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딱 내가 바라는 모습인데(1)
*
“...뭔가 이상하지 않아요?”
“뭐가요?”
처음 말을 꺼낸 성미령이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갑자기 우리를 여기로 데려온 것도 그렇고.. 이거 마치...”
“연금軟禁당한것같다?”
나성진이 말을 받았다.
그들이 있는 곳은 귀빈실.
벽에 걸려있는 색채화와 인물화들은 누가 봐도 명화 같았으며, 중간에 위치해있는 거대한 원형 탁자와 창가에 위치한 여분의 탁자까지.
심지어 구석에는 보기만해도 푹신해보이는 고급 소파까지 자리해있었다.
확실히, 이곳은 ‘귀빈실’ 이었다.
마치 이쪽 세계만의 특색이 엿보이는 듯하다.
거기까지였다면 이런 말도 꺼내지 않았으리라.
“...문밖에 기사들, 아직 안 갔죠?”
나성진이 조금 어두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발단은 이랬다.
이도가 오슨의 행세를 하며 제물이라 불리는 이들의 해방을 명령하고, 다시 왕궁으로 왔을 때. 그의 곁에 있던 브릴란트가 이들에게 다가오더니 말했다.
‘잠시 귀빈실에 계시죠. 바로 안내드리겠습니다.’
그 말이 끝이었다.
뭐라고 물어 볼 새도 없이 기사들이 이들을 이곳으로 데려온 것이다.
그게 다가 아니다.
그 기사들은 다른 곳으로 가지 않았다.
마치, 범죄자를 유치장에 가둬 놓은 것처럼, 대략 10명이 넘는 기사들이 모두 밖에서 대기하고 있었는데.
확실히, 연금 당한다는 느낌이 결코 어색하지는 않으리라.
나가려고 문을 열면, 밖에서 대기하던 기사가 안에 계시라는 앵무새 같은 말만 되풀이하며 그대로 문을 닫는다.
그게 10분 동안 벌어진 일이었다.
이들은 바보가 아니었고, 상황이 이상하게 흘러간다는 것을 눈치 챘다.
성미령이 한숨을 푹 내쉬고, 나성진이 중얼거린다.
“아무래도 이거... 걸린 것 같은데.”
“...우리가 도우러 가야되는 거 아니에요? 그래도 명색이 부단장인데.”
그때였다.
오도독-
심각한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게 과자 씹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나성진과 성미령이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언제부터였는지, 준비되어있는 다과를 이것저것 골라가며 먹던 한수아가 빙긋 웃으며 반대쪽 손으로 들고 있던 과자를 들어올렸다.
“드실래요?”
“...”
나성진은 할 말을 잃었고 성미령은 한숨을 푹 내쉬고 말았다.
“수아야. 지금 상황이 되게 이상하게 흘러가고 있다니까? 어디서부턴지는 모르겠는데 그 브릴란트라는 놈이 뭔가 눈치를 챈...”
“언니. 걱정 마세요.”
성미령의 말이 끊기고, 한수아가 한 번 더 빙긋 웃었다.
“이도님이잖아요.”
순간 성미령이 말이 막혔는지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는 인상을 찌푸린다.
혀를 깨문듯하다.
한수아는 별일 아니라는 듯 확신어린 어조로 말을 이어갔다.
“그분은 저희가 모르는 무언가를 알고 있어요. 언니. 저는요.”
잠깐 말을 멈추더니.
오도독-
과자를 씹는다.
햄스터가 따로 없을 정도다.
“처음 그분을 보고, 느꼈어요.”
조금 야릇한 말에 나성진과 성미령이 동시에 그녀를 바라본다.
“느껴? 뭐를?”
“그냥.. 아. 이 사람이다... 그런 거요.”
“...”
할 말을 잃은 성미령과 나성진이 서로를 바라본다.
확실히 얘도, 정상이 아니다싶은 눈빛이다.
“언니, 기억하시죠? Epi... 아.. 아직은 입에 잘 안 붙네요. 그... 첫 번째 시련에서 그분이 행동하셨던 거요.”
“기억하지. 그걸 어떻게 잊겠어.”
“그분의 행동에는 망설임이 없었어요. 그런 건, 보통 각오로 되지 않아요.”
“....”
“그래서 저는 그분을 믿어요. 그런 행동에는 모두 의미가 있을 테니까. 그게 설령 누군가를 죽이는 일이라 해도요.”
