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를 한다는 건-27화 (27/131)

27화. 변화(1)

행정부장을 따라 이동한곳은 왕궁 구석에 위치한 밀실이었다.

행정부장은 자신은 여기까지라는 듯 문 앞에서 대기했고 나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정중앙에 꽤나 큰 소파가보이고 그 앞에 거대한 수정구가 보인다.

소파에 앉았다.

”...오슨!!“

자리에 앉자마자 눈앞에 한 남자의 얼굴이 홀로그램처럼 드러났고. 이내 밀실을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굵직한 저음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이게 통신이라는건가.

마치 영상통화를 하는듯한 기분이다.

깔끔하게 정돈한 짧은 머리와 굵은 눈매와 각진 턱,

그리고 구릿빛 피부와 입고있는 옷으로도 감출 수 없는 단단한 근육까지.

왕이라기보다는 전사와 비슷하다.

그게, 클레시스 매캐넌을 처음 본 내 감상이었다.

”...왜 아무말도 하지 않는 것인가! 병사를 보내다니!! 이게 대체 무슨 짓이야!!!“

귀가 아플 정도다.

하지만 목소리와는 별개로 ‘영상’속의 그는, 분명 나를 바라보고있었다.

픽 웃었다.

”...웃어? 지금 웃음이 나오나? 웃지만말고 말해보란말이야!!! 대체 뭘 꾸미고있는것이야!!“

”시끄럽고.“

생각지도못한 대답이었던걸까.

내 말에 맥캐넌 왕이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정말, 믿기지 않는듯한 모습이다.

평소에는 오슨이 꼬박꼬박 존댓말 해줬나보다.

여하튼.

”어제 나를 습격한 암살자중 한명인 라미레즈라는 사도가 그러더군.“

”...“

”박유정이라는 사도와 판링링이라는 사도와 함께 꾸민 일이라고. 그 덕에 나는 상처까지 입고 하루 동안 도망이나 다녀야했다.“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맥캐넌이 폭소를 터트린다.

”프..프하하하하하!!! 미치겠군. 오슨, 고작 하루사이에 농담이 많이 늘었어. 소드 마스터인 그대가, 기사 수십 명을 한 칼에 모조리 죽일 수 있는 그대가 상처를 입어? 도망을 쳐? 개소리 말고!!“

”...“

”원하는 게 뭐지?“

피식-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군.“

”...‘내기’에서 졌다고 이렇게 화풀이하는 건가?“

...내기?

처음 들어보는 주제가 튀어나왔다.

다시, 면상에 철판을 깔았다.

”어제 습격을 당했을 때 기억 상실에 걸렸는지, 그대가 하는 말이 개소리로 들리는군.“

”...어처구니가 없어서 말이 안 나오는군. 그래서... 후우.. 젠장! 원하는게 뭐냔말이야!!“

”계속해서 말했던거같은데.. 박유정과 판링링을 내놓으라고.“

매캐넌이 잠깐 말을 멈추고는, 이내 짐작했다는듯 실소를 터트린다.

”...하! 이제야 알겠군. 어디서 들은건지는 몰라도 그 둘의 외모가 반반한 걸 알고있나보지? 그래서? 그 둘을 한번 품어보겠다? 그 말인 것이냐 지금? 내기에서 졌으니 그 둘이라도 내놔라? 할당된 제물이 많아지니 똥줄이타나? 내 절대로 그 둘을 내놓지 않을 것이야!“

제물.

내가 아는 주제이자, 생각만 해도 짜증이 나는 단어가 튀어나온다.

눈매가 좁혀졌다.

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놈이 큰 목소리로 외친다.

”내 할당인 2천 제물을 그대가 감당했다고 이런 모략을 꾸미다니! 당장 병사를 물러!! 이미 황제 폐하께도 보고가 들어갔을 것이야!“

싸늘한 눈으로, 수정구 속의 놈을 노려보았다.

놈이 흠칫하는 게 눈에 보인다.

신경 쓰지 않았다.

