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개입하다(1)
실소가 터져나오는게, 모든 잡념이 사라지는 기분이 들 정도다.
정말 신기한 여자다.
그리고, 아니 진짜 미치겠네.
웃음을 지울 수가 없다.
지구에서 보았던 판링링은, 어마어마한 희대의 악녀였다.
인류가 죽였어야 할 몬스터를 애완 동물로 키우는 웃기지도 않는 짓을 했으며, 살아있는 사람을 '싱싱한 먹이'로 표현하는 등, 심지어 그런 사람을 몬스터에게 '먹이'로 던져 주고, 후우..
그 몬스터를 시련자들이나 일반인들 무리에게 던져놓고 내기판을 벌이는 등.
너무 많아서 일일이 나열 할 수가 없을 정도다.
그러니까... 이년은 자기 이득이 되는 일이라면 그 무엇이든 하는 년이었다.
과한 나르시시즘인지 개인의 영달을 위해서인지. 아니면 개인의 유희를 위해서인지.
솔직히 그 이면에 무슨 생각을 품고 있는지는 물론 이년이 왜 그랬는지 그딴 건 관심 없다.
정말로 관심 없다.
하지만 하나는 확실히 알고 있다.
열차를 폭발시키고 기차 내의 모든 시련자를 죽이려고 했던 페데리코 마키아벨리처럼.
이년은 갱생의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다는 거.
아마도 형님이라면, 이년의 실체를 보지 못한 형님이라면 한번쯤은 보살피고 보듬어줬겠지만.. 나라면... 글쎄.
웃는 얼굴 그대로, 천천히 손을 들어올렸다.
판링링이 환하게 웃는다.
동시에 그녀의 눈깔 안에 내비친 한줄기의 빛이 똘똘 뭉쳐지는 게 눈에 보였다.
모략. 작전. 등등..
의도는 뻔했다.
세뇌다.
하하...
나를 상대로 세뇌를 걸려는 그녀가, 이제는 귀엽게 보일 지경이다.
그래서, 선물을 하나 해주려고 한다.
내밀던 손을 그대로 허공에서 정지시켰다.
그녀가 의아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본다.
그리고, 그녀의 눈이 크게 떠졌다.
내가 반대쪽 손으로 들고 있던 란지에를 휘둘렀기에.
서걱-
판링링의 팔목을, 너무나도 빠르게 스쳐지나갔다.
그래서 당사자인 판링링은 물론, 지켜보던 박유정까지도 반응하지 못했다.
판링링이 내밀었던 손이 그대로 바닥에 툭 떨어지고. 피 분수가 터져 나오던 그때.
“아..아아아아악!!!”
박유정이 겁먹은 듯 뒤로 물러서다 엉덩방아를 찧고, 판링링이 팔을 부여잡으며 주저앉는다.
동시에 구석에 있던 두 명의 암살자가 나를 향해 자리를 박찼다.
굉장히 빠른 속도다.
기의 흐름이, 나를 향해 물밀 듯 밀려온다.
몸을 돌리는 것과 동시에 란지에를 한번 휘둘렀다.
서걱-
달려오던 한 놈의 머리가 잘린다.
고개를 숙였다.
스아악-
단검이 머리를 스친다.
란지에를 회전시켜 역수로 꼬나 쥐고는 그대로 뒤쪽으로 찔렀다.
푸욱-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란지에의 검날은 남은 암살자의 심장에 박혔다는 것을.
그렇게 판링링에게 ‘세뇌’당했던 두 인형은, 지금 명을 달리했다.
비교적 깔끔하고 쉽게.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덜덜덜 떠는 박유정과는 다르게 표독스러운 눈으로 나를 노려보는 판링링.
이제 와서 깨달은 건데.
나는 생각보다 가학성애 기질이 있는듯하다.
저런 눈빛을 받는 건데.. 왜 이렇게 기분이 좋은 거지.
“재미있는 ‘스킬’을 가지고 있는 것 같은데...”
무미건조한 어조로 내뱉는 내 말에 판링링이 발악하듯 자리를 박찬다.
이것도 꽤 위협적이다.
고통이 장난이 아닐 텐데도 이런 움직임이라..
마치 '불굴의 의지'를 사용하는 시련자를 보는 것 같다.
뒤로 한걸음 물러서며 란지에를 횡으로 휘둘렀다.
서걱-
멀쩡했던 판링링의 왼쪽 팔이. 어깨부터 그대로 잘려나간다.
그녀는 지금 이 시점에서도 꽤 독한 여자였나 보다.
