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단 한 사람을 위한 에피소드(3)
왕궁 안쪽에 위치한 ‘게이트 존’에 다다르자 그곳에 서있던 로브를 입은 남자가 바로 예를 취했다.
“전하를 뵙습니다.”
다행이다.
에피소드에 입장할 때마다 변장의 가면을 작동시키는 게 거의 버릇처럼 되다시피 했는데 지금 내 얼굴이 오슨의 얼굴이었나 보다.
여튼, 인사 따윈 됐고.
“판테온 제국으로 가는 게이트 열어. 지금 당장.”
인장이니 뭐니 하는 개소리는 하지 않았다.
로브를 입은 남자, 게이트를 지키는 마법사는 망설임 없이 기이한 언어로 주문을 외웠고 코앞에 있던 길쭉한 말뚝같이 생긴 긴 장치에 손을 내민다.
동시에 후우웅 하는 소리와 함께 공간이 열렸다.
워프 게이트.
제국에는 총 2명의 대마법사가 있는데, 그들 중 공간 이동 마법에 능통한 흑마탑의 탑주가 만든 게이트다.
오로지 왕을 비롯한 최고위급 귀족들만이 사용할 수 있는 이 게이트는 발바라 대륙에 총 10개가 존재한다.
그중 하나가 이것이다.
망설임 없이 몸을 밀어 넣었다.
*
판테온 제국으로 이동한 나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주변 풍경이고 나발이고 분명 건축물은 아름다울 테지만 그딴 게 눈에 들어올 리 없다.
지금 내가 본 놈.
맹세컨대 내가 아는 시련자중에 저런 ‘능력’을 가지고 저런 ‘짓’을 하는 놈은 없었다.
홀던 크리스틴의 권능인 중력을 사용하면서 박유정의 태풍을 사용한다고?
아니.
그건...
분명 권능을 뺏는 듯 한 모습이었다.
젠장.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지?
조용히 눈을 감았다.
기의 흐름과 주변에서 들려오는 발자국 소리들이 들리고 느껴진다.
하나하나 지워갔다.
우선 발자국 소리를 지웠다.
벌레들이 지저귀는 소리도 지웠고, 쥐새끼가 기어 다니는 소리도 모조리 지웠다.
나는 바람을 느꼈다.
고요하다.
바람이 불어오고, 그 안에 농도 짙은 살기와 광기가 묻어나온다.
한곳이 아니다.
세 곳.
정확히 동쪽에 하나, 서쪽에 하나. 남쪽에 하나.
거리는... 동쪽이 가장 가깝다.
확률은 3분의 1.
망설임 없이 다리에 힘을 주고..
“언질도 없이 갑자기 이렇게 오시다...”
콰아앙-!
내 몸이 빛살 같은 속도로 뻗어나간다.
그런 내 뒤쪽으로, 멍한 표정을 지은 한 남자가 있었다.
율리우스 폰 판테온.
판테온 제국의 황제이자 그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권위를 가진 남자.
그가 머쓱한 얼굴로 머리를 긁적이더니, 조용히 말했다.
“쫓아가봐. 최대한 들키지 않게.”
분명 율리우스 혼자였지만,
“...충!”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목소리가 들려온다.
머쓱했던 율리우스의 표정이,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표정 변화.
그는, 한동안 이도가 있던 자리를 응시했다.
*
주변 풍경이 미친 듯이 뒤바뀐다.
일단 얼굴을 내 본래 얼굴로 바꿨다.
자리를 박차며, 생각을 이어갔다.
예지의 형태가 바뀐 건 둘째 치고 내가 본 예지는 단 한 가지를 의미했다.
보지도 못했고 듣지도 못했던 기상천외한 ‘권능’을 가진 새로운 능력자의 등장.
콰아아앙-!
바닥이 움푹 파이며 내 몸이 뻗어나간다.
이미 50레벨을 넘은 내 몸은 자연스럽게 기를 온몸에 순환시키는 경지다.
무협으로 따지면 검기상인의 경기라고 해야 할까.
당연히 혈기는 자극하지 않았다.
이미 능력치를 꽤나 높게 상승시킨 지금의 상황에서, 벌써부터 혈기를 자극한다면 내 몸은 오래 버티지 못 할 것이다.
가지고있는 힘이 크면 클수록 그 반작용도 더욱 더 거대해지기에.