”두 번 말하지 않아. 그 둘을 내게 보내. 뒤지고 싶지 않으면.“

”...이 빌어먹을 놈이... 내 반드시 황제 폐하께 네놈의 처벌을 논할 것이야!“

한숨을 푹 내쉬고 말았다.

”덩치도 산만한 새끼가 고자질하겠다고 주둥이를 나불거리는 게 썩 보기가 좋지는 않군. 12시간 주지. 그 시간 안으로 둘을 데려오도록.“

붉어진 놈의 얼굴이, 그대로 사라졌다.

아무래도 통신구가 완전히 꺼진 모양이다.

피식 웃고 말았다.

안 오면 이쪽에서 가주지 뭐.

자리에서 일어서고는 문을 열었을 때였다.

”전하.“

처음 보는 면상의 남자가 있었다.

그 옆으로는 행정부장이 고개를 숙이고 있었고.

그 상황을 바라보며 속으로 직감했다.

이놈이 ‘재상’이라고.

”...제물에 대해서 말씀드릴게 있습니다.“

미치겠다.

왜 이렇게 웃긴 걸까.

웃고 싶지 않은데 계속 웃음이 나온다.

그래, 얘기 좀 하자.

나도 그 ‘제물’이라는 것에 대해서 할 얘기가 있었거든.

*

”자. 얘기해봐.“

슬며시 주변을 둘러보았다.

나는, 대전에 있었다.

내가 오슨과 싸우면서 완전히 무너진 서너 개의 기둥과 폭탄이라도 맞은 것처럼 무너져 내린 대전은 하룻밤사이에 마치 재생이라도 한 것처럼 원상복구 되어있었으며, 왕좌 아래에는 총 다섯 명의 인물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아니, 네 명이다.

한 놈은 내 앞에서 고개를 뻣뻣이 들고 내 눈을 직시하고 있었으니까.

재상.

이름은 모른다.

그놈이 나를 바라보며 또박또박 말을 이었다.

”어젯밤에 말씀하셨던 대로 준비해놓았습니다.“

가라앉은 눈으로 재상을 응시했다.

제물.

나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기분이 좋아서? 아니다.

그냥.. 엿 같아서.

-나도 처음에는 몰랐거든.

-뭘요?

-그 나라의 시민들이 왜 우리를 구원자라 부르면서 열광했던 건지.

-..신의 계시인지 뭔지 하는 거 때문에 열광한 거라면서요?

-그게, 정확히는 그거 때문이 아니더라고.

”신의 계시를 받기위한 제물을 2천명에서 4천명으로 늘렸고, 모두 준비가 완료되었습니다.“

재상의 말에 구석에 있던 에덴의 단원들이 몸을 떨었다.

그들도 눈치 챈 것이다.

저 ‘제물’의 의미를.

사실, 생각해보면 정말 별거 없다.

Episode #2에서 오슨이 말한 적이 있었다.

대신전에서 정확히 1년 전, 계시가 내려왔었다고.

그 과정에서 이 세상의 머저리들은 어떤 선택을 내렸을까.

이쪽 세계는 지구에서의 중세 시대와 비슷하다.

그 배경에 마법이라는 비상식적인 힘이 등장할 뿐.

신을 믿는 이놈들은 뻔한 짓을 했다.

바로 공양과 공물.

그리고, 그게 지금 말하는 ‘제물’이다.

풀어서 말하면 신의 계시를 받기위한 제물.

조용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모두가 표정없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있었다.

문득 도시의 분위기가 떠오른다.

분명, 그 분위기는 삭막하다 못해 어두웠다.

왜 그랬던 걸까.

단순히 ‘왕’이 실종되었기에?

아니, 일정부분 그런 이유도 있었겠지만 분위기가 삭막했던 이유는 이것이다.

-이 왕이라는 놈들이, 아니 황제라는 놈이 우리가 처음 발바라 대륙에 진입하기 1년 전부터, 멍청하게도 매달 수천 명의 인간을 제물을 바쳤더라고, 신의 계시는 그렇게 해야 내려지는 거라면서,

손으로, 왕좌의 팔걸이를 툭툭 두드렸다.