그 상태로 이를 악물더니 멀쩡한 두 다리로 자리를 박찼으니까.
앞서 말했듯 세뇌의 발동 조건은 신체를 접촉하고 눈을 맞춰야한다.
그 신체가 굳이 손일 필요는 없다.
슬쩍 스텝을 밟으며 옆으로 피했다.
그녀가 중심을 잃고는 나를 스쳐지나간다.
한 치 차이.
그런데 그녀는 알까.
내가 딱 그 정도 차이를 허용했다는 걸.
그녀가 다시 몸을 돌렸지만 그대로 균형을 잃고 바닥에 쓰러졌다.
핏물이 웅덩이진다.
그런 판링링을, 나는 조용히 내려다보았다.
사람들은 모른다.
양 팔의 중요성은 단순히 편리의 유무가 아니다.
한쪽 팔이 사라진다면 사람은 평소와는 전혀 다르게 움직여야한다.
바로 균형이 무너졌기에.
심지어 판링링은 두 팔이 잘려나갔다.
바닥에서 일어나려고 발버둥 치는 그녀가 애처롭기까지 하다.
[천상의 학살자가 물끄러미 당신을 바라봅니다.]
[만개의 언어를 깨우친 자가 조금 혼란스러워합니다.]
[선善에서 군림하는 자가 미묘하게 인상을 찌푸립니다.]
[악惡을 지배하는 자가 환하게 웃습니다.]
[시작을 알린 아룡이 누군가를 향해 같이 왈츠를 추자며 손을 내밉니다.]
내 행동은 절대로 선으로 보일 행동이 아니다.
오직 나만 알고 있는 현실에서 내가 내뱉는 증오의 대상은 지금의 판링링이 아닌 미래의 그녀를 향한 것.
가능하면 저 신들의 메시지를 만족시켜주고 싶지만 글쎄.
지금은 아니다.
무시하고 말을 이었다.
“아까 그 두 암살자의 눈깔이 비어 있던 거, 네 짓이지?”
“그게 뭐!! 왜!!! 내가 뭘 잘못했다고!!!”
뭘 잘못했냐고?
이런 와중에도 시치미를 뗀다.
정말이지.. 여러모로 대단한 여자다.
“그 두 놈처럼 나도 그렇게 만들려고 한 거잖아?”
정곡을 찌르자 핏물 범벅이 된 그녀가 움찔 몸을 떤다.
“그 상태로 나를 조종 했을 수도 있고.. 아니면 ‘자살’ 시켰을 수도 있고.. 애초에 그런 마음 먹었다는 거 자체가 나한테는 뒤질 이유로는 충분하거든. 네가 말했듯. 나는 시련자들 뒤통수치는 새끼들을 무조건 죽일 거니까.”
판링링이 어버버하며 아무 말 하지 못했다.
그런데...
“아마 너는 모를 거다.”
란지에를 고쳐 쥐고는 판링링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내가 너를 죽이는 이유는, 그런 이유가 아니라는 걸.”
의구심. 혼란. 당황. 패닉.
복합된 감정이 판링링의 표정에 드러난다.
신경 쓰지 않았다.
그대로, 란지에를 내려찍었다.
푸욱-
판링링의 목을, 그대로 관통했다.
“켁..켁켁..”
“네가 죽는 이유가 대체 뭔지, 멈추지 말고 계속 생각해라.”
나지막한 내 말이 혼미해져가는 판링링의 뇌리에 꽂힌다.
진심이다.
내 말이, 그녀가 ‘대기자’ 상태가 되었을 때도 그 머릿속에 계속해서 맴돌기를 바란다.
말없이 팔에 힘을 주었다.
서걱-
그녀의 목이 절단된다.
란지에를 뽑고는, 판링링의 심장을 향해서 내려찍었다.
푸욱 하는 소리가 정겨울 정도다.
싸늘한 분위기 속에서 란지에를 뽑아들고는 피를 털어냈다.
후우...
나도 모르게 숨을 토해내고 말았다.
나비효과라고 하던가.
나는 이미 많은 것을 바꿨다.
마키아벨리를 죽임으로써 그가 ‘힘’을 얻지 못하게 했고, 판링링을 죽이면서 화룡점정을 찍었다.
지구를 위협하는 굵은 가지들을, 생각보다 빠르고 효율적으로 쳐낸 것이다.
이제 남은 건 잔가지들밖에 없다.
그리고 그런 놈들은 전쟁의 여파에서 그대로 죽어나갈게 확실하다.
이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박유정이 멍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갔다.
