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화. 딱 내가 바라는 모습인데(2)
“...정말로 스승님은 돌아가신 건가?”
꽤나 진중한 물음이다.
놈과의 거리는 얼추 8m.
일단 답하지 않았다.
힐끗 고개를 돌리고는 말했다.
“너희 둘은 어디 가지 말고 대기해라. 밖으로 나가면 대화고 나발이고 그냥... 죽일 테니까.”
정확히는 박유정한테 한 소리다.
판링링은 어찌 됐건 무조건 죽일 거니까.
그때, 브릴란트가 다시 끼어들었다.
“내 질문에 대답하라. 사도 이도여, 스승님은.. 정말로 돌아가신 건가?”
브릴란트, 그의 말은 불신으로 흔들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굳이 묻지 않고, 대답하지 않아도 모든 상황이 말해준다.
내가 오슨의 행세를 한다는 건 적어도 오슨이 부재중이라는 것을 말해주는 확실한 증거.
그리고 나는 말했다.
오슨은 죽었다고.
브릴란트가 아무리 그 사실을 믿지 않는다 해도 그의 본능은 말하고 있을 것이다.
오슨은 분명히 죽었다고.
그 본능에, 확신을 보태주고 싶다.
“오슨은 분명 죽었다.”
“...그래.. 그렇군.”
브릴란트는 잠시 눈을 감았다.
마치, 누군가를 추모하는 듯 모습이다.
그 누군가는 분명 내게 뒤진 오슨 발리스타겠지.
나는 말없이 브릴란트를 바라보았다.
그가 슬며시 눈을 뜨더니, 자신의 검집에 손을 올려놓는다.
“다른 기사들은 나서지 말도록.”
“...장군!”
“이건 내 개인적인 일이다. 그러니 목숨을 헛되이 하지 말거라.”
기사들이 흐느끼며 뒤로 물러선다.
...그 모습을 보면서 뜬금없다는 생각을 했다기보다는.. 조금 감탄했다.
그리고, 나는 속내를 내뱉었다.
“...이거는 알고 있어라. 지금 싸우면 넌 죽어, 무조건.”
스르릉-
브릴란트가 천천히 검을 뽑아들었다.
“남들은 스승님을 쓰레기라고 불렀지.”
그가, 검을 고쳐 쥔다.
“권력에 눈이 먼 괴물이자 아녀자를 겁탈하고, 거슬리는 건 모두 죽이는. 그럼에도 거대한 힘을 가진 괴물, 황제는 그런 스승님을 견제했고 나는 스승님이 아닌 황제 쪽에 섰다.”
동시에, 브릴란트의 검에 빛이 감돌기 시작했다.
오러, 다른 말로는 강기.
마스터의 전유물이다.
“하지만, 내 마음은 언제나 스승님께 향하고 있었지.”
...이중스파이였다 이건가?
조용히 놈을 바라보았다.
결연한 표정과 무언가를 각오한 모습.
“스승님은 개처럼 살던 내게 세계를 보여주었고, 내 재능을 처음 개화시켜주었어. 그는.. 단순한 스승이 아니야. 내 은인이지.”
왠지 저 모습이 익숙하다.
비교대상이 조금 묘하긴 했지만 나와 형님의 관계와 조금.. 아니 아주 많이 비슷해 보인다.
그가 자세를 잡았다.
“사도 이도여. 전력으로 오거라. 나는 지금부터 내 스승님이자 나의 은인의 복수를 할 터이니.”
검주劍主 오슨 발리스타의 제자,
마스터인데도 칭호가 없는 마스터.
브릴란트가 자세를 잡는 것과 동시에, 나는 혈기를 자극했다.
두근!
사고가 빨라지고 세상이 붉어진다.
힘이 용솟음쳤다.
순식간에 분위기가 싸늘해지고 대전 안에 있던 모두가 뒤로 한걸음씩 물러선다.
사람의 눈이 붉어지며 사람 자체가 변한 것 같은 기사奇事를 눈앞에서 지켜보았기에.
나는 한걸음 내디뎠다.
쿠웅-
내 존재감이 대전을 짓누른다.
동시에 내딛은 발에 힘을 주었다.
상체가 숙여지고, 다리가 자연스럽게 대리석을 파고든다.