계시가 내려온 것과 제물이 바쳐지는 것.

그 사이의 상관관계?

단 1mm의 접점은커녕, 그냥... 바퀴벌레 비듬만큼도 없다.

처음에 형님과 수많은 시련자들은 그것을 방관했다.

실제로 어떤 식으로 에피소드가 진행되는지 모르고 있었으니까.

거기다 시련자들은 어디까지나 이방인일 뿐이다.

제물이라는 걸 바치는게 졸라게 아니꼬워도 결국 그건 이쪽 세상의 일.

어쩔 수가 없었고 합리화도 가능했다.

그 잘못된 부분을 고치려고 노력한 것은 결국 형님 혼자였고, 형님은 Episode #30에 이르러서야 잘못된 부분을 바로 잡을 수 있었다.

이게 왜 잘못된 부분이냐고?

-제물을 바치는게 어떤 의미인지, 그 멍청이들은 몰랐어. 신전에서 바치는 제물은 그 종류에 따라 Episode #39에 나올 '신'의 성향을 결정하는.. 일종의 재료였다는걸

발바라 대륙의 구원.

단어 선택이 의아하다고 느낀 사람이 얼마나 될까.

생각해보자.

대체, 무엇으로 부터 구원을 하는것일까?

간간히 소환되는 몬스터들?

말했다시피 이곳에는 기를 다루는 괴물인 마스터들이 존재한다.

검주劍主, 창주槍主, 권주拳主, 도주刀主, 궁주弓主

이 다섯명은 각 왕국의 왕이다.

그리고 언급은 안했지만 제국에는 마법사들도 존재한다.

그들 모두의 힘이면 '크레타노스'라는 공룡 처럼 생긴 중위종의 마물까지는 막아낼 수 있다.

여유롭지는 않겠지만 대륙민의 오분의 일 정도가 죽을거고... 결국엔 막아낸다.

그리고 크레타노스가 등장하는것은 Episode #38.

간단하다.

대륙의 구원에서 주체와 객체는 대륙의 주민들과 몬스터가 아니다.

대륙의 주민들과 신.

즉, 이곳에서의 구원은 신들로부터의 구원을 말한다.

후우..

조용히 숨을 몰아쉬었다.

이 이상 언급하기에는 시기상조.

그러니까.

정리하면 지금 이 세상은 지구를 구하기 전에 이루어질 전초전 같은 느낌이다.

전초전.

너무나도 적절하다.

그런데....

툭툭툭-

나는 말없이, 계속해서 팔걸이를 두드렸다.

이 세상이나 저 세상이나 여전히 대중은 멍청하다.

무차별적으로 ‘납치’해서 대륙을 구원한다는 핑계로 매달 수천 명의 사람을 제물로 바치니, 당연히 시민들은 그것을 두려워했다.

하지만 뭐라고 하기도 애매한 게.

일반 시민은 힘이 없다.

그렇게 1년 가까이 지났다.

그런데, 멸망을 막기 위한 사도가 정말로 나타난 것이다.

시민들은 생각했다.

사도가 나타났으니 이제 더 이상 제물로 희생될 일은 없을 거라고.

하지만 황제는 다르게 생각했다.

5개의 왕국과 제국에서 매달 수천 명의 시민을 제물로 바쳤다.

그런데 그게 효과가 있으니 이제는 그 제물을 늘리자고 생각한 것이다.

그 차이다. 대중과 정치인의 차이는.

”전하. 이미 황제 폐하께 보고가 올라갔습니다. 이제 그들을 신전으로 인도하시어 평소처럼 그들 모두를 죽이시지요.“

정확히는 그 제물들의 피를 뿌리는 과정이지만.. 역시 오슨은 개새끼였다.

어디서부터 시작할지 계획을 세우긴 했었는데... 이렇게 되니 생각보다 일이 조금 더 수월해질 것 같다.

모두가 나를 바라본다.

피식 웃고 말았다.

내 입이 열리고, 그 안에서 폭탄이 터져 나왔다.

