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를 한다는 건-37화 (37/131)

37화. 단 한 사람을 위한 에피소드(1)

매캐넌 왕국을 정리하는 일은 손쉬웠다.

비상식적이지만, 앞서 말했듯이 이 왕국이라는 건 힘을 가진 철부지 애새끼 다섯 명을 달래주기위해 만들어졌다.

적어도 마스터라는 건 일평생 기를 느끼기 위해 수련을 했고, 도나 검, 등등, 제각기의 무기를 수련하며 스스로를 극한까지 몰아붙인 이들.

그런 이들이 정치를 할 수 있을까?

아니, 머리까지 근육으로 차있는 놈들이 정치는 개뿔.

그래서 황제는 제국에서 유능한 행정관을 고르고 골라 재상으로 파견한 것이다.

그러니까.. 정리하면 나는 할 일이 거의 없었다.

정치와 경제에 관련한 모든 일들은 소천과, 전 매캐넌 왕국의 재상이었던 자넬리에게 일임했으니까.

지구에서 이해관계가 수도 없이 얽혀있는 기업들이 적대적 m&a를 하며 인수합병을 하는 등, 그런 절차와는 다르다.

말 그대로 이 대륙 전체가 기이한 구조를 취하고 있었기 때문에,

결론만 말하자면 나는 두 개의 영토를 가진 소규모 왕국의 왕이 되었다.

퀘스트창을 확인했다.

[축하합니다. Episode #3를 클리어 하셨습니다.]

[50,000 코인을 획득하셨습니다.]

[대기실로 귀환하시겠습니까?(Y/N)]

다른건 별로 신경 쓰이지않았는데, 지금 내 눈에 보이는 이거.. 이게 너무 신경쓰인다.

내가 알기로 에피소드를 클리어했을때는 대기실로 귀환 할 것이냐, 혹은 이곳에 머물것이냐. 라는 두가지 선택지가 '당연하게' 제시되는걸로 알고있었는데..

지금은 그냥 귀환하라는 선택지만 제시되었다.

이거, 내 생각보다 많은게 바뀐듯하다.

찌릿-!

젠장.

뇌리에 진물이 차오르는 기분이다.

확실히 나는 무리했다.

가능하면 신중에 신중을 기하는게 내 모토였지만, 나는 하루라도 빨리 이 대륙 전체를 먹어야한다.

한 순간이라도 쉬어 갈 생각이 없었고 한계단씩 차근차근 올라갈 여유가 내게는 없다.

조금의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최대한 빠르게, 끝내야 한다.

고개를 돌려 옆에 있는 한수아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나를 옆에서 부축하고 있었다.

그것도 고개를 숙인채로.

나와 절대로 눈을 마주치지 않겠다는 결연한 의지마저 엿보인다.

그녀에게 물었다.

“...너, 원하는 포지션이 뭐야?”

고개를 숙이고 있던 한수아가 고개를 살짝 갸웃한다.

그녀가 땅을 바라보며, 말한다.

“포지션이요..? 저는 이도님 옆...”

듣지 않고 손으로 그녀의 턱을 가볍게 위로 올렸다.

그녀의 맑은 눈과 마주친다.

그녀가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숙이려 했지만 고개를 저었다.

“그런거말고.. 아니다. 내가 괜한걸 물었네. 잘 들어 네가 귀환해서 사야할 스킬들이니까.”

한수아의 눈빛이 진지해진다.

“이그라실 300개, 스킬 ‘정령 소환술’, 그리고 남은 코인은 전부 지능에 몰빵해.”

한수아가 멍한 표정을 짓는다.

정말, 날것 그대로 표정이다.

이내 한수아가 시무룩한 표정을 짓는다.

“저... 코인 없어요.”

픽 웃고 말았다.

이상하게, 이 여자만 보면 여유가 생기는 것 같다고 해야 하나.

말없이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녀를 슬며시 옆으로 밀어내고는 가볍게 심호흡했다.

지금부터는, 홀로 걸어야했으니까.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매캐넌 왕성은 발리스타 왕성과 구조가 매우 비슷했다.