농담이 아니고 죽을 수도 있다.
이제부터 혈기는 내 비장의 한수, 최후의 한수로 숨겨둬야한다.
젠장.
그런것과는 별개로 가슴이 막힌듯 답답하다.
나는 지금 왜 이렇게 달리고 있는 거지?
박유정을 살리고자 하는 걸까.
아니면 그 권능자를 찾아 죽이려는 걸까.
그것도 아니면 그 권능자를 품으려는 걸까.
내가 개입하면서 미래가 바뀌었으리라는 것은 분명 예상했었다.
그런데 예지 속에서 보았던 그놈.
모르겠다.
직접, 봐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리고 분명 나는 이런 느낌을 전에도 받은 적이 있었다.
꿈이라고 생각되던 그 새하얀 공간에서 형님을 만났을 때.
그때의 불안감.
젠장.
그때였다.
띠링!
[악惡을 지배하는 자가 당신을 주시합니다.]
[시작을 알린 아룡이 당신을 주시합니다.]
[선善에서 군림하는 자가 당신을 주시합니다.]
최고신들의 모든 관심이 내게 집중된다.
그걸로 확신했다.
무언가, 나도 모르는 무슨 일이 벌어졌다는것을.
그리고 지금 내가 가는 곳.
단순한 직감이었고 확률도 3분의 1이었지만, 나는 운이 좋았다.
“사...살려주세요..”
“왜 그렇게 겁을 내고... 저건 또 뭐야?”
눈앞에 보인다.
박유정과 한 남자.
정확히는 금발머리의 서양인.
그 면상을 ‘제대로’ 인식한 순간, 머릿속에 번개가 쳤다.
엉망이 된 지구에서 혼란을 이용해 시련자들로 용병 사업을 꾸렸고, 무기를 개발하고 미국을 지배하고, 유럽을 지배한 일반인.
그리고 2년차가 되었을 때 죽었던 남자.
에릭 마이어 로스차일드.
분명히 그놈이다.
하지만... 저놈은 시련자가 아니었을 텐데?
내 머리가 사고하는 그 짧은 순간, 나를 발견한 놈이 망설임 없이 발로 바닥을 내려찍는다.
이내.
쿠웅-
굉음과 함께 내 주변이 짓눌린다.
땅을 짚고 자리를 박차려던 내 몸이 잠깐 주춤했다.
평소의 중력보다.. 4배... 아니다.
예지로 보았던게 맞았다.
최소 5배다.
하지만 버틸만하다.
허리춤의 슈타이어를 향해 손을 내뻗고 놈을 향해 겨누던 그 순간.
놈이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양 주먹을 마주친다.
콰아아아앙-!
땅이 터져나가며 내 몸이 옆으로 기울어진다.
..시발.
확실하다.
이 권능은 ‘공기 응축’.
즉, 놈의 권능은 하나가 아니다.
몸을 기울인 그 자세 그대로, 권총에 기를 집중시켰고 방아쇠를 당겼다.
타아앙-!
중력에 의해 내 몸이 느려지고, 균형을 잃었기 때문일까.
내 기의 탄환은, 놈의 옆머리를 스쳤다.
피조차 튀지 않는다.
놈이 반응한 걸까 아니면 내가 놓친 걸까.
빠르게 답이 내려진다.
이레귤러의 페널티. 아이템의 효과가 20% 감소한다는 그 페널티 때문이다.
젠장, 이럴 줄 알았으면 이거 안사는건데.
짜증나는 표정으로 한 번 더 권총을 놈에게 겨눴다.
기를 조금 더 모은 그 순간.
놈이 긴장한 표정으로 뒤로 물러선다.
그 단 한 번의 도약으로 10미터를 이동한 에릭, 확실하다.
놈의 신체 능력도 평범한 인간의 수준이 아니다.
Episode #4를 진행하는 시련자라면 절대로 보여줄 수 없는 움직임.
최소 모든 능력치가 30.. 아니, 40정도에 육박하는거같다.
심지어 놈의 양 다리에는 기가 몰려있었다.
기력 스텟까지 개방했나보다.
아니, 기력은 둘째쳐도 대체 어디서 저런 코인을..
순간.
[악惡을 지배하는 자가 실소를 터트립니다.]
메시지 창을 보자마자 모든 상황이 구슬로 꿰맞추듯 맞춰졌다.