동시에 내 머릿속에, 언젠가 그녀와 대화하던 순간이 떠오른다.
-스킬창에 물음표로 된 스킬이 있더라고, 나는 이게 뭔가 싶었어.
내 시점에서 과거의 박유정.
그녀의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작은 문을 열고 내 뇌리로 파고든다.
-지혁이 오빠를 만난 게... 아마 Episode #25때였을 거야. 맞다. 깜빡했네. 그 물음표 스킬이 고유 권능이라는 거, 그때 오빠를 만나고 처음 알게 됐거든.
날카로운 인상으로 조금 흐뭇하게 웃던 미래의 박유정.
날카로운 인상은 변하지 않았지만 그때와는 다르게 여유가 없는 눈앞의 햇병아리 박유정.
내게는 지금이 현실이다.
햇병아리가, 나를 올려다본다.
-그때는 몰랐어. 이 남자를, 내가 진심으로 좋아하게 될 줄은.
그녀가 뒤로 주춤 물러선다.
젠장.
-재미있는 남자였지. 멋있기도 했고, 나랑은 다르게 오빠는 많은 사람을 살리려고 했었거든. 정말로... 신기했어.
손에 쥐고 있던 란지에를 검집에 채워 넣고, 그 손으로 얼굴을 툭 쳤다.
혈기를 거두지 않은 상태에서, 얼굴만 오슨의 얼굴로 바꿨다.
지금 혈기를 거두면 어마어마한 고통이 나를 덮칠 것이기에.
다행인건 가면으로 붉은 눈을 감출 수 있다는 사실이다.
“...저도... 죽이실 건가요..?”
박유정의 물음에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그런 남자를 어떻게 따르지 않을 수가 있겠어? 나, 너한테 질투도 했거든. 오빠는 항상 너만 생각했으니까. 그래도... 결혼은 내가할거야.
짜증난다.
왜 형님이 이 세계에 없는 걸까.
박유정은 형님을 좋아했다.
스스로는 짝사랑이라고 생각했다지만, 흥미롭게도 형님은 여지를 남겨두었었다.
지구를 구원하는 미래, 그 미래에서 다시 생각해보자고, 지금은 아니라고.. 그렇게 거리를 두었던 형님과 그걸 받아들인 풍신 박유정.
...이걸 정리하면 미래를 약속한 사이라고 하는것도 나쁘지는 않으리라.
하.. 시발.
웃음조차 나오지 않는다.
나는 안다.
형님과 박유정 사이에 맺어진 감정의 끈은, 절대로 얇지가 않다는 것을.
단순한 호감, 그 이상의 감정.
언제였더라.
박유정이 지구에서 죽었을때, 형님은 울부짖었다.
정말로... 그때의 형님은 내가 아는 형님이 아니었다.
광기와 살의 그 자체가 된 형님은 눈에 보이는 모든것을 부수고 죽이고, 찢었다.
지구를 구하겠다는 목적을 이루기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하며 모든 것을 뒤로 미뤘던 형님은, 제정신을 차리고나서도 아무 말 하지 않았다.
그저, 계속해서 앞만 보고 걸어갔을 뿐.
그런 사람이다. 형님은.
그런 형님이 마음에 두고있던 여자를, 지금 죽인다는건 판링링과 그녀를 동급으로 본다는 이야기... 젠장.
생각은 짧았다.
그리고 결심도 짧았다.
그녀를 ‘지금’ 죽이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내 곁에 두지도 않을 것이다.
품속에서 아이템 하나를 꺼내들었다.
손톱 크기 정도의 작은 배지였다.
조용히, 정보창을 열람했다.
[맹의 증표][Rare]
-시전자와 피시전자간에 위치 공유
-피시전자의 의지에 따라 증표의 효력 유무가 정해진다.
아무런 무늬 없는 둥근 원형 배지.
이게, 무려 10만 코인짜리 아이템이다.
“[맹의 증표]를 사용한다. 대상자는 시련자 박유정.”
내 말이 끝나자. 배지가 빛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배지가 조용히 떠오르더니, 마치 분신술을 쓰듯 두 개로 나누어진다.
하나는 내 손으로, 다른 하나는 그녀의 손으로.
손에 올려진 배지를 바라보던 박유정이 의아한 목소리로 묻는다.
“이게... 뭐에요?”
“기회.. 라고 할 수 있지.”
“기회요?”
잠깐 그녀의 눈을 응시했다.
아직까지는 맑다.
그 안에 똬리를 튼 ‘경계심’은 그냥.. 무시했다.