나는 소천을 비롯한 매캐넌 왕국의 재상에게 귀빈실로 수뇌부 모두를 모으라는 명령을 내린 상태였다.

내가 지금부터 말할 내용은 '군사'에 관련된 것이기에.

그리고 지금, 내 눈앞에 귀빈실의 입구가 보인다.

망설임 없이 문을 열고 들어갔다.

꽤나 거대한 원형 테이블에 앉아있던 모든 이들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외친다.

“전하를 뵙습니다!”

천천히, 하지만 힘 있는 걸음걸이로 나는 가장 상석에 있는 자리에 가서 앉았고.

그런 내 뒤를 한수아가 졸졸 따라온다.

내가 옆으로 눈짓하자 내 옆에 있는 빈자리에 그녀가 가서 앉는다.

조용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한수아를 처음 본 전 매캐넌 왕국의 수뇌부들은 하나같이 멍한 눈으로 그녀를 응시하고있었다.

미의 기준이 지구와 이곳이 동일한지는 모르고있었는데 한수아의 외모는 이곳에서도 통하나보다.

물론, 그들이 감상할 시간은 여기까지다.

“들어라. 지금 이 시간부로 발리스타 왕국내의 군사 체계를 개편한다.”

“개편...이요?”

“사실 개편이라고 할 것도 없지. 발리스타 왕국의 두 단장을 대장군으로 임명하며, 새로 편입된 매캐넌 소속의 모든 병사단을 그 밑으로 편입시킨다.”

그나마 얼굴이 익숙한 케인과 주체가 조금 환하게 웃고, 그와 상반된 표정을 한 네 명의 남자가 보인다.

하나는 앞서 말했던 자넬리라는 이름의 재상이었고, 나머지 세 명은 뭐... 기사단 단장인지 뭔지.

관심도 없다.

그때, 가장 기도가 뛰어나고 덩치도 매캐넌과 꽤나 비슷해 보이는 남자가 끼어들었다.

“...그 편제, 황제 폐하께 말씀 드리고 진행 하시는 겁니까?”

조용히 고개를 돌려 놈을 바라보았다.

발리스타 왕국에는 대장군이 있었다.

황제가 직접 파견한 대장군이자, 오슨 발리스타의 제자인 브릴란트.

매캐넌 왕국도 당연히 발리스타 왕국과 체계가 같았기에 당연히 존재한다.

황제가 파견한 대장군이.

지금 주둥이를 연 저놈이 그 대장군이다.

그런데...

“독립지역이라는 단어에 대한 정의를 내가 모르고있는건가 아니면 네가 모르는 건가?”

“...황제 폐하께 보고를....”

“네가 모르는 거였나보네. 야.”

대장군이 말을 멈추고 나를 바라본다.

“적당히 깝죽대고, 내 일처리에 불만 있으면 제국으로 꺼져.”

“...아무리 제국의 별이셔도 말씀이 굉장히 과하십니..”

“하아....”

흠칫.

“..내가.. 지금 기분이 별로 좋지가않아. 지금 아주... 피곤하거든. 너는 지금 이 순간부터 한마디라도 더 하면 죽는다. 내 모든 걸 걸고 약속하지.”

“...”

대장군이 그대로 입을 다물고 나를 따르는 케인과 주체가 슬며시 검 손잡이를 움켜쥔다.

놈이 눈동자를 돌린다.

내 힘과 위력을 코앞에서 지켜보았고, 지금 그의 눈에 보이는 내 모습도 그때와 별반 달라 보이지 않을 테니까.

물론, 속으로는 죽을 것 같은 느낌이지만.

놈은 그대로 고개를 숙였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전파한다.”

모두가 좌중을 휘어잡은 내 말에 귀를 기울인다.

아마, 폭군이라는 게 있다면 나 같은 놈이 폭군이지 않았을까.

“나를 호위하는 별도의 사단을 구축한다. 오직 사도들로만 이루어진 그 사단의 총사령관은 내 옆에 있는 사도 한수아, 그리고 그녀를 양옆에서 보좌하는 참모의 자리에는 이 자리에 없는 나성진과 성미령 사도를 임명한다.”

띠링!

[발리스타 왕국 소속의 모든 시련자들에게 알립니다.]