악신.
그동안 악신들이 왜 그렇게 잠잠했을까.
도발까지 하고 욕설을 서슴치 않던 나를 놈들이 가만히 놔둔다?
말이 되지 않았다.
신들은 직접적인 위해를 가할 수 없지만 간접적인 위해는 가할 수 있다.
예를 들면 내게 적대적인 ‘시련자’를 제대로 키운다거나 하는 식으로.
놈들은 준비했던 것이다.
나를 죽일 히든카드.
그러니까 눈앞에 있는 저놈.
놈이 악신들의 히든카드다.
천천히 걸음을 옮겨, 박유정의 앞에 섰다.
갑작스럽게 구원을 받은 박유정이 급기야 눈물을 흘린다.
그런데...
“연기하지마라. 내가 지금 기분이 별로 안 좋거든.”
움찔 몸을 떤 박유정이 금세 눈물을 훔친다.
그리고는 방금 전까지 울먹이던 표정과는 정 반대의 얼굴인 긴장한 표정으로 나와 에릭을 바라본다.
무시하고 고개를 돌렸다.
에릭 마이어 로스차일드.
놈과 내 눈이 허공에서 교차한다.
그때였다.
[악惡을 지배하는 자가 시스템에 서브 퀘스트를 요청합니다.]
[시스템이 요청을 거부했습니다.]
[악惡을 지배하는 자의 표정이 처참하게 구겨집니다.]
웃음이 새어나온 것도 잠시.
[시작을 알린 아룡과 선善에서 군림하는 자가 시스템에 서브 퀘스트를 요청합니다.]
웃음이 사라지고 미간이 좁혀진다.
예상했냐고 묻는다면 당연히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나는 내가 약간이나마 안일했음을 인정 할 수밖에 없었다.
악신을 제외한 저 둘이 내게 ‘호감’ 비스무리한걸 보여준다고 해도, 엄밀히 말하면 저들도 신이다.
선신은 대의를 가진 자를 원하고 그가 끊임없이 검증받기를 원한다.
그 검증을, 악신이 만든 상황이라 해도 이해만 맞으면 수락하는 존재가 선신이고, 아룡은 중립에 위치해있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주체가 중요한 게 아니라 객관적인 상황이 중요한 것.
바보같이, 그동안 잊고 있었다.
신이라는 존재들은 성향은 달라도 근본은 같은 놈들이라는 사실을.
띠링!
[서브 퀘스트가 발생했습니다.]
[이 퀘스트는 시련자 ‘에릭 마이어 로스차일드’와 시련자 ‘이도’에게만 적용됩니다.]
[1:1로 겨뤄 상대에게 ‘항복’을 받아내십시오.]
[보상 : 20,000,000 코인]
[제한 시간 : 없음]
[주의하십시오. 상대를 죽인다면 보상은 없습니다.]
내용을 확인하자마자 왠지 모를 안도감이 몰려왔다.
내가 과민 반응 한 걸까.
‘고작’해야 이 따위 퀘스트라니?
허공을 응시하던 나와 놈이, 동시에 서로를 응시한다.
놈의 눈매가 호선을 그린다.
“너구나?”
“...”
“그 이도라는 놈이 너였구나.. 너 유명하더라. 웃기지도 않는 말을 떠벌리고 다녔던데.”
혹시나 하는 생각을 했었다.
회귀를 한 게 나뿐만이 아닐 거라는 생각.
그리고 그 생각은 지금 쓰레기통으로 직행했다.
놈은 나를 모른다.
하지만 몇 가지 의문이 머리를 어지럽힌다.
잠깐 어울려주자.
조용히 물었다.
“그게 뭐가 웃기지?”
놈이 슬며시 목을 푼다.
“아니 안 웃길 수가 있나? 뒤통수를 치는 놈은 찾아가서 죽이겠다며? 아니 네가 뭔데?”
“...”
“네가 뭔데 이 화려한 무대에서 사람의 ‘욕망’을 컨트롤 하려는 건데? 배신? 뒤통수? 그게 뭐? 당하는 놈이 병신이지.”
놈의 눈동자, 그 안에 담겨있던 미약한 광기가 점점 고개를 치켜든다.