이윽고.
콰아아앙-
내 몸이 포탄처럼 날아갔다.
브릴란트가 눈을 크게 뜨고, 뒤늦게나마 검을 휘둘렀지만 내 어깨가 놈의 명치를 후려치는 게 더 빨랐다.
콰아아앙!
“크흑!”
브릴란트가 건너편 기둥 두어 개를 그대로 관통하고 바닥에 쳐 박히고, 다섯의 기사가 검을 뽑고 나를 향해 달려드는 것.
모든 게 짜 맞춘 듯 이어진다.
나는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고개를 들었다.
느껴진다.
기사들의 움직임. 공기의 유동.
허공에 물결치듯 번져가는 흐름.
마나의 질까지.
모든 게 느껴진다.
혈기가, 한층 더 농밀해졌다.
그 순간.
“나서지 말라고 하지 않았느냐!!!!!!!”
무너져 내린 기둥 속에서 중후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나를 향해 달려들던 기사들이 그대로 그 자리에 정지한다.
마치 조건반사처럼.
브릴란트가, 박살난 기둥 하나를 옆으로 던지며 천천히 걸어 나온다.
입가에서 흘러나온 피를 슥 훔쳐내는 그의 모습은, 감탄이 절로 터져 나올 정도의 존재감을 보여 주고 있었다.
그는 확실한 ‘전사’였다.
“...과연... 이 정도의 힘이라니..”
순간, 브릴란트의 기세가 변한다.
쿠구궁-!
거대한 기가, 그의 몸에서 소용돌이치고, 그의 몸 전체가 푸른빛에 휩싸인다.
온 몸에 마나를 두른 브릴란트.
강했다.
분명 강했지만.. 안타깝게도 오슨보다는 아래다.
“...사도 이도여. 그대의 진정한 목적은 무엇이지?”
죽음을 각오한 전사가 진지하게 묻는다.
답해줄 수밖에 없었다.
“내가 사는 세상의 구원.”
내 말에 그가 작게 고개를 끄덕인다.
그 모습마저 마음에 든다.
정말로, 죽이기 아깝다.
결국 나는 내 속마음을 내뱉고 말았다.
“나와 함께 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브릴란트는 생각할 필요도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스승님이 없는 세상은... 나에게 인세지옥이나 마찬가지. 나는 스승님의 복수를 하고, 그대는 앞길을 막는 적을 치운다... 너무나도 간단하지. 그거면 충분하지 않나?”
조용히 웃었다.
너무나도 이상적인 모습이다.
내가 에덴의 단원들에게 바라는, 그리고 시련자들에게 바라는 모습이 바로 저 모습이다.
그래서 더욱 안타깝다.
후우..
그의 각오를 읽었다.
그러면, 그에 대한 예를 갖추는 수밖에.
“...아마 네가 처음일거다.”
천천히 한걸음 내디뎠다.
“내가 이 세상에서 처음으로 전력을 다하는 거, 잘 보고, 잘 기억해라.”
기운을, 더 끌어올렸다.
내 눈이 완전히 붉게 물들고, 몸 전체에서 붉은 빛이 흘러나온다.
잠재력을 최대한. 그 극한까지 끌어올린 나는, 이 순간 진정한 광전사였다.
자리를 박찼다.
콰아아앙-!
내 몸이 빛살 같은 속도로 뻗어나갔고, 손에 쥐어져있던 란지에가 휘둘러진다.
브릴란트가 반응했다.
그의 검이 움직인다.
내 검과, 그의 검이 허공에서 맞부딪친다.
콰아아앙-!!
기파가 몰아치며 거대한 충격파가 주변을 휩쓸었다.
브릴란트는 밀리지 않았다.
그의 검이, 내 검을 밀어내려한다.
나도 팔에 힘을 주었다.
우리의 검이 덜덜덜 떨린다.
동등한 힘의 대치,
순수한 힘으로는 내가 우세였지만 놈의 검기가, 그리고 기를 두른 놈의 몸이 미약하게나마 나와 ‘동수’를 이룬 것.
생각은 짧았다.
그대로 란지에를 놓고 고개를 숙였다.
대치되던 힘이 사라지자 브릴란트의 검이 직선으로 뻗어 나와 내 머리를 스친다.