성미령은 결국, 그녀의 맞은편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그래서 더 자세하게 들을 수 있었다.
한수아가, 그분의 속마음은 매우 따뜻했거든요 라고 중얼거리는 말을 말이다.
자리에 앉았던 성미령은 과자를 집지도 못했다.
이거 진짜.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왜 내 주변에는 이런 사람들밖에 없는 건데?
그때까지도 대화에 끼지 못했던 나성진이 질문을 던진다.
“...그런데 Episode #1에서, 이도님이 대체 뭘 했던 겁니까?”
그 물음에 대한 답은 성미령이, 너무나도 가볍게 딱 한 단어로 정리했다.
“살인이요.”
“...신기하네요.. 두 분은 경계심도 없네.”
그리고는 비어있는 의자에 털썩 주저앉는다.
성미령이 툭 내던지듯 말했다.
“솔직히 방식이 그렇긴 해도, 그분은 우리를 살려줬거든요. Episode #1이 끝나고 대기실로 가니까. 안내자가 놀라더라고요. 내가 살아있는 게 신기하다나 뭐라나.”
나성진이 어깨를 으쓱한다.
그렇게 둥근 원형 탁자를 중심으로 세 명이 모여 앉게 되었는데, 이렇게 보니 그림도 이런 그림이 없다.
이국의 과자를 맛보듯 하나하나 집어 드는 한수아와 한숨을 푹 내쉬고 있는 성미령, 그리고 한쪽 팔에 붕대를 감은채로 복잡하게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나성진.
뭔가 어울리지만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다.
성미령이 결국 과자 하나를 집어 들고는 조용히 씹었다.
정말 생각하면 할수록 기이한 남자다.
그는 이 시련에 대해서 확실히, 남들이 모르는 ‘무언가’를 알고 있다.
그리고 계속해서 앞으로 나가는 그 남자의 뒷모습.
순간 성미령의 머리속에 이도가 가볍게 웃는 모습이 떠올랐다.
성미령은 붉어진 얼굴을 감추려 재빨리 잡념을 털어냈다.
이건 호감이 분명했지만, 성미령은 절제했다.
Episode #2때처럼, 오늘 중으로 또 수많은 몬스터들이 소환될 터.
이런 감정은 사치다.
그런데... 젠장.
성미령의 잡념은 사라지지 않았다.
'아니... 그 어떤 여자가 그런 남자를 보고 호감을 갖지 않을 수가 있겠어.'
성미령은 살짝 홍조를 띈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창가가 보인다.
아까, 이도의 연설이 머릿속에 맴돈다.
사라지지 않는 잡념을.. 굳이 억지로 밀어내지말자.
그렇게 성미령의 입가에도 한수아의 그것과 비슷한 포근한 미소가 살짝 피어오른다.
그런 성미령의 뒷모습을.
한수아가, 매우 가라앉은 눈으로 조용히 응시하고 있었다.
*
천천히 걸었다.
내 뒤에서 걷고 있는 브릴란트.
확실하다.
저놈은 지금 무언가를 눈치 챘다.
혹시 내가 율리우스와 이야기하는걸 엿들은 걸까.
아니지,
그건 아닌 것 같고.
반응을 보니까 왠지 그 전부터인 것 같기도 하고.
아 혹시 연설할 때.. 그때부터 인가?
아니면 내가 검을 휘두를 때?
그러다 문득, 피식하고 웃음이 터져 나온다.
눈치 채면 어떻고, 채지 않으면 어떠한가.
그대로 고개를 돌렸다.
브릴란트와 눈이 마주친다.
놈이 흠칫하고 놀란다.
내가, 환하게 웃고 있었기에.
“...왜.. 그러십니까.. 스승..아니 전하.”
대답 않고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제 얼굴에 뭐가 묻었습니까?”
“아니”
“그럼 왜.. 그렇게 바라보십니까.”
“네 얼굴 보는 게, 이게 마지막인지 아닌지 그게 조금 궁금해서.”
흠칫.
내 말에 놈이 놀란다.
그 안에 담긴 가시를 눈치 챘기에.
그 이상 말하지 않았다.
그대로 몸을 돌리고는 대전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거대한 철문을 열고, 단상에 올라 왕좌에 앉자. 브릴란트가 대기하던 기사들을 향해 조용히 손짓한다.
이내,
닫혔던 철문이 다시 열리고, 네 명의 인물이 안으로 들어왔다.
그 모습을 보며, 자연스럽게 미소 지었다.