“나는 너 같은 놈을 많이 봐왔거든, 분명 사람 주둥인데 그 주둥이에서 개소리를 지껄이는 놈들, 지가 뭐라도 된 것처럼 미쳐 날뛰는 버러지, 보니까 영웅 심리에 도취된 것 같은데... 보기 역겨울 정도야 진심으로.”
놈이 작게 웃었다.
농도 짙은 광기를, 웃음으로 표현하는 것 같다.
“그런데.. 너 혹시 고유 권능 가지고 있는 건 아니지?”
말없이 놈을 바라봤다.
“되게 과묵한 놈이네.. 쟤가 말이야. 막 도망치면서 무언가를 계속하더라고.. 그게 너를 부르는 거였나 보네. 지원군으로 온 거지? 이게 참.. 우리 쉽게 가자. 항복해. 그리고 내 밑으로 들어와. 잘해줄게.”
타인의 권능을 빼앗을 수 있는 능력이라.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다.
“고민돼? 하긴.. 그래, 고민 될 수도 있지. 그런데 잘 생각해, 네가 내 옆에서 날 보좌하면 여기에서는 물론이고 지구에서도 대접 받게 만들어준다. 절대로 섭섭하지않게, 어때? 꽤 괜찮은 제안이지?”
내 모습이, 마치 자기 말에 휘둘린 것처럼 보였나보다.
그리고 이 순간, 놈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야 확신했다.
나는 불안해했었다는 것을.
놈의 가능성은 무궁무진하다.
어찌보면 예지력과 비슷한 수준의 사기 능력.
타인의 권능을 흡수하는 권능이라니, 이게 말이나 되는가.
재앙은 한수아 하나면 충분하다.
그때, 놈이 이죽인다.
너무나도 자신감 넘치는 모습으로.
"명심해, 항복 안하면 나는 너를 죽일거다. 권능을 가지고있건 없건, 항복하면 살려주고 거절하면 죽인다. 간단하지?"
잠깐이나마 고민했던 나 자신이 한심해 보일 정도다.
속으로 생각했다.
정말 다행이라고.
이렇게 ‘일찍’ 만나게 되어서 너무 다행이라고.
그때 놈이 입을 열었다.
“뭐야? 왜 쪼개? 아.. 혹시 그거 항복하겠다는 긍정의 웃음?”
쪼갠다고..?
손으로 입가를 더듬었다.
언젠가, 기차에서처럼 나는 웃고 있었다.
손을 치웠다.
슈타이어를 들고, 놈의 미간을 겨눴다.
“곧 뒤질 놈이 말이 많네.”
2000만 코인? 필요 없다.
놈이 저렇게 주저리주저리 떠드는 이유? 하나밖에 없다.
놈은 지금 딜레마에 빠졌다.
내가 코인을 포기한 것과는 다르게 놈은 2000만 코인을 포기하기 어렵다고 느꼈을 테니까.
거기다 자기가 항복하면 내가 2천만 코인을 먹게 되고, 놈은 그만큼 도태되는 등.. 여러 가지 잡생각이 놈의 머릿속을 흐트러뜨리고 있을 터.
놈의 모습은 마치 공작새가 날개를 펼쳐 드는 것과 흡사해 보인다.
그리고 절대적으로 무언가를 하나 믿고있는 듯 한 모습이다.
당연히, 관심없다.
“그러지 말고 항복하라니까? 안하면 후회 할...”
무시하고 방아쇠를 당겼다.
그와 동시에 놈이 양팔을 내뻗어 교차시킨다.
타앙-!
콰아아앙-!
기탄이 놈의 몸 코앞에서 막히고, 놈이 뒤로 한걸음 물러섰다.
놈의 주변을 감싸고있는 둥근 원형의 막.
흥미롭다.
저 권능은 방어 계열 권능 중 하나인 '실드'다.
상점에서 파는 몇 천 코인짜리 스킬이 아니라 권능으로 판정된 실드.
그 효력은 일반 실드 따위가 범접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즉, 놈의 권능은 최소 세 개.
대체, 몇명의 고유 권능자를 죽인걸까.
그들과 크리스틴까지도 예지속의 박유정처럼 말려 죽인걸까.
이 미친놈.
“이 미친놈이...”
내 생각과 놈의 말이 일치한다.
놈이 일그러진 얼굴로 나를 노려보고있었지만 전혀 위협이 되지 않는다.
새끼가. 그렇게 쳐다보면 어쩔건데?
엑스트라 놈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