피했다.
한 치 차이다.
한걸음 내디뎠다.
거리가 만들어진다.
주먹을 내지르면 정타를 먹일 수 있는 최적의 거리.
아니.
모자르다.
그대로 몸을 틀었다.
허공에서 방향을 전환한 브릴란트의 검이 나를 스친다.
찢어진 곳도 없고 다친 곳도 없다.
호흡을 조절했다.
걸음, 거리, 간격. 그리고 내가 뚫을 수 있는 기의 흐름.
내가 어떻게 움직여야할지. 어디로 움직여야할지.
모든 것이 머릿속에 그려진다.
아니. 이건 경험이다.
한 번 더 한걸음 내디뎠다.
브릴란트의 눈이 크게 떠진다.
'고작해야' 단 한 걸음이었지만, 그의 눈에는 내가 완전히 사라진 것처럼 보였을 테니까.
형님이 내게 알려주고, 그리고 내가 형님에게 배운 최고의 기술중 하나.
축지縮地.
오로지 혈기를 자극한 상태에서만 사용할 수 있는 기술이자 그만큼 반작용도 큰 기술.
땅을 접은채로 이동한 나는, 브릴란트의 뒤쪽에 있었다.
완벽한 카운터.
이거다.
주먹을 풀었다.
손날을 세우며, 빠르게 내질렀다.
브릴란트가 고개를 돌리고, 눈이 크게 떠지는 것.
그 모든 게 눈에 보인다.
하지만 늦었다.
푸우욱-
내 손날이, 브릴란트의 심장을 그대로 꿰뚫었으니까.
느려진 세상이 원래대로 돌아온다.
느릿느릿, 천천히 몸을 바로 세웠다.
털썩-
브릴란트가 그대로 무릎을 꿇는다.
“...장군!!!”
승부는 순식간에 끝났다.
그리고 온몸이 따갑다.
축지는 일종의 공간 이동 술과 비슷하다.
혈기를 자극한 상태에서 기운을 느끼고, 그 기운의 흐름을 타고 흐름이 접히는 구간을 찾는다.
그리고 그 구간으로 강제로 몸을 이동시키는 것.
그게 축지다.
당연히 공간을 찢는 그 여파로 내 몸은 상상을 초월하는 어마어마한 압력에 노출된다.
내가 입고있는 갑주가 스파크를 튀기며 찌그러져있었고, 그게 스파크를 튀며 다시 회복된다.
머리를 찌르는 고통과 힘이 빠져나가는 엿같은 기분이 온몸을 휩쓸었지만.. 무시했다.
다리에 힘을 주고, 고개를 치켜들었다.
브릴란트의 기운이 흩어지고, 내 거대한 존재감이 대전 전체를 짓누른다.
그때였다.
띠링!
[신화神話 스킬 축지縮地를 획득하셨습니다.]
이어서.
[당신은 이레귤러입니다.]
[신화神話 스킬 축지縮地가 삭제됩니다.]
실소를 터트릴 뻔했다.
언젠가 말한 적이 있었다.
스킬 따위는 배울 필요가 없다고, 그건 치기 어린 말이 아니었다.
그리고, 지금처럼 얻은 스킬이 삭제 되도 상관없다.
나는 언제든지 내가 쓰고 싶은 기술과 내가 배웠던 스킬을 그대로 사용 할 수 있으니까.
브릴란트가 힘겹게 고개를 들었다.
패배자라기엔 당당하고, 승리자라기엔 모자란 그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그가 말했다.
“...부탁하나 해도 되겠는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대륙을.. 구원해주게.”
잠깐 그를 응시했다.
눈이 마주친다.
브릴란트의 눈은 한 점의 흔들림도 없었다.
저건, 진심이다.
“...약속하지. 소검주小劍主 브릴란트.”
그가, 결국 웃는다.
칭호가 없는 마스터는 죽음을 맞이하고서 칭호를 얻었다.
“소검주小劍主... 소검주라... 좋군.”
머지않아 그의 몸이 옆으로 천천히 쓰러진다.
눈에서는 빛이 사라지고, 뻥 뚫린 심장에서 흘러나온 피가 바닥을 적신다.
그런 그의 모습을, 나는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이 남자를 자세하게 알지는 못한다.