”제물은 이제 더 이상 바치지 않는다.“

”...?“

고개를 숙이고 있던 대신들이 모조리 고개를 치켜든다.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이다.

그중에서 한 남자가 입을 열었다.

”스승님. 그 말씀은.. 황제 폐하의 명령을 거부하시겠다는 말씀이십니까?“

기세가 범상치 않다.

아마도 제국에서 파견된 대장군이 저놈인가보다.

그리고 스승이라.

미치겠다.

웃고 싶지 않은데 계속 웃음이 나온다.

”굳이 말하면 그런 거겠지.“

웃음기 어린 어조로 말하자.

”전하!!!“

모두가 당황하던 그때.

재상이 조용히 말했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그건 절대로 아니 될 일입니다.“

놈과 눈을 맞췄다.

그 눈에 담겨져 있는 것은 적개심.

황제의 명령을 거부한 나를, 완전히 적으로 바라보는 눈빛이다.

이 새끼도 졸라게 웃기는 새끼네.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니 될 일이다?“

”..예“

왕좌에서 내려와, 천천히 단상을 내려갔다.

한걸음, 두걸음...

그리고 짧게 물었다.

”왜?“

”..예?“

놈이 당황한다.

그런 놈의 코앞에는 내가 서있었다.

”묻지. 왕이 누구지?“

”..전하십니다.“

”그럼 너는?“

”..신하입니다.“

”나만 이해가 가지 않는 건가? 신하가 왕의 말에 토를 다는군.“

”하지만 저는 황제 폐하의 명령을 받는...“

스르릉-

말없이 허리춤에 채워져 있던 란지에를 뽑아들었다.

재상이 당황하며 뒤로 한걸음 물러섰다.

”당신... 아니, 지금 무슨 짓을 하려는 겁니까?“

”스승님!!!“

조용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살짝 풀린 눈의 한수아와, 눈을 껌뻑이고있는 성미령, 그리고 나성진.

그외에 직접적인 이 대륙의 주민들인 대신들까지.

나를 막는 자는 없었다.

대신들이 나를 막지 않는 이유는 내가 왕이라서가 아니라 내가 강하기 때문이다.

정확히는 내가 아닌 ‘오슨 발리스타’지만.

그렇게, 대신들과 하나하나 눈을 맞췄다.

마지막으로 재상에게 시선을 옮기고는 방금 막 깨달았다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아.. 이제야 떠오르는군, 나를 습격한 사도들과 너는 공모를 했어. 나를 죽이기 위해. 그래 이런걸.. 반역이라고 하지?“

내 갑작스러운 말에 놈이 당황을 넘어 경악한다.

”반역...? 반역이요?! 제가?“

검날을 슬며시 밑으로 내리자, 놈의 표정이 조금 환해진다.

이번에는 웃지 않았다.

지구에서는 시련자들을 상대로 장사를 하는 이들도 있었고 정치를 하는 이들도 있었다.

눈앞의 이 재상은 자기 대륙의 주민들을 가지고 정치와 장사를 동시에 하고있었다.

이게, 지구를 구하기 전의 전초전이라면, 당연히 나는 최선을 다할것이다.

그러니까.... 이런 개새끼들은 살아있을 가치가 없다.

나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오늘부터 발리스타 왕국은 새롭게 태어날 거다.”

“..?”

“하지만 너는 보지 못하겠지.”

“그게 대체 무...”

서걱-

란지에가 빠르게 놈의 목을 스쳐지나간다.

“스승님!!!!!!!!”

동시에 피보라가 휘몰아친다.

뒤로 넘어가는 놈을 바라보며 마저 말했다.

“이렇게, 죽을 테니까.”

조용하다.

싸늘한 침묵이 가라앉는다.

“두 번 말하지 않는다. 지금 이 시간부로 제물은 없다.”

검을 한번 툭 털어내고는 고쳐 쥐었다.

“대답은?”

화들짝 놀란 이들이 황급하게 대답한다.

“명을 받듭니다 전하!!!!!”

란지에를 검집에 집어넣었다.

자 이제, 황제는 어떻게 반응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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