[지금 이 시간부로 발리스타 왕국 소속의 모든 시련자들은 국왕 오슨 발리스타를 호위하는 사단 [***]에 소속되며, 그 사단의 총사령관은 [한수아], 그리고 보좌진에 [나성진],[성미령]이 임명되었습니다.]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한수아가 내 옆으로 오더니 속삭였다.

“저... 지금.. 70만 코인 받았어요...”

생각보다 크다.

아마 지금쯤 이곳으로 오고 있을 나성진과 성미령은.. 그에 절반 정도를 나눠서 받지 않았을까.

이건 나도 처음 시도하는 거라 자세히는 모른다.

슬슬 눈이 무거워진다.

젠장.

최대한 표정을 숨기고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까 말했던대로 정치와 경제에 관련된 일은 너희들이 알아서 처리하고, 내일 보지.”

“....충!!”

그대로 한수아를 데리고 귀빈실을 나섰다.

주변에는 기사가 한명도 보이지 않는다.

구석에 있는 방문을 열고 그 안으로 한수아와 함께 들어갔다.

완벽한 밀실....이라고 생각했는데.

운이 좋은건지 나쁜건지, 여긴 침실이었다.

옆으로 고개를 돌리자 한수아가 터질 듯이 붉어진 얼굴로 고개를 푹 숙인다.

허어... 얘는 뭔 생각을 하는 거야?

딱 거기까지였다.

찌릿-!

온몸이, 찌그러지는 기분이다.

선천지기가 구멍 뚫린 독에서 흘러내리는 물처럼 내 몸에서 빠져나간다.

그게 느껴진다.

“크흑..”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말았다.

젠장.

“이..이도님!!”

한수아가 재빨리 나를 부축했지만 효과는 없다.

고개를 돌려 그녀와 눈을 맞췄다.

그녀의 눈이 미친 듯이 떨리고 있다.

그녀의 열정이 약화 되었다고 하는 게 나을까.

아니면 순수해졌다고 하는 게 나을까.

적어도 광기에 물들 것 같은 눈빛은 아니다.

“..귀환해, 내가 말한 거 꼭 사고.”

그녀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고는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는 게, 마치 나보고 먼저 귀환하라는 것 같다.

뭐라고 말하려다.

“쿨럭-”

피를 토해내고 말았다.

나를 부축한 그녀의 손과, 그녀의 몸, 그리고 그녀가 입고있는 로브가 내 피로 물들었다.

그녀가, 조용히 말했다.

“제가.. 도와 드릴 일은 없을까요? 너무 받기만 하는 것 같아서.. 신경써주는건 너무 고마운데.. 뭐라도 하고싶어요."

그녀의 눈을 바라보며 확신했다.

한수아는 지금 진심이라는 것을.

그런데.. 뭐라도 하고싶다고?

"..나중에, 때가 되면 말해주지. 그리고..."

"그리고..?"

내 옆에 있는 것만으로 도움이 된다는 걸 말할까 잠깐 고민했고 그냥 하지말아야겠다고 결정했다.

지금 이 상황에서 로맨스 같은 핑크빛 기류가 감돌 말을 내뱉는건, 너무 어색하고 작위적이었으니까.

말없이 그녀의 머리를 손가락으로 툭 쳤다.

“됐고, 귀환해.”

그녀가 아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이내, 빛무리가 그녀를 감쌌다.

그녀가 사라지자마자. 나는 그 자리에서 털퍼덕 주저앉았다.

이제 내 차례다.

솔직히 한수아를 먼저 보낸 이유는 별게 아니었다.

그녀를 보내고 억지로 가볍게 웃고있던 입꼬리가 제 자리를 찾았다.

볼이 푸들푸들 떨리는게, 더 이상 표정 연기를 할 수가 없을것같다.

지금 거울이 있다면 내 표정이 보였을 텐데..

아마도 지금 내 표정은 일그러지다 못해 극도의 예민함과 경계심을 담은 표정일 것이다.

조금 더 보태면 히스테리성 인격 장애를 극단적으로 앓고 있는 사람의 표정이라고나 할까.