웃을 수 밖에 없었다.
일단 네 명중 두 명은 모르는 얼굴이다.
중요한건 다른 두 명을, 내가 안다는 거다.
손을 마주치는 것만으로 태풍을 만들고, 그 태풍으로 땅을 뒤집고 마나를 흩트리고, 상대를 갈기갈기 찢는 여인.
미래의 풍신風神이라 불릴 괴물이자 신격을 갖춘 다섯 명의 시련자중 한명.
풍신風神 박유정
그리고 그 옆에 서있는 여자.
박유정과는 정반대의 인물.
환희신녀歡喜信女 판링링.
사람을 세뇌하고, 중국이라는 거대한 땅을 자기 손 아래에 넣고 주무르던 희대의 악녀.
그녀가, 흥미롭다는 얼굴로 나를 바라본다.
흥미.
저 표정은 흥미가 분명했다.
실소가 터져 나온다.
겉으로 보이는 내 모습은 오슨 발리스타, 즉, 왕이다.
이를테면, 중국 국적의 그녀에게 나는 ‘주석主席’에 앉아있는 인물로 보일 터.
그런데도 두려움이나 의구심도 아닌, 흥미를 갖는다?
미치겠다.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남다른걸까.
저건 자기 능력에 대해 깨달았고 이 시련에서 어마어마한 힘을 얻어 갈 수 있다는 가능성도 깨달은 자들만이 보여줄 수 있는 표정이다.
물론. 판링링을 살려둘 생각은 없다.
이곳에서 그녀는 힘을 얻지 못할 것이고, 당연히 지구에서도 힘을 얻지 못할 것이다.
내가, 그렇게 만들 거니까.
판링링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로 물었다.
“라미레즈라는 시련자를 아나?”
“처음 듣는데요?”
꾀꼬리 같은 그 목소리에서도 흥미가 묻어나온다.
조금씩. 거슬린다.
이 상황을 즐기는 듯 한 저 모습은 두 말할 것도 없이 좆같았다.
“흠. 그 사도가 말하기를 너희 둘과 그놈까지, 총 셋이서 나를 죽이려고 했다던데?”
그녀가 실소를 터트린다.
“제가 왜 그쪽을 죽여요? 왕이라면서요? 나 같은 일개 사도가 대체 왜? 생각할수록 웃기지 않아요?”
그러면서 옆에 있는 박유정을 바라보는데, 박유정은 대꾸조차하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나를 바라볼 뿐.
“후우...”
작은 한숨이 터져 나온다.
판링링의 태도는 거슬렸지만 딱 거기까지.
지금 내 신경을 완전히 건드리고, 거슬리게 하는 건 따로 있었다.
기사들.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다섯 명의 기사들은 아무런 태도도 취하지 않고 있었다.
심지어 단상 아래에서 눈을 감고 있는 브릴란트까지.
한번쯤은 무례하다! 라거나, 예의를 갖춰라!! 같은 식으로 소리쳤을법한 놈들이 가만히 있으니, 당연히 거슬릴 수밖에.
그 모두가 마치 합죽이라도 된 것처럼 조용했다.
대전 안에 나 혼자 있는 것 같은 기분이다.
[황제의 길을 걸었던 전사가 조용히 당신을 바라봅니다.]
[천상의 학살자가 조용히 당신을 바라봅니다.]
[시작을 알린 아룡이 휘파람을 불고 있습니다.]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한걸음씩 내딛으며 단상을 내려갔다.
저벅-
조용한 대전 안에, 내 발자국 소리만 울린다.
판링링과 눈을 맞췄다.
그녀는 세뇌능력자다.
그 외에 그녀의 특징, 그리고 그녀가 주로 쓰던 스킬은 무엇이었고, 주로 쓰던 동작과 주로 쓰던 무술은 뭐였는지.
나는 그녀에 대해 알만큼 안다고 자부한다.
물론, 그 정보들을 대대적으로 수정해야한다.
지금의 그녀는, 내가 아는 환희신녀가 아니다.
그저 자기의 능력을 깨달은 시련자.
음.. 햇병아리 중에 조금 덩치가 큰 햇병아리라고 하는 게 나을라나.
그래도 하나는 위험하다.
그녀의 세뇌 능력.
지금까지 언급할 필요조차 없었기에 따로 언급하지 않았다.
세뇌 능력은 다수에게 중복 적용이 가능하다.
한수아의 매혹 능력도 마찬가지.
