에피소드.

지금껏 해왔던 대로 이기면 된다.

그래. 이기면 된다.

젠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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