이런 표정, 그 누구에게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새삼스럽지만 이 광전사의 갑주는 한번 작동시키는 건 쉽지만 푸는 건 굉장히 어렵다.

일단 고통이 따라주니까.

당연하게도 오랫동안 혈기를 끌어올린 지금의 나라면, 그 고통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다.

솔직히 말할까.

지금, 그 어느 때보다 두려웠다.

마음의 준비를 했다.

힘겹게 손을 들어 귀환 창에 Y버튼을 누르려다 잠깐 멈췄다.

귀환하기 전에, 확인할게 있었다.

인벤토리에서 맹의 증표를 꺼내들었다.

동시에 눈앞에 작은 홀로그램이 떠오른다.

지형 구조들은 단 하나도 보이지 않는 말 그대로 어두운 공간, 그곳에 박유정을 뜻하는 새하얀 점과 나를 뜻하는 붉은 점이 보인다.

거리는 표시됐다.

1264km.

확실하다.

박유정은 판테온 제국에 있다.

맹의 증표를 인벤토리에 집어넣고는 마음의 준비를 하고, 바로 대기실로 귀환했다.

빛무리가, 오랜만에 내 몸을 감싼다.

*

“오랜만이에요 이도님!”

대기실로 귀환한 나를 쎄쎄가 반겨준다.

동시에 내 몸을 하얀빛이 감싸고, 상처가 재생된다.

천천히 변장의 가면을 풀고, 혈기를 거두려다.. 한 번 더 심호흡했다.

젠장.

내 심각한 표정을 알아챈 그녀의 표정에서 웃음기가 사라진다.

방금 전까지 함께 있던 한수아는 몰랐다.

내가 변장의 가면으로 얼굴을 가리고, 갑주로 몸 전체를 감쌌으며, 조금 비어있는 곳은 용포로 완전히 가렸기 때문에.

하지만 쎄쎄는 알아챘다.

지금 내 모습은, 정상이 아니라는 것을.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일단 내 피부는 매우 푸석했다.

뿐이랴. 논바닥 갈라지듯 얼굴 전체에는 금이 가 있었고 뼈는 미친 듯이 삐걱거린다.

앞서 말했지만 혈신 상태를 너무 오래 유지했다.

머지않아 쎄쎄가, 매우 걱정스러운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짧게 숨을 내뱉고 혈기를 거뒀다.

동시에.

빠지지지직-!

"끄으읍!!"

뇌가 찌그러지는 느낌과 온 몸이 박살나는 개 같은 느낌을 시작으로 마른하늘에서 번개가 수천 번 내려찍는 느낌과.. 시발.

나는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

타앙-타앙!!

콰아아아앙-!

총소리와 폭탄 터지는 굉음이 사방에 울려 퍼진다.

고개를 들었다.

일단 가장 먼저 든 생각은 내가 왜 여기에 있는 걸까 하는 생각이었고 두 번째로 든 생각은 코앞에서 나를 향해 날아오는 꽤나 큰 돌덩이를 피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망설임 없이 오른쪽으로 자리를 박찼다.

하지만 느리다.

신체 능력이 월등히 상승한 ‘나’라면, 자리를 박차는 것만으로도 최소 4m 정도는 여유롭게 이동했어야한다.

하지만 지금 나는, 거의 ‘일반인’ 수준의 보폭 거리만큼 밖에 움직이지 못했다.

젠장.

뭐야 이거?

퍼어억-!

날아오는 돌덩이에 그대로 등을 얻어맞고 말았다.

“끄윽..”

머릿속으로 통증이 찌릿하고 올라온다.

균형을 잃고 앞으로 쓰러지려던 때, 손을 내뻗어 균형을 맞췄고 빠르게 옆으로 몸을 회전시켰다.

낙법같지 않은 낙법을 펼치고 고개를 들었다.

그제야 주변 풍경이 눈에 보인다.

일단 당황했다.

여기는 ‘발바라 대륙’이 아닌 ‘지구’였으니까.

그것도 서울.

눈앞에 그대로 동강난 이순신 장군의 동상이 보인다.

광화문 광장인가.

고개를 들었다.