하지만 하나는 확실하다.
오슨과 브릴란트는 정반대의 사람이었다는 거.
만날 사람을 잘못 만난 전사의 최후라니.
손을 뻗어 죽어있는 브릴란트의 몸에 가져다댔다.
흡수를 사용해야하지만... 내키지 않는다.
조용히 손을 치웠다.
잠깐.
“...”
브릴란트의 꿈이 정확히 뭐였는지 나는 모른다.
중요한건 그는 멈췄다는 거고, 나는 멈추지 않았다는 거다.
나는, 아직 더 걸어가야 한다.
그가 어떤 성품을 가졌건, 그런 건 내가 신경 써서는 안 된다.
정말, 신념에 불타는 자를 오랜만에 봐서 그런 걸까.
나도 모르게 감상적이었나 보다.
하지만..
‘대륙의 구원... 약속하지.’
진심이다.
나는 바닥에 떨어진 란지에를 집어 들고는 브릴란트의 시체에서 목을 베어냈다.
그리고 손을 내밀어 브릴란트의 목 없는 시체에 흡수를 사용했다.
프스스-
그의 몸이 가루가 되어 흩어진다.
힘이 빠져나간 몸에, 미약하게 기운이 차오르는 게 느껴진다.
충분히, 버틸만하다.
나는 브릴란트가 차고 있던 아이템들을 모조리 인벤토리에 집어넣었다.
그런 나를, 다섯의 기사들이 죽일 듯이 바라본다.
무시했다.
띠링!
[시작을 알린 아룡이 진지한 눈으로 당신을 주시합니다.]
[선善에서 군림하는 자가 당신이라는 존재를 진심으로 궁금해 합니다.]
끝이 아니었다.
띠링!
[악惡을 지배하는 자가 시스템에 이 상황에 대한 '형평성'과 '공정성'에 관한 감사를 요청합니다.]
[시스템이 요청을 거부했습니다.]
[악惡을 지배하는 자가 쌍욕을 터트립니다.]
이 메시지들도 당연히 무시했다.
고개를 돌렸다.
당황한 표정을 숨기지 못한 두 시련자가 보인다.
판링링과 박유정.
그들에게 다가갔다.
내 발이 한발자국씩 나아갈 때마다, 두 시련자는 뒤로 한걸음씩 물러선다.
터억-
둘의 등이. 동시에 기둥에 맞닿았다.
“...당신, 시련자..에요? 이도... 이도라고요..?”
박유정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나름 침착한 것 같지만 눈빛 안에는 두려움이 자리해있었다.
젠장.
박유정을 보는 순간 브릴란트와 현재의 상황에 대한 의구심이 물 밀리듯 밀려난다.
솔직히, 이렇게 봐도 모르겠다.
이 여자가 왜 나를 배신하는지.
내가 알던 이 여자는 지구를 구하는데 가장 앞장섰고, 모진 풍파를 형님과 나와 함께 맞서던 여자였다.
그런 여자가... 아니. 아니지.
가정이 잘못되었던 걸까?
그녀는 애초에 ‘그런 여자’가 아니었었던 거고, 형님이 ‘그런 여자’로 만든 게 아닐까?
서너 번씩 기회를 줬다던 형님의 말이 머릿속에 맴돈다.
젠장.
다른 시련자라면 이딴 고민은 아예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애초에 나를 배신했다는 그 사실 자체만으로 죽여 버렸을 테니까.
하지만 박유정은...
하아...
그때였다.
묘한 눈빛을 짓고 있던 판링링, 그녀가 박수를 치며 시선을 주목시킨다.
“잠깐만. 나 그쪽에 대해 들어봤어요.”
나에 대해서?
고개를 돌리자 판링링이 천천히 한걸음 내딛는다.
“시련자들한테 그랬다면서요? 뒤통수치는 놈은 찾아서 죽여 버리겠다고. 그쪽 꽤... 유명하던데요?”
Episode #1에서 내가 했던 말이 생각보다 널리 퍼진듯하다.
그녀가, 한걸음 더 내디뎠다.
그리고는 천천히 손을 내민다.
“악수라도 할까요? 저는 그쪽 편에 서고 싶은데.”
판링링이 환하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