단상을 내려오면서 기사들과 눈을 감고 있는 브릴란트.
그리고 판링링의 뒤에 있는 두 남자까지.
그들 모두를 눈여겨보았다.
세뇌에 빠진 자들은 눈에 힘을 잃는다.
그 말은 그들의 ‘자의식’이 사라진다는 이야기다.
지금 내 눈에 자의식이 사라진 자는 정확히 두 명이다.
판링링의 뒤쪽에 서있는 두 남자.
입고 있는 옷은 마치 타이즈와 비슷해보였고 체구는 말랐다.
그 둘은 기사나 전사가 아닌, 암살자다.
아마, 브릴란트가 보냈다던 두 명의 특급 암살자라는 놈들이겠지.
하지만 나머지 기사들.
그들의 눈에는 빛이 들어와 있었다.
자의식도 존재한다.
그러니까...
피식 웃고 말았다.
이거,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 였다.
생각보다 너무 빠르게 들통 난 것 같다.
단상에서 완전히 내려왔다.
눈을 감고 있던 브릴란트의 눈이 조용히 떠진다.
그가 나를 바라보고, 내가 손가락으로 내 얼굴을 툭 치고, 내 본래 얼굴이 드러나는 그 과정들이. 물 흘러가듯 이어진다.
브릴란트의 눈에, 작은 놀라움이 자리한다.
내가 오슨 발리스타가 아니었다는 걸 알아챈 감정이 아니다.
저건 눈앞에서 얼굴과 체구가 순식간에 변하는 그 과정에 대한 단순한 놀라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즉, 이놈은 알고 있었다.
내가 오슨 발리스타가 아니라는 것을.
언제부터였을까.
그 이상 생각하지 않았다.
의미가 없었으니까.
“...역시 그때의 굉음은 스승님이 싸우던 소리였나..”
브릴란트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린다.
“스승님은 어디로 가신거지?”
“하늘나라.”
깔끔하게 대답하자 판링링이 실소를 터트린다.
힐끗 고개만 돌려 두 시련자를 살폈다.
방금 전, 실소를 터트린 판링링은 웃고 있음에도 몸은 굳어져있었고 박유정은 무슨 상황인지 의아해하는 눈빛으로 나와 브릴란트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걸로 확신했다.
저둘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는 것을.
그런데 왜 브릴란트는 저들을 이 대전 안으로 밀어 넣은 걸까.
음....
짧게 생각했다.
'만약 내가 브릴란트였다면...'
고개를 돌려 굳은 표정의 브릴란트를 바라보았다.
이 새끼... 덩치가 무색하게 머리를 썼나 보다.
대충 그림이 그려진다.
“명분 쌓기인가?”
브릴란트의 눈매가 꿈틀한다.
“습격에 실패했던 저 두 사도가 다시 습격을 했고... 그 습격으로 ‘오슨’은 죽고, 마침 그 주변에 있던 대장군인 네가 그 두 사도를 죽인다? 이후에는 새로운 왕이 되거나 황제에게 거대한 신임을 얻게 되는...뭐 그런 거 구상한 거냐?”
브릴란트는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웃지도 않는다.
오히려 입을 연 내가 조금 겸연쩍을 정도다.
아무래도 내 가정이 틀렸나보다.
“악당새끼들이 생각하는 건 뻔하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틀린건가. 이거 조금 신기하네. 너 내가 황제랑 무슨 얘기 나눴는지는 아냐?”
브릴란트가 고개를 젓는다.
그리고는, 천천히 중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사도 이도, 그대의 목적이 무엇인지 나는 모른다.”
조용히 브릴란트를 바라보았다.
“그대의 연설, 인상적이었지. 잠시나마 스승님을 사칭하는 그대의 곁에서 함께 움직이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
이상하다.
브릴란트 이놈, 내 생각과는 다르다.
무언가... 확고한 신념 같은 게 느껴진다.
그가 조용히 한탄 섞인 말을 토해냈다.
“그대가 스승님이 아닌 게... 정말... 안타까워.”
그 이상, 대화를 진행시키고 싶지 않았다.
중요한건 하나다.
나는 오슨을 사칭했고 그게 들통 났다.
그래, 어차피 한번은 짚고 넘어갔어야 할 일.
그게 조금 앞당겨진 것뿐이다.
슬며시 란지에의 검집에 손을 올려놓았다.
내 입이 열리고 무감각한 내 말이 조용히 새어나온다.
“잔말 말고, 시작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