“자세한건 정보창 열람해보고, 나는 네가 어떤 선택을 하건 어떤 짓을 하건 상관 안 해. 다만, 내가 하는 일을 막거나 나를 방해하지마라.”
“...”
“두 가지만 기억해. 내가 하는 일에 거슬리거나 배지의 효과가 사라진다면, 나는 너를 죽일 거다. 네가 어디에 있건 어디에 몸을 숨기건. 그딴 건 의미 없어. 난 그게 가능하거든.”
그녀가 흠칫 몸을 떨더니, 이내 정보창을 열람하고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이거면 된다.
아니. 아니지. 하나만 더.
“박수 한번 쳐봐.”
그녀가 눈을 껌뻑였다.
이게 갑자기 뭔 개소리냐는 듯한. 그런 표정이다.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자. 그녀가 마지못해 손을 들어 박수를 친다.
짝-
그녀의 손뼉이 쳐지는 것과 동시에.
후우우웅!
대전 안에, 거대한 바람이 휘몰아쳤다.
그녀가 화들짝하고 놀란다.
고작해야 2초, 아니 3초에 불과했지만 분명, 지금 그녀는 허공의 마나와 바람을 중심으로 모았다.
띠링!
[바람과 한 몸이 되었던 마법사가 흥미로운 눈으로 시련자 박유정을 바라봅니다.]
[바람의 영혼을 품은 자가 시련자 박유정에게 흥미로운 눈빛을 보냅니다.]
[시작을 알린 아룡이 당신의 선행에 어깨춤을 들썩입니다.]
[선善에서 군림하는 자가 흐뭇하게 웃습니다.]
그녀의 능력은 수많은 권능 중에서도 단연 최상위 수준이다.
앞서 말했듯 고유 권능자는 그릇이 중요하다.
능력치를 올리고, 마나를 깨닫고, 몸에 마나를 담으며 허용치를 점점 넓혀 가면 갈수록 고유 권능은 더욱 더 강해진다.
지구에서 그녀는 박수를 한번 치는 것만으로 수천마리의 드레이크를 공중분해 시켰고, 수백 마리의 악마들도 씨몰살 시켰다.
그녀가 신격을 갖추고 풍신이라 불렸던 이유는, 당연하게도 그녀가 강했기 때문이다.
“이게... 대체?”
물끄러미 그녀를 응시했다.
처음 나는 보모처럼 박유정을 비롯한 몇몇 시련자를 보살피고, 키우려고 했다.
예지력으로 내가 본 미래는 그런 과정이 이어지고 쭉 이어진 결과였을 터.
이미 나는 예지력으로 보았던 미래와 다른 길로 걸음을 옮긴 상태다.
한수아를 죽이지 않았고, 나성진과 성미령을 에덴의 품으로 끌어들였고 박유정과 거리를 두었다.
그래, 이거면 된다.
나는 그녀를 키우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스스로 성장 할 것이고 나의 원조 없이 강해질 것이다.
그리고 때가 되면 죽겠지.
몬스터에게 죽든 시련자에게 죽든..
후우..
그렇게 흘러가도록 하자.
시냇물이 냇가로 흘러들어가듯, 나는 물꼬만 틀어준다.
내가 내린 판단은, 분명 옳다.
“내가 말한 거, 잊지마라.”
“...”
“이제 가봐.”
그녀가 길 잃은 강아지처럼 눈매를 좁혔다.
“...어디로요?”
어디긴 어디야.
“네가 가고 싶은 곳. 왕국이라 불리는 데는 곧 머지않아 모조리 사라질 테니까 가능하면 판테온 제국으로 이동해.”
“...저 이미 발리스타 왕국으로 이전했는데요?”
“그러니까 여기 있지 말라고. 판테온 제국으로 가서 그쪽으로 소속 변경해.”
그녀가 이 남자는 대체 뭐지 하는 표정을 짓는다.
그녀로서는 황당할 수밖에.
처음에는 죽일 것처럼 대하더니, 갑자기 이상한 아이템으로 서로의 위치를 공유하지를 않나, 이어서 위치 공유를 풀면 죽이겠다고 협박을 하지 않나. 그런데 이제는 또 어떻게 알았는지 물음표 스킬까지 개화시켜주었다.
아낌없이 주는 나무였다가, 그 나무를 도끼로 찍어내려는 나무꾼이 되었다가.
뭐 이리 종 잡을 수가 없는 걸까.
그런 표정이 박유정의 얼굴에 떠오른다.
그녀를 무시하고는 그대로 몸을 돌렸다.
닫혀있던 철문을 열자, 절로 미간이 찌푸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