도심을 가로지르는 수십 기의 전투기들과, 도로변을 타고 움직이는 수십 기의 탱크가 보인다.

건물들은 대부분 무너졌고, 그 사이로 군복을 입은 군인들이 어떤 몬스터와 대치중이었다.

어떤 몬스터.

익숙하다.

꿈으로 보았다 해도 절대 잊지 못할 놈.

거대한 동체.

번들거리는 두 눈깔.

검붉은 색의 가죽에 나있는 돌기들은 보기만 해도 오금이 저려올 정도였다.

그때, 놈의 입이 벌려지고 그 안에서 불길이 터져 나온다.

드래곤 브레스.

절대로 잊지 못하고, 잊을 생각도 없는 드래곤 특유의 기술.

그 브레스에 한쪽에 위치해있던 수십 기의 탱크가 그대로 녹아버리고 군인들도 그대로 녹아버렸다.

아니 그런 건 무의미했다.

도심이 거의, 완전히 반파되었으니까.

얼굴이 따갑다.

열기라는 이름의 가시가, 내 얼굴을 미친듯이 쏘아대는 것 같은 기분이다.

젠장. 나는 놈을 안다.

파룡破龍 바하무트.

빌어먹을 새끼.

당연히 신격神格을 갖추는 존재는 인간이 전부가 아니다.

에피소드에 소환되는 수많은 몬스터들.

그들도 넓은 범주로 보자면 나 같은 ‘시련자’들처럼 ‘시련’을 받고 있는 ‘시련자’다.

종의 차이는 분명하지만 중요한건 그게 아니었다.

눈앞의 저놈, 바하무트는 신격을 초월했으며, 그 스스로가 원한다면 이명을 갖추고 신들의 종파에 속해 이름을 뽐내며 만 세상을 아우를 수 있다.

그게 투자자들이자 ‘신神’이라 불리는 존재.

놈은, 그 자리를 거부하고 오로지 생명체를 죽이는 쾌락을 추구하기 위해 신이 되지 않은 존재다.

그때, 바하무트가 나를 바라본다.

나도 놈을 바라봤다.

본능적으로 혈기를 끌어올렸다.

그런데,

이상하다.

다급하게 내 몸을 바라보았다.

...내가 입고 있는 옷은 ‘갑주’가 아니라 군복이다.

뭐야... 이게 대체 뭔..?

-기이한 존재가, 하나 있었구나.

머릿속에서 놈의 개 같은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이건 언령이다.

이건 놈이, 나에게 하는 말.

고개를 들었고 한쪽 손도 같이 들어올렸다.

그리고, 깔끔하게 중지를 펼쳐보이자 놈이 실소를 터트린다.

-건방진 놈이군. 벌레 놈이 건방을 떨...

저벅-

작은 발자국 소리가 들려오고, 놈이 말을 멈춘다.

동시에 주변에 잇던 모든 사람들도 바하무트처럼 동작을 멈췄다.

모두가 나를 바라본다.

아니, 정확히는 내 뒤쪽.

나도, 슬며시 고개를 돌렸다.

키 190cm정도에 육박하는 한 남자가,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입고 있는 갑주에서는 붉은 기운이 아른거리고 있었으며, 안 그래도 짧은 그의 머리가 기운에 휩쓸린 건지 조용히 나풀거린다.

그 남자가, 나를 바라본다.

나는 웃고 말았다.

지금까지의 웃음과는 너무나도 다른 기쁜 웃음.

아마 내 웃음을 누군가 보았더라면 쟤가 ‘그’ 이도가 맞는 건가라는 의문이 자연스럽게 피어오를 것이다.

나는 웃었고 그 남자도 웃었다.

정지혁.

그가 나를 바라보며 천천히 걸어온다.

그리고는 내 어깨에 손을 툭 올렸다.

-아직은 아니야. 너는 아직 여기로 오면 안 돼.

조금 진지한 목소리로 말하던 형님이, 내 어깨에 얹은 손으로 내 이마를 툭 쳤다.

-게으름 피우지마 인마.

형님이 장난기어린 웃음을 짓는 순간.

눈앞이 깜깜해지고 무언가 흡수되듯 내 몸이